15. 오랑캐의 도의 (1)
아마도 고국의 절기로는 한로(寒露)가 지났을 것이련만, 땅이 달라지면 하늘도 덩달아 달라지는지 바람이 선선할 뿐 싸늘하지는 않았다. 간만에 관복 대신 도포 입고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기에는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물론 한가로움을 즐기는 장소가 어디 멋들어진 정자가 아니라 꼬부랑 글씨로 ‘평화다방(Café de la Paix)’이라 쓰인 법국 파리의 다점(茶店)이요, 도포 차려입은 사람은 법국은 물론 전 구주를 둘러보아도 이 두 사람과 그 일행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외물(外物)에 구애받지 아니하는 선비라면 개의치 않아야 하리라.
“가배(咖啡)라 하였소? 면암 그대는 참 비위도 좋소. 나는 도저히 탕약 같아서 입에 대지를 못하겠는데...”
“이곳의 식자들은 이 가배를 식자가 마땅히 즐겨야 하는 물건이라 여기고 있습니다만,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였거늘 어찌 배우는 뜻을 세우는데 차가 있어야 한다 하겠습니까. 다만 잠을 깨는 효험이 있으니, 이를 위하여 마실 따름입니다.”
물론 마시다 보니 그 맛을 조금 알 것도 같았지만, 어쨌든 시작은 허리가 불편해 도저히 침상에서 잠을 이룰 수 없어 대신 잠을 쫓고자 마시는 데 있었다. 나이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한참 윗사람인 김병학 앞에서 좋아하는 티를 낼 수는 없는 법.
“엊그제 종우(洪鍾宇) 그 아이가 진서로 옮긴 신보(新報)를 보았소?”
대신 달달한 과자(디저트)나 조금 시켜 집적거리던 김병학이 문득 물었다. 뜬금없이 고려(Corée) 얘기가 나온다 하기에 한 부 사서, 벌써 나름대로 이 나라 말에 익숙해진 홍종우에게 옮기도록 시켰던 것이다.
“예. 들었습니다. ‘법을 만드는 관청(Corps législatif)’이라 하였다는데, 아마 실체는 따로 있는데 이곳 사람들이 우리 사정에 무지하여 잘못 옮긴 듯합니다.”
“허나 아예 없는 얘기를 꾸며서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터. 나라의 경장이 쉴 새 없이 이루어지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구려.”
“언뜻 읽기로는 우리가 ‘개화’했다면서 저들 딴에는 상찬(賞讚)하는 듯하였는데, 정말 우수한 제도라 순수하게 찬탄함인지, 아니면 우리가 저들과 겉모습이 같아짐을 기꺼워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어 우려되기도 합니다.”
김병학이 수긍하며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지나가던 풍채 좋은 노인이 또 어디서 온 객이냐며 말을 물어왔다. 이들이 파리에 체류한 지도 어언 두 달째. 이곳 다방의 단골들이야 두 사람이 꽤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늘 새로 오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둘 중 그나마 혀가 더 잘 돌아가는 최익현이 서투른 법국 말로 응대하는 동안, 김병학은 지금 이 기이한 판국을 생각하며 홀로 웃었다.
따지고 보면 둘은 원수지간 아니겠는가. 어쨌든 김병학의 바로 위 항렬에서 최익현의 스승 이항로를 모함하여 죽이려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애초에 한 명은 큰 꿈을 품고서 지금껏 배워온 정학(正學)의 틀 바깥을 살피러 나오고, 다른 한 명은 한때의 잘못된 생각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나온 터. 고국에서의 묵은 감정 대신 객지에서 동향인끼리 뭉치는 마음이 고개를 내밀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어쩄든 오랑캐는 오랑캐요 정도는 정도임을 굳게 믿고 있지 않던가. 한 번 구원(舊怨)을 제쳐놓고 보니 꽤 죽이 맞았다. 물론 입맛은 또 꼭 맞지는 않았기에 지금처럼 한 명은 커피를 홀짝거리고, 한 명은 빈 잔만 앞에 두고서 막가론인지 마도래인지 하는 기이한 과자를 후비적거리고 있었지만.
이 이국적인 손님이 자신 나라 말을 서투르게나마 한다는 데 흥분한 노인을 겨우겨우 달래고 작별을 고한 최익현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거참, 고생이 많구려. 나는 도저히 흉내조차 못 내겠던데. 종우나 옥균 같은 아이들이 곧장 따라하는 것을 보면 신묘할 따름이외다.”
“소생도 그런 연유로 더 머리가 굳기 전에 여기 남겠다 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어려운 이야기가 나온즉 김병학도 얼굴을 굳혔다.
“정말 그래야만 하겠소? 나랏일이 사람을 얻고 얻지 못하고에 달렸는데,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면암 그대 같은 사람이야말로 목 타는 사람에게 건네주는 표주박 같은 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엄연히 사절단의 대표로 임명되어 나온 김병학과는 달리, 공식적으로는 젊은 유학생들을 통솔하기 위해 나온 최익현이다. 사연을 묻지는 않았지만, 화서의 학통을 이은 자가 대놓고 오랑캐와 교섭하는 일을 맡기는 부담스러웠기에 그랬으려니 했다. 그런데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은 바로 귀국하지 않고 이곳에서 서양의 사정을 공부한 뒤 유학생들과 함께 돌아가겠다 하는 것 아닌가.
“방금 종우의 이야기를 하셨지요. 혹시 대감께서도 그 아이의 사연을 들어 알고 계시는지요?”
“알다마다. 배움을 위해 천리독행(千里獨行)함도 미담일진대 나라의 기둥이 되고자 자처하여 만리타향에 나아왔으니 미담 아니겠소이까.”
홍종우는 올해로 나이가 열아홉이지만, 아직 혼례도 못 치러 헛상투를 튼 총각이다. 분명 집안은 남양 홍문의 방계지만, 일가가 영락하여 저 멀리 고금도(古今島)에서 곤궁하게 살고 있다 하였다. 나라에서 유학생을 뽑는다는 소식을 어찌어찌 듣고서 홑몸으로 상경해, 따라가기를 간곡히 청하였기에, 상께서 이를 가엽게 여겨 머나먼 친족인 이조참의 홍순목(洪淳穆)으로 하여금 일가의 생계를 돕게 하고, 홍종우 본인도 원하는 대로 유학단에 따라나올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저 아이들도 이처럼 혹 사문(斯文)의 지극한 도리로 미처 밝히지 못한 시무의 대책을 오랑캐의 기(器)로써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머나먼 길을 나섰는데, 유자(儒者)로 홀로 서려는 자가 학동들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허나 이미 오랑캐의 기물이 정교하고 저들 나름대로 치국(治國), 경세(經世)하는 방편을 세웠음은 익히 보아 알게 되었지 않소? 학동들이라면 모를까, 저들의 기물과 처세의 변통에서 배울 바가 있다면 이미 그 사정을 훑어보아 알게 되었을 텐데, 어서 돌아가 이를 정도(正道)에 맞게 들여올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최익현 본인도 마음속으로 수십 번은 족히 주고받았을 문답이다. 청산유수로 말이 나오던 입이 굳게 닫혔다. 한참 고민하다가 저 달군 탕약 같은 볶은 콩즙 – 어찌 저것이 차(茶)라는 말인가 –을 한 모금 한 뒤에 답이 나왔다.
“대감께서는 아마, 저들의 정예한 화포와 기기를 들여오고 빼어난 재주를 배워오면 나라가 부강해지리리라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소생도 이곳 대서(大西) 땅을 밟고 직접 눈으로 탐문하기 전에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기실 아직도 그렇지 않은가 싶어 마음에 어지러움이 있지요.
하지만 대감, 감히 말씀드리건대 그 뒤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오랑캐의 기(器)에는 그 도(道)도 담겨있을 것입니다. 후자 없이 전자만으로 무언가를 이룩하려 한다면, 이는 겉모양을 흉내만 내는 것이라 앞뒤가 맞지 않고 결국 사상누각에 그칠 따름입니다.”
그렇다. 그저 막연히 양이, 서쪽 오랑캐라 생각했건만, 직방(職方)의 바깥에도 또 천지가 있고, 그 땅은 천하도(天下圖)에 나올법한 기괴한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바다 건너가 오랑캐였지만, 바다 건너에서 보기에는 자신이 온 곳이 오랑캐였다.
이 땅에서 스스로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자들이 저들끼리 싸우며 나름의 제도를 만들고, 저들끼리의 도의를 정하니, 그들이 지금 자신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는 온갖 무기와 재주가 다 여기서 나왔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 오랑캐의 도를 익혀보겠다는 것이오? 내 그대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건만.”
“스승께 받은 호로써 불리기를 바라면서 추호라도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이들에게 이들 나름의 도가 있다 한들, 어찌 우리의 도가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기자 이래 우리 동방이 예를 지켜 내려오기가 사천 년이며, 열성조께서 나라를 세워 덕을 펼침은 또 반 천 년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간 지켜온 것이 틀렸다는 얘기를 들어야만 합니까? 우리가 과연 무얼 잘못하기는 한 것입니까?”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몇 해 전, 박규수와 함께 연행 다녀오던 길에 품은 후 지금까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던지고 받았던 질문이었다. 절로 감정이 격해지니 목소리도 올라가고, 주변의 시선도 몰렸다.
“성현들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만세의 도의를 세우고 그 이래 삿됨 없이 지켜왔거늘 어찌 틀렸다 하겠습니까? 이곳에 남겠다 함은 그 때문입니다. 배우되 익히지는 않겠습니다. 끝까지 궁구하여 이 오랑캐의 도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야 말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도(吾道)가 비록 말단의 일에서는 미진할지언정 그 대의만은 틀리지 않았음을 떳떳하게 외치고야 말 것입니다. 이로써 나라의 도를 지키면서 또 나라의 체(體)도 지키는 방도를 마련하고야 말 것입니다.”
저도 모르는새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음을 그제야 깨달았는지, 어울리지 않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넘어간 의자를 곧추세웠다.
“죄송합니다. 소생이 불민하여 말하는 중 상심(常心)을 잃었습니다. 대감께서는 부디 너그러이 봐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일장연설을 듣는 김병학이 보기에는 어떠하였는가 하면, 솔직히 말해 어리석은 짓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고매하고 멋들어져 보이는 것이야 사실이라지만, 언제 그런 멋이 – 선비로서 어울리지 않는 속된 말이지만 – 밥을 먹여준 일이 있던가? 세도가 우선이요 정정당당함은 그 다음에나 차릴 수 있는 겉멋임을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김병학으로서는, 그의 개인적인 선호를 떠나서 최익현의 의기가 그저 의기에 그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후... 내 그대 마음은 잘 알겠소. 그러잖아도 주변 코 큰 사람들 눈길을 끄는데 더 끌지는 맙시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이 파천황의 시대, 화이가 뒤집히고 정사가 뒤바뀌는 시대에는 저렇게 미치광이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이야말로 더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대쯤 되는 선비가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는데 가로막는 것 역시 올바른 처사는 아닐 터. 그대 마음대로 하시오. 내 본국에 돌아가서 잘 설명하도록 하겠소.”
한편, 그와 대략 같은 시기이건만 날씨는 확연히 다른 대륙의 정 반대편. 주조선 일본공사 카츠 카이슈는 뜻밖의 손님이 가져온 뜻밖의 소식에 놀랄 뿐이었다.
“봉행 어르신, 무탈하신 듯하여 천만다행입니다.”
사절단의 우두머리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따라나온 이노우에 카오루였다. 어쨌건 사절단의 임무는 자신이 아니라 조선 국왕을 예방하여 서신을 봉정하는 데 있으니 이와쿠라는 바로 입궐하고, 이론상 단순한 수행원이었던 이노우에는 공사관에 들린다는 핑계로 카츠를 만나러 나온 것이다.
“재작년 이래 어르신께서 계속 계셨으면 참 좋았겠거려니 생각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이제야 다 과거지사가 되어버렸지만요... 하하.”
조선 사절단을 둘러싼 소동으로 가만히 있던 미국만 이익을 보고, 졸지에 일본이 조선과 동급인 중국의 속국임을 인정해버린 이래, 조슈 정벌 패전으로 잠시 물밑으로 가라앉았던 싸움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토막을 외치는 번들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끝내 터무니없는 조약을 맺고야 말았다며 막부를 맹비난하고, 이에 질세라 막부는 이 모든 것이 조선 사절단의 길잡이 노릇을 해 분란의 소지를 만든 웅번들 탓이라며 뒤집어씌운 끝에,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니 공무합체(公武合體)니 하는 말은 허울로만 남은채 싸움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도바(鳥羽)에서 한 번, 고후(甲府)에서 또 한 번, 막부군은 연전연패하고, 사세를 관망하던 서국의 여러 번들도 마침내 웅번들에게 힘을 보태겠다 했건만, 패했음에도 동국 번들이 지레 기세를 올리며 한데 뭉쳤기에 조정은 어느 한 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물론 신정부를 꾸리기는 했지만 그뿐. 기다리고 기다려도 막부 토벌령은 내려오지 않으니 끝내 관군(官軍)도 자칭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찌 싸움은 계속되어 끝내 에도 앞까지 밀어닥쳤지만, 카츠 대신 육군총재직을 차지한 야마오카 텟슈(山岡鐵舟)가 강경파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의 설득에 못 이겨 결사항전을 결심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야전에서 한 판 붙는다면 모를까, 제대로 된 성, 그것도 에도라는 대도시를 낀 성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나라를 반절로 쪼개는 내전을 벌일 각오까지는 되어있지 않았던 웅번들이었다.
결국 철수하여 그 옛날 동국과 서국의 구도를 재연한 채 서로 주고받는 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중, 끝내 토막에 마음이 기울어 있던 교토의 공경들마저도 둘을 중재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출범한 신정부는, 말이 하나의 정부지 사실상 웅번들이 우세한(그러나 주도하지는 못하는) 서부와 여전히 도쿠가와의 접시꽃 문양 휘날리는 동부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늦게나마 쇼군직을 버리고 겉으로 막부를 해체한 요시노부는, 그렇게 자신들이 무능한 외교로 나라를 망쳤다 욕하였으니 한 번 너희가 해보라는 식으로 조약 개정을 웅번과 공경들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그래서 먼 길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자네 말을 들어보니 그저 신정부가 세워짐을 기념하여 인사치레로 왔다는 건 내 짐작대로 겉치레였음을 알 것도 같다만. 정확히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는 영 감이 잡히지 않는군.”
이노우에가 무의식적으로 양옆을 살핀 뒤 – 아마 어디든 듣는 귀가 있던 유신지사 시절의 버릇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것이리라 – 살짝 다가와 말했다.
“본국의 지령입니다. 청국과 조선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라는 지시입니다.”
카츠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이제 우리도 새로 정부를 세웠으니, 이전의 잘못된 조약들은 하나씩 고쳐나가야겠지요. 하지만... 당장은 힘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분란을 일으키고 또 어떻게 뒷감당을 하라는 말인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으니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게.”
아마도 그 ‘자세히’ 부분이 현장의 재량에 맡겨진 것이리라. 설명하던 이노우에도 절로 힘이 빠졌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공식적인’ 비공식 임무는 『일청수호조규』 체결을 위한 사전 교섭입니다. 함께 ‘자립하는 나라’로서 좋은 벗 조선의 힘을 빌려 청국을 설득해라. 이것이 제가 함께 출사한 동지들에게 들은 조언입니다만...”
조언은 조언일 뿐. 그러나 그렇다고 물러날 수만은 없다. 어쨌든, 무사가 되어서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전장에서 물러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대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방에 비장한 느낌이 감돌았다.
“그래, 해 보아야지. 어떻게든 싸움을 붙이고 먹이를 찾는 것. 그게 이제 우리 일본이 처한 오랑캐 세상의 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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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다방은 1862년 개관하여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커피 마시며 철학을 논하는 파리지앵’ 스테레오타입에 나오는 카페 모습을 생각하면 얼추 맞습니다. 동명의 호텔 1층에 차린 카페로, 바로 옆이 1867년 만국박람회장이라 관람객들이 즐겨 투숙한 숙소라고도 합니다.
커피를 음역할 때 쓰는 말 가배(咖啡)는, 실제 역사에서는 궁중의 음식으로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한자를 쓸 때도 입 구(口) 대신 구슬 옥(玉) 변을 써서 珈琲라고 불렀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무엄하게도(?) 최익현이 먼저 맛을 보게 되었으므로, 중국에서와 동일하게 입구변을 써도 무탈할 것입니다.
조선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을 거쳐 들어오는 번역어를 접하는 대신 1860년대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외와 접촉하게 되면서, 근대적 개념들을 자국에 익숙한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신문(新聞) 대신 ‘조보(朝報)’의 이름에서 파생하여 나온 신보(新報)라는 표현을 사용함이 그 예지요. (물론 대부분은 작가의 창작입니다.)
홍종우는 비록 명가의 자제기는 하지만, 집안이 영락하여 실제로도 어렸을 적 고생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일본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며 유학 자금을 모으던 중 자유당 당수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눈에 들어, 그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천하도는 조선 중기 이후 유행한 지도의 한 형태입니다. 중화세계 바깥의 세상을 상상하여 그린 지도로, 여인국, 일목국(외눈박이 나라), 삼수국(머리 셋 나라) 등등 황당한 나라들이 실존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요.
하지만 이는 단순히 우스갯거리로 삼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전통적인 세계질서 관념의 한계에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중화세계 바깥에, 나름의 합리성을 갖춘 세계가 존재한다면, 왜 성현들은 그런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하는 세계론의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유학이 말하는 세계관을 거부하게 된다면, 동아시아 전통사상의 체계 내에서 손댈 수 있는 곳은 『산해경』이나 음양가 등의 도교 계열 텍스트뿐이고요.
본래 역사에서 카츠 카이슈는 에도성 무혈개성을 이끌어 무진전쟁에서 막부군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그 이전에 신센구미를 일반 병력으로 재편성해 전투에 내보낸 것도 이를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음모론이 있지요.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여기에 반발해, 해군 잔당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가서 에조 공화국을 세우기도 했고요.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요시노부 이하 막부 진영의 전쟁수행 의지가 썩 높지만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에서는 카츠가 진작에 무대에서 퇴장해버렸고, 제너럴 셔먼 호 테러의 책임공방으로 좌막 진영도 한데 결집해버렸습니다. 그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