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2)
귀남은 편전에서 생각에 잠긴 채 이제는 계절마다 습관으로 굳어진 군밤 굽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문득 입가를 만져보았다. 아직은 솜털 같지만 어쨌든 수염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어느새 이 몸에 넋이 깃든 지 다섯 해째요, 몸의 나이로는 열다섯이다. 키는 어째 영 자랄 기미가 없어, 허리 굽은 옛 몸뚱이보다도 눈높이가 낮았지만, 어차피 주변 모든 사람들이 제게 맞추어 알아서 몸을 굽혀주니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그의 지난 생에서는 어른이 무엇인지를 숙고할 여유 따위 주어지지 않았다. 나라에서 어른이 되었으니 군인 노릇하러 올라오라 하여, 욕먹고 얻어맞으며 기껏 살아서 돌아오니 집안은 풍비박산 나 있었다. 무작정 상경하여 시작한 군밤장수 노릇 사 년차에 겨우 식모살이하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벌이가 썩 신통치 못해, 겨울이면 집 – 집이라 해 보아야 아내가 일하는 주인집의 다락방이었지만 – 에 들어올 때마다 돌아오는 것이 바깥바람마냥 차갑고 서러운 냉대였다.
집주인이 알선해주어 봄마다 여기저기 일거리를 알아보았지만, 암만 그 양반이 ‘배운 건 없어도 성실한 청년’이라 소개해주면 무엇 하겠는가. 얻는 일자리마다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으니 귀남이 날고 기어보았자 결국 밤 굽는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올해 겨울도 수레 끌고서 안국동 골목에서 군밤이나 팔아야 하겠다고 할 때면, 아내는 욕을 한 바가지씩 퍼주곤 했다. 그러다가 제 풀에 지쳐, 자신이 비록 서출의 서출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반가(班家)의 혈육이었다면서, 남편이라고 맞이한 사람이 팔자 사나워 치부(致富)와는 연이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냐며 서럽게 울고는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무언가 열심히 하다 보면 제 팔자는 고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시절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결국 계속 밤만 굽다가 팔자를 완전히 고치게 되었으니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아내를 생각하며, 또 자신을 생각하며 몇 년을 악착같이 벌고 귀신같이 아껴서, 겨우 판잣집을 면한 집 한 칸을 얻었다.
그나마 얹혀사는 신세를 면했다며, 부부의 연을 맺은 지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는 미소를 지어주던 아내는, 그해 겨울 연탄가스를 마시고 어린 아들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따지고 보면 번듯한 주인집에서 했던 것처럼 허름한 새집에서도 연탄을 마구 땐 아내의 잘못이요, 허술한 집을 팔아먹은 업자의 잘못이겠지만, 귀남은 그저 제 팔자려니 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묻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씁쓸한 생각이 머리를 채울 때는 달달한 군밤이 그나마 낫다. 한 입 베어 물면서, 귀남은 그때 자신을 여기로 보낸 북악산 산신령이라도 불러다 지금 자신이 처한 형국에서 어찌해야 할지를 묻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때, 그리던 산신령 대신 엉뚱한 사람이 문 건너편에서 기척을 했다.
“도승지 입시이옵나이다.”
“들라.”
재작년 급제해 예문관(藝文館)에 있다가 올해 승정원(承政院)으로 옮긴 제 친형 이재면(李載冕)이었다. 원체 터울이 있다 보니, 자신이 이번 생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혼례를 치르고 별채에 머물고 있던 형으로, 사실 구름재에서도 별로 마주칠 일이 많지는 않았다. 물론 그래도 이것저것 챙겨주곤 해서 정이 꽤 가기는 했었지만.
“예조에서 삼간택(三揀擇)을 위해 길흉을 따져보니, 초간택은 2월 13일, 재간택은 2월 25일, 삼간택은 3월 2일로 각각 택일함이 가장 길하다 하옵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평소 정사를 돌볼 때 아뢰어도 될 일이다. 굳이 제 형이 온 것은 아마도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소매를 뒤지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바치었다.
“이 일에 대하여 운현궁에서 혹 어진 정사에 보탬이 될까 작은 꾀를 헌납코자 한다며 이 글월을 올렸사옵니다. 상께서는 부디 살피소서.”
펼쳐서 언뜻 훑어보니, 처녀단자를 낸 명문가 규수들 이야기다. 어떤 집안은 누구를 보냈는데 이 집안의 위세는 어떠하며, 저 집안은 문중 사람들의 성품이 어떠하다 운운하였다. 개중에는 그가 요새 신임하는 박규수의 집안도, 또 요새 조용하다지만 제 벗 철종에게 크게 잘못한 일이 있어 자신이 은근이 경원시하고 있는 장동 김문도, 얼마 전 대원군을 벌줄 것을 청한 것 외에는 딱히 별 감정이 없는 풍양 조문도 있었다.
그리고 명단 말미에는 여흥 민문의 규수로 전 첨정(僉正)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있었다. 이르기를, 그 사람됨은 영민하나 다소 별나다 하며, 또 주변 집안사람들은 딱히 대성한 사람은 없으되 평이 썩 좋지는 않다 하였다. 아마도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민비(閔妃)이리라.
눈길이 글의 끝에 이름을 보았는지, 이재면이 한 마디 덧붙였다.
“대원군이 또한 이르기를, 한미한 집안에 성심을 두신다면 척신(戚臣)들이 불민한 자들만 있을 테니 운현궁이 가일층 높아질 것이며, 명문거족(名門巨族)에 성은을 내리신다면 비록 붕당의 폐해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사직의 기틀이 한결 도타워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어차피 자신 혼자 힘으로 조선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무리요, 당장 흥선대원군 이하 명신들을 모아놓아도 그저 본 역사보다는 백성들을 덜 괴롭게 하며 무너지는 것이 전부이리라 지레 짐작하고 있던 귀남이었다. 소싯적부터 ‘조선은 원래 망할 나라였다’ 하는 이야기를 귀에 박히게 들었으니, 그런 생각을 품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니 못난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해보려 하는 것보다야 지난 프랑스의 일로 서로 믿는 마음이 생긴 – 최소한 귀남은 그렇다고 여겼다 – 대원군에게 힘을 몰아주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세도가 하나를 골라 중전을 들이게 되면 물론 대원군 외에도 기댈 구석이 하나는 생기겠지만, 그만큼 대원군은 힘이 빠질 것이요, 다른 집안들이 은근히 자신을 원망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세도가 외에서 배필을 정함이 마땅한 이치인 듯했다. 그 경우 원 역사대로 민비와 가례를 치르게 되리라는 점만 빼면,
조선 망국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민비의 사치와 미신이었다고 왜정 시절에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서울에 올라와 장사할 때도, 골목 터줏대감들이 가끔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민비에 대해 흉을 보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세도가들을 외척으로 끌어들여 상대할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얘기 속 민비 같은 여인네를 감당하는 것도 제 깜냥에는 무리일 듯했다.
게다가 애초에 지금 제 앞에 놓인 글 속의 여흥 민씨가 그 민비가 맞기는 한지도 의문이었다. 듣기로 제 아버지 대원군의 처가도 민씨, 외가도 민씨라 하였으니, 엉뚱한 아낙네를 의심하는 꼴이 될 수도 있을 법했다. 또 알고 보니 아직 마음 한 구석이 삐뚤어지기 전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저 자신이 예전에 언뜻 어설프게 들어 안 이야기만으로 처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침이 과연 가한 일인가? 또 반대로, 배운 것 없는 자신도 악명을 전해들을 만큼 유명한 악인을 두 팔 벌려 맞이함은 또 가한 일인가?
그래도 눈앞의 이재면이 어쨌든 이곳 조선에서 좀 더 오래 산 사람이므로 이런 양패구상의 상황에서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도 있겠다 싶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도승지는 사사롭게는 나와 골육의 정이 있는 사이요. 그러니 한 가지만 묻겠소.”
“하문하시옵소서.”
대원군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임금의 물음이 던져질 줄은 몰랐는지, 이재면은 당황하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만약 그대가 혼사가 오갈 무렵에, 음... 꿈을 꾸었다고 해 둡시다. 꿈에서 어떤 양갓집 규수가 패악(悖惡)을 부리던 끝에 온 집안이 패가망신하는 것을 보았는데, 알고 보니 그 규수가 지금 가친(家親)께서 혼약을 생각하고 있는 집안의 사람인 게요. 그렇다면 꿈에서 그러하였으니 이를 연유로 삼아 그 규수를 물림이 가하겠소?”
터무니없는 질문에 이재면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얼마간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대저 꿈이란 앞날을 신명(神命)이 깨우쳐 경계케 하는 것도 있지만, 허무맹랑할 뿐인 것도 있습니다. 혼약이란 작게는 두 사람 간의 일이지만 크게는 두 집안 사이의 대사입니다. 배필로 맞이한 뒤 꿈에서 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면 충분치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간택에 든 규수라면 어떻겠소?”
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것을 묻는지 영 납득이 가지 않는 듯한 낯빛이 잠시 보이는 듯했다. 이번에도 얼마간 깊게 고민하던 이재면이 다시 답했다.
“국모 될 사람을 정하는 일은 실로 국가의 대사이니, 비록 인군(人君)의 꿈이라 하나 그것만을 믿고 정함이 어찌 사리에 맞는다 하겠습니까. 행악(行惡)하는 여인이라면 설령 정비(正妃)라 할지라도 곧장 내치고는 하였으니 이는 전례에도 있는 일입니다. 우선은 간택을 통해 살피고 훗날 곤전(坤殿. 중궁전)에 주인이 생긴 뒤에 다시 밝게 헤아리셔도 족할 것입니다.”
자신이 이만큼 얘기하면 대원군이나 박규수는 얼추 눈치를 채었던 것도 같은데, 이 형은 그저 꿈 얘기는 꿈 얘기일 뿐인 줄로 알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만약 그 패악질하는 것이 도를 넘어도 한창 넘어선다면 어떻겠소? 예컨대, 음... 금강산 일만이천 봉에 모두 쌀 한 가마니씩 올리고 제사를 지내려 한다든지... 아니, 이건 좀 약하군... 양이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할 단초를 마련한다 하면 어떻겠소? 꿈이라고는 하지만...”
나라 망하는 이야기가 나온 뒤에야 왕이 무언가 다른 뜻을 넌지시 돌려 말할 뿐임을 깨달은 이재면이 다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저 창덕궁과 운현궁을 오가며 대원군의 말을 전할 뿐인 자신에게 이렇게 머리 굴릴 일을 시키는 동생에게 망측한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망극한 꿈일지라도 허황될 수 있는 것은 똑같을 듯하옵나이다만...”
형과 동생이 모두 고민에 빠졌다. 그때, 문득 무언가 떠오르는 듯했다.
“전하, 혹 일전 잠저에 계실 적 글공부에 보탬을 드리고자 바쳤던 『기문총화(奇聞叢話)』를 기억하시옵나이까?”
그렇잖아도 공부와는 연이 없는데 한문은 더욱 깜깜하여 고생하던 무렵, 하루는 재면이 지나가던 책쾌(冊儈)에게서 야담집(野談集) 한 질을 빌려다준 적이 있었다. 경전을 어려워하는 듯하니 우선 이것이라도 읽어봄이 어떻겠느냐 하면서 건네준 책이 바로 『기문총화』였다.
언뜻 보았더니 꽤 재미가 있어서, 부족한 글 실력으로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물론 며칠 지나지 않아 흥선군에게 걸려서, 어딜 감히 패관야승(稗官野乘)을 읽히느냐고 형과 함께 쌍으로 혼이 나기는 했지만.
“영묘조(英廟朝)에 정순왕후(貞純王后)께서 슬기롭게 문답을 하여 영조대왕의 마음을 얻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처럼 간택하는 중 미리 물음을 던진 뒤 그에 답하는 것을 살피면 어떻겠습니까? 만일 말씀하신 꿈이 정녕 천인의 감응(感應)이 있어 미리 계고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 품성에서도 행악하는 단초가 보일 터인즉, 이리하면 미리 여덕(女德)을 살피어 후환을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조가 간택할 때 여러 규수를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니, 정순왕후가 ‘인심이 가장 깊다’ 대답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인지를 물으니 이번에는 ‘백성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 답변하여 영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저 야사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귀남이 만약 마음만 먹는다면 실제로도 일어나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간택이란 국법으로 절차가 확고히 정해진 것이 아니요, 그저 전례를 살펴서 그때그때 하는 것이다. 나라의 기강이 세도가의 전횡으로 무너지면서, 외척의 발호를 막고자 간택하면서 유력가를 쳐내는 도리도 함께 사라진바, 이미 성년이 되어 친정하는 왕이 ‘이번에는 이렇게 하자’ 하면서 강력히 주장한다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귀남은 머리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자신이 들어 알던 것처럼 민비가 악독한 여인이라면 미리 몇 가지 문답을 한 뒤 이를 구실삼아 제치면 된다. 하지만 뻔히 알 법한 질문을 규수들에게 던진다면 민비는 물론이요 다른 이들도 모두 똑같은 답변을 내어놓을 터, 옥석(玉石)의 구분이 될 턱이 없었다.
그러면 무슨 질문을 던질 것인가? 그가 만일 학식이 깊다면야 무슨 고사(故事)를 들추어가며 재기 있는 질문거리를 끌어낼 수 있겠지만, 지금 귀남으로서는 그럴 여력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 할지라도 돌아오는 답을 가려서 볼 요량이 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니 남는 것은 결국 제 신변에 관한 이야기다. 구중궁궐에 들어와 배필이 되었을 때, 용상에 앉은 사람이 딱히 잘 난 것 없는 필부(匹夫)라는 사실을 알고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를 가려낼 수 있는 물음으로 지금 귀남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본디 가례는 가례도감이 도맡아 추진하고, 그 전후의 일은 내명부가 돕기 마련이다. 초간택을 전후하여 요새 부쩍 대원위 위세에 밀리는 감이 없잖은 신정왕후가 간만에 전면에 나서면서, 한성의 명문가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눈치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간택부터 불꽃 튀는 국혼이 얼마만이었던가. 도성 사람들의 이목도 여기에 쏠렸다. 혹자는 철인왕후와 얽히지 않게 하기 위해 미리 김우근(金遇根)의 수양딸로 입적시킨 김병학의 딸이 유력하다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조면호(趙冕鎬)의 딸이 미인으로 유명하니 필히 간택에서도 유리하리라 짐작하였다. 지엄한 국사가 잡인의 입에 오르내림은 분명 좋지 못한 일이었건만, 아직 왕실의 위엄이라는 것이 막 진흙탕에서 건져진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또한 그 무렵,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대원군에게 몰래 내려간 주상의 뜻이 돌고 돌아 신정왕후의 귀로도 들어가고, 다시 신정왕후는 제 일족에게 귀띔한 것이리라. 그 소문이란, 초간택에서 간택된 처자들에게 주상께서 친히 내린 질문을 밝힐 것이며, 재간택에서 여기에 얼마나 그럴듯한 대답을 올리는지를 놓고서 부덕(婦德)의 있고 없음을 가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가문을 불문하고 있는 끈 없는 끈 동원해 대체 그 소문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그 묻는 내용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함은 지당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김문과 조문의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운현궁 문지방이 닳을 지경이었건만 대원군은 그저 빙긋 웃으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결국 일단 초간택부터 되고서 생각해보자는 심정으로 여러 유력가들은 캐묻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2월 13일, 나흘 전 점치기로 길한 시간이 오시(午時)라 하였은즉 때에 맞추어 형형색색 사인교가 요금문(曜金門) 앞을 메웠다. 사전에 명을 내려 분만 바르고 성적(成赤. 연지)은 삼가며, 명주와 고운 모시도 금하였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곱게 단장하였다. 곧이어 문이 열리니, 솥뚜껑을 밟으며 규수들은 하나씩 운명의 중희당(重熙堂)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간택이 끝날 때가 되어 모두가 기진맥진해 있을 즈음, 간택된 다섯 처자의 이름이 불렸다. 누구는 눈물을 훔치고 누구는 담담하게 나간 뒤, 남은 사람들은 상궁을 따라 다른 전각으로 옮겼다.
진지상이 차려져 있어, 허기를 급하게 – 물론 언제 누가 지켜볼지 모르니 최대한 조신하게 – 채웠더니 곧 상이 물려지면서 신정왕후가 직접 나왔다. 그러고서는 밀봉된 두루마리 하나를 조심히 뜯은 뒤 그 내용을 읊어 내려갔다.
“여러 규수들에게 묻는다. 지금 그대들은 나라의 지존과 가례를 올리려 이곳에 왔지만, 필경 다섯 중 넷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낙향한 뒤 이듬해 가친의 뜻에 따라 시집을 갔는데, 지아비는 할 줄 아는 것이 오직 군밤 굽는 것이 전부요, 일자무식에 다른 이렇다 할 재주도 없다. 이때 아녀자된 도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멀리 운현궁에서 대원군은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 신정왕후와 다섯 처자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 한 가지 오류가 있었으니, 전각 안 모든 사람들이 놀란 것은 사실이되 유독 한 규수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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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혼은 『국조오례의』에 그 절차가 나타나 있습니다만, 간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 내내 당색을 막론하고 조금 더 의례적 성격을 줄이고 현실정치적인 측면 (즉 사대부에 유리한)을 고려하여 관례를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목적이었는지, 끝내 순종의 국혼에 이르기까지 간택의 법도는 수시로 고쳐질지언정 주욱 고수되었습니다.
여담으로, 한 번 간택에 참여한 처자들은 평생 수절할 것이 요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후대의 낭설에 불과합니다. 실제로는 다들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