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36화 (36/320)

12. 믿음을 고치는 사절단 (1)

때는 바야흐로 게이오(慶應) 3년 (1867) 초여름.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기이한 깃발을 세운 양선 한 척이 기항하였다. 분큐(文久) 연간 이래 양이들이 조슈(長州)의 앞바다를 저들 마음대로 오가는 것이 결코 새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바다 건너 조선인들이 양인의 배를 빌려 건너왔기에 가히 미증유의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허어, 이제는 조선인들도 신주(神州)를 노린다는 말인가?”

“사정을 알아봐야겠지요. 어쩌면 간만에 조공을 바치러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조만간 기도(木戸) 선배께서도 오실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기껏 조공을 바친다 한들 어전(御前)으로 나아가는 대신 저 막부 놈들에게 고개를 조아릴 것 아닌가? 황국의 앞날에 도움은 안 될 듯한데.”

다다미 열두 첩(약 20㎡)을 조금 넘길까 싶은 조그만 방에 환자 한 명과 칼 찬 사내 셋이 모이니 방이 꽉 찬 듯했다. 술집 주인 하야시의 집에 신세 지고 있는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는 결핵이 이미 말기에 이르러 병석에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선배의 애첩 오우노를 내보내고 대신 병구완하고 있는 후배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한 사람, 마침 병문안을 온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한 사람, 그리고 조선인들의 도항(渡航) 소식을 먼저 전하고자 달려온 막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또 한 사람이었다.

“조선에 요새 무슨 일이 있기는 하다고 짐작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무슨 얘기인가?”

야마가타의 혼잣말에 이노우에가 물었다.

“작년 즈음부터일 겁니다. 조선에서 건너오는 인삼 물량이 확 늘었어요. 값이 헐해지니 타카스기 선배에게 약을 지어드릴 여유도 생겼고요. 처음에는 쓰시마 놈들이 갑자기 수완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당(唐)나라로 인삼을 밀수하던 뱃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서 판로를 찾아 조선의 동래현까지 왔다고 하더군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아래에서 공부한 선후배이자 작년의 전쟁(제2차 조슈 정벌)에서 함께 싸운 전우이기도 하다. 특히 타카스기의 뒤를 이어 기병대(奇兵隊)를 이어받은 야마가타는 더욱 타카스기를 각별히 생각하였다.

“재작년에 개항을 하면서 해안 단속을 강화했다더니, 그 때문인 모양이로군. 그나저나 약효는 영 없는 것 같은데, 처음에는 좀 좋아지는 듯하더니만 지금 보니 그대로군. 우메노스케(梅之助. 신사쿠의 가명 겸 별명). 좀 어떤가?”

입만 열면 가래와 피가 나와 좀처럼 말을 아끼는 타카스기가 야마가타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용하다는 고려삼으로도 안 되는 걸 보니 신불(神佛)이 내려와도 고쳐주지는 못할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때, 쿵쿵 하는 발자국 소리가 울리더니 곧 미닫이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쇼인의 문하생 중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아직까지는) 우두머리 노릇하고 있는 이다. 야마가타가 부축해주어 타카스기도 잠시 몸을 일으키고, 다른 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아마 이토가 전해주었겠지만, 입항한 배는 조선인들이 빌린 것이 맞네. 원래는 아메리카의 무장 상선이라고 하고, 배 이름은 제너럴 셔먼이라고 한다는데, 언뜻 항구에서 보니까 양이 군함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분큐 연간의 싸움으로 가라앉은 우리 쪽 배들보다는 크더군.”

“혹시 호레키(寶曆) 연간에 왔던 자들처럼 에도로 조공을 올리러 가는 무리들입니까?”

이노우에가 일동을 대신해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네. 그때는 이름을 통신사(通信使)라 하였지만 이제는 수신사(修信使)로 이름을 바꾸었더군.”

“‘믿음을 고친다’라, 멋대로 조공을 멈춘 건 저들일 텐데 퍽 거만하군요.”

“음, 실은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 잘들 들어보게나.”

기도의 설명에 좌중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일의 시작은 올 3월, 청국이 조선 조정에 보낸 서한이었다고 한다. 요 몇 년 사이 직접 서양 나라들과 접촉하기 어려운 번의 야심찬 젊은이들이 대신 청국에 유학을 가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그런 이들 중 야도 마사요시(八戸順叔)라는 자가 있어 광동(廣東)의 한 신문에 이렇게 기고한 것이다.

‘조선 국왕이 5년마다 반드시 에도에 가서 대군을 배알하고 공물을 바침이 옛 규례였다. 그런데 조선 국왕이 이 규례를 멋대로 폐한지 오래이니, 일본국에서는 화륜선(火輪船)을 구매하고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추궁하려 한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무고(誣告)라 여기어 청국에 호소하는 한편, 그런 망령된 말로 두 나라의 신의를 해치는 자들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촉구하고자 이번에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공식적인 내용이고, 쓰시마 쪽에서 전해온 내막은 또 따로 있네. 정리하면, 저들 땅에서 나는 면화의 품질이 좋으니, 이 기회에 자유로운 통상을 빌미삼아 황국의 부를 빼앗겠다는 것이야.”

이른바 공목(公木)이라 하여, 사츠마에서 사들인 흑각이나 구리 따위를 넘기고 무명베를 받아오는 것이 궁벽한 섬인 쓰시마가 입에 풀칠하는 방도였다. 물론 지난 수십 년간 품질 좋은 면필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그 대신 인삼이나 쌀(公作米) 등을 대신 넘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화 작황이 괜찮을 때면 바다 너머로 옮겨 파는 것만으로도 짭짤하게 재미를 볼 수 있었으므로 포목은 여전히 선호되는 상품이었다.

그런데 공기가 예상보다 단축되어 올 봄에 인천에서 조업을 시작한 방적공장이 문제였다. 조선 조정에서 외국인 고문들을 고용해 계산해보니, 아직은 영세한 조선의 내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생산량이 나왔다고 한다.

굳이 승수 낮은 수제 포목의 수요까지 모두 대체해 국내에서 길쌈하는 여인들의 밥줄을 빼앗느니, 우선 해외 판로를 알아보아 국부에 보태고자 가까운 일본 땅에 왔다는 것이다.

“허, 그런 안쪽 사정까지 모두 알아채다니, 쓰시마 그 조그만 섬에 신통한 닌자가 있을 리는 없고, 조선 관리들의 기강이 많이 해이한 모양입니다.”

말석-이 좁은 방에 ‘말석’이 있기는 하겠냐만-에서 가만히 듣던 이토가 농을 던졌다.

“그야 예전부터 알던 일 아닌가. 아무리 조정에서 신법을 펼친다 한들 하루아침에 나라 전체가 일신될 수는 없는 법이지. 우리 히노모토도 아마 우리 번을 벗어나면 그런 머저리와 얼간이 천지일 것이야.”

“그보다 저들을 어찌 대할지가 더 큰 문제일 듯합니다. 만일 저 자들이 이대로 에도까지 가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에도의 불충한 무리들이 막부의 명분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게 될 텐데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일전에 스승으로부터 배우기를, 조선국왕은 쇼군을 ‘타이쿤(大君)’이라 부르면서 유일한 교섭의 상대로 삼았다고 했다. 쇼군도 이를 알았기에, 거금을 흩뿌려가며 조선의 사절이 올 때마다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작년 큰 싸움에서 막부군을 거하게 물리쳐 천하에 조슈 사나이들의 무명(武名)을 널리 떨쳤다. 그리고 올해는 만약 교토에서의 일이 잘 풀린다면 감히 공무합체(公武合體)를 운운하는 황국의 걸림돌들을 모두 치워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지사들이 함께 내건 토막(討幕)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국에 조선이라는 뜻밖의 변수가 나타났은즉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환자 타카스기까지 모두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꾀죄죄한 방에 모여 있어서 그렇지, 이 젊은이들은 밖에서는 조슈 번의 실세로 자부하는 자들이다. 이곳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작게는 번의 앞날, 크게는 일본 66주의 미래까지 좌우할 수도 있었다.

“저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쇼군 대신 조정과 교섭하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말이 조정이지, 실제로는 우리가 우선 교섭에 나서고 나중에 대죄해야 하겠지만요.”

“나라 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다고 둘러대어 우선 돌아가게 만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조선인들의 일처리는 굼뜨다 했습니다. 저들이 사정을 깨닫고 다시 사절을 보내기 전까지는 대의를 이룰 수 있겠지요.”

좌장 격인 기도가 생각에 빠지자, 다들 한 마디씩 생각하는 바를 내놓았다. 그러나 말을 꺼내어도 기도가 호응하는 낯빛 없이 계속 사색에 빠져 있으니 방 안이 절로 숙연해졌다.

다시 객혈을 한탕 한 타카스기가 입을 열었다. 병색 완연한 목소리였지만 조용한 방이었기에 마치 함께 싸움터를 달렸을 때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에도로 가게... 내버려 둡시다.”

스승으로부터 문하생 중에서도 가장 총기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타카스기다. 무슨 빼어난 계책일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귀가 큰 야마가타는 정말로 제 귀를 쫑긋 세웠다.

“지금 조정이 조선과 대등하게 교섭하게 되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니 우리도 속국과 같은 급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날 일본 땅에서 식자를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진구황후의 원정 이래 삼한 땅이 일본에 복속되었음을 알고 있다. 입장의 차이가 있다면 노국(러시아)을 막기 위한 기반으로 삼기 위해 조선을 병탄해야 하느냐, 아니면 잘 구슬려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리라.

그런데 오늘날 서양 각국의 법도는 조약을 정하면 이를 만방에 공표하게 되어 있다. 마치 그 옛날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가 했던 것처럼 안에서는 조정의 신하, 밖으로는 일본의 국왕을 자처했다가는 스스로 조적(朝敵)임을 입증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어차피 막부는... 오래 못 갑니다. 제 무덤을 파게 만들고 나중에 토막의 기의가 완수되면 힘으로 조선과의 약조를 고치면 될 일입니다...”

물론 새로 쇼군에 오른 너구리 요시노부(徳川慶喜)도 이를 모를 리 없다. 아마 화려한 예식으로 어리석은 대중의 눈을 가리고, 복잡한 수사로 포장해서 조선과 수호(修好)한 공적을 내세우고 문제될 소지는 감추어 없애려 할 것이다.

“역시 타카스기 선배님이십니다! 잉기리스에서는 이런 걸 ‘독이 든 사과’라고 하더군요. 단 걸 좋아하는 너구리가 베어 물지 않을 리 없지요!”

다들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계산하고 있는데 이토가 나서서 타카스기를 띄워주었다.

“하지만 요시노부도 바보는 아니야. 게다가 지금 저들이 먼저 시모노세키에 기항했으니, 우리가 무언가 손을 써두었으리라 의심할 테지.”

물론 뒤이은 기도의 지적에 다시 조용해졌지만.

요시노부의 입장에서도 댈 수 있는 핑계는 널렸다. 조선 사절단이 찾아온 명목은 ‘조선을 무고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함이니, 그 책임을 돌려서 나라가 살아날 길을 논하고자 정한(征韓)을 입에 담은 웅번의 지사들을 지목할 수도 있다.

“그러면... 보이는 곳에 손을 대어놓으면 되지요. 아예 우리 쪽 사람 한 명을 붙여서 에도에 함께 보내면 되겠지요... 적당히 나라를 위해 칼을 멈춘다는 핑계를 대고요...”

“아, 과연!”

어쨌든 조선 사절단이 조슈에 먼저 들린 것은 사실이니, 길안내를 겸해 누군가 한 명쯤 따라붙는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나라를 위해’ 외세와 모의하거나 막부를 음해하는 대신 사절단을 도와 뜻한 바를 이루도록 돕는다. 이런 명분을 당당하게 내세우면서 타협의 손을 내미는 시늉을 했는데 판을 집어치운다면, 조슈, 나아가 웅번 전체의 체면을 건드리는 꼴이 된다.

힘의 균형이 웅번 쪽에 기울고 있음은 이미 작년 싸움의 결과로 드러난 바 있다.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요시노부는 함정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좋은 생각이네. 허나 아직 공식적으로 우리가 조적 혐의를 벗지 못했으니, 작년 싸움에 직접 나섰던 슌스케(이토)를 보내기는 곤란할 테고, 야마가타는 기병대를 이끌어야 하니 안 되지. 그러면 이노우에, 자네는 어떤가?”

말이 권유지 실은 지시다. 분큐(文久) 원년 막부의 자객들에게 크게 다친 이래로 상처가 덧날까 두려워 갑주를 차려입지 못하는 이노우에다. 어차피 전장에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언제고 다시 붙을 수 있는 싸움의 불꽃을 생각하면 그가 나섬이 가장 나았다.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궁금함도 있었다. 타카스기야 병석에 누운지 꽤 되었으니 소식에 어두울 법도 하고, 기도도, 야마가타도, 하다못해 이토도 모두 무(武)의 일로 바빠 그 사이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오롯이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츠마와 도사를 오가며 자연스레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던 이노우에는 들어서 알게 되었다. 작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칙허를 받은 안세이(安政) 5개국 조약과 조선이 프랑스와 맺었다는 조약을 보면, 아무리 고쳐보아도 조선이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양인들과 협상을 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워낙 물산이 빈궁한 나라이므로, 그저 뜯어낼 것이 없어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봐 주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었다. 아마 자신의 동료들도 열에 아홉은 그렇게 여기고 그냥 지나쳤으리라.

하지만 요코하마로 돌아온 프랑스 제독이 했다는 말이 영 께름칙했다.

분명 조선은 강력한 군대를 가진 나라로, 상륙하는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맹렬히 맞서 싸웠다고 했다. 문약하기로 유명한 조선이 프랑스군을 과연 막아낸 것이 맞기는 할까 싶어 의문을 품었지만, 또 생각해보니 저 오만한 프랑스인들이 헛되이 상대를 강력하다고 띄워줄 자들은 아닌 듯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서양의 배를 몰고 찾아온 것은 조선이었다. 그 반대가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달랐을까? 분명 자신들이 먼저 개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먼저 찾아온 까닭은 무엇인가? 그저 시운(時運)을 잘 만난 탓이었을까? 이노우에는 어쩌면 조선 사절단과 함께 에도로 가는 길에 이 수수께끼 같은 나라의 진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었다.

한편, 조선 사절단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을축양요에서 외인들과 교섭한 경험이 있는 신헌이 다시 한 번 정사로 나섰다. 신헌은 다시 변경에서 교역하는 업무를 다룬 적이 있는 전 의주부윤 윤자승(尹滋承)을 추천하여 부사로 대동하고 왔다.

그리하여 신헌이 이끄는 조선 사절단이 이노우에의 ‘인도’를 받으며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요코하마에 입항하게 되었으니, 귀남의 원 세상에서 찾아온 객이 있었더라면 이 상황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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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계급 외에도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끌여들여 기병대를 조직한 타카스기 신사쿠는, 원 역사에서는 1867년 5월 오랜 지병이었던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물론 인삼이 정말 결핵에 효과가 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일시적으로 활력을 북돋아준 정도에 불과합니다. 집에서 따라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너럴 셔먼 호의 제원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박규수가 보고한 사망자의 수를 보면 20명 전후에 불과하여 소형선처럼 보이지만, 그 전에 문정한 바를 보면 돛대가 둘 달려 있고 갑판에 큼직한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최소한 원 역사에서의 운요호 이상은 되는 듯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글 앞머리에 언급되는 야도 마사요시의 글은 원 역사에서도 1867년 3월 청나라 예부에서 조선으로 전해져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쓰시마 쪽을 통해 막부에 항의의 뜻을 전할 것을 청하고, 이후 강화도 조약 체결시에도 이 책임을 물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을 멸시하는 풍조는 작중에 묘사된 것처럼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18세기 이후 일본 국학 전체의 경향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한론이 등장한 것도 결코 이상하지 않지요. 인접한 국가를 깎아내려 자국을 드높일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의 한 가지 안타까운 특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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