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는다 (2)
미시(未時)에 전동 집을 나선 가형은 의외로 빨리 돌아와, 아직 박명(薄明)이 노고산 자락에 남아 있었다. 울고불고 하다 지쳐 쓰러진 김병기(金炳基)를 달래어 집으로 보내느라 진이 다 빠진 김병국이 형 병학을 건조하게 맞이했다.
“돌아오셨습니까, 형님.”
“오냐. 우리 부덕한 형님께서는 돌아가신 모양이구나.”
“예, 한 두어 각쯤 되었을 겁니다.”
“참, 아무리 비정한 대원위와 환재 대감이라지만 설마 올해 겨우 관례를 올린 아이를 바다 너머로 보낼까. 그쪽도 걱정이 팔자란 말이지. 뒤치다꺼리 하느라 시장할 텐데 다과상이라도 내오라 해야겠다.”
옥천군수로 외직(外職) 생활을 마치고 도로 상경하자마자, 유홍기와 사제의 연이 있는 어린 양아들 김옥균이 바다 너머로 끌려갈 지도 모른다는 풍문을 듣고 대경실색해 찾아온 김병기였다. 게다가 그 뜬소문에 혹한 김옥균이 수양아비 속은 알아주지도 않고 짐을 싼다, 스승 유홍기에게서 양서(洋書)라도 미리 빌려 보겠다 법석을 떨었다 하니, 그 찢어지는 심경이 이해는 되었다.
집안의 못난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병학·병국의 손윗사람인지라, 영락없이 붙잡혀서 하소연하는 것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제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가 끊기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사정하다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덕에 겨우 병학이 모화관을 다녀올 짬이 났다.
종복에게 이야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차려진 다과상이 놓였다.
“뜻하신 바는 모두 이루고 오셨습니까?”
“그래, 흠차대신 대인을 뵙고, 권신들이 대국 몰래 양이들에게 사절을 보내 결탁하려 한다 얘기하고 왔단다.”
두 사람이 알기로 아직 청국에서 구주(歐洲) 땅에 사절을 파견한 일은 없다. 대국으로서 내빙하는 외인들을 맞이한다면 모를까, 먼저 찾아갈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대인 성정에는 바로 입궐하여 결판을 보겠다 이러시지는 않았을 성싶습니다만, 무어라 하시던가요?”
“바로는 아니지만 조만간 입궐하겠다 답하시더라. 화이(華夷)의 구분이 어쨌건 소국이 대국의 번신(藩臣)으로서 함부로 바깥과 사귐은 예가 아니지 않더냐.”
그런데 병학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병국은 반색하기는커녕 도리어 한숨을 푹 쉬었다.
“형님, 실은 오늘 찾아온 까닭이 그 일 때문이었습니다. 하필 소란스러운 일이 생겨서 출타하시기 전에 말씀드리지는 못했습니다만...”
몇몇 집안 어르신들이 사람됨이 경망스럽다고 책망하는 동생 병국이 까불대기는커녕 진지하게 서두를 떼니 병학도 동생의 마음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사절단 무리에 끼어 감을 허여(許與)해주시기를 청하고자 했습니다. 만일 마 대인 덕에 이 일이 유야무야된다면 모를까, 혹 그렇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 부족한 동생도 바깥세상을 보고 와도 될는지요.”
“무어라? 네가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혹 주상의 뜻이 확고하다 할지라도, 그저 다른 문중 사람들을 보내어 머릿수만 채우면 될 일이다. 어찌 이역만리 고생길을 사서 하려 하느냐? 만약 길고 긴 여로에 안타까운 일이라도 생기면 네 형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병국은 입을 몇 차례 열고 닫더니, 마음을 굳게 하고서 형을 타일렀다.
“형님,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하옥 대감께서 졸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어찌 잊겠느냐.”
“‘문중을 위함이 나라를 위함이요, 나라를 위함은 문중을 위함’이라 하셨지요. 우리 집안이 명신(名臣)을 낸 것 외에 다른 문벌의 사람들과 견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풍양 조문은 서학쟁이들과 요 근래 더 가깝게 굴고 있고, 반남 박문은 환재 대감이 있으니 두말할 것도 없으며, 하다못해 저 못난 여흥 민문도 깊고도 깊은 은혜를 입었지 않습니까.”
올해 부쩍 쇠약해져 결국 병상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 김좌근이 남긴 말이었다. 물론 세도가의 전횡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헛소리냐고 따져 물었겠지만, 적어도 김문 사람에게는 심금을 울리는 바 있었다. 적어도 이들이 보기에, 그간 나라가 어지러웠음에도 여태껏 종실이 보존된 것은 나라의 중심을 자신들이 지켰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품었으므로, 대원군과 박규수에 비벼볼 만한 위세를 되찾을 마지막 기회였던 국혼마저 좌절된 지금, 명문가 중진과 자제들을 모아 해외로 보내겠다 하는 작금의 상황을 예사로이 넘길 수 없었다. 이 사절단이 파견되면 이를 전례삼아 지체 높은 집안 사람들을 차례로 바다 밖에 보낼 것이요, 나아가서는 『만국공법』 운운하며 아예 ‘상주하는 사절’이라며 돌아오지도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온 명문가들이 인질을 잡힌 격이 되어 침묵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대원군과 박규수를 견제할 수 있는 이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될 것인가. 마치 그 옛날 어질지 못한 임금을 충동질해 폐모살제(廢母殺弟)케 했던 북인들처럼 나라에 파국을 몰고 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 이대로 가면 온 나라가 그저 대원군과 환재 대감 두 사람 손에 놀아나게 되겠지. 그래서 오랑캐에게 국사(國事)를 말하였다고 후대에 손가락질 받을 것을 각오하고 오늘 모화관을 다녀왔지 않더냐.”
“송구합니다만, 이 어리석은 아우가 보기에 나라의 문호를 다시 닫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청국에서 아조가 양이와 서로 통함을 막고자 하였더라면, 진작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저 풍양 조문 놈들처럼 상고(商賈) 되기를 자처하여 가산을 처분해 제물포에 공방이나 차리자는 것이냐?
다시 생각해보아라. 지금 청국은 양이들의 화포와 선박을 들여오고 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손 놓고 방관하고 있다지만, 저들이 군병(軍兵)의 예리함을 되찾는다면 가장 가까운 번국부터 손대려 하지 않겠느냐? 지금 대원군과 통리아문의 어리석은 무리들이 나라를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고 가고 있는데 그 놀음에 함께 어울려준다면 나라와 집안 모두에 화를 몰고 올 뿐이다.”
지방의 산림들마저도 반절은 이항로의 눈치를 보고 나머지 반절은 자기들끼리 서원을 차려 다투느라 정신이 없는 지금, 모든 명문거족들이 한데 뭉쳐야 겨우 대원군과 박규수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주상의 총애를 입고 있는 저들에게 가장 먼저 표적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나설 각오를 하는 집안이 아직껏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쯤 다른 집안들도 이 소문 뒤의 진상을 알아본다던가, 문중의 모든 선비를 동원해 연명으로 상소한다던가 할 궁리 대신 누구를 뽑아 보내야 가장 빈자리가 작을까 고민하고 있을 터이다.
그때 다른 사람도 아닌 김문의 실세 김병국이 앞장서서 파견되기를 청하면 어찌 되겠는가. 마침내 김문이 운현궁의 편에 서기로 했다고 여기리라. 그렇게 되면 개화라는 호랑이를 가로막기는커녕 대원군과 함께 그 등에 올라타는 격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그 전에 우리가 나서서 이 나라가 나아갈 길을 물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왕 양이들과 통교하였으니 이를 무를 수는 없습니다. 저 옥균이 같은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개화당이 그렇게 꼬여낸 명문의 자제가 한둘이겠습니까? 저들을 고스란히 환재의 손에 넘겨주어야 하겠습니까?”
“아우야, 말이 지나치다. 이미 날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생각해보자꾸나.”
그러나 한 번 열의를 뜬 병국의 말을 멈추지는 못했다.
“우리가 만일 이 대세를 끝까지 거스른다 한들, 뒤를 이을 아이들이 우리를 물정 어두운 뒷방 늙은이 취급하며 손바닥 뒤집듯 저들의 편에 붙어버린다면 그간 들인 공력과 정성이 모두 공(空)으로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형님, 부디 길게 생각해주십시오.”
“그만하자 하지 않았느냐!”
진중한 성격의 형이 끝내 목소리를 높이고야 말았다. 깜짝 놀란 병국은 그저 형의 낯을 살필 뿐이었다.
“우리 집안은 문정공(文正公. 김상헌) 이래 설령 성은을 입지 못하더라도 나라의 가운데를 지킴을 자랑으로 삼아 여기까지 왔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은 가문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도 있는 것이야. 너도 이제 나이가 불혹을 넘긴지 두 해가 되었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예, 형님. 아우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목청을 높여 미안하구나.”
그러나 동생은 자신의 생각이 전혀 짧지 않다고 여기고, 형은 자신의 목청을 높이도록 한 동생의 완고함을 원망하였으니, 비록 서로 사과하고서 곧장 자리를 파하기는 했지만 앙금은 그대로 남았다.
아무리 도성과 성저십리를 통틀어 손에 흙 안 묻히고 사는 이들이 열에 여덟은 족히 된다지만, 그 중 역관 노릇 하는 이들은 가문 대대로 직분을 전해 받는 사람들이니 수효가 많지 않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요새 숭앙받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오경석이다.
올봄 경장과 더불어 성상이 ‘세귀지풍(世貴之風)’을 장차 폐지하여 나라에 도움 될 사람들은 한미하고 비천한 집안이라도 모두 재주를 펼 수 있게 하겠다는 윤음을 내렸을 때만 하더라도, 역관들은 모두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통리아문이 세워지고, 그저 낭청(郎廳) 자리나 하나 얻으리라 여겼던 오경석이 교린사(交隣司)와 어학사(語學司) 당상(堂上)을 겸하며 사실상 총리의 오른팔이 되니 마침내 우리 세상이 되었다 하며 기를 펼 법도 하였다.
조만간 사행길 팔포(八包)팔이보다 더 좋은 벌이가 제물포에 많이 생기리라 귀띔해주어 여러 역관 집안들이 단번에 가세 펴게 만들어준 것도 오경석이요, 통리아문의 실무직 자리에 자신이 가르친 이들로 능력 있는 이들을 여럿 천거하여 벼슬길을 널리 열어준 것도 오경석이었다.
그러니 김병학이 아무리 입 무거운 이를 수소문해 통변을 맡겼다 해도, 저녁 무렵 모화관에서 오간 이야기가 인정 칠 즈음이면 오경석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야 김병학이 건네준 거금을 받고서 입을 싹 씻었겠지만, 개화당이 언급되고 여차하면 오경석까지 걸려 넘어갈 만한 사안인 듯하였은즉 도성 바닥에 역관으로서 발붙이고 살기 위해서는 오경석에게 자초지종을 고하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내와 간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 했던 오경석은 잠시 언짢아했지만, 내막을 듣자마자 바로 의관을 갖추고 바로 박규수의 집에 찾아가 자신이 들은 바를 그대로 전했다.
“마 대인은 움직이지 않을 걸세.”
잠시 고심하던 박규수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장동 사람들이 사행(使行)에 자신의 사람을 심지 않은 것도 꽤 되었지 않은가. 그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무슨 말씀이신...? 아, 과연 그렇군요.”
말뜻을 헤아리던 오경석도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작년, 공친왕이 빈춘(斌椿)을 보내 양이의 사정을 정탐케 한 일이 있었다, 청국 조정의 인가를 받은 공식 사절은 아니었으니 김병학으로서는 설령 이 일을 알고 있을지라도 겉으로 내세운 핑계인 유학생 인솔 외에 속사정이 있을 줄은 짐작치 못하고 있을 터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지금 총기 넘치는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저들 땅에 보내는 것 아닌가? 대국의 전례를 본받을 뿐이라고 둘러대면 설령 마 대인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더 문제 삼지는 못할 것이야. 게다가 마 대인은 비록 성품이 선량하고 소탈하기는 하되 그리 노활하지는 못하니 충분히 이 늙은이와 대원위 대감이 상대하고도 남음이 있을 터.”
한 숨 돌린 오경석이 다음 화제를 꺼냈다.
“그리하면 장동 김문에 대해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대국의 흠차대신이라 하나 어쨌건 나랏일을 사사로이 발설한 것 아닙니까?”
“그야 당연히 처분이 있어야 하겠지.”
“처분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습니까. 그저 물러나 더 이상 정국에 끼어들지 말 것을 넌지시 종용할 수도 있겠지만, 아예 조정에 공론을 조성하여 멸문케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은 아무래도 저보다는 대치(유홍기)가 더 잘 꾸밀 수 있겠습니다만.”
확실히 이 일은 굳이 꼬투리를 잡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듯했다. 애초에 장동 김문이 한창 세도를 부리던 시절에는 더한 일도 많지 않았던가. 하다못해 임술년(1862)에는 있지도 않은 사람을 만들어내 이항로와 함께 역모를 꾸몄다고 무함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마신이를 잘 설득해, 말을 더 그럴듯하게 맞추면 단순히 대간들을 시켜 탄핵하는 정도를 넘어 역모 고변까지도 그럴듯하게 자아낼 수도 있을 법했다.
“가벼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군그래. 밤이 늦었으니 우선 살펴 돌아가도록 하게. 어쨌건 이 일로 나라와 우리 당의 발목을 잡을 만한 소지를 없앨 수 있게 되었으니, 다 역매 그대의 공일세.”
“하하, 모두 성상께서 어진 정사를 펼쳐주시고 또 대감께서 그간 살펴주신 덕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만 하직인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경석 앞에서 보여준 얼굴과 달리 박규수의 마음속은 그리 평온하지 못했다. 이불 펴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환국에 참여하면서 손을 더럽힐 각오를 한 박규수였다. 앞으로 개화의 길을 밟아나간다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훼방을 놓으려는 무리들이 적지 않게 나올 터, 지금쯤 미리 국법의 지엄함을 보여줌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모의하여 사람을 해치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른 이야기다. 그간 장동 김씨가 횡포를 부린다 원망하며, 저들의 자리에 서게 되면 어떻게 그간 저들이 저지른 악행을 징벌할지 머릿속으로 그리며 홀로 즐거워한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막상 권세를 쥐게 되니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서 오경석에게 자신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금상이 이처럼 어질게 모두를 안고 간다면 물론 피는 적게 흐르겠지만, 무릇 사람은 베풀어준 은혜는 쉽게 잊고 쌓인 원한은 죽어도 잊지 않는 법. 어떻게든 처분해야 하리라.
아직 그들의 당이 피워낸 개화와 부국이라는 꽃은 봉오리조차 완전히 맺히지 아니하였다. 이 꽃이 언젠가 활짝 피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 괴로운 손을 놀려 인골을 거름으로 줌도 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켕기는 바가 있었다. 뒤척이고 뒤척이다 겨우 눈을 붙이려는 순간, 멀리서 수탉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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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역사에서 김좌근은 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물론 대원군에게 별장과 비자금을 뜯겼다는 야사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만큼의 위세는 당연히 못 누렸음은 알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종실록 편찬을 주도하고 대원군이 부활시킨 삼군부의 첫 번째 영사가 되는 등,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속담의 좋은 예가 되었지요.
그러나 이 역사에서 장동 김씨는 훨씬 더 몰락했습니다. 원 역사에서처럼 척사 여론을 이끌어내 대원군과 비빌 만한 세력을 유지하지도 못했고, 손 대는 일마다 실패했지요. 원 역사보다 3년 일찍 죽은 것은 그러한 사연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한편, 원 역사에서 오경석은 신미양요 무렵 대원군에게 ‘개항가(開港家)’로 찍히는 바람에 박규수가 중용되는 동안에도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의 활약 정도를 제외하면 두드러지는 활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개화당 젊은이들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낼 무렵에는 중풍으로 쓰러져서 마찬가지로 일선에 나서지 못했고요. 대원군이 척사가 아닌 개화를 집권의 기조로 삼게 되면서 생긴 나비효과 중 하나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에 박규수가 언급하는 ‘있지도 않은 사람’은 돈녕도정 이하전의 역모 고변의 관계자로 지목된 이돈(李燉)입니다. 종친의 방계 중에서도 서출에 속하는 사람으로, 실존 인물이라고는 하나 고종 초기 조정에서는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한 사람’으로 취급해 사실상 허구의 인물이라 단정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