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길이란 본래 굽은 것 (3)
끽해야 올해 나이 스물인 유생이 알면 무엇을 알겠는가. 그러나 그 치기 어린 글이 위정자들의 체통을 걸고넘어지니 벌하지 않을 수 없다. 꼭 대원군의 술수에 동참하지 않는 대신들이라 해도 이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서슬 퍼런 그 옛날 당쟁 속에서였다면 환국, 아니, 사화(士禍)를 두어 번 정도는 벌일 법한 구실을 주는 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럴 구실도 결국 성상의 마음에 따라 생길 수도 있고 한 순간에 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릴 수도 있는 것인데, 이 마지막 고개를 넘기지 못하니 명분 생기기만을 기대하는 대원군 이하 대신들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사람 피 보기를 꺼리는 주상이라지만, 그도 사람일진대 홍가가 상소랍시고 올린 글에 격분하기는커녕 외려 그를 싸고도니, 전생에 혹 빚이라도 졌는가 하는 무엄한 의혹도 속으로 할 법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임금이 답답할지라도 신하된 자로서 어찌 할 수는 없는 법. 그저 있는 수 없는 수 다 동원하여 마음을 돌리려 애쓸 뿐이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거두지 않음은 실로 어진 덕이지만, 저 홍 모라는 자는 경장을 앞둔 이 긴요한 때에 망령되이 붓을 놀려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써 어심을 어지럽혔으니 처단함이 마땅합니다!”
“나라의 위엄이 바로 서지 않으면 정령(政令)의 매서움이 흐트러지고, 그리하면 결국 덕행의 효험도 사라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비상한 시국에 한낱 서생이 함부로 국법을 논하며 그 기강을 흐리도록 내버려 두면 어찌 되겠습니까?”
“성상께서 경장의 기치를 높이 하셨으니, 『회통』은 그 발단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니 지금 편벽된 마음 품은 자들에게 엄히 계고하는 뜻을 보이지 아니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길목마다 막히고 부딪히는 폐단이 생길 터이니, 오늘의 한 가지 근심을 경계하지 아니하면 후일의 백 가지 우환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바로 이를 가리킴입니다.”
하지만 입장을 뒤바꾸어 귀남의 눈으로 보면 어떠하였는가.
나라를 다스린 지 다섯 해가 되어가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는 그였다. 그래도 오래 가지 못할 나라이니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고 적당히 버티자고 생각했던 처음과는 달리, 어찌어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금에 이르렀다. 물론 이런 노력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박규수와 함께 다듬은 개혁의 구상도, 대원군과 함께 나선 외국과의 협상도 그럭저럭 순탄히 잘 풀리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요즘 들어 전과는 기류가 달라졌음을 부쩍 느끼고 있었다. 아마 작년, 김병학을 앞에 두고 누구의 피도 흐르게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의 마음을 대신들이 알아주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나라를 위해 (부족한 그를 대신하여) 힘써주면 좋으련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 풀리던가.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以人治人) 들었지 창칼로 다스린다는 말은 내 듣지 못하였소. 경들이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마음은 갸륵하지만, 지금 경장을 앞둔 때인데 유혈(流血)이 있으면 어찌 상서롭다 하겠소. 부드럽게 타일러 훗날 원한이 없게 함만 못하오.”
이 어린 유생의 글만 보아도 그러하였다. 물론 귀남도 사람이니만큼 읽으면서 기분이 상함은 어찌할 수 없었지만, 과연 그것이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쳐대는 것처럼 참형에 처할 만한 건인가 생각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뒤에서 노리는 바가 있을 터.
그러면 그 노리는 바는 무엇일까? 미루어 짐작컨대 부르는 말은 세도니 권력이니 다양하겠지만 결국 속뜻은 하나이리라. 그가 지난 생에서 듣고 배우기로 선비란 고리타분할지언정 원리와 원칙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배우기로도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내세우는 말과 품은 뜻이 달라서야, 먼 옛날 – 또는 먼 미래 – 쪽방촌 편의점 앞에서 이웃 노인네들과 가끔 소주병 깔 때마다 입을 모아 욕했던 높은 사람들과 이래서야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좀 저들끼리 싸움은 그치고 화목하게 잘 지내보면 어떨까 싶었다. 무턱대고 베어야 한다, 몰아내야 한다 외치기보다는 우선 무엇 때문에 악을 쓰고 욕을 하는지 그 사정이라도 듣고 앞뒤를 따져보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 핑계로 모 대감을 베어 죽이고, 저 핑계로 무슨 대신을 쫓아내버리면, 정작 나라에 필요할 때는 누구의 재주에 기댄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술을 터득할 리는 없으니, 귀남은 홀로 구상하고 고민하며 적어도 사람 목이 날아다니는 흉흉한 정국은 피하게끔 할 방도를 마련하려 노력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번듯한 학문도, 집안도, 벼슬도 없는 유생 홍재학이 어느새 기정진 이하 산림의 기대를 등에 업고 상경하게 되었으니, 어깨가 무거워 십리 길에 한 번씩은 부러질 법도 하였다.
마침내 입궐하여 예를 갖출 때도 긴장과 두려움에 고개를 바닥에서 떼지 못하였으니, 그의 오장육부를 파헤치려 드는 대소 관료들의 눈길을 피할 수 있었으므로 외려 다행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와서 구경하였다면, 아마도 이것이 말로만 듣던 국문장(鞫問場) 풍경이구나 하였으리라.
“유학 홍재학은 들으라. 그대는 무슨 연유로 조정의 중신들을 삿된 무리라 비방하며 나아가 내 학문에 미진함이 있다고 하였는고?”
아마 처음 젊음의 혈기에 못 이겨 상언하는 글을 올렸을 적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멱살 잡고 마당에 내팽개치는 한이 있더라도 제지하였으리라. 그러나 엎질러진 물. 한번 죽지 두 번 죽겠는가 생각하며 다시금 결의를 다진 홍재학이 입을 열었다.
“신 재학 아뢰옵나이다. 상소의 대강은 이미 진달받으셨을 것으로 아오니 그 요체만을 재차 말씀 올리겠사옵나이다, 『회통』의 명전법과 같은 나라의 큰 제도는 반포하기에 앞서 작게는 조정의 대신들과 의론하고 크게는 산림의 공론까지 들어, 가감하고 다듬어 폐단을 미리 없앰이 상례요 조종의 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법도가 폐함을 당하고 언로가 막혔으며, 이를 고치려는 산림의 뜻있는 이들은 외려 사세를 모르는 고루한 자로 몰이를 당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문장이 비루하고 담긴 뜻은 일천하나, 오직 그 뒤의 마음만은 이와 같았으니 부디 헤아려 살펴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입을 떨어지게 만들기가 어려웠지, 한 번 열리니 생각하였던 바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말하다 보니 스스로 분하여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말이 잘 나오다가도 막혀버리는 것이, 아무래도 비방의 당사자가 목전에 있으니 또 글로 쓸 때처럼 떠오르는 대로 내지를 수는 없는 듯했다.
“재학의 뜻이 이렇다 하니, 뭇 중신들은 그의 의론에서 옳은 부분과 이치에 닿지 않는 부분을 가리어 일깨울 부분은 일깨우고 가납할 구석은 가납토록 하시오.”
임금의 허가가 떨어지니, 이때를 노린 영의정 류후조가 공손히 예를 갖춘 뒤 앞으로 나섰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막힌 언로가 다시 막히지 않도록 보장해달라 하면 될 것을, 어찌 만동묘를 훼철하여야 한다, 조정 대신들은 야소의 심복이다 하는 말로써 엉뚱한 사람을 비방하고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다는 말인가?”
이어서 우의정 이유원이 나섰다.
“그대는 명전법을 일컫어 성현이 글로 남긴 정전의 제도를 더럽힌다 말하였다. 그러나 정전의 일이 있었던 것도 세대를 따지면 삼천 년 전의 이야기인데, 그 일을 지금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면 제도를 더럽히는 것이라 우격다짐으로 주장함이야말로 비루한 언사가 아닌가?”
대사헌 한계원도 한몫 거들었다.
“지금 나라의 일로 급한 것은 경장밖에 없다. 이 일로 논란이 생길 것을 일찍이 밝으신 성상께서 걱정하시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시고, 또 아문의 일에 대해 초야의 선비들이 의문을 품으면 이를 정성스레 살피어 답변토록 하시었다. 이것이 벌써 두 해 전의 일인데 미혹되는 바가 있으면 그때 해소하지 않고 지금에 이르러 소란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잠시 정적이 흐르는데, 엎드린 홍재학의 목울대로 침 삼키는 소리가 기둥 사이를 울렸다.
“감히 여러 중신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언사가 과격하여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힘은 제 수양이 부족한 소치이니 입이 여럿인들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다만 아무리 경장이 시급하다 한들 중의(衆議)를 생각하는 덕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인 농(農)을 다루는 명전법만은 무어라 끼어들 사이도 없이 『회통』 사이에 넣어서 굳혀버렸으니. 이는 무슨 곡절인지요?”
홍재학이 대원군이 북벌을 꺼내면서까지 묻어버리고 싶었던 부분을 짚고 나왔다.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말 삿된 의도를 가지고서 그러는 게 아니라면, 공장을 세우고 학교를 여는 곁가지의 일에서는 박규수를 내세워 소통하는 시늉을 내면서도 정작 여러 사람의 삶을 헤집어놓는 명전법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지금 피 흘릴 건을 만들어 후환을 없애려 함이 대원군의 뜻이었다. 자신을 따른다면 이로써 얻게 될 세도를 나누어 주겠다. 직접 운현궁을 드나들든, 눈치를 보며 조용히 따라가든 뭇 중신들이 대원군을 따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쳐 없애고, 조정 안에 하나의 목소리만 남겨 강대한 나라를 만들어나간다. 후자라면 모를까 전자는 이 나라에서 벼슬 욕심 가진 자라면 누구든 꿈꾸는 바였다. 남인의 후예 한계원, 명문이지만 영묘조 이래 내쳐져 절치부심하던 류후조. 문중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계해년 환국 이후 환로에 오른 이들에게 이만큼 달콤한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를 그 피의 주인 될 당사자 앞에서 –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주상의 앞에서 –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법.
“바로 그대가 말한 것처럼 가장 중한 일이므로 이렇게 일을 다루었을 뿐. 이처럼 때에 따라 권도(權道)로써 변통함은 경국(經國)에 있어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초야의 서생이 입에 담을 바는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운데 지금까지 그러한 것처럼 공론을 살피고 산림의 뜻을 청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치세(治世)라면 조종의 법도를 지켜나갈 수 있겠지만, 과연 지금도 그러하겠는가? 때에 따라 융통함 없이 고루함으로 일관함을 믿음이라 부른다면, 이것이 미생(尾生)이 다리 밑에서 기다리는 고사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때, 임금이 다시 끼어들었다.
“정말 좋은 이야기요. 그러면 나 또한 한 가지 묻겠소. 세상에 어지러움이 있을 때, 조종의 법도를 새롭게 고침이 가하겠소, 그렇지 않으면 본래의 법도를 지키되 영의정이 말한 것처럼 때에 따라 권도를 따름이 가하겠소?”
화제가 엉뚱하게 튀어버리니, 류후조 이하 모든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고쳐뜨고서는 곧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결국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처지에 맞추어 흐르는 법. 먼저 대원군의 사람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한계원이 나섰다.
“은(殷)은 하(夏)의 예법을 이어받되 여기서 버리고 보태었으며, 주(周)는 또한 은의 예법에서 때에 맞추어 가감하였습니다. 어지러울 때에는 씨줄과 날실을 더욱 가지런하게 바로잡아야 함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속뜻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면, 그러므로 대원위 합하를 믿고 그가 지금보다도 더 확고하게 집정하도록 믿고 맡겨달라는 말까지 덧붙였으리라.
반면 그럴 생각까지는 없던 이유원과 류후조는 저들끼리 한번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이유원이 먼저 반박에 나섰다.
“대사헌의 말이 옳으나, 또한 그 뜻이 지나친 바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 나라가 처한 양이의 변은 전고에 없던 일이라 하나, 이미 성상께서 지극한 덕으로 교화하시어 우리가 능히 그 기물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하은주 삼대가 정삭(正朔)을 바꾼 예에 빗대겠습니까. 다만 전례 없는 일이 간혹 있으므로 때때로 권도를 따를 뿐입니다.”
말석에 있던 공조참판 강노가 나아와 다시 반박했다.
“국론을 일통하여 오롯이 나라의 정기를 한곳에 모아야만 지금의 난국을 능히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회통』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으니 어찌 이를 권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이어서 류후조가 다시 공박하고, 생각을 추스른 한계원이 도로 반박하고, 이유원은 옆에서 거드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홍재학은 여전히 엎드려 진땀만 흘리고 있고 용상에 앉은 귀남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허, 이처럼 제신들 사이에도 의논이 분분하니, 어찌 누구 한 사람만을 콕 찝어 식견이 편벽하다 할 수 있겠소? 차라리 여러 사람들을 한데 모아 각자 생각하는 바를 공론에 보태도록 함이 낫지 않겠소이까?”
논쟁이 오간지 한 식경은 되었을까. 지금 홍재학을 탄핵하는 논리가 곧 자신의 힘이 되리라 여기며 무더위 속에서 열심히 침을 튀기던 중신들은 옥음(玉音)을 듣고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재학의 글에 과격한 언사가 있어 지엄한 덕을 어지럽힐 소지가 있음은 사실이나, 지금 이렇게 보니 또 그 마음만은 취할 바가 있는 것도 같소. 지금 조정에서도 이렇게 하나의 의제로도 설왕설래를 하는데, 장차 국정의 현안을 다룸에 있어서는 어떻겠소이까? 마땅히 세력 있는 쪽이 세력 없는 쪽을 핍박하여 보탬이 되는 생각을 찍어누르는 폐해를 막아야 할 것이외다.”
“다 쓴 『대전회통』에 곧장 증보를 해야 할 것 같소. 총리대신이 조금 더 고생을 해 주시오.”
칭병하고 그날 자리에는 나오지 않았던 박규수가 통리아문의 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입시하자마자 귀남이 입을 열었다. 박규수 또한 홍재학을 불러다놓고 조정 대신들끼리 싸움을 붙인 이야기는 익히 들은 터였다.
“송구함을 무릅쓰고 여쭙겠나이다. 정녕 조정에 붕당을 다시 만드실 생각이시옵나이까? 분란을 일으킴에서 그치지 않고 따로 관청을 만들어 다투게 하시겠다니, 신의 지모가 짧아 어심을 모두 헤아리지는 못하겠사오나 폐해가 없지 않을 듯하옵나이다.”
아직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아, 가칭 참의원(參議院)이니, 국사당(國事堂)이니 하는 기관을 놓고 조정은 물론 민간조차 편이 갈라져 있었다. 정사를 고관대작들에게만 맡겨놓으면 힘 없는 이들의 좋은 생각이 묵살되기 쉬우니, 이와 무관하게 하고자 하는 말을 서로 내어 그 논리정연함을 견주고, 그 중의를 취합해 어전에 올리게 한다. 대략적인 계획은 이랬지만 대체 그러면 참여는 누가 할 것이며, 의견은 어떻게 내고 또 모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규수로 따지면, ‘그건 아문과 협의하여 잘 해보시오’라며 통째로 위임해버린 임금에게 우려 반 실망 반의 생각을 품고 있었다.
“미증유의 일이 나라를 누차 덮치고 있는데, 이번 일에서 볼 수 있듯 작금의 조정에서 공론을 종합하고 때때로 초야에서 올라오는 상소를 청취하는 것만으로는 미처 다루지 못하는 곳이 생길 수밖에 없소. 그러니 당상(堂上)·당하(堂下), 참상(參上)·참하(參下)를 막론하고 좋은 생각이 있으면 모두 구하여 듣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리하여 조정 안에 분란이 생기면 인화(人和)가 깨어질 것입니다. 서로 당을 이루어 다투고, 모함하고 고변하며 마침내 왕업에까지 누를 미치게 될 터인데, 부디 재고하여주시기를 아뢰옵나이다.”
붕당의 폐해를 알면서도 막지 못함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식견 얕은 이들이야 소인배들이 정사를 농단하려 하기 때문이라 하겠지만, 반남 박문의 후예로 어쨌건 세족의 한 사람인 박규수는 그 뒤에 무언가가 더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차마 글로 내어놓지 못하고, 오직 취중의 진담으로, 입에서 귀로 전하는 말.
‘붕당을 권장하고 서로 싸움을 붙인 것은 구오(九五. 임금)의 뜻도 있었다.’
말하면서도 알았다. 결국 누가 꾸몄든 지난 수백 년을 물어뜯고 싸운 것은 자신들 세족들이었고, 그 역시 기회가 닿는 대로 자신이 보고 배운 바에 충실하려 했다. 당장 일전에 김병학에게 역모의 혐의를 씌우려 획책하지 않았는가. 그 전에는 서원의 일로 대원군을 곤경에 몰아넣으려 일을 꾸몄다.
그러니 결국 위선이요, 저 홍씨 서생의 말마따나 향원(鄕原)의 무리라는 욕을 들어도 할 말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박규수는 연소한 주상의 어진 마음을 믿었기에, 감히 그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전하, 사람과 사람의 다툼을 일으켜 이득을 취함은 비록 종사를 위해서일지언정 쉽게 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지금 당장은 어심을 얻고자 백관이 입안의 혀처럼 굴도록 만들 수 있겠지만, 지난 기백 년간 고질이 된 싸움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깊게 생각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답변이 돌아왔다.
“총리, 나는 이 조정에 싸움이 없기를 바라오. 나라 전체에도 오직 평안만이 있기를 원하고. 하지만 어떻게든 서로 다투려 드는 무리들이 있으니 어찌하겠소? 저들끼리 싸우게 하고, 그저 그 싸움통에 애먼 사람이 끌려들어가 고역을 겪지 않게 막아주는 수밖에 없겠지. 내 상소에서 말한 것처럼 배움을 일삼지 않아 이보다 좋은 방책은 차마 생각하지 못했소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해주시오. 나라가 평온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이전과 같소. 지금까지 수없는 환난을 겪었고, 앞으로도 고된 길만이 있을 텐데, 내 과분한 자리에 앉아 그 어려움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더하려 하겠소?”
하지만 정말로 눈앞에 권력이 있는데 이를 낚으려 하지 않을 위정자가 얼마나 될까?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라며 겸양하는 이 어린 인군의 사양지심(辭讓之心)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참으로 곧은 것은 구부러져 보이며, 길이란 본래 굽어 있는 것이라. 숙손통(叔孫通)이 과연 제대로 된 선비이기는 하겠냐만은, 그렇게 따지면 군밤장수는 어디 왕재(王才)라 하겠소이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오.”
농으로 던진 말에 무서우리만큼 무거운 뼈가 들어 있었다. 그저 지금 택하는 권도가, 임금이 그토록 사랑하는 어진 덕을 잡아먹지 않기만을, 그리고 그렇지 않도록 자신이 힘 닿는 데까지 왕을 보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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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계속 엑스트라로 출현하느라 제대로 된 설명이 없던 인물들이 대거 제 목소리를 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대원군 집권기에 정계에 진출해 요직을 거쳤던 사람들이지만, 한계원, 이유원, 류후조, 강노 등은 모두 다채로운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원군 실각 전후에 걸어간 길도 각자 달랐고요.
이유원은 선조 대의 명신 이항복의 후예입니다. 박물지 임하필기(林下筆記)의 저자로도 유명하지요. 당색을 따지면 소론 집안이라 하겠습니다. 대원군 집권 이전에 이미 그냥저냥 관직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후 대원군과 대립, 그 뒷통수를 화려하게 날리면서 1870년대 후반에는 이홍장과 교섭하고 영의정에도 오르는 등 거물로 부상합니다.
반면 한계원과 강노는 각각 남인, 북인 집안 출신으로 대원군 집권기에 중용되었습니다. 대원군이 실각할 때 둘이 세트로 파직당했지만, 이후 친위세력이 필요했던 고종에 의해 둘 다 재차 중용됩니다.
중간에 언급되는 하은주 세 나라의 이야기는 공자가 논어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세 나라의 정삭, 그러니까 달력은 정월로 삼는 달이 조금씩 달랐다고 하지요. 달력이라는 게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가지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후반에 언급되는 ‘구오’는 주역에 등장하는 효의 이름입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 효, 그 중에서도 양의 효(강건중정)로, 흔히 임금을 비유하는 표현 중 하나로 쓰였습니다.
마지막에 귀남이 읊는 것은 진한교체기의 선비 숙손통에 대해 사마천이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처세로 파란만장한 시기에 유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면서 사마천은 높게 평가하였지만, 정작 후대 유학자들은 지조가 없다면서 (물론 진한교체기에 ‘선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는 않았으니 숙손통으로서는 억울하겠지만) 비판하였습니다.
숙손통이 학문의 생존을 위해 비굴한 짓을 했다면, 작중의 귀남은 마침내 현실과 타협하고 ‘인도의 실현을 위한 패도’의 가능성을 한 발짝 열었습니다. 과연 이 길로 아예 빠져버리게 될지, 그렇지 않고 애매한 선을 타면서 계속 고생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