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32화 (32/320)

10.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3)

북경. 프랑스 공사의 사저(私邸).

“여보, 가르니에 군(François Garnier)이 보낸 코레(조선) 소식 읽어봤어요? 어쩜 이리도 낭만적인지!”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기다리던 중, 벨로네 백작부인이 신문을 읽고 있는 젊은 남편에게 문득 물었다.

조선의 개항 소식을 듣자마자 살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보겠다며 휴가까지 내고 찾아온 젊은 해군 장교 이야기였다. 듣기로는 비록 입국은 허가받았지만 수도 ‘세울’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 대신 이 ‘은자의 나라’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현지인들을 닦달해 이것저것 수소문하고 있다 했다.

“자, 들어봐요. 소년 국왕이 자신의 반려를 찾기 위해, 귀족 집안의 다섯 처녀에게 질문을 던졌대요.

‘그대들은 내가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그저 아무 재주 없는 마롱쇼(군밤) 장사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다들 ‘그래도 사랑하겠습니다’, ‘지극정성으로 모시겠습니다’ 같이 입에 발린 이야기를 하는데, ‘민’이라는 처녀는 답하기를,

‘둘이서 파는 게 벌이가 더 좋을 테니 저는 옆에서 고구마라도 구워서 팔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거예요. 국왕도 이 당찬 소녀에게 한 눈에 반했는지 그 자리에서 구혼했다지 뭐예요.”

작년의 그 끔찍한 난리통을 겪고서 한동안 코레의 ‘C’자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던 벨로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 무슨 『천일야화』에 나올 법한 얘기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동방 야만인들의 어리석은 습속일 뿐이오. 농담 따먹기로 왕비 자리를 정한다니, 쯧.”

지나치게 프랑스에 불리한 조건으로 조약 초안에 합의했다는 이유로, 본국에서는 벨로네를 조선 공사대리(Chargés d'affaires)로 부임시킬 계획을 짜고 있었다. 요컨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무언가 이권을 뜯어내라는 것이었다. 임시 대리(ad interim)보다 아예 공사 자리가 없는 곳에 부임하는 편(en pied)이 격이 높으니 승진이라면 승진이지만, 실제로는 좌천인 셈이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벨로네는, 조선에서의 난리법석이 그저 과거의 일로 묻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물론 덕분에 본국에서 한 두어 달은 자기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한 모양이지만, 파고들면 들수록 영 개운하지 못한 이야기만 나올 터이니 그저 훗날 쓰일 (정확히는 쓰이기를 기대하는) 자신의 일대기에 각주 한 줄로 남으면 족할 일이었다.

“듣기야 멋지고 낭만적이지 몰라도, 한 번 생각해보시오. 불화의 신 에리스가 여신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바치는 사과를 던져준 게 무슨 연유에서였겠소? 애초에 정답이 있을 수 없는 문제잖소. 어떻게든 싸움이 나게 하려는 것이었겠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바친 사과를 누가 가져갈 것인지를 놓고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 우기는 여신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거기서 일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트로이 전쟁으로까지 번졌다는 것이다.

”차라리 궁정에서 암투를 벌인 끝에 왕비를 고른다면 모를까, 이렇게 되도 않는 문답으로 왕비를 정했으니 아마 코레 궁정에서도 이 일이 화근이 되어서 조만간 다툼이 벌어질 게요.”

벨로네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실은 정답에 가까웠다. 한양의 명문세족(名門世族)들로서도 실없는 문답으로 단번에 간택의 결과가 정해져 버렸다는 데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은밀히 밀약하여 중전을 정하였다거나, 사전에 주상의 밀지가 있어 결과가 정해진 채 이루어진 간택이었다면 풍양 조문이든 장동 김문이든 불만을 품을지언정 좌불안석의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숭정 연간, 천하가 뒤흔들리고 밝은 도가 쇠망하던 시절, 반정의 공신들이 국본(國本)을 든든히 하고자 국혼물실(國婚勿失)을 기약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 이후로도 당색을 불문하고 뭇 중신들이 간택의 법도를 폐하고 조정의 공론에 따라 배필을 정할 것을 진언한 이유는 또 무엇이었던가. 한미한 집안이 함부로 척신(戚臣)의 반열에 올라 정국을 뒤흔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 서원과 신법, 개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다툼 속에서도 딱히 누군가를 쳐내는 일 없이 원만하게 사안을 처리해 왔던 주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라의 주인이 자신임을 과시하듯 마음대로 간택에서 수수께끼 놀음을 하더니, 그 답변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보잘것없는 집안의 처자에게 성은을 내린 것이다.

비록 권력이 한 집안에 머문 지 오래되어 집안들 간에 다투며 견주던 기억이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세의 흐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세도가들의 눈이 흐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같이, 여흥 민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하고 또 견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소란을 일으켜 뭇 사람의 주의를 끈 연유는 곧 작금의 명문 중 어디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고 새로운 집안을 끌어들임으로써 오직 군권(君權) 그 하나만을 높이겠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함일 터이다.

허나 이미 운현궁 등쌀에 시달리고 있는데 남은 자리를 또 민문의 모자란 무리들에게까지 할애해준다면 몇 해 안으로 숨구멍조차 남아나지 않을 것이 명백하였다. 그러니 자신들 외에 또 다른 세족(世族)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저 예리한 눈에 표독한 마음을 담아 민문의 목덜미를 노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암만 재주가 없고 품성이 달린다 하나 민승호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이래서야 범에게 물려가지 않기 위해 대신 하룻강아지에게 목줄을 채워 들판에 놓아두는 격이 아닌가. 그저 속없이 주상의 수수께끼에 별나기 이를 데 없는 답으로 응해 뭇 도성 사람의 이목을 끌어온 의붓누이동생을 탓할 뿐이었다.

“에휴... 그러게 왜 그랬단 말이냐. 기껏 문중에 볕들 날이 찾아오나 했더니만... 그냥 다른 규수들처럼 『내훈(內訓)』 구절이나 읊을 것이지, 대체 왜 그놈의 감저(甘藷) 같은 얘기는 해서 기껏 찾아온 볕들 날을 절로 내쳐버린다는 말이냐...”

내일이면 옆집 운현궁에 입궁해 친영(親迎)을 기다릴 자영을 앞에 두고서 하는, 꾸중인지 한탄인지 애매한 넋두리였다. 허나 자영은 기가 죽기는커녕 외려 억울한 마음을 품은 듯하였다.

“오라버니, 그럼 아무 말도 안 하고 다른 규수들 사이에 조용히 머물러 있어야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네 성품을 익히 알았으니 그런 기대는 애초에 품지도 않았다. 그래, 유난히 여덕(女德)에서 벗어난 소리는 안 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은...”

자영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속마음을 꾹 눌러 담고서,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하였으니 군밤 굽는 지아비 곁에서 고구마를 구워 팔겠습니다’라 답한 것이었다.

만일 구름재댁 둘째가 아닌 다른 소년이 용상에 앉아 배필을 구한다 했다면 무어라 대답했을까. 아마 속마음대로 털어놓으라 했다면, ‘무능한 부군은 집에 가둬놓고 글이나 읽히면서 제가 나와 밤장수를 하든 무얼 하든 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어렸을 적부터 사서(史書)를 섭렵하며, 공자를 말 한 두 마디로 오가라 하였던 남자(南子)라든지, 『자치통감』 한 구석에 나오는 측천무후(則天武后)처럼 되고 싶었던 자영이었다.

하지만 초간택 날 전각에서 문제의 그 물음을 들었을 때, 자영은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저 군밤 굽는 사내란 곧 나라의 지존 자신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임을. 그리고 그 사람, 자기가 몇 해 동안 대체 어떤 사람인가 살피고 묻고 또 정탐하였던 그이는 집에 가둬둘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잠저에 머물던 주상을 훔쳐보고자 남장을 하고 찾아갔던 그때 이미 제 정체가 드러났으니 굳이 죄를 주려면 줄 수도 있었다. 입궐하던 그 날도 주변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환호하는 것을 그저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즉위한 후에는 또 어땠던가. 몸은 규합(閨閤)에 있을지언정 항상 밖의 일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제 장동의 시대는 갔으니 조만간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또 그 다음에는 무슨 신법을 놓고 다툼이 있으니 또한 칼바람이 휘날릴 것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궁궐에서 어제 군밤을 맛보고 나오는 대신이 있다는 얘기는 들려올지언정 사약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도통 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니 설령 그 끝이 파멸로 이어질지라도 양껏 제 마음 닿는 데까지 달려보고 싶던 말괄량이 민자영이 보기에, 한때 군밤 팔던 금상은 자신을 뒷방에 가두려 할 사람도, 얼음장같이 하룻밤 가연(佳緣) 맺고서 마음이 떠나갈 사람도 아니요,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해 보라고 인자하게 웃으면서 옆을 지켜줄 법한 사람이었다.

“소녀 살피건대 금상께서는 아무리 주변의 권신들이 한 목소리로 무함할지라도 함부로 생령을 해치실 분이 아니십니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인즉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요, 또 문중에 해 될 일도 없을 테니 오라버니께서는 근심을 푸시지요.”

“대원위 이르기를, ‘곤전(坤殿)이란 곧 전각을 이르는 말이지 사람이 아니니, 그 주인 되는 사람 마음에 따라 수시로 비우고 또 채울 수 있는 것’이라 하였사옵나이다.”

삼간택까지 마치고 결국 자신이 알던 대로 민비가 왕후로 낙점되었다. 곧 전생에서 써본 적 없던 사모(紗帽)를 쓰고 기러기 들고서 신부를 맞이하러 가게 되리라. 그런 생각에 빠져, 납비의(納妃儀) 준비에 관해 보고를 올린다는 핑계로 찾아온 친형 이재면의 말을 대충 흘려듣고 있었는데, 뒤이어 대원군이 언급되니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 무슨 말이오? 가례를 물리는 도리도 있소?”

“또 이르기를, ‘숙묘조(肅廟朝. 숙종)의 일을 상고하시라’ 하였사옵나이다.”

그 일이라면 일전에 왕실 어른들에게 들은 바 있었다. 아마도 이전 삶에서는 요부(妖婦)로만 알았던 장희빈(張禧嬪)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떠올려보라 함은 무슨 뜻이라는 말인가? 품은 궁금증이 겉으로도 티가 나게 드러났는지, 재면이 친절하게 덧붙여주었다.

“감히 말씀 올리자면, 실덕(失德)한 여인이 인군의 총애를 받게 되면 그 폐해가 크므로, 그 전에 내치는 전례가 있었사옵나이다. 한 사람이 행악하여도 그러할진대, 그 집안이 모두 행악(行惡)한다면 실로 국난(國難)에 버금가지 않겠나이까. 대원위의 말은 혹 그러한 단초가 있다면 마땅히 미리 내침으로써 지극한 성덕(聖德)에 티끌 하나 없도록 함을 이름이 아닌가 하옵나이다.”

민비가 전생에서 그처럼 악명이 높았던 까닭이 따로 있지는 않을 터이다. 아마 대원군은 그럴 때에 대비하여 마음을 굳게 하라는 뜻을 전하고자 한 것이리라. 하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 일이었다.

다른 규수들이 모두 ‘집안에서 길쌈에 힘써 살림에 보태겠다’는둥, ‘오직 부덕(婦德)으로 섬겨 남편의 막힌 품성이 뚫리게 하겠다’는둥 어디 경전에 나올 법한 답으로 일관할 때 민씨네 딸은 옆에서 군고구마를 팔겠다 했다.

아직 고구마를 구워서 먹는다는 얘기를 못 들어본 것으로 보아하니 지금 이 무렵에는 흔치 않은 발상인 듯했는데, 그것을 홀로 구상했을 테니 기특하기도 하였거니와 못난 남편을 나무라지 않고 함께 고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들어 알던 민비라면, ‘못난 남편을 제쳐두고 집안일을 홀로 재단하겠다’ 하는 답변이 나올 줄 알았다. 물론 그런 성정을 지녔더라면 간교함도 따라올 테니 자신의 마음 씀씀이를 간파하고서 다디단 언사로 자신을 꼬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품은 의심을 바탕으로 숙고해보면 가려내지 못할 일은 아니었으리라.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을 이리 보낸 산신령이 영 고된 팔자와 맞바꿈 해준 일이 미안해서, 저 민씨댁 처자 심성도 고쳐준 게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상상을 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대원군이 전하기를, ‘미욱한 글월로 부부의 가약을 맺는 일을 놓고 심려를 끼쳤음에도 끝내 미신(微臣)의 편을 들어주심에 기껍고도 황공한 마음이 그지없으며, 한 마디 문답으로 외척이 전횡할 소지를 또한 막았으니 그 신산(神算)에 탄복할 뿐’이라 하였사옵나이다.”

정말 저 말을 모두 외워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손바닥 어딘가에 적어놓고서 슬쩍 보면서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 궁금하다면 나중에 물어볼 일이었다.

“민문의 규수를 간택함이 대원군이 정사를 더 잘 보필(輔弼)토록 하는 길이라 여긴 것은 맞소만, ‘외척이 전횡할 소지를 막는다’ 함은 무슨 얘기요?”

애초에 민비의 성정이 영 불안하니 미리 뜬구름 잡는 듯한 문답이라도 한 마디 던져서 떠보자는 꾀는 귀남과 재면이 함께 머리 맞대고 낸 것이니, 재면으로서도 이 엉뚱한 찬사에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재면이 설명하기를, 대원군은 자신들의 ‘꾀’를 듣고서 정말로 탄복한 듯했다고 했다. 풍문대로 민문의 여식의 성정이 별나다면 이 문답에서도 예기치 못한 답이 나올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비범한 답이라고 포장하여 소문을 내면 될 일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명문가들이 제 집안 사람이 간택받지 못한 일을 원망하는 대신, 고작 재치 있는 말 한 마디로 과분한 위세를 얻었다며 민문을 질시해 물고 뜯을 것이다.

여기까지 이재면이 해설해주니 귀남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은 그저 소문난 악녀에게 붙잡혀 사는 처지를 면하고자 잔머리를 굴렸을 뿐인데 멀쩡한 집안 하나가 풍비박산 나게 생기지 않았는가. 다른 집안들의 질투를 받는다 하니 대놓고 챙겨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새로 중전을 맞게 되면 조금 곰살궂게 대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귀남이었다.

하지만 귀남이 조금만 더 학식이 깊었더라면, 자신의 수수께끼 놀음으로 한 문중이 곤란해진 것이 나라에 이득이 되면 되었지 해롭지는 않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어쩌면, 그 집안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그 여식의 입장에서도 대대로 후세인의 질타와 매도를 받게 될 운명을 피하는 단서를 상감이 친히 내려준 셈이니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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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가르니에(Marie Joseph François Garnier)는 19세기 중반에 활약한 탐험가입니다. 흐르는 강만 보면 거슬러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유명했지요. 본업인 해군 장교는 제쳐놓고, 메콩 강과 장강 일대를 탐험하기도 했습니다.

대리대사·공사(chargés d'affaires)는 대사·공사가 부재중이거나, 아직 대사 혹은 공사를 서로 파견할 수 있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 굳이 더 높은 지위의 외교관을 파견할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파견되는 것이 외교상 관례입니다. 이후 1961년 빈 협약으로 그 지위가 공식적으로 국제법상에 명시되지요.

실제 역사에서 조불수호조규는 대리공사의 개입 없이 바로 조인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청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하질서 하 종주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작중 시점에서는 아직 독단적으로 공사를 파견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실제 역사에서 청불전쟁으로 베트남의 ‘자주국’ 지위가 보장되기 전까지 프랑스가 취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한편, 고구마는 영조 대에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도입 직후에는 조정에서 한강변 섬들에 심기도 했다는 기록이 『북학의』에 있습니다만, 그 이후 겨울철 보존 문제로 인해 남해안을 중심으로만 재배되고 그 외 지방에서는 구황작물이 아닌 별미 정도로만 인식된 듯합니다. 실학자들의 기록과 당대 요리책들을 보면 고구마를 통째로 먹지 않고 말린 뒤 빻거나 전분 형태로 만들어 요리에 사용한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실제로 고구마가 널리 보급된 것은 1950년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고구마 재배를 장려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흔히 생각하는 ‘군밤장수 모자’가 원래 미군 동계장비(M1951 파일캡)였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로 설득력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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