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38화 (38/320)

12. 믿음을 고치는 사절단 (3)

왜정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귀남이 일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사실 한 가지뿐이었다.

‘대체 왜?’

대체 왜 그들은 굳이 옆 나라에 쳐들어와, 처음부터 너희 나라는 없던 것이라고 가르쳤을까. 이 땅에 무슨 보화라도 묻혀있길래 그랬던가?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족속들이라는 말인가?

제국주의라는 시대가 그것을 강요했다. 우리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총칼에 명운을 걸었을 뿐이다. 한 번 총칼로 먹고사는 길을 택한 뒤에는 멈추려야 멈출 수 없었다. 만약 귀남이 당시의 일본이라는 나라에게 물을 도리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궁색한 답변을 주워섬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거대한 시대의 흐름 같은 이야기를 귀남이 상상할 수 있을 리도, 이해할 리도 없다. 그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쳐 물을 뿐이리라.

‘조선국 국왕 이형은 일본국 대군 전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

만력(萬曆) 임진년의 큰 잘못(임진왜란) 이래 대군의 집안에 왕재가 있어, 밖으로는 잘못을 뉘우쳐 다시 교린(交隣)하는 예를 갖추고, 안으로는 어지러움을 다스려 능히 예순여섯 주에 모두 덕화(德化)가 미치게 되었으니 하늘의 조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임진년 이래 이백 하고도 일흔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그간 서로 정을 돈독히 하여 이웃 사이의 화목함이 실로 해내(海內)의 보배와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근래 양국이 모두 곤란하여 사절을 주고받지 못하였기에, 소식은 닿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유언(流言)이 떠돌았습니다. 우리가 그대 나라에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이처럼 없는 말을 망령되이 꾸미어 우리를 헐뜯는다는 말입니까?

혹 옳지 못한 생각을 품은 난민(亂民)들이 있어 어지러운 말을 퍼뜨리는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예를 다하지 못함이 있었더라면 서로 깨우쳐 고쳐나가면 될 일입니다. 바라건대, 이 장정(章程)으로써 전대의 누덕(累德)을 더욱 도탑게 하는 단초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한 국서의 내용을 익히 전해 들은 신헌으로서는, 지금 돌아가는 형세를 보며 그 누덕이라는 것이 실은 강희(康熙) 연간에 불타 강호성(에도 성) 안에 주춧돌만 남아있다는 높은 누각(천수각)과도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터는 그럴듯하되 애초에 내용은 진작에 사라져버리지 않았는가.

자객들을 막기 위해 달려온 이노우에라는 청년이 말하기를, 도성 인근의 반민(叛民)들이 작당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기 위해 난동을 부린 것이라 했다.

지금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모르긴 몰라도 확실히 나라에 큰 피해를 입힌 꼴이었으니 뜻한 바를 결국 이루어내었다 할 수 있으리라.

“반발개보(磻拔介甫. 로버트 반 발켄버그)라 하였소? 그자가 위로한다면서 기세등등하게 찾아와 그대 나라에서 배상을 받아내어 이 옳지 못한 일에 응당한 대가를 치루게 만들겠다며 호언하더이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협상은 협상이니 계속되어야 한다. 미국에 대한 보상 문제는 다른 로주들에게 맡기고 신헌의 안부도 물을 겸하여 찾아온 카츠에게 신헌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죽은 것은 오귀자(烏鬼子) 두엇이요, 승선한 미국인과 영국인은 고작 한 명이 살짝 불에 그을리고 다른 한 명은 다리가 부러진 데 지나지 않건만. 불문마(不問馬)의 고사를 양인에게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다쳤는데 어찌 이권을 얻어낼 생각부터 한다는 말이오. 그대 나라도 고생이 많겠소.”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사람이 다쳤는지만 묻고 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공자의 고사다. 워낙 유명한 얘기다 보니 유학 소양이 깊지 않은 카츠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오가는 사절을 해침은 금수와도 같은 짓이다. 그런데 불온한 마음을 품은 악독한 자들이 나서서 그런 흉측한 일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웃된 나라로서 책임을 묻기보다는 도성 옆에서조차 못된 자들이 횡행하는 시국을 동정하고, 어찌하면 도와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함이 예에 맞다.

그런데 『영환지략』에 예를 아는 대서(大西)의 대국이라는 미국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지금도 당장 성에 미국 사절이 찾아와 먼저 온 손님인 조선 사절단보다 더 요란법석을 떨고 있지 않은가.

물론 반 발켄버그가 듣는다면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났다지만 그 피해가 심대하여, 머나먼 동아시아에까지 투사할 여력은 없는 미국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습게 보이는 일은 없어야 했다. 비록 사소한 일이라지만 지금 이 야만인들의 기세를 억누르지 않는다면, 미국을 얕본 현지인들에 의해 나중에 감당 못 할 손실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아시아에 진출한 다른 열강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한동안 극동에서 진지한 교섭의 대상으로 취급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화당원으로서 얼른 본국에 돌아가 승전의 열매를 즐겨야 할 발켄버그로서는 최악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생트집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참화가 일어난 원인은 외국인을 직접 접하지 못해 일본 대중 사이에 허황스런 소문이 퍼진 데 있다. 이렇게 국민이 문명국으로서 교양을 갖추지 못한 나라에는 군함처럼 강력한 무기를 판매할 수 없다.

조만간 조슈와 한탕 할 생각인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 되면 약조한 대로 남부군의 해군 전함을 인도한다는 계약의 이행을 재고해볼 수밖에 없다.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일본인과 외국인의 우호를 다지면서 서로 친숙해질 필요가 있으니, 미국인이 일본 내지를 자유롭게 ‘여행’-실제로는 생사(生絲)의 현지 매수겠지만-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 이렇게 어르고 협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사정을 듣는다 해도 알아줄 리 없는 신헌은 미주의 대국을 자처하는 육내사질(育奈士迭. 미합중국)이 어찌 저렇게 왜인들을 핍박하는가 여기며 안타까워하고 또 일본을 동정하는 마음을 품을 뿐이었다.

“어쨌든 신 공을 비롯해 이웃나라에서 오신 귀빈들을 아국의 사람이 감히 해치려 악독한 마음을 품었으니, 위정(爲政)하는 입장으로써 마땅히 사죄하는 예가 있어야 합니다. 어찌하면 이 결례를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카츠의 목소리에 다시 머릿속을 떠돌던 정신이 눈앞으로 돌아왔다.

신헌의 입장에서는 그리 오래 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 섬의 어리석은 무리들이 조선을 속국이라고 우겨대는 것은 마땅히 경계하여야 한다. 당장 자신의 목숨부터가 위태로워지지 않았는가. 귀국하여 어전에서 사정을 아뢸 때 반드시 다룰 일이다. ‘왜’ 조선을 노리느냐는 우선 살아날 방도를 마련한 다음 고민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들이 이곳 강호에 오래 머물렀기에 이런 난리가 터졌다고 생각하니 이를 빌미삼아 무언가 더 뜯어낸다던가, 양보를 얻어낸다던가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조선까지 저 미국처럼 금수와도 같은 꼴에 빠져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금상 아래에서 조선이 나아가려는 길은 오랑캐의 기(器)로써 높고도 밝은 도를 바로 세우는 것이지, 정도를 버리고 금수와도 같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신헌이 학문 깊지 않은 무부(武夫)라 하나 이를 모르지 않았다. 이처럼 밝은 덕으로서 정사를 베푸니 지난 을축년(1865)에도 법국인이 스스로 사절 되기를 청하여 쳐들어온 자국 함대를 물러나게 하는 공을 세우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우당탕 달리는 소리와 함게 문이 열렸다. 시종 하나가 쓰러지듯 엎드리며 절을 올렸다.

“부교(봉행) 어르신! 급한 일이 있습니다! 잠시 나와보시기를...”

“무례다! 지금 신 공과 담화하고 있음이 보이지 않더냐!”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얘기를 듣고서 사쿠라다몬(櫻田門) 밖으로 나와 보니 기묘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스무 명가량 될 법한 왜인들이 문 밖 큰길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주변에는 구경하는 무리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저들과 복식이 다른 사람이 출문(出門)함을 보았는지, 무릎 꿇은 자들 중 가장 머리 희끗희끗한 이가 먼저 목청을 높였다.

“조선에서 오신 신 공은 들으시오! 나흘 전의 참변은 오직 이 사람, 미토 번사 타치카와 타다스케가 제자를 잘못 가르친 데 까닭이 있소!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 미욱하여 제자들이 한때의 혈기를 이기지 못하였으니, 그 잘못, 목숨으로 갚겠소이다!”

“아이즈에서 올라온 토시기치 타치노에몬이오! 나 또한 친우들에게 올바른 덕을 권면하지 못해, 사태가 이에 이르러 황국의 앞날에 폐를 끼치게 되었소. 그 죄 목숨으로 갚겠소!”

어느새 따라온 역관이 재빠르게 말을 옮겨주었다.

“허, 이 나라에도 지부상소의 아름다운 풍습이 있는가. 아니, 저건 지도상소(持刀上疏)라 부름이 가하겠군.”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요. 자신만 칼을 들고 오면 되었지, 뒤에 선 시동도 큰 칼을 들고 있으니 무슨 연유일까요?”

옆에서 신기한 듯 구경하던 부사 윤자승도 궁금함을 담아 한 마디 던졌다. 허나 그 궁금증은 곧 흩날리는 유혈로 답을 얻었다. 이어서 한 명, 또 한 명. 이 광경에 현장을 빙 둘러싼 왜인들은 오히려 찬탄하는 듯하였으나, 사정 모르는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막심한 불효요 광기의 소치일 뿐이었다.

“그만들 하시오!”

말이 통하지 않음도 잊고 신헌이 쩌렁쩌렁 외쳤다. 다행히 곧 역관도 제정신을 차리고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여, 아직 죽지 않은 자들과 구경하는 자들의 이목이 모두 이 이방인에게 쏠렸다.

“원한이 있다 한들 그 잘못은 올바름으로 갚는다 하였으니 (以直報怨), 부덕(不德)에 부덕을 더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며칠 전 미국에서 돌아와 이 황당한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물었다.

“뭐, 할복하러 모여든 자들이야 의기양양해서 돌아가고, 주군께서는 코가 꿰이셨지.”

신헌은 자신의 말이 먹혀서 저 왜인들이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을 되찾았다 여기고, 거두절미하고 이직보원(以直報怨) 얘기만 들은 관중들은 의기로 조선 사신을 감복시켰다며 자화자찬. 목숨 내어놓을 각오를 하고 상경한 번사들을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부두에 도는 소문으로는, 사쿠라다몬의 의사 삼인중(義士 三人衆)이 있었기에, 조선이 더 파렴치한 요구를 내걸지 않고 물러나게 되었다 하던데, 맞는 이야기입니까?”

분명 신헌의 입에서 나올 때는 자신들이 원한 가질 소지를 올바른 행실로 달래야지 엉뚱한 짓은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는 뜻이었겠지만, 다른 쪽이 듣기에는 마치 조선인들이 스스로 부덕한 짓을 했음을 깨닫고 삼가기로 하였다는 뜻으로 들렸던 것이다.

물론 신헌이 무슨 말을 하였든 듣는 군중이야 저들 편한 대로 뜻풀이하고 그대로 믿었겠지만, 막부까지 나서서 은근히 이를 부채질하고 있으니 카츠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자네, 밖에 나가서 빳다(버터)를 너무 많이 먹은 것 아닌가? 저들은 조선인이야. 붓만 잡고 살던 샌님들이라고. 다른 양인들이라면 모를까, 남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꿀 걸세.”

“그런데 코가 꿰이셨다니요?”

“이 와중에 저들이 내건 원안 이야기는 슬그머니 잊히고야 말았지만, 어쨌든 그 자립지국(自立之國) 구절이 결국 그대로 들어가게 되었다네. 협상을 길게 하는 것 자체가 지금으로서는 부담이니, 얼른 도장 찍고 저들 나라로 돌려보내고 싶으셨던 게지. 그리고 입단속 차원에서, 이 사람은 조만간 주(駐) 조선국 초대 공사로 부임하게 될 것이고.”

애초에 후쿠자와가 요코하마에 들려서 고향 오사카로 돌아가는 배편을 물색하고 있을 때 굳이 사람을 시켜서 불러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 지도 모르거늘 가기 전에 얼굴 한 번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교께서 떠나시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조선이 개화되어야 훗날 우리 일본도 열강의 틈바귀를 헤쳐나가 비상할 발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과정이 순탄하지는 못했지만 이 일로 우리도 조선과 소통할 명분이 생겼으니, 길게 보면 더 이로운 일 아닐까요?”

“그 전에 우리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조선 대신 미국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했잖은가. 자네도 알겠지. 그 동안 안세이(安政) 조약이 그토록 불리했음에도 우리가 오히려 교역으로 이익을 본 것은 생사 값으로 중간에 장난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이제 미국 상인들이 내지로 들어와서 명주실을 사 가고, 그 자리에 조선산 무명까지 들어온다?”

“그 전에 어떻게든 작금의 혼란을 마무리 짓고 조약을 재개정한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주군께서도 그럴 생각이시네. 이 일로 의민(義民)의 높은 뜻으로는 천하를 구하지 못함이 명백해졌으니, 원한을 올바름으로 갚는 마음으로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웅번을 때려잡자고 조만간 말씀을 내리실 거야. 미토 번 얼간이들은 저들 마음에 안 들면 난리를 피우지만, 적당히 경전 한두 구절 읊어주며 비위를 맞추어주면 또 순순히 따라오지 않던가.”

“어떻게든 적을 만들어서, 조선에게도 농락당하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자, 그런 것인가요. 이미 얼마 전 사건에서 그렇게 백성들의 공론으로 불장난을 했다가는 위험할 수 있음이 명백히 드러났건만···.”

그러나 그런 얄팍한 술수라도 지금처럼 민심이 어지러운 시점에서는 귀신같이 잘 먹히기 마련이다. 그렇잖아도 작년 패전 이후로 군제를 개편하면서 당장 코앞의 고산케(御三家)들조차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던 터. 이렇게라도 위기의식을 불피운다면 또 무언가 얻어낼 수 있는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내쳐짐을 당한 카츠 입장에서 알 바는 아니었다.

“하. 나는 모르겠네. 이제 자네들이 고민하게. 확실한 건 이거야. 조선 사절단이 내건 이름, 자네도 들었겠지?”

“예. 어쨌든 조규를 체결하고 사건도 어찌어찌 수습되었으니 그간 상했던 믿음을 고쳐낸 것은 맞지 않던가요?”

“글쎄, 원래 있던 믿음을 고쳐서 서로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으니 수신사(修信使)보다는 개신사(改信使)가 맞지 않을까 싶더군. 저놈들이 언젠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들 것이라 믿는 것도 믿음이라면 믿음 아닌가. 그냥 얕잡아보던 데서 마음을 고쳐먹어 숫제 맞먹으려 드는 괘씸한 놈들이라고 여기는 것도 믿음이라면 믿음이고.”

“후우... 갈 길이 멀군요.”

“뭐, 젊음이라는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조선 사절단 따라온 이노우에라는 친구도 여러모로 생각이 많았던 모양인데, 이 사람은 한 발 물러나 줄테니 자네들끼리 한 번 잘 해보게나! 하하하!”

그러나 카츠의 웃음에는 딱히 생기랄 것이 없었다. 후쿠자와도 따라서 웃기는 했지만, 과연 이 ‘새로운 믿음’이 일본에게 도움이 되기는 할까 싶어 마음 한 편에 걱정이 깃듦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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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직명을 옮길 때는 참 골치아픈 일이 있습니다. 모두 한자명 그대로 옮기자고 하면 대명(다이묘), 장군(쇼군) 등이 어색해지고, 모두 원음으로 옮기게 되면 카이군부교(해군봉행), 쇼리다이진(총리대신)이 이상해져 버리지요. 일관성의 결여는 그런 면에서 봐주시기 바랍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저런 할복 쇼가 있었습니다. 1868년 사카이 항에 입항하던 프랑스 해군 병사들이 내리자마자 도사 번 무사들이 일제히 공격해 열한 명을 살상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다른 프랑스 군인들이 도사 번의 깃발을 ‘모욕했다’는, 당사자 딴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요. 좌우지간 이에 대해 프랑스 측에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니, 당시 책임자였던 하급 지휘관과 몇몇 무사들이 단체로 프랑스 대표 앞에서 할복을 했습니다. 결국 충격을 받은 프랑스 대표 뒤프티-투아르 대령은 형을 중지하고 남은 이들을 사면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황당한 얘기지만, 문필가 겸 군인 모리 오가이에 의해 팩션으로도 쓰여 ‘미담’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원 역사에서 생사 팔이는 메이지 유신 초기의 자본 축적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1920년대까지 일본 총수출액의 40%를 차지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생사의 산업구조가 근대화되기 이전에 미국 상인들에게 시장이 노출되어 버렸습니다. 과연 어떤 파급효과를 몰고 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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