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33화 (33/320)

11.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는다 (1)

매 해 온 나라가 난리법석을 겪었음에도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이치는 변함이 없어, 국혼으로 시끄러웠던 봄도 지나고 무탈하게 여름도 꺾여 이제는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다. 코 높은 양인들은 삼삼오오 경운궁 옆 정동거리를 거닐며 제 터럭 색깔을 닮은 형형색색 단풍을 구경하였고, 통리아문이 조만간 경기 일대부터 시작해 경자유전(耕者有田)하게끔 전정(田政)을 변통한다는 풍문이 돌았기에 작황은 중하(中下)라지만 도성 분위기는 푸근하였다.

그러나 편전에서 국사를 논하는 귀남은 그저 초조할 뿐이었다. 새로 기기창을 만들고 화포와 선박을 제조하려니 나라의 사정이 영 빠듯했기에,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손을 벌려야 했다.

‘이 생에서나 저 생에서나 돈이 쪼들리는 건 마찬가지구나...’

귀남이 이 시기의 정세에 조금 더 밝았더라면 이왕 이리 된 것 차관을 통 크게 들여와 이것저것 판을 벌리고는 수익이 돌아오기만 기다렸겠지만, 빚을 지면 큰일이 난다고만 여겼기에 그러지를 못했다.

이는 나라의 곳간을 채우면 채웠지 빚을 지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못하던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출을 받아서 더 크게 어딘가에서 이권을 뜯어내 갚으면 된다는 발상은 유자를 자칭하는 이들로서는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빚쟁이 독촉에 시달리기는 싫고, 또 그렇다고 이미 갚게 된 빚을 남에게 떠넘길 수도 없으므로 그저 스스로 돈벌이를 할 궁리를 하는 길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원군과 개화당에게 나라를 저당 잡히게 만든 책임을 물을 법했던 대간들이 ‘척족’ 민씨를 노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중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덕분에 간섭하는 사람 없이 어찌하면 빌린 돈을 밑천삼아 나라의 살림을 펴게 할지 고민할 수 있었다.

“나라의 근본은 농상(農桑)에 있고, 농상의 일은 전정(田政)의 옳고 그름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법국에서 들여온 차관의 팔 할이 기기창을 차리고 화포를 들여오는 데 쓰였지만, 나머지 이 할이 남았습니다.

신 등이 생각건대 그 남은 양도 결코 적지 않아, 양전(量田)의 큰 사업을 능히 일으킬 만합니다. 은결(隱結)을 찾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계(地契)의 제도까지 정비한다면, 한 번 크게 휘둘러 훗날의 우환을 미리 쓸어 없애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나라가 거두는 바는 늘어나고 백성은 빼앗김을 근심하지 않게 되니, 어찌 애민(愛民)하면서 부국(富國)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간 통리아문 각료들이 날밤 새워가며 쥐어짠 방도들을 아뢰고자 입시한 박규수가, 무언가를 정리한 수본(手本)을 올리며 말하였다.

“총리대신 이하 각료들의 고생이 참으로 많소. 내 마음 같아서는 손수 밤이라도 구워주고 싶지만, 관원 모두에게 나눠주기에는 품이 너무 많이 드니 상급으로 갈음할 수밖에 없겠소. 다만 홀로 고민하지 말고, 서양의 국법에 비슷한 제도가 있을 지도 모르니 아문의 관원을 시켜 상고해보게 하시오. 청국에 와 있는 양인들 중 측량하는 재주를 지닌 자도 있을 터인즉, 고용하여 혹 아국의 법도에 보탤 바는 없는지 알아보는 것도 고려해 보시오.”

“헤아리심이 하해와 같이 깊으니 감복할 따름이옵나이다.”

확실히 박규수 한 사람과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보다, 이렇게 관서 하나를 세워 일을 전담케 하는 편이 여러 모로 나았다. 어차피 귀남의 원래 세상에서 나라가 돌아가는 방식도 근원은 모두 서양 것들을 본뜬 데 있을 테니, 이렇게 ‘서양의 전고를 살펴라’ 하면 알아서 오밀조밀하게 사안을 잘 처리해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그럴듯한 방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그 옛날 호롱불 꺼질 일이 없었다는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처럼 혹사당하는 젊은 관원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따지자면 굳이 이 시국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자기들의 팔자를 탓할 일이겠지만, 어쨌든 귀남으로서는 대신 수고해주는 이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인천 외에 새로 개항한 세 곳에서는 소식이 없소?”

“경흥 고을에 새로 개시(開市)한 데서는 양곡을 넘기고 모피를 받아오고 있는데, 경흥부사가 문정한 바로는 아직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터를 잡은 아라사인의 수효가 많지 않아 큰 이익을 얻지는 못할 듯하다 하옵나이다.

원산도 마찬가지로, 아라사와 영길리 선박이 두어 번 왕래하였을 뿐 아직까지 딱히 통상을 한 바는 없다 하며, 동래부에 오는 왜인들도 비록 개항의 일에 기꺼워하기는 하였으되 이전보다 더 많은 교역을 행하지는 않는다 하였사옵나이다.”

원 역사에서와 달리, 일본이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궤도에 오르기 전 개항하면서 발생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조선산 양곡을 굳이 더 들여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내막을 알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 큰 차이는 없었겠지만.

그때, 귀남의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전 생에서 그의 소득 상당 부분을 도맡아 채워 주던 외국인들이 왜 한국, 그것도 서울에 찾아왔겠는가. 그런 나라와 도시가 있음을 전해 들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아직 중국과 일본 사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인사동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사 가던 기념품이 무엇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서 귀남이 물었다.

“총리, 어쩌면 아직 양인들이 이 조선 땅에 무엇이 나는지를 잘 몰라서 아니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르오. 지금껏 찾아온 자들이야 그저 우리와 통교할 것을 청하고자 온 이들이니, 지금 동래부에 찾아오는 왜인들처럼 제 발로 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마땅히 우리가 먼저 저들에게 가서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소? 하다못해 저자에서 물건을 팔 때도 호객은 하는 법이니 말이오.”

언뜻 보니 박규수도 꽤 솔깃한 눈치였다.

“신이 일전에 『만국공법』을 보니, 서역 나라들끼리는 서로 사절을 주고받음이 통례라 하였습니다. 확실히 본래 속뜻이 어땠든 저들이 먼저 통교하자는 뜻을 우리에게 보였으니, 우리도 답방(答訪)함이 예에 맞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지위가 되는 고관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내는 길에 견문을 넓히도록 유망한 젊은이들도 함께 보내면 금상첨화이리라. 아직 조정의 고관대작 중 태반은 개화에 썩 열의가 없는 세도가들인데, 이들에게 잠시 바깥바람 쐬면서 세상 구경할 기회를 준다면 서로 좋을 듯하였다.

물론 자신은 통 연이 닿지 않아 한 번도 못 가본 해외여행이지만, 그래도 그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를 쓰고 인천공항에 꾸역꾸역 몰려가는 것을 보면 분명 좋은 것은 맞겠다 싶었다. 설마 나랏돈으로 유람을 보내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려. 내 다음 조회에서 가부를 공론에 부칠 테니 아문에서는 인선과 노정(路程)을 먼저 검토해보도록 하시오.”

퇴궐하여 아문으로 돌아온 박규수는 곧장 일에 착수하였다. 우선 인천부에 기별하여 혹 빌릴 수 있는 배가 있는지를 확인케 하고, 유홍기와 오경석을 시켜 당여로 포섭할 만한 명문가 자제의 명단을 뽑아 올리게 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돌고 돌아 벌열(閥閱) 집안들의 문지방을 넘을 무렵에는, 성상께서 외척 민문을 겁박하는 세족들을 미워하여 모조리 붙잡아 해외로 정배(定配)하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으로 탈바꿈하였다는 것이었다.

당장 외부의 문물을 들여올 만큼 나라의 일이 화급한 것도 아니요, 사절을 보내달라는 청이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배라는 것은 바로 옆의 왜국을 갈 때도 생사의 각오를 하고 타야 하지 않던가. 아직 양이의 기선(汽船) 얘기를 그저 요사한 헛소문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조선에서, 배를 타고 세상을 일주한다는 발상은 설령 국위를 선양하기 위함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반남 박문이라면 모를까, 풍양 조문이나 장동 김문의 입장에서는 영 켕기는 면이 없잖았다. 서원의 일로 유림을 끌어들이려 하고, 법국 함대가 왔을 적에는 대원군을 넌지시 탄핵하려 하고, 이제는 여흥 민문까지 몰아세우고 있으니, 이 모든 데는 나름의 핑계가 있었지만 또 용상에 앉아서 본다면 괘씸하게 여겨질 법도 했다. 피바람 부는 것을 꺼리는 어진 주상이라지만, 그 대신 눈엣가시들을 모아다 바닷바람 맞게 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온갖 해괴한 고안을 해내면서 선왕의 제도를 뒤집어엎고 있는 통리아문에서 멀리 바다 너머로 보낼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에 명문가들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청국 흠차대신이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모화관(慕華館)은 본래 화(華)를 숭모하는 마음을 담은 곳이다. 그러니 변발을 한 회인(回人)이 그 마당에 양탄자를 깔고서 천방(天房. 카바 신전)을 향해 절을 올리는 모습을 만약 지나가던 조선 선비가 본다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지도 모른다.

허나 저무는 햇살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청진언(淸眞言. 샤하다(신앙고백))을 읊는 이 사람이 바로 흠차치리조선사무대신(欽差置理朝鮮事務大臣) 마신이(馬新怡)인즉,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입 밖으로 볼멘소리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모양새가 퍽 그럴듯하시구려. 혹 벼슬 떨어지시게 되면 이곳 한성에 청진사(淸眞寺. 모스크)라도 하나 차리면 되겠수다.”

하지만 바다 건너 조선 땅에 와서까지 저 이상한 관습을 지키는 제 상관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장문상(張汶祥)은 이 나라 사람도 아니요, 선비와는 더더욱 연이 없는 사람이니 거리낌 없이 이렇게 놀려댈 수 있었다.

“어, 문상이 왔느냐. 배편으로 온 모양이지?”

“예나 지금이나 영명하시우. 가뜩이나 팔자에도 없는 전령 노릇 하고 있는데 걸어서 요동팔참 다 찍고 언제 천진(天津)까지 다녀오겠소. 내가 무슨 신행태보(神行太保)도 아니고.”

사교(邪敎, 태평천국)의 난을 막기 위해 함께 싸우면서 칼밥 먹은 사이였으니 말은 거칠게 나올지언정 말투까지 차가운 것은 아니었다. 비록 십년 전만 해도 못 배운 도적에 불과했던 장문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고난 눈썰미와 칼솜씨가 어디 가지는 않았기에 곧 새로 지현(知縣)으로 부임한 마신이의 눈에 들었고, 그 아래에서 종군하게 되었다.

작년, 증국번의 상군(湘軍)이 군비를 빼돌린 정황을 파고들던 중 분란이 생기는 바람에 밀려나, 절강순무(浙江巡撫) 직을 내려놓고 이곳 조선에 와 있던 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이 진압되고 행방이 묘연했던 장문상이 자신을 수행해 이역까지 가겠다며 떠나기 며칠 전 절로 찾아온 덕에 타향살이가 마냥 외롭지만은 않았다.

두 사람의 신분의 차이는 태산과 발해(渤海)와도 같았으니 여간해서는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한 번 제 사람으로 여기면 격의 없이 대하는 마신이의 소탈한 성품으로 인해 이렇게 툭 말을 놓고서 이야기하는 일이 둘 사이의 버릇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제물포에 짓는다는 공장도 뼈대가 잡혔겠구나. 혹시 오는 길에 보았느냐?”

“양화진(楊花津)까지 오기 전에 구경한다고 핑계 대고서 잠깐 찾아가 보았는데, 꽤 그럴듯하게 짓고 있더이다. 뭐, 기계를 모두 들여와 공장을 돌리려면 내년 여름은 족히 되어야 할 것 같다고는 하지만...”

조선왕이 탐욕스런 법국인들에게 차관까지 얻어내면서 짓고 있다는 공장이었다. 영국과 법국에서 방적기(紡績機)를 들여와, 한쪽에서는 명주실을 자아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명으로 피륙을 짜낸다 했다.

작년(1865) 제물포를 열어 통상을 하겠다 한 이래,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것은 역시 이재(理財)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강남의 상인들이었다. 의주(義州)로 들어오는 삼(蔘)이든, 황해도 연안을 거쳐 몰래 산동으로 들어오는 삼이든 정작 수요가 많은 강남의 상인들로서는 너무나 중간에 거치는 손이 많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니 조선이 항구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혹자는 낡은 배를 매입하고, 또 조금 더 연줄이 많은 이는 서양 기선을 임차하여 제물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절강성에 머물면서 잠상을 열심히 때려잡은 이가 마신이 본인이었으니 그 사정을 모를 수 없었다.

허나 무슨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갑자기 화식(貨殖)에 혈안이 된 듯한 조선의 조정은 포삼으로 중원의 재화를 빨아들이는 것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관이 나서서 상인들에게 용선(傭船)을 알선해주니, 포삼 장사에서 손을 뗀 몇몇 의주 상인들이 대신 갯벌에서 나는 소금과 남방에서 들어오는 설탕을 싼 값에 책문(柵門) 쪽에 풀고 있다고 들었다.

“뭐, 그간 원체 나라의 물산이 곤궁하였으니 조금만 나아져도 확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겠지. 우리 땅에서야 아무리 공장을 돌릴지언정 어지간해서는 동네에서 길쌈하는 아낙네들을 못 따라가지 않더냐.”

“그래도 어쨌건 배 아픈 건 사실이우. 이왕 흘러나갈 은자라면야 양귀자(洋鬼子) 대신 요 고려 종자들에게 가는 편이 낫긴 하겠지만서도...”

“자, 넋두리는 그만하고, 밥값 할 궁리를 하자. 총리아문에 올릴 글을 받으러 온 것 아니었더냐.”

이곳 조선으로 부임해올 때 공친왕으로부터 받은 밀지는, ‘존이불론(存而不論)하고 치이불기(置而不棄)’라, 조선인들이 양인들과 무슨 교섭을 하든지 눈앞에서 가로막지는 말되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양인들이 제일가는 번국 조선을 업신여기고 통상하러 온 청국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러 온 마신이였지만, 그의 소임 중 가장 큰일은 자신이 탐문한 이곳 한성의 동정을 글로 써서 장문상을 통해 올리는 것이었다.

만약 올 봄에 체결한 『수륙무역장정(水陸貿易章程)』이 조금 더 국정에 개입할 단초를 마련해주었다면 이곳 모화관에서 뜬소문이나 긁어모으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많았겠지만, 대원군 그 자가 ‘야비한 영·법 양국에 대국의 아량을 보여주라’ 청하니 장정을 맺을 때도 양보하고 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본국에서 지원이라도 제대로 해 주면 모를까, 아문에 예산이 부족하다는 연유로 아직껏 공사관 하나 제대로 못 짓고 이곳 모화관을 계속 쓰고 있지 않던가. 물론 나름대로 공들인 건물이기는 했지만, 작정하고 오래 머물면서 일을 볼 수 있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에고, 형님, 나 뱃멀미 하는 건 알고 계시잖수. 좀 쉬었다 가게 해 주시면 안 되겠수? 그렇잖아도 저기 한강 올라오다가 또 뱃속 아침밥이랑 거하게 상봉하고 오는 길인데...”

“아직 다 못 썼으니 염려 말아라. 어차피 오늘은 누구 찾아올 사람도 없으니 옆방 가서 좀 누워 있거라.”

“역시 형님뿐이우.”

그러나 야속하게도 장문상이 별채에 몸을 누이려 하자마자 – 대체 왜 조선 놈들은 침상을 쓰지 않는다는 말인가 - 대문 밖에서 누군가 조선말로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냥 조용히 한 구석에 숨어서 눈이나 붙일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한때 의형으로 모셨던 마신이가 혹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 역시 그가 높으신 분께 받은 임무였다. 마신이의 말마따나 밥값은 해야 하는 법. 볼품없는 의관이지만 최대한 정비하고서 의형의 뒤에 섰다.

찾아온 남자는 마흔 즈음 된 사내였는데, 옆에 역관을 대동하고 온 것으로 보나, 옷차림으로 보나 꽤나 높은 사람인 듯하였다. 공손히 읍(揖)하고 무어라 중얼거리니, 역관이 바로 옮겼다.

“조선국의 미관(微官) 김 모가 흠차대신 대인을 뵙습니다. 사대의 예에 혹 누가 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되어, 긴히 말씀 나누고자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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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이는 회족(回族)입니다 ('무함마드'를 음차한 마씨 성 역시 회족이 많이 쓰는 성씨지요.). 중국 내부에 녹아들어 혈통으로는 한족과 차이가 없어진 무슬림 집단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중국 여기저기에 거점을 마련하였는데 마신이도 회족의 본고장에서 멀리 떨어진 산동 출신인 것으로 보아, 그런 집안 출신인 듯합니다.

당대 영국의 기록에도 마신이를 ‘모하메단(무슬림)’으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마신이는 회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일정 부분 유지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작중에 묘사된 아침 기도 관련 표현들은, 명말청초의 이슬람 학자 왕대여(王垈輿)가 쓴 교리서 『정교진전(正敎眞詮)』에 그 출처가 있습니다.

원 역사에서 마신이는 녹영군을 이끌고 태평천국과 염군 진압에 공을 세워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유명무실화된 청말 녹영군에서 그나마 제몫을 한 몇 안 되는 사람이지요. 그 후에는 수복된 장강 삼각주 일대에서 치안을 회복하는 데 힘썼습니다. 하지만 1870년 도적 출신 옛 부하 장문상에게 암살당합니다.

훗날 여러 차례 영화화된 (2007년에는 이연걸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지요) 이 ‘자마안(刺馬案)’의 정황에 대해서는 후대는 물론이요 당대에도 영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사건의 조사를 맡은 증국번이 서둘러 장문상을 처형하고는 수사를 종결지어버리고, 조정은 또 이를 방관했거든요. 증국번의 상군이 중앙 통제를 벗어나 군벌화되는 것을 눈치 챈 녹영군 인사였기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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