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길이란 본래 굽은 것 (1)
가볍게 땅을 적시던 매우(梅雨)가 살포시 그쳤다. 빗소리 잦아들고 새는 우짖는데, 재동 박규수네 마당의 백송은 하얀 껍질을 양껏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하늘은 개지 않아, 마치 사랑방에 앉아 수심에 빠진 집주인의 표정과도 같았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대감.”
“아, 역매(오경석) 왔는가.”
“안사람 친정에서 감복(甘鰒)을 조금 보내왔는데, 가히 양품(良品)이라 조금 나누어 가져 왔습니다. 조만간 날 더워질 무렵 기력 쇠하실 때 드시면 딱 맞을 듯합니다.”
“허허, 뭘 그런 걸 다. 여하간 고맙네, 고마워.”
이들이 고작 셋이서 개화당이라는 것을 발족하여 국정에 발을 걸친 지도 어느덧 여섯 해째가 되었다. 그 전의 교분도 적지 않았으니, 박규수가 아무리 반갑게 맞이한들 그 이면에 감추려 애쓰는 수심을 오경석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의 일로 심경에 어지러움이 있으신 것인지요?”
“거 참, 용하게 맞추는군. 자네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함부로 못 하겠어.”
헛웃음과 한숨이 한 순씩 교차한 뒤 본심이 나왔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이처럼 어려운 줄 알았겠는가. 부자(夫子, 공자)께서 만세의 사표(萬世師表)로 일컬음을 받으심도 다 마땅한 연유가 있음을 내 근래 들어 다시금 깨달았네.”
박규수가 통리아문의 수장으로서 재직한 지도 어언 삼 년. 그간 내놓은 개혁안을 집대성해 나라의 법으로 삼고자 그의 관직생활에 어쩌면 가장 큰 명예이자 멍에가 될 『대전회통』을 왕명으로 편찬하게 되었다. 그 뒤에 어떤 식으로든 종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하는 대원군의 입김이 있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 대감, 그래도 반계(磻溪) 이래 여러 이름난 선비들이 혁파할 것을 누누이 얘기한 법제들을 건드리는 것 아닙니까. 선인의 말을 한데 엮는 데서 지나지 않거늘 누가 감히 엉뚱한 일로 생트집을 잡는다고 입방정을 떨겠습니까?”
“자네 말마따나 수많은 사람들이 얘기한 안건은 맞지. 하지만 생각해보게. 애초에 이 일이 쉽게 고쳐지는 것이었다면 그처럼 명신(名臣)과 선유(先儒)들이 누누이 고쳐 말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당대에 쉽사리 고쳐지지 않으니 후대에라도 잘 해보라며 말씀들을 남기신 것이고, 그 후대는 또 후대로 넘기고 해서 오늘 여기에 이른 것 아니겠는가.”
하다못해 당장 몇 년 전 신법에 살짝 끼어서 함께 반포된 호포(戶布)의 제도만 보아도 어떠했는가. 처음 듣고서는 절묘한 계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를 임시변통이 아니라 나라의 장구한 법도로 만들고자 전례를 찾아 기록을 뒤져보았더니, 그가 익히 알던 영묘조(영조) 때뿐 아니라 숙묘조, 심지어 효묘(효종) 때에도 잊을 만하면 조정에서 논의되던 것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대에 와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뿐이겠지요.”
그야 그렇겠지만, 그 발등이 하필 박규수 자신의 발등일 이유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잖아도 이미 명문가 집안 사이에서 암암리에 자신을 ‘재동 왕안석(王安石)’이라며 비꼬고 있음을 익히 아는 박규수였다.
“그리고 그간 대감뿐 아니라 아문의 모든 신료들이 힘을 합쳐 중지(衆智)를 모으지 않았습니까. 명전법(名田法)만 보더라도 그 제도가 치밀하고도 정교하여 감히 정전(井田)의 옛 법에 비할 만합니다.”
오경석이 『대전회통』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명전법을 들고 나왔다. 나라의 모든 땅을 나라 명의로 된 어음을 주고 사들여, 땅에 이름을 붙이고 지계(地契)를 작성한 뒤 관청에 경자(耕者)로 등재된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지난 수백 년간 이 땅에서 오고 간 선정(先正)의 논의에 박규수 본인의 꾀, 통리아문에 합류한 한미한 집안의 자제들이 낸 잔머리, 그리고 가끔 시의적절한 임금의 귀띔까지. 농(農)을 대본(大本)으로 삼는 이 나라에서 가히 개국 이래 최대의 변혁이라 하여도 무방할 법제였다.
“이보게, 지금 우리가 지금까지 궁리한 바에 미진함이 있을까 근심하는 게 아닐세. 우리 머릿속에만 머물던 생각이 바야흐로 세상에 전모를 드러내려 하는데, 과연 세상이 가만히 있어줄까 고심할 뿐이지. 하다못해 마당에 쌓인 썩은 낙엽을 뒤집어도 그 아래 벌레가 놀라 달아나거늘...”
“허나 대감, 그래서 우리가 지금껏 몇 달간 밤샘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조정에서 논의를 거치는 중이라면야 연명으로 만인소를 올리든 지부상소를 하든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단번에 국법으로 포고되는 것일진대, 흉참한 마음을 품지 않고서는 감히 대들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근심이란 몸을 지키는 근원이 되지만 과하면 도리어 몸을 해치게 되는 법입니다. 지금 나라의 국운이 비로소 기나긴 겨울을 지나 숨통을 트려는 참인데 대감께서 기체에 미령함이 있으시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어찌 되긴 어찌 되겠는가. 위세 부리던 여우는 모든 욕을 뒤집어쓰고 사라지고, 그 뒤에 있던 범이 여우가 마련해준 고기 맛을 보러 나오겠지.’
애써 이 말이 목청을 타고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꾹 눌러삼켰다. 말해봐야 이해받지 못할 것이 명백하기도 하였거니와, 사실 요새 박규수는 오경석마저 미심쩍은 면이 없잖았기 때문이었다.
박규수가 통리아문의 일에 매진하는 동안, 조정에는 새 얼굴이 부쩍 늘었다. 김병학이 ‘어리석은 생각으로 사직에 누를 끼쳤음’을 사죄하며 동생 대신 사절단 우두머리로 갈 것을 자청하고 나서자, 이를 계기로 여러 명문가들도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중진들을 내어놓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생긴 빈자리에는 추사(秋史)의 문인들이 하나씩 고개를 내밀었다.
세도가가 꽉 잡고 있던 조정에서는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숨 죽이고 살던 이들이, 알고 보니 다들 집에 양서 한두 권씩은 비장(備藏)하고서 양이와의 통교를 대비하고 있었다 했다. 신헌이 그런 이였고, 강위(姜瑋)도 그러했다. 민문이 다른 벌열의 뭇매를 맞을 때는 조용히 숨 죽이고 있다가 이제 와서 고개 내미는 민규호(閔奎鎬) 같은 자도 있었다.
그러므로 박규수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대원군 그 자의 계책 아닐까? 어심은 어디까지나 개화에 있지 박규수 한 사람에게 머물러 있지 아니한즉, 굳이 그가 아니라도 나라의 문호를 열고 국운을 트게 하는 데 쓸 사람이 많다면, 『대전회통』의 반포로 들이닥칠 후환을 모두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뒤 내쳐도 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게 둘 수는 없었다. 지난해 사절단 소동으로 성상을 뵈었을 때, 그 지극한 마음을 편린으로나마 접한 박규수다. 그 여리면서도 어진 마음을 알아줄 이가 그 아니면 또 누가 있으랴? 적어도 저 굶주린 이리 같은 대원군과 그 품 안의 사람들은 아닐 터이다. 개화의 큰 뜻을 제 앞가림을 위해 이리저리 비틀지 않고 오직 종실과 민려(民黎)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조선 팔도에서 찾자면 찾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가 보기에 지금의 조정에는 그런 이가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쳤기에 친우 오경석조차 온전히 친우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옛날 임술년(1862), 자신이 종친의 아들을 가르치게 되었다며 파락호 흥선군을 소개시켜 준 것은 누구였는가? 자신으로 하여금 장동 김문을 무너뜨릴 음모 꾸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자칫 피 흘리기를 꺼리는 금상의 눈밖에 나게 할 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또 누구였는가?
그렇잖아도 천하장안이니 뭐니 하는 패거리를 꾸린 이래 중인들을 제 손 안에서 부리는 대원군이다. 오경석도 사실 그의 손을 잡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후우... 멀리 간 대치(大致)가 오늘따라 그립구려.”
만방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음을 알리러 가는 첫 사절단이니 필히 개화당 사람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며, 스스로 천거하여 나선 유홍기였다. 그의 꾀라면 권력에 대한 욕심과 쥔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려진 자신의 눈을 대신해 뭔가 뾰족한 방책을 내어주기도 했으련만.
“대감께서도 아시다시피 대치는 세상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잘 살 법한 인물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고 모쪼록 몸을 잘 돌보십시오. 나라의 중책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충문공 김조순이 소싯적에 패설을 좋아하여 『오대검협전(五臺劍俠傳)』이라는 글을 직접 쓰기도 하였음은 유명한 이야기다. 저자의 파락호 시절 좋든 싫든 장동 김문과 얽힐 수밖에 없었던 대원군은 대체 그때부터 앞날 창창한 젊은이였던 그가 왜 그랬을까 싶어 은근히 궁금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제는 알 법도 했다. 권력을 희구하는 자가 상상에 빠지는 것은, 그 상상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일구어낸 장동 김문의 성세는, 『오대검협전』에 나오는 검협의 도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구석에서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수천 리 떨어진 죄인을 사사(賜死)케 하는 것이 도술의 경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 대원군도 그와 비슷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 안동수의 족형 안동준(安東晙)이 인천에서 보내오는 서양 소식을 보다 보면, 자신이 이끄는 조선도 언젠가 그런 엄청난 나라로 도약할 수 있을 듯해 절로 흉중이 웅장해지는 것이었다.
“보로사(프로이센) 육군 대도독 모기(毛奇. 헬무트 폰 몰트케)가 철마(鐵馬) 탄 이십만 정병을 이끌고 남벌(南伐)하여 대국 오지리(오스트리아)를 하룻밤 싸움으로 꺾었다는구려! 고작 기물의 이로움을 얻은 오랑캐들도 이리할진대, 우리 군영의 충용한 장사들이 양이의 기물과 재주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하게 된다면 어떻겠소이까?”
물론 굳이 그 소식을 제 앞에 앉은 김평묵(金平默)에게 늘어놓는 것은, 자기만족 외에도 따로 노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무릇 기(器)란 정사의 말단으로 선비가 가벼이 마음을 두어서는 아니 되는데, 그 중에서도 병(兵)은 더욱 지엽에 속합니다. 합하께는 송구한 말씀이지만, 오랑캐의 일은 오랑캐의 일로 덮어두고 우리는 마땅히 예의의 나라로 남을 궁리를 함이 가할 것입니다.”
최익현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사절단과 함께 바깥 세상을 살피러 나간 이후, 이항로의 제자들 중 우두머리 역할은 최연장자인 김평묵이 물려받았다.
“아, 물론 그야 그렇겠지만, 생각해보시오. 이제 나라의 문호를 연 지도 꽤 되었소. 공장에서는 면포가 한없이 쏟아지고, 기기창에서는 정예한 화포가 원하는 대로 찍혀 나오는데, 거기에 이제 멀리 관서에서는 크기를 이루 말할 수 없는 금맥까지 발견되었다 하더이다. 그대도 저 아리망인 오배라는 자가 관에 고변한 이야기는 들었을 것 아니오?”
최익현에게 앞날을 맡긴 뒤 낙향하여 후학 가르치기를 계속하던 이항로는 지난달 끝내 숨을 거두었다. 당색을 막론하고 모두의 추앙을 받던 산림의 큰 선비가, 비록 천수를 다했다고는 하나 이처럼 세상을 떠남은 식자라면 누구나 슬퍼할 일이었다. 허나 정작 육식자(肉食者)들은 애도하기보다는 그간 화서의 눈치를 보아 숨을 죽이고 있던 유림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를 살피기에 바빴다. 대원군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마침 스승의 문집 출간 건으로 상경한 김평묵을 불러다 문답을 주고받고 있던 것이다.
“지금이 어떤 세상이오이까? 오랑캐 천자라 하나 엄연히 대국의 중심 된 자가 서양 오랑캐를 피해 몽진하고, 그 이후에도 오랑캐를 꾸짖기는커녕 그들을 받아들여 끝내 무찌르지 못하고 있소. 옆의 왜국으로 말하자면 아직 소식이 모두 퍼지지는 않았지만 어지롭기로는 중원에 비하여도 모자람이 없고.
이런 세상일진대, 우리인들 어찌 가만히 선왕의 법도만을 지키며 이 땅에 머물겠소이까? 동리 전체에 불이 났는데 운이 좋아 우리 집의 불길은 어느 정도 잡을 수 있게 되었소. 그렇다면 빗장 걸어잠그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서둘러 나머지 불씨까지 털어 없앤 뒤 마땅히 옆집 불도 꺼주러 가야 하지 않겠소?”
“이 불민한 선비는 재주가 용렬해 초야에 묻혀 살며 스승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합하께서 품으신 큰 뜻의 반의 반도 살펴 알지 못할 터이니, 부디 뜻하시는 바를 곧이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직하면서도 마음씨 좋은 것으로 유명하지, 명석함으로 이름을 날리지는 못한 김평묵이다.
상대가 자신의 상상 놀음에 어울려주지 않겠다 하니, 재미는 없어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나라에서 『대전회통』이라는 것을 반포할 거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감하고 산삭(刪削)할 바를 추려서 정리하는 것이지.”
“밝으신 금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나날이 닦이고 있는 나라의 법도를 뒷받침할 좋은 기틀이 되겠습니다만, 소생을 부르심은 어찌 된 연유인지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국법을 증보하였다 하나, 그 내용을 살피면, 통리아문에서 지금껏 내놓은 소위 개화의 법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엄청난 것들이 많을 거요. 뭐, 내 여기서 다 말은 않겠다만,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의론에 따라 팔도의 농토를 모두 환수하고 다시 나누어준다. 이 정도만 들어도 얼추 감이 잡힐 것이오.
내 그대를 이곳 운현궁에 부른 까닭은, 이 일에 대하여 산림에서 주도해 여론을 모아달라 청하기 위해서요. 생각해보시오. 무릇 구폐(舊弊)를 일소한다 함은 듣기는 좋지만 실지 행동에 옮기면 어디선가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오. 그만큼 거기에 기대어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러면 그런 자들을 억눌러 올바름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겠소?”
“마땅히 정도(正道)로써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깨우치고 때로는 꾸짖어, 교화를 이지러뜨리지 못하게 해야겠지요.”
“잘 말해주었소. 그리고 지금 정도란 무엇인가. 개화의 법을 지렛대 삼아 국운을 융성케 하는 것이 정도일 것이오. 잠시의 불편과 사소한 손해를 견디지 못하고 국법에 대해 왈가왈부함은 곧 편벽한 선비의 행실이니 사도(邪道)가 되겠소.
작고하신 화서 선생의 뜻을 문하에 있지도 아니하였던 내가 감히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선생께서 생전 신법의 논의에 관해 하실 말씀이 정녕 아무 것도 없으셨겠소이까? 그럼에도 끝내 침묵을 지켜주셨으니, 내가 보건대 이야말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큰 뜻을 지켜 벗어나지 않으심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여전히 김평묵은 뚱한 표정 그대로. 수긍하지 못함이 명백하였다.
“그렇다 하나, 만약 합하께서 이르시는 『대전회통』의 내용이 그처럼 나라의 기틀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조정에서 품의(稟議)를 거쳐 중론을 모은 뒤 시행함이 가할 것입니다.”
드디어 대원군이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그렇다면 미리 준비해둔 말을 꺼낼 때다. 목소리를 낮추고 살짝 몸을 굽혀, 분위기를 한껏 잡은 뒤 넌지시 말했다.
“만동묘(萬東廟)가 언제까지나 화양동에 있어야겠소이까?”
과연, 효험이 굉장했다. 숭정 갑신년 이래 조선 땅에서 선비를 자처하는 자들 중 저 말에 마음 흔들리지 않는 자 있을까?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사당에서 제례를 지내주는 데서 그치는 지금의 구차함을 타파하고, 중원 땅에 올바른 도리가 다시 서게 만들 수 있다는데 어찌 설레지 않을까? 흔들리는 동공을 확인한 뒤, 다시 허리를 곧추 펴고서 말했다.
“물론 단번에 지나치게 많은 제도를 변혁하는 것이니 넘치고 모자라는 곳은 없지 않겠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내 약조컨대 사후에 반드시 잘잘못을 가려 책임을 묻게 하겠소.
허나 이는 나중의 일이고, 당장의 시무는 급박한데 나라의 흥망도 이에 걸려 있소. 그러므로 왕업을 수행함에 소인의 짧은 식견이 끼어들 단초를 마련할 수는 없는 것이오. 이 뜻을 알아주시겠소? 화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잠시의 어려움을 감수하고 앞날의 대업을 위해 조정의 결단을 믿고 따르도록 뭇 선비들의 뜻을 모아주실 수 있겠소?”
북벌의 꿈으로 살그머니 마음 한 구석을 간지럽히고, 그에 스승의 이야기까지 더하니 마침내 김평묵의 눈도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김평묵이 자리를 비치적거리며 뜬 뒤, 대원군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처음 나라의 역사를 배울 때, 북벌(北伐) 두 글자의 힘이 얼마나 막강하였는지를 깨닫고 전율하던 때가 떠올랐다. 나라가 오랑캐에게 짓밟혀, 종실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벼슬하는 이들은 여진인에게 고개 조아린 조정이라며 은근히 깔보던 그 시절, 효종대왕은 저 두 글자로 나라의 근본을 다시 세웠다.
『대전회통』이 몰고 올 파란이 얼마나 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화서의 제자들을 부려 산림의 눈을 가리고, 혹 법에 따라 개혁을 추진함에 어그러짐이 있다면 그 책임을 박규수에게 물으면 될 일이다. 혹시 아는가, 그가 김평묵 앞에서 떨었던 허풍이 어느 날 진실이 되어, 선비의 나라 조선이 선비 없이 총칼의 힘만으로 홀로 설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기틀을 닦아준다면,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도리는 다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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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역사에서 『대전회통』은 1865년에 편찬됩니다. 『대전통편』을 보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원군의 집권에 보다 유리한 권력구조를 법제화하는 한편 대원군 주도의 개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했지요. 이 역사에서는 1865년에 을축양요라는 훨씬 큰 사건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그럴 엄두를 못 냈습니다만.
한편, 대원군이 정말로 부국강병을 추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집권기에 – 심지어 양요 이전부터 – 추진된 각종 정책들의 방향성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런 정책들이 서구의 기술이나 생산기반 없이 추진되어 가시적 성과를 거의 내지 못했다는 데 있겠지요.
뜬금없이 등장한 헬무트 폰 몰트케는 사실 그렇게 뜬금없지만은 않습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도 그의 용병술을 칭송하는 내용이 있거든요. 뛰어난 장수 한 명이 전세를 좌우한다는 관념은 애초에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