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37화 (37/320)

12. 믿음을 고치는 사절단 (2)

에도(江戶) 성이 손님 같은 주인과 진짜 손님을 맞이하여 북적였다. 평소 오바마(小濱)에 머무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교토의 조정 – 그리고 주변을 떠도는 수많은 낭인 – 의 눈을 피해 조선 사절단을 접견코자 에도로 내려온 덕이었다.

그러나 북적이는 것은 오직 성뿐, 나머지 저자는 백여 년 전 마지막 사절단이 왔을 때에 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하였다. 쇼군이 온갖 기이한 음식과 화려한 예식으로 세를 과시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 당부하였던 이노우에만 무안할 뿐이었다. 아마 어떻게 대응해도 패착이 될 테니 애초에 큰 이야깃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함이리라.

어쨌건 도착은 하였으니 오모테무키(表向)에서 가져온 국서를 봉정(奉呈)하고 예를 갖추었다. 그 뒤로는 막부 안에서 답변을 논의하는 동안 에도를 둘러보라는 요시노부의 ‘배려’가 있어, 전습대(傳習隊)의 사열을 받고, 육군소(陸軍所)를 방문하는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듯했다.

막부의 세를 과시하고 저 ‘시골 반란분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 설득하기 위함이리라. 작년의 패전 이래 절치부심하며 군제를 개편하고 있다는 막부다. 조슈 사나이이기 이전에 무사로서 무슨 병비를 하고 있는가 궁금도 하였지만, 어쨌건 조슈는 아직까지는 조적(朝敵). 군국의 형세를 바다 건너 조선인들에게만 엿보여주고 정작 같은 나라 사람인 저는 에도 성 한편에 ‘정중히’ 모셔두고 있음을 한탄할 따름이었다.

그러기를 며칠. 하루는 시종이 내온 차를 감상하고 있는데, 궁 안 사람과는 사뭇 다른 쿵쿵대는 발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발칵 열렸다.

“여어, 몸이 지금쯤이면 반토막 나 있을 줄 알았는데 용케도 붙여놓았군그래.”

누가 몇 년 전 자신이 칼 맞은 이야기로 기분 나쁜 농을 던지는가 하고 고개를 돌린 이노우에도 곧 상대를 알아보았기에 바로 응수하였다.

“네놈의 입도 아직은 잘 붙어있군. 하기야, 그 큰 입이 막히면 허풍은 어떻게 떨 건가.”

신센구미(新選組) 국장 곤도 이사미(近藤勇)였다. 원래라면 유신지사들을 막기 위해 교토에 있어야 할 그가 이곳 에도에 얼굴을 비춘 까닭은 무엇인가 싶었지만 물어보아도 답을 해 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와라. 네놈을 기다리는 분이 계신다.”

사면이 막힌 가마를 타고 후문으로 몰래 나와 한참을 갔다. 고향 조슈나 한동안 칼질을 하며 오가던 교토라면 모를까, 에도 지리는 익숙지 않았으므로 안에 앉아서는 도저히 어디로 가는 지를 알 길이 없었다.

가마에서 내리자 눈앞에 있는 것은 하타모토(旗本)쯤이나 될 법한 집안의 저택이었다. 곤도 놈이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더니, 정원 한구석에 다실(茶室)이 있고 등잔불에 인영이 어스름하니 문풍지에 비추었다.

“오, 왔는가. 몰래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아무래도 성 안에는 다다미에도 귀가 달렸으니 좀 그래서 말이야.”

다실 주인은 다름 아닌 카츠 카이슈(勝海舟). 작년 조슈와의 싸움에서 막부군이 사실상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그 뒷수습을 맡았기에, 이노우에에게도 친숙한 얼굴이었다. 또한 그 이전부터 고베(神戸)에 해군조련소를 세우고 좌막(佐幕)과 도막(倒幕)을 막론하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모두 가르쳤기에 막부에서는 의심을, 웅번 쪽에서는 조심스러운 존중을 보이는 거물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사츠마 촌놈들 사이에서는 뇌물을 거하게 바쳐 확실하게 전향케 하자는 멋모르는 소리까지 나올까.

“해군봉행(海軍奉行) 어르신을 뵙습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교토나 고베에 계시지 않고, 이곳 에도에 계시다니, 의외입니다.”

“하하, 무슨 일이겠는가. 자네가 조슈 구석탱이 대신 이곳 에도에 와서 졸지에 포로 생활 하는 것과 같은 연유지. 쇼군께서 조선인들을 상대하는 데 내 힘이 조금 필요하다 하시니, 주군을 모시는 자로서 어찌 거절하겠는가. 여기 곤도 군도 그래서 함께 데려온 것이고.”

시종이 차를 내왔다. 카츠가 턱짓을 하니 곤도도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시종과 함께 물러났다. 더운 하루도 저물 무렵, 정원에는 풀벌레가 조금씩 우짖기 시작했다.

“그래, 자네는 궁 안에만 있었으니 바깥소식에는 깜깜이겠지. 우리도 나름대로 조용하게 접객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우리 편에도 입 가벼운 이들이 많았던 것 같아. 금방 사신 얘기는 새어나가고. 살은 더 붙고. 심지어 어떤 놈들은 조선인들이 와서 우리가 저들에게 입조하라고 요구했다는 헛소문을 당당하게 글로 써서 퍼뜨리고 다니더군.

덕분에 올해는 이세 신궁 참배(お伊勢参り) 대신 난조(南上)가 유행이라네. 미토(水戶) 번사들은 물론이고 조금 여유 있다 싶은 영민들까지 총출동했어. 로주(老中)들이 고개를 내밀기만 하면 에워싸는 통에 도저히 저택 밖으로 나올 엄두들을 못 낸다지.

오랑캐를 오랑캐라 부르며 그 올바른 자리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감히 사과를 요구하는 조선인들을 모조리 참(斬)해야 한다. 당장 양선을 더 구매해서 웅번과 손을 잡고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못다한 일을 마쳐야 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들을 외쳐대니 여간 난리가 아니라네.”

넉살 좋아 보이던 카츠의 눈매에 돌연 날이 섰다. 뜻만 드높은 애송이를 겨우 면한 이노우에로서는 순간이나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자네들이 노리던 바인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되네. 어차피 나도 주군께서 잠깐이나마 믿어주셔서 이 일을 전임하고 있을 뿐. 요새는 교토든 에도든 내 편이 별로 없지. 어쭙잖게 숨길 생각 하지 말고 그대로 털어놓으면, 내 숨길 부분은 적당히 숨기고 보고하도록 하겠네.”

“허나 사실이 그러한데 무엇을 더 말씀드리겠습니까. 어차피 조선 사신들이 무도한 요구를 들고 왔으니 어떻게 처분하든 저희 쪽에게 불리한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에 그저 길안내를 자처하며 따라왔을 뿐입니다.”

“허,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한 인질이다, 이거로군. 거기에 더해서, 겸사겸사 조선 속사정도 조금 살피고, 우리 쪽 사정도 들여다볼 생각이었겠지. 맞지 않나?”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주는 게 있으면 우리도 받아가는 게 있어야겠지. 그래, 자네가 보니 조선인들은 어떤 것 같던가? 지금 우리로서도 저들이 왜 이런 요구를 지금 들고 나왔는지, 그 속뜻을 알지 못해 답답한 상황이란 말이지.”

지금까지 자신이 함께 배를 타고 오면서 전해 들은 내용 정도야 크게 중요하지 않을 듯하니 공유해주어도 될 성싶었다. 어쨌든 같이 황국을 위하는 입장 아닌가. 처음 조선인들의 도항 소식을 들었을 때 타카스기네 방에서 오갔던 얘기만 빼고, 정사(正使) 신 공과 주고받은 문답에 대해 얼추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어쨌건 속뜻은 정말 포목 장사뿐이라 이건가. 하긴, 붓만 잡고 살던 이들이니 아무래도 굳이 고르라면 칼보다는 돈을 택하겠지. 좌우지간 고맙네.”

경청하는 카츠를 보면서, 이노우에도 언뜻 이 일이 그럭저럭 잘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물론 막부가 곤란해지기를 기대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후임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웅번들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폭탄을 남겨놓고 가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협상해서 사신들을 돌려보내고, 조선인에게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막부의 체면이 조금 상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길을 가다 보면, 처음에는 험준해 보이던 고갯길이 막상 오르다 보면 의외로 잘 다져져 있어 수월하게 마루에 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외려 돌부리를 조심해야 한다. 삼가는 마음이 풀어져 발밑을 살핌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통상의 건이 잘 마무리되어 수호(修好)의 조항을 가다듬고 조만간 귀국할 생각에 젖어 있던 신헌 일행도, 조용히 일처리를 잘 해냈다고 여기던 막부 사람들도 그처럼 방심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라는 것의 뒷부분은 어차피 두 나라가 모두 통상의 이익을 기대하였으므로 쉽게 합의가 되었지만, 정작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조약문 첫 절에서 문제가 불거지고야 말았다.

반 연금상태인 이노우에에게도 들려오는 소식이 있었다. 첫 절에 카츠는 두 나라가 ‘자주국(自主之邦)으로 대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명시하기를 원하였는데, 상대방은 정색하며 조선과 일본은 모두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나라이며, 중국의 문명을 받아 일찍이 오랑캐 신세를 벗어났으니 자립(自立)할 뿐 자주(自主)하지는 않는다고 우겨대었다 했다.

그러니 그러잖아도 끓어오르는 여론이 더욱 비등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신속(臣屬)한 번국이 괘씸하게도 억지를 부린다고 헐뜯으며 당장 사절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는 건백서는 그나마 점잖은 축에 속했다.

“‘중화(中華)는 가장 빼어난 땅(首善之區)으로 만국(萬國)에서 찾아오므로’ 우리 일본도 중국에서 명(命) 받는 입장 아니냐니, 저잣거리에서 했다가는 자네 같이 의협심 높은 무리의 도움을 받아 그날로 염라(閻邏)와 상봉할 수 있을 법한 말이지.”

협상이 엉뚱한 데서 돌부리에 걸려 교착되어버리자, 대책을 마련한다며 또 자신의 집으로 이노우에를 부른 카츠였다.

“저들이 들고 온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성에 머물며 훑어보았더니 과연 그런 구절이 있기는 하더군요.”

“그걸 또 저 로주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했으니, 그 신 공이라는 사람도 어지간히 벽창호 아닌가. 그 치들이 지금 에도로 몰려들고 있는 골통들에게 이야기를 흘린다면 당장 천주(天誅) 운운하며 조선 사신의 목을 노릴 멍청이들이 적지 않게 나올 텐데···. 쯧쯧···.”

“그러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걸 얘기하자고 자네를 부른 것 아닌가. 잠시 자네가 웅번의 대표쯤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게. 이 조약은 말일세, 겉보기에는 평등하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아. 양날의 칼이라 이 말일세. 통상의 자유를 허용하면 당장에야 조선 면필이 들어오겠지만, 어차피 더 풍요로운 것은 우리 히노모토 땅이잖은가. 몇 년만 버티면 이 조약을 빌미로 자네 스승 같은 사람들이 외치던 정한(征韓)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게야.”

이노우에가 사절단에게 물어보았을 때도 비슷한 얘기가 있었다.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공장을 지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지금 각 번들이 마음만 먹으면 우격다짐으로 세우고 있는 화포 공장 대신 면사 공장을 세울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카츠도 필히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으리라.

“그런데 지금 주군께서는 돌대가리들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계신 거야. 차라리 명분을 세우려면 정말 지금 에도에 몰려든 멍청이들처럼 사절단 목을 모두 베고 전쟁을 선포해도 되겠지. 하지만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어리석은 백성들이 망령된 말을 한 데 대해서는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는 정도로 둘러대고 국서의 표현을 문제 삼아 정중히 돌려보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군.

자네도 생각해보게. 이 조약, 맺음이 가한가, 맺지 않음이 가한가? 지금 약간의 굴욕을 참지 않으면, 나중에 이런 조건을 얻기 위해 정말로 사생결단을 볼 각오를 하고 달려들어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허나 고민한들 답이 쉽게 나올까. 이노우에도 그렇고, 그의 동지들도 그렇고, 나라의 공론(公論)이란 항상 자신의 편이고 또 자신의 편이어야만 하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여겼다. 혹 어긋남이 있다면 계몽하고 또 칼로 다스리면 될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여론이 제가 홀로 발이 달려 미친 말처럼 주인을 내버려 두고 멀리 달려나가는 상황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군권을 장악해 언로를 틀어막고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입은 모두 막아버린다면 모를까. 아직은 어디를 둘러본들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 나도 무어라 답을 올려야 주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도 저도 아닌 방안으로는 도저히 나라에 득 될 게 없고. 그렇다고 멍청한 짓을 맨정신으로 할 수도 없고.”

“죄송합니다. 도움은커녕 폐만 끼쳤습니다.”

“자네인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신센구미 전력을 조금 데려왔는데, 어쩌면 곤도 국장이 애검을 꺼내들 때가 곧 올지도 모르겠어. 아이즈(會津)에서 낭인들이 대거 상경했다더군. 좌우지간 조심하게.”

무어라 미안하다는 말을 더 주워섬기고는 지난번처럼 사방을 가린 마차에 올라 성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앞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나는 아이즈에 그런 사람 있다고 알려진 오시마 기치노스케! 존황양이(尊皇攘夷)를 입에 담더니 감히 조선의 개가 되어 황국의 이름을 더럽힌 이노우에를 하늘을 대신해 처단하고자 여기 섰다!”

차고 있는 칼집에 손을 대며 발도를 준비하는데, 길잡이로 가던 곤도가 나서는 듯했다.

“이봐, 이노우에(井上)고 이노시타(井下)고 여긴 없다. 공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딴 데 가 보아라.”

“문답무용!”

“여기, 기이(紀伊) 사람 마츠모토 곤스케도 있다! 정의의 칼을 받아라!”

이대 일이라. 어지간히 급한 자객인 모양이었다. 허나 상대는 칼질 솜씨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신센구미의 국장. 싸움에 합세하려 휘장을 걷어 올렸을 때는 이미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다.

“너희 일당의 피만 묻힐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네놈 목을 붙여두기 위해 피를 흩뿌리다니. 코테츠(虎徹)도 참 별일이라 생각하겠군그래. 누가 보기 전에 도로 들어가라. 아마 누군가 네놈이 이리로 지나다닌다고 말을 흘렸을 거다.”

그때, 옆에 있던 무사 하나 – 아마도 같은 신센구미 소속이리라 – 가 자객의 시체를 뒤지더니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국장, 혈서로 된 연판장(連判狀)입니다. 꽤 여러 명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요?”

“뭐 다른 말은 안 쓰여 있나?”

“퍽 악필입니다. 하긴, 손가락을 베고서 썼으니까요. 어디... ‘지엄한 황국의 도리에 따라, 한날한시에 악흉(惡凶)을 쓸어 없앤다’라는데요?”

연판장에 ‘한날한시’라 쓰인 것이 영 께름칙했다. 이노우에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봐, 곤도. 오늘 조선 사절들에게 무슨 외유 일정이 있나?”

평소라면 퉁명스럽게 대답할 곤도였지만, 분위기를 읽을 줄은 알았다. 뭔가 중차대한 일임을 짐작하고서 순순히 대답했다.

“요코하마에 정박한 후지야마(富士山)를 견학하러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젠장! 이봐, 곤도. 문제가 되면 내가 나중에 배라도 가를 테니, 우선 요코하마로 가자! 이 놈들, 한날한시라고 했으니 조만간 조선 사절단 쪽에도 손을 쓰려고 할 거야!”

“그쪽에도 경호하는 자들이 있다. 전령만 보내도 될 텐데.”

“멍청한 놈! 네가 조선인이라면 자객이든 경호든 다 같은 일본인으로 보일 텐데 어떻게 믿겠나! 우선 낯익은 나라도 가서 뒷수습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잠깐 고민하던 곤도도 수긍했다. 다행히 카츠의 저택은 아카사카(赤阪), 아직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라도 어디서 구해서 전력으로 달리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법했다.

“네놈이 이런 재주라도 있어 다행이로군.”

곤도가 어디선가 재빨리 말을, 그것도 대여섯 필을 구해 온 덕에 다른 무사들까지 대동하여 4리 (일본 리. 약 16km)쯤 될 법한 길을 빠르게 주파할 수 있었다. 덕분에 후지야마에서 하선해 부두에 막 내린 사절단을 노린 자객을 제때 막을 수 있었으니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칼부림에 서장관 민 모라는 자가 혼절하여, 그가 깨기를 기다리다 보니, 이미 저물던 해가 거의 이세야마(伊勢山) 아래로 잠기고 있었다. 그 사이 성에서도 사람이 나와 상황을 정리하고, 경호 담당자라는 머리 허연 노인은 보기가 안쓰러울 만큼 맨바닥에서 도게자(土下座)를 하였다.

“이봐, 곤도.”

“또 왜 그러는가?”

“그 연판장 말야... 아무래도 우리가 잡은 놈들의 머릿수보다 서명된 이름이 더 많았던 것 같지 않나?”

“음,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은데...?”

그리고 그때, 슬슬 어둠이 내려앉아 물도 하늘도 캄캄한 바닷가에 갑자기 불꽃이 일었다. 작은 쪽배 서너 척이 선창에 불을 지른 채, 정박한 양선 하나에 근접하고 있었다.

“엇! 셔먼 호가!”

멀리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배 위에서도 늦게나마 다가오는 쪽배를 보았는지 우왕좌왕. 총질하는 소리가 들리는 법도 했다.

그러나 그러든 말든 이미 불에 선체 대부분이 삼켜진 쪽배는 그대로 배 우현을 들이받았다. 이윽고 이물 근방에 한 척이 더 들이받았고, 사공이 총에 맞았는지 잠시 방황하던 나머지 쪽배 한 척도 고물 근처에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기름을 실은 것일까? 화약만큼의 폭발은 아니었지만, 곧 배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구명정 여럿이 해수면에 닿았지만, 배 근방에서 물보라가 이는 것이 모두 승선하지는 못한 듯했다.

모두가 넋이 나가 참화의 현장을 바라보는데, 좌중의 누군가가 하이쿠 한 소절을 읊었다.

“안타깝도다.

불꽃놀이 끝나고

흩날리는 별.”

--- *** ---

마지막 하이쿠는 메이지 시기의 작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것을 모작하였습니다 (淋しさや / 花火のあとの / 星の飛ぶ).

난조(南上)란 일본 국학의 중심지였던 미토 번의 주민들이 에도로 몰려가 집단으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의견을 제출하는 행위였습니다. 각 번 사이의 이동의 자유를 원칙상으로 허가하지 않던 에도 막부에서 이는 적잖은 정치적 함의를 지닌 움직임이었습니다. 미토 번이 도쿄의 북쪽(오늘날의 이바라키 현)에 위치하기에 ‘남쪽(으로의) 상경’이 됩니다.

1829년 최초의 난조는 참가자 대부분이 번사들이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중하급무사, 심지어 상류층 영민들까지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수적 우위를 활용, 카고웃타에(籠訴)라 하여 막부 내에서 쇼군의 최측근 (그리고 막말에는 사실상 정권 수뇌부)였던 로주 이하 중신들의 앞뒤를 포위하고 떼로 호소하는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반대파에 대한 암살과 협박을 위주로 하는 테러는 메이지 유신 전부터 빈번하게 발생해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치의 고질병이 되어버립니다. 1860년, 안세이 대옥의 책임자 이이 나오스케를 궐문 밖에서 암살한 것이라든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의 ‘지사’들이 저지른 영국 공사관 방화라든지, 사례를 들자면 한없이 들 수 있지요.

한편, 개화기 조선 외교정책에 있어 수구와 개화를 막론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책인 『만국공법』은 1864년 청의 동문관(同文館)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작중 시점에서는 따끈따끈한 신간인 셈인데, 박규수가 원 역사와 달리 1865년에 연행을 가면서 바로 수입해온 것이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만국공법』은 미국 법학자 휘튼(Henry Wheaton)이 쓴 국제법 전공서를 번역한 책인데, 그 출간 목적은 중화질서와 국제법이 병존 (물론 실제로는 중화질서의 국제법에 대한 우위에 가깝습니다만)할 수 있음을 역설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같은 속국(藩屬)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주권국과 동등하게 외교를 펼칠 수 있습니다. 같은 오스만 투르크령이라 하더라도 알제리처럼 독자적으로 조약을 맺을 수 있는 경우도, 이집트나 세르비아처럼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 작중에 등장한 후지야마 함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별 실속은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1866년 겨울 막부 측에 인도되었으니 최신은 맞습니다만, 정작 1868년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막부 해군의 실속만 건져서 홋카이도로 도주할 때 후지야마는 놓고 갔거든요.

여담으로, 중간에 낭인 (가상 인물입니다) 이 외치는 ‘문답무용’은 일본에서만 쓰이는 숙어입니다. 아마도 일본 문화가 유입되면서 사자성어로 함께 퍼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작중에서는 일본인이 하는 말이니 전혀 문제될 소지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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