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1)
병인년(1866) 정월, 세배하고 덕담 주고받는 이 대신 조정 돌아가는 이야기로 일희일비하는 이들이 도성 저자를 메웠다. 그 사유를 들여다보면 크게 두 가지이니, 새해를 맞이하여 ‘조종(祖宗)의 기틀을 새로이 다지고 사직(社稷)의 강고함을 안팎으로 더하고자’ 성상이 경장(更張)의 윤음(綸音)을 내림이 하나요, 올해로 성상의 보령이 열다섯이라, 사내로서 통혼할 나이가 되어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림이 또 다른 하나였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이 일들이 여항(閭巷)의 이야깃거리가 된 까닭을 살펴보면 이러했다. 나라에서 경장이니 이정(釐整)이니 외쳤던 것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유독 이번에 중인(衆人)의 이목을 끄는 것은 위세 당당한 환재 박규수 대감이 직접 그 우두머리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무슨무슨 도감(都監)이니 청(廳)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대국의 새 법도에 따라 이름도 거창하게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라 하고 그 권한도 얼마 전 혁파된 비국(비변사)와 거의 비등하게끔 하였으니, 바뀌어도 무언가 크게 바뀌리라는 것은 식견 있는 자라면 누구든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한편 국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 수십 년 간의 관례로 보았을 때 항상 장동 김문, 어쩌면 풍양 조문에서 독점하였을 국모(國母) 자리였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그와 확연히 다름을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었다. 작년 양요(洋擾) 때 대원군과 세도가들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비미(卑微)한 집안들도 감히 단자(單子) 넣어볼 욕심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감고당(感古堂) 안주인 한산 이씨도 그런 이들 중 하나로, 수양아들 민승호(閔升鎬)를 시켜 금지옥엽 귀한 딸 자영의 처녀단자(處女單子)를 한성부에 제출케 하였다. 하지만 감고당 사람들이 무어라 생각하든 가례(嘉禮)의 상대가 누가 될지는 결국 주상이 결정하는 것이었고, 그 주상의 뜻은 다시 대원군의 마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터인데, 지금 그 마음이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아우님, 부디 재고해보시게. 종친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한미한 가문을 택함은 옳지 않으이.”
흥인군 이최응(李最應)이 간곡히 청했다. 형제들의 이름자에 모두 날 일(日)이 있는데 저 혼자 일(日) 대신 가로되 왈(曰)이 들어가 있으니 천생 왈짜(건달)라는 흉을 듣는 못난 형이었다.
“그래, 사대(四代)에 걸쳐 정비(定妃)됨이 상례가 아님은 나도 아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상도를 벗어나면서까지 저들을 챙겨준다면, 저 장동 김문이 종친들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는 셈인가? 때로는 야멸차게 내치는 것보다 너그러이 베푸는 것이 더 이로울 수도 있는 법이야.”
아마도 지금 흥인군이 대원군을 굳이 찾아와 이렇게 떼를 쓰는 것도, 저 혼자 궁리한 바가 아니라 김씨 형제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기 때문이리라.
“일찍이 주상께서 잠저에 계실 적 아우님이 영초(김병학)의 딸을 며느리로 받겠다고 한 일도 있다고 들었네. 아우님도 분명 마음 가는 바가 있으니 그리 말한 것 아니겠는가.”
형이 아직 장동 김문의 발아래를 기던 시절 이야기까지 거론하니, 가만히 듣고 있는 대원군의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저 이야기를 알 만한 사람이야 김병학·김병국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형님, 주상께서 영민하시어 뒤에 있던 발(簾)을 거둔 지도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상께서 바라시는 대로 할 뿐이고 가례도감은 간택(揀擇)을 도울 뿐입니다. 그러니 이 아우의 뜻이 중하다면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능청스레 시치미를 떼니 못난 형은 자못 답답한 모양이었다.
“이보게, 아우님. 자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곳이 어딘지는 나도 모르겠네만, 어쨌든 나라에 외척이 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일세. 외척이 전횡하는 폐단을 없게 하고 종친을 높이겠다고 한다면, 그나마 나은 자들이 김문이야. 자네도 대비(철인왕후)께서 얼마나 현숙하고 부덕(婦德)을 갖추신 분인지는 알지 않는가?”
“형님께서는 대비께서 현숙하심은 알고 그 일족이 우리 종친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는 모르십니까?”
“그래서 우리 아우님이 직접 도를 넘는 이들을 쳐낸 것 아닌가? 반면 다른 무리들은 아직 그렇게 김을 맨 적이 없지. 이제야 길을 들였는데 다른 외척을 들이면 안 되지 않겠나?”
톡 쏘아붙였지만 이최응은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대체 김병학이 무엇을 내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도 잘 구슬린 듯했다.
“반남 박문? 지금도 환재가 정승이 된 뒤 통리아문이다 뭐다 해서 설치고 있는데, 국혼의 인연까지 맺게 되면 얼마나 더 기고만장해지겠나? 김 충문공(김조순)이 성만 바꾼 격이 될 걸세.
풍양 조문? 그래, 금상께서 보위에 오를 때 도움을 줬다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네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지 않나? 외척으로 삼으면 화근이 될 뿐이지.
여흥 민문? 그 집안이 유독 기를 못 펴는 까닭이 어디 있겠나. 다 인물들이 용렬하기 때문이지. 저들이 외척이 된다면 성상의 교화에 누가 되면 되었지 결코 보탬은 안 될 것이야.”
“그만 하시지요, 형님. 말씀드렸듯 이 일은 오롯이 성심(聖心)에 달린 일이니 우리가 이곳에서 왈가왈부함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 군밤이나 드시지요. 문객 천 아무개가 구운 것인데 맛이 기가 막힙니다.”
암만 할 말이 많다 해도 입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먹거리로 막아놓으면 그만이다. 지난 번 양요에서 공을 세워 상급에 초관(哨官) 벼슬까지 받은 천덕만이를 억지로 계속 행랑살이하게 만든 덕을 이럴 때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이최응 말이 틀린 것은 아니어서, 그가 조용해졌다 한들 듣는 대원군의 마음이 온전히 평온해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김병학이 염치불고하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청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의 아내도 민문, 아버지 남연군의 아내, 즉 대원군의 외가도 민문이다. 거의 문중 사람에 준할 만큼 민문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대원군이 보기에, 민문은 정확히는 인재가 없다기보다는 딱히 벼리 될 자가 없어 문중의 힘이 한데 모이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것에 가까웠다. 설령 누군가 나서서 저들을 한데 묶으려 한다고 한들, 아마 장동 김문처럼 오래 집권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저 저 자신의 축재와 권세에만 신경 쓰면서 사분오열할 공산이 더 컸다.
그렇게 외척이 앞날 생각지 않고 전횡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집권은 공고해지고 대신 아들의 명망은 무너지게 된다. 망측하게도 ‘여인의 치마폭에 휘말렸다’거나, ‘여색에 뜻이 흐려졌다’ 운운하는 무리들이 적잖이 나올 것이요, 그만큼 외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우러러보는 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리라.
이러한 장구지계(長久之計) 하에서 그는 김문의 세도를 집어삼켜 집권하자마자 감고당 원 주인 심씨 일가를 내쫓고서 눈칫밥 먹던 과부 한산 이씨네를 대신 들어와 살게 하였다. 아내 민씨 말하기를 그 집 딸이 작은아들 관례 치를 무렵에 과년(瓜年)할 것이라 하였던 것이다.
감고당이 어떤 고사가 얽힌 고택인가. 같은 여흥 민문의 사람이었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장희빈의 농간으로 폐출되고서 다시 주상의 마음이 돌아오기만 고대하며 머물던 곳이다. 아마 과부 이씨 역시 식견이 있다면 제 속뜻을 알아서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계해년(1863)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비록 작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양요 당시 들끓을 뻔한 조정의 공론을 애써 잠재우고, 그때 공언한 대로 끝내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일 없이 자신의 귀하디귀한 실권을 통리아문에 넘긴 것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덕분에 대원군은 세력을 추스르고 다시 세도가들 사이를 이간질시킬 수 있었다. 한계원(韓啓源), 강노(姜<水+老>)처럼 주상이 확실히 자신을 신임함을 보고 편을 갈아탄 자들도 적잖이 있었다.
그런 아들이었기에, 자신의 권세를 확고히 하고자 아들이 제 뜻을 펴지 못하도록 만들기가 저어되었다. 형의 말대로 – 아마 그의 귓가에 김가 형제들이 흘린 말이겠지만 – 아들을 위해서라면 김문, 또는 김문이 아니더라도 유력한 가문에서 비(妃)를 맞이함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개화당을 제 파벌로 삼기 위해 박규수의 문중에서 누군가를 들이든, 개화당을 여차하면 견제하기 위해 형의 말대로 김문에 또 한 번 은총을 내리든, 어느 쪽이든 임금에게 보탬이 되기는 할 것이었으므로.
어쩌면 그가 방금 전 형에게 둘러댄 것처럼, 애초에 자신이 왈가왈부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저 아들에게도 이것이 최선이리라 스스로 여기면서 가볍게 마음을 정했겠지만, 이제는 그러려야 그럴 수 없었다. 형이 물러가는 대로 몰래 궁에 서한을 넣어 주상의 의중을 묻기로 마음을 굳혔다.
의정부 맞은편에 통리아문이 세워진 지도 거의 보름이 지났다. 그러나 실지로는 이미 작년 가을에 박규수가 대원군과 담판하여 나라의 제도를 더욱 새롭게 할 것을 합의한 뒤 옛 삼군부(三軍府) 자리에 새로운 기구를 마련할 것이 조정에서도 알려진 바, 총리대신 박규수 이하의 인선은 끝난 지 오래였다. 개중에는 미리 출근하여 사무할 준비를 해두는 열의 넘치는 관원도 드물지 않았다. 정초에는 말 그대로 현판(懸板)만 한 셈이었다.
신진 관료들이 대거 그 아문에 들어가, 날마다 새로운 법도를 고민하고 양이의 기물을 들여올 궁리를 하니, 조만간 제물포 옆 인천 고을에 큼직한 기기창이 생긴다, 양이의 신묘한 방직기(紡織機)가 들어와 양목(洋木)만큼 좋은 포목을 무한정 뽑아낼 수 있게 된다 하는 풍문도 돌음직하였다.
반면 그만큼 소식 늦은 선비들이 상경하여 이러한 조치는 아니 될 일이라 상언(上言)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다만 기정진(奇正鎭)처럼 그 이름 알려진 선비들만 글월을 올리는 것이 아니요, 온갖 유학(幼學)들이 잡스러운 이야기로 꼬투리를 잡는 경우도 많다 보니, 부디 상소를 쓰려거든 제대로 알고서 반박하라는 뜻으로 통리아문에서 경장의 절목과 그에 관한 문답을 정리해 순보(旬報)로 내었다. 종이 값이야 매일같이 올라오는 상소문을 씻어 쓰기만 해도 충당되니 큰 걱정이 없었던 것이다.
재작년 문과 급제해 벼슬길에 나선 민승호(閔升鎬)가 의붓동생 자영에게 건네준 것도 그러한 순보로, 내용을 살피자면 빈번히 올라오는 문의와 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한 것이었다.
글 앞머리에는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의 항의가 있었다.
“지금 귀 아문에서는 오랑캐와 통상하여 정교한 기물의 이익을 취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물산은 끝이 있고, 저들이 바다 건너에서 가져오는 물목에는 끝이 없습니다. 더욱이 저들이 가져오는 물건들을 살피면, 정교한 솜씨로 사람의 오관(五官)을 속이는 것입니다. ‘꾸밈이 그 바탕을 지나치니 겉치레에 불과한데 (文勝質則史)’ 이러한 외물(外物)이 퍼지면 곧 교화가 무너지고 정도가 사라질 것이니, 이에도 불구하고 통상의 이익을 논하는 까닭을 묻고자 합니다.”
그 뒤에 총리대신 박규수의 답이 있었다.
“지극한 의리를 밝히고 천하 만민을 바르게 함이 곧 도(道)의 쓰임이요, 그 도를 펼칠 때 의지하는 것은 곧 기(器)라 일컫는다. 주상 전하의 성단(聖斷)으로 양이와 교역을 허통하기 전부터 이미 양목(洋木)의 폐해가 있었는데, 이는 비유하자면 추운 겨울 헐벗은 사람에게 얇고 헤진 모시옷과 두텁고 화려한 갖옷 중에서 고르게 하면 열이면 열 갖옷을 고름과 같다.
그러나 이는 화려한 옷에 미혹된 것이 아니라 따뜻한 의복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검박한 풍속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솜옷을 주지 않는다면 이처럼 갖옷을 구해 입으려 할 것이다. 이것이 곧 적당한 기(器)가 없을 때 끝내 도까지 흐려지는 소이(所以)이다.
지금 나라에서 나는 물산으로 자랑할 것은 오직 쌀, 삼(蔘), 베에 그치니, 동래를 드나드는 왜인들이 이 품목만을 사 가는 데서 이를 징험할 수 있다. 그런데 쌀은 백성이 먹는 것이므로 함부로 외인들에게 내어줄 수 없으며, 삼은 과하게 심으면 땅을 해친다. 오로지 포목(布木)만은 그 이익은 크고 폐해가 적다.
살피건대 저들의 양목이 우리의 토산보다 나은 것은 길쌈하는 솜씨가 뛰어나서가 아니요. 길쌈하는 기기를 정교하게 갖추어 번개처럼 빠르게 수백 동(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저 기기를 들여와 양목만큼 승수(升數) 높은 포목을 만들어낸다면, 저들의 양목은 세상 반대편에서 실어오는 뱃삯이 있으니 어찌 우리와 비기겠는가?
이렇게 하면 나라에 양목이 들어와 귀한 재보가 새어나가는 폐단을 영구히 막을 수 있을 것이며, 도리어 우리가 쓰고 남는 만큼 청국과 왜국에 내어다 팔아 나라에 긴요한 서책, 동(銅) 따위를 들여올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근천(近淺)한 예이지만, 적절한 기로써 도를 도움(扶道)이 이와 같다. 어찌 이것이 화(華)로써 이(夷)를 다스리는 이치가 아니랴!”
자영은 간혹 세필로 옆에 방점도 찍고 뭐라 깨작이기도 하면서 이 문답을 읽어 내려갔다. 의붓오라비 민승호는 그런 동생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이 오라비지 실은 대원군의 아내 민씨의 친동생이므로 부녀간이라 해도 무방할 터울이었기에, 더욱 자영이 철부지처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얘야, 내 운현궁에서 전해 듣기로, 어차피 장동 김문과 풍양 조문 모두 대원위 대감 눈 밖에 났다 했다. 그러니 따로 부덕(婦德)에 있어 흠결(欠缺)만 없으면 될 텐데, 왜 굳이 이런 데 마음을 써서 스스로 꼬투리 잡힐 일을 만드는 것이냐?”
“오라버님, 제가 다 생각해두고 헤아린 바가 있어 이리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민문이 유력하다 한들, 상대들이 만만치 않다. 조그만 흠이라도 보인다면 저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지금 같은 때가 아니라면 우리가 또 언제 저들에게 비벼볼 생각이나 하겠느냐는 말이다.”
소싯적부터 말괄량이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민승호로서는 마음이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대에 들어 부쩍 한미해진 집안이다. 먼 친척 민치상(閔致庠) 정도를 제하면, 근래에 딱히 잘 나가는 친족도 없었으니 이번 국혼이야말로 다시는 없을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맹랑한 아이는 제 어깨에 가문의 앞날이 달려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하고자 하는 대로 날뛸 뿐이었다.
저 혼자 어설프게 남장을 하고서 운현궁 뒷골목을 들락거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했던 마음고생이 아직도 선했다. 대여섯살도 아니고 이제 슬슬 여인 모습이 나오는 아이가, 그렇게 장차 혼처(婚處)될 곳을 싸돌아다니지를 않나, 외간 남자랑 스스럼없이 얘기를 트다가 장래의 낭군(郎君) 되기를 바라는 이에게 걸리지를 않나. 금혼령 내리기도 전에 스스로 혼삿길을 막아버리는 듯해 그저 머리만 싸맬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어디 도망가지도 못하게 종아리를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아이를 상하게 했다가는 스스로 산통을 깨는 것과 매한가지였기에 참고 또 참았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까지 친정집을 전전하며 마음고생이 심했던 한산 이씨는 거의 쓰러지기까지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양갓집 규수가 『좌전(左傳)』을 즐겨 읽는다고 동네에서 종종 얘깃거리가 되는 아이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양서(洋書)도 곧잘 보면서 시무(時務) 논하기를 즐긴다는 험담이 어딘가에서 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운현궁 담장을 넘어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오라버님, 저들이라고 그러면 지금 사세가 불리함을 모르겠습니까? 문중의 일가친척을 모두 뒤져서 재색 겸비한 규수를 찾아 있는 단장, 없는 단장 시켜서 내보낼 텐데, 아무리 소녀가 일신의 자질이 뛰어나다 한들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더욱 『내훈(內訓)』을 달달 외우고, 길쌈과 집안일 배우는 데 진력(盡力)하여 인군(人君)의 배필 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 아니냐!”
“그렇게 해서는 오히려 굴러들어온 기회를 차버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 소녀가 그간 운현궁 주변에서 캐묻고 다니며 알아낸 바로는, 금상께서는 잠저에 계실 때부터 품은 기개가 남다르셨다 합니다. 지금 나라에서 신법을 펼치고 경장을 운운하는 것도 필히 그 뒤에 어지(御旨)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라버님 말씀대로 단자(單子)를 낸 다른 집안 규수들은 모두들 부덕을 갈고 닦았을 테니, 저 개화(開化)라는 것이 당최 무엇인지는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닭 무리 속의 학 한 마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오골계가 되어서 눈에 띄어야지요!”
자영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도로 대들었다. 자신을 어떻게 하려야 차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렇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한다 생각하니 더욱 얄밉고 괘씸했다. 그러나 누굴 탓하랴, 아이의 심성이 원래 저러한 것을.
“후... 그래, 부디 네 말이 맞기를 바랄 뿐이다.”
예로부터 사서(史書)를 즐겨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즐겨하고, 무엇이든 제가 생각하기에 그럴듯하면 그저 온 힘을 다해 달려드는 것이 이 아이의 품성이었다. 훗날 정말로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야 가문의 세를 크게 일으키는 중추(中樞)가 되어주기는 하겠지만, 자신만 옳다 여기고 남의 말은 도저히 들을 생각은 하지 않으니 그런 날이 오기도 전에 섬돌을 치워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두려울 따름이었다.
--- *** ---
자, 이렇게 드디어 민자영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과연 저 외골수 성격으로 비참한 운명을 피해갈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기에, 묘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름대로 주변인의 평가와 문헌상의 각종 근거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보려 했습니다만... 혹 그런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쪽지나 댓글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민자영의 집 감고당은 비록 역사적으로 민씨 문중의 것이기는 했지만, 이미 19세기에는 가문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청송 심씨의 소유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고종 즉위 직후 대원군이 손을 써서 집주인 심의면 부자를 쫓아내고 민승호에게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이 역사에서는 대원군의 집권이 1863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민자영과 고종 사이에 잠깐이나마 접점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면 남성의 혼인 적령기는 15세입니다. 물론 실제 조선 왕들의 국혼 시기를 보면 다 제각각이기는 합니다만, 좌우지간 작품 내에서 고종의 친정이 공식적으로 1865년 초부터임에도 불구하고 1866년에 국혼이 선포된 이유는 이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