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밤으로써 밤을 논하니 (3)
운현궁 노안당 처마 위로 손톱만한 달이 떴다. 여름 무더위도 이제는 옛말이라, 낮 동안 조금 달구어지나 싶었던 마당은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냉랭히 식었다. 이젠 바람도 밤엔 제법 쌀쌀하건만, 원체 돈과 공을 들여 지은 노안당이기에 외풍이 새들어와 정담 나누는 두 사람을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허허, 정녕 저자에 도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입니까.”
“소문이 요새 얼마나 부풀려졌는지는 나도 모르겠소만, 어쨌든 오밤중에 몰래 그 백 아무개라는 법국인이 들어와 주상 앞에서 제 잘못을 뉘우친 것은 사실이외다. 덕분에 영길리하고도 잘 이야기가 되었고. 이제 아라사를 방비하는 일만 남았으니, 모두 성상의 은덕이요 열성조의 보우가 아닐 수 없소.”
제법 그럴듯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건만, 어차피 집주인 흥선군이나 찾아온 박규수나 술에 마음이 있지는 않았으니 가득 찬 술잔은 헛되이 천장만 비출 뿐이었다.
“이렇게 참된 대업이 시작되는군요. 모쪼록 합하(閤下)께서도 이대로 함께 나라의 앞길을 헤쳐 나가는 일에 함께해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맞는 말이오. 이번 일로 지금 조정을 채우는 고관대작이란 자들은 믿을 게 못됨을 깨닫게 되었으니, 환재 그대와 그대의 당여들만 믿고 가야지.”
박규수 역시 연행(燕行)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곡절을 전해 들었다. 자신이 연경에 머무는 동안 법국 함대가 내방하여, 한 차례 난동을 부리다 제압된 뒤에야 통교하게 되었다 들었다. 그리고 그 전에 경솔하게 대원군의 초청을 받아 왔다고 입을 가벼이 놀리는 바람에 조정에도 한 차례 파란이 일 뻔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오직 일찌감치 개화에 어지(御旨)를 둔 금상이 있었기에 대원군이 아직껏 권세를 놓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암만 속으로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하더라도 겉으로는 개화의 쪽배에 함께 오른 사이인즉 박규수 일파와 함께하는 편이 타산이 맞는다. 한 쪽에는 조정의 일에 개입할 명분이 없고, 다른 한 쪽은 조정에서 제 자리를 지킬 권세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 연경에서 뜻하신 바는 잘 이루고 오셨소? 후기지수(後起之秀)들 중 쓸 만한 이는 있더이까?”
“전자의 물음은 이미 예부 자문(禮部咨文) 얘기를 들으셨을 테니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경신년(1860) 이래 외환과 내홍(內訌)이 잇따르니 암만 저들이 우리를 번국(藩國)으로 여긴다 할지라도 어찌 간섭할 요량이 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후기지수로 말하자면... 좀 웃긴 이야기지만 이번에 데려간 젊은이들 중에는 서장관(書狀官) 최익현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적들이 치고 들어올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굳이 그가 도성을 비웠던 것은, 물론 그만큼 신법에 대해 청 조정의 양해를 구하는 일이 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화당 영수로서 나라의 젊은 신료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다. 관례와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말단 서리(胥吏) 자리까지 개화당이 눈여겨본 젊은 인재들로 꽉꽉 채워서 간 연행이었다.
“아, 그 얘기는 들었소. 거 참, 화서 선생 문하에서 나온 이가 환재 그대를 따라다니다니, 세간의 호사가들이라면 꽤 떠들어댈 듯하오만.”
“비록 학통은 그러하다 하나, 눈썰미와 일을 처리하는 재주 모두 가볍게 볼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속에 품은 뜻이 원체 확고하여 굽히게 하긴 어렵겠습니다만. 덕분에 유리창(琉璃廠)을 샅샅이 뒤져 올 수는 있었지요.”
유리창은 북경 전문대가(前門大街) 옆의 골목으로, 천하의 고서(古書)와 기서(奇書)가 모두 모인다 하는 곳이다. 암만 새로 서책을 들여온다 하더라도 무엇이 보배이고 무엇이 허접쓰레기인지 가릴 수 있는 안목 없이는 어려운 일이니, 박규수가 최익현을 높이 보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래, 들여온 서책으로 이 땅에도 기기창(機器廠)이니 제조국(製造局)이니 하는 것을 세울 수 있겠소이까? 이번에 양이들과 교섭을 해 보니 병기의 위엄만한 것이 없었소. 얼른 겉핥기식으로라도 따라잡지 않으면 화란이 닥치지 않을까 두렵소이다.”
풀려나자마자 다시 전권대신으로 제물포로 내려간 신헌은, 염하에 좌초한 법국 배를 예인해주는 데 일손을 빌려주는 데 대한 보수로 저들이 사용하는 양총(洋銃) 수십 정을 받아내었다. 언뜻 보았던 모습을 흉내 내어 한 달 뒤 입항한 영길리인들과의 협상장에 저 총으로 무장한 군졸들을 호위 삼아 데려갔더니,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달라지더라고 신헌은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세에 불과함을 대원군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법국인들이 물러난 뒤 초지진과 광성보의 화포를 다시 살펴보니, 상대의 포에 맞아 망실된 것은 백에 한둘에 불과하되, 제대로 관리하지 않다가 갑자기 방포하면서 스스로 부서진 것은 열에 두셋이나 되었다. 또 그만큼 화약을 아끼지 않고 쏘아대었지만, 법국 배를 예인해주러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정작 흠집은 거의 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침 청국도 이를 깨닫고 열심히 공장(工匠)들을 모아 여기저기서 오랑캐의 무기와 배를 만들려 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박규수가 연경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금방 이 나라에서도 근사한 화포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였던 터였다. 그런데 웬걸, 이야기가 거기 미치자 박규수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대답보다 한숨이 먼저 나왔다.
“나라의 모든 동전을 거두어 한 번에 털어 넣고, 산과 밭의 모든 삼(蔘)을 뽑아서 팔아넘긴다면 어떻게 한 번은 값을 치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듣기로 영길리에서는 병기 대신 베 짜는 기기를 들여오고 덕대(德大. 광산업자)를 알선 받기로 하였다던데, 양이 덕대들이 어디서 금·은광을 찾아내지 않는 한 그들에게 삯 주기도 만만치 않을 듯합니다.”
“허, 그 정도란 말이오? 아무리 국용(國用)이 빈궁하다 한들 양이들의 기물 한두 점이야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사실 대원군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물포 앞 바다에 닻을 내린 양선이 얼마나 웅장한지, 또 빠르기는 어찌나 빠른지 모두 영종 첨사로부터 듣고 강화유수에게서도 고쳐들은 바였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 않는 것일 뿐, 못하는 것이 아니라 (不爲也非不能者)’ 생각했다.
“뾰족한 방도 하나쯤 없겠소? 그대도 그렇고, 그대가 교유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도 없지 않을 텐데. 하다못해 무슨 당백전(當百錢)을 찍어내서라도 양이의 화포는 들여와야만 하는 것이오. 이번에야 상대로 찾아온 자들이 우리를 자못 낮추어보았으니 그 의표를 찌를 수 있었지만, 우리의 병비(兵備)가 실은 저들을 당해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소.”
여독도 풀리지 않았는데 이 일로 마음고생도 꽤 했던 모양인지, 오늘따라 중늙은이 박규수가 앞의 ‘중’ 자 빼고 그냥 늙은이처럼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금 나라에 물산이 곤궁하니, 우선 지금 가지고 있는 데서 새어나감이 없도록 기강을 바르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듣기로 청국에 아편의 폐해가 심각한데, 우리 포삼이 그에 특효라 합니다. 우선은 이것으로 재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정(田政)에 손을 대어 경자(耕者)들에게 논밭이 돌아가게 하면 소출이 절로 늘 것이요, 이왕 교역을 허한 김에 거두기로 한 포조(浦租) 대신 관세(關稅)를 걷게 되면 또한 나라의 살림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영길리인들이 데려올 덕대들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나랏일을 생각할 때 요행을 바라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 나라 삼천 리 강역에 아직 발견치 못한 광산이 하나쯤 없겠습니까? 최소한 지금 대국에서 우리더러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하려 하라 했으니, 설령 금이 난다 할진들 그 소출을 조공으로 바치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나라의 곳간이 3년은커녕 한 해 거두어 한 해 버티는 정도이니, 나라가 나라꼴이 아닌지(國非其國也) 꽤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나라의 법제를 모두 일신(一新)하지 않고서는 다할 수 없습니다. 국정을 운영함에 이익을 논하지 않음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경장(更張)의 뜻을 크게 떨치지 않고서는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서 박규수는 아마도 연행길 내내 고민하였을 방책을 이야기하였다. 요컨대, 청국에서 ‘총리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두어 양이와 통교하고 자강의 수단을 마련함을 총괄케 하는 것처럼, 조선에서도 비슷한 관청을 따로 두어 나라를 뜯어고치는 일을 도맡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 그러한 방도의 전모를 모두 밝히는 것은, 환재 그대가 그 새 아문의 수장 자리를 얻어내고자 하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소?”
박규수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결국 박규수의 말은 자신을 믿고 대원군 제 몫의 권력까지 맡겨달라는 뜻과 진배없었다. 지금 어심(御心)이 개화에 쏠려있음이 명명백백함에도 조정에 장동 김문을 위시한 유력가들의 자리가 남아있는 이유는 개화당 사람으로 당상(堂上) 오른 자가 오직 박규수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하였으니 홀로 조정의 여론을 감당하면서까지 경장(更張)을 밀어붙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별도의 관청을 두어 그곳에서 군국의 사무를 모두 처리하게 만든다면, 다른 자들의 눈치 볼 필요 없이 홀로 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 있게 된다. 얼마 전 혁파한 비국(備局. 비변사)을 다시 만드는 격 아닌가 싶어 께름칙하기는 했지만, 박규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싶었다.
“내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소. 아직 여독도 다 풀리지 않았을 터인데 고생이 많구려.”
인정이 치기까지는 아직 족히 반 시진은 남아, 돌아가는 길에 달을 완상(玩賞)할 여유가 있었다. 문득 귀국하던 중 봉황성(鳳凰城)에 머물 때가 떠올랐다.
일행은 기나긴 사행길이 어느새 끝을 보이고, 또 목표로 삼았던 바도 그럭저럭 이루었기에 다들 꽤 풀어진 분위기였다. 마침 성의 수령 노릇 하는 이가 노고가 많았다며 연회를 베풀어주어, 마실 사람은 마시고 노닐 사람은 노닐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그들과 더불어 즐길 수가 없었다. 예부에서 내려준 자문이, 겉으로 보기에는 조선이 스스로 신법을 창안하여 시행함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내용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더 섬뜩한 속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연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나와 밤하늘 보름달을 보고 있는 젊은이, 최익현도 자신과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또래 젊은이들의 강권에 끝내 술잔을 거절하지 못했는지 볼은 조금 발그레해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하였다.
“그래, 면암. 달은 볼만 한가?”
살짝 떠 보았더니 바로 우수 어린 답변이 돌아왔다.
“달은 밝지만 주변이 온통 칠흑이니 그저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때 저 달이 실은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라 설명해준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린 모양이로군그래.”
“예, 맞습니다. 대감. 그 빛이 대국의 정병(精兵)이었다면 이미 쇠한 지 오래요. 정학(正學)이 그 빛이었다면 곧 양이가 내세우는 금수의 도에 삼켜지고야 말 텐데,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예부에서 내려준 자문의 말미에 이르기를, 대국 또한 사정이 있는데 조선이 스스로 나서 그 근심의 일부를 덜어주니 참으로 기특하다 치하하면서, 다만 멀리서 지켜보는 은덕을 베풀 뿐이라 했다. 다시 말해 아마 지금쯤 조선에 도착했을 법국인들이 무엇을 하든, 또 그 뒤를 이을 영길리가 무슨 행패를 부리든 오롯이 조선이 알아서 할 일이며, 다만 언젠가 다시 돌아와 상국 노릇은 하겠다는 것이다.
“애초에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비할 만한 도움을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간 안에서야 숭정후(崇禎後) 연호를 쓸지언정 겉으로는 열심히 속방(屬邦)의 예를 갖추었거늘, 돌아오는 것은 암만 미사여구로 포장하였다 하나 우리를 방기(放棄)하겠다는 선언뿐이지 않습니까?”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이리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니 취기가 오른 듯하기는 했다. 비록 아직 요동이라지만 조선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다. 다행히 박규수가 양 옆을 살펴보니 딱히 누가 있는 듯하지는 않았다.
“지금껏 대국을 자처했던 저들이지만 정작 제일의 번병(藩屛)에 대해서조차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다른 양이를 불러와 균세(均勢)를 노릴 뿐입니다. 대국조차도 어찌 하지 못하는 양이를 우리 조선이 홀로 견뎌낼 수는 있겠습니까?”
애초에 국초만 하더라도 북변에 붙어 겨우 먹고살던 여진 야인(野人)들을, 나라를 이루어 중원을 삼킨 뒤에는 불만을 참고서라도 대국으로 불러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순 이래 천하의 가운데 땅(中國)을 얻은 나라들은 모두 당해낼 이 없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바다 건너에서 새로운 오랑캐들이 건너와 중원을 노략질하는데도 대국을 자칭하는 나라는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과연 대국이 약해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새로 나타난 이 코 큰 무리들이 파천황의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인가? 국운이 기운 지 오래인 조선이 홀로 노력한들, 이 무섭게 변화하는 천하의 대세 속에서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서양과 통교하여 나라를 부강케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해 왔던 박규수였지만, 막상 이렇게 냉엄한 현실과 직면하게 되니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지금껏 바른 도를 고수하면 나라를 지키고 천하를 바르게 할 수 있다 믿어왔을 이 눈앞의 젊은이는 오죽했겠는가.
그때 그는 이렇게 최익현을 달랬다. 자신이 낸 신법을 보지 않았느냐고. 밝으신 주상과 함께 만든 이 신법으로, 살아남을 뿐 아니라 나라를 도로 흥성케 할 단초를 얻지 않았느냐고. 천지의 운수가 태음(太陰)으로 향한들 저 달처럼 빛날 방도가 아예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라고 둘러대며, 반신반의하는 최익현에게 숙소로 물러나 쉴 것을 청했다.
지금 운현궁에서 대원군이 자신에게 기대한 것도 그것이었다. 무언가 꾀를 내어 보아라. 그 동안 너 홀로 잘난 체 하며, 무슨 방책이라도 있는 양 거들먹거리지 않았더냐.
우습게도, 돌이켜보면 이렇게 뭇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에서 나오는 계책을 기대하는 모습이야말로 지난 수십 년간 그가 은밀히 꿈꿔왔던 바였다. 어렸을 적 지구와 태양의 운행에 대한 시를 지어 주변 어른들을 놀라게 했을 때부터, 그는 어쩌면 자신이 이처럼 뛰어난 인재임을 인정받고 싶어 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제물포 앞바다에 시커먼 연기를 뿜는 이양선이 정박하고, 무시무시한 화포로 심도(沁都. 강화도)를 위협하였다는 얘기를 듣자 그 또한 마음이 절로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나라를 구할 계책이라고 떠들거나, 서재에 홀로 앉아 무슨 비책(祕策)이라도 내는 것처럼 붓을 놀리는 것과는 그 중압감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속으로 들끓는 의심을 누르면서, 그는 계속 제갈무후의 흉내를 내어야만 했다. 그마저도 겉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 될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껏 헤아리고 궁리한 바가 어떻게든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신법을 세움으로써 - 이른바 을축변법(乙丑變法)이다 - 나라를 일신하는 첫 발판을 마련하는 데는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계책을 자아내도록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주상이었다. 이제 내년이면 국혼(國婚) 얘기가 나올 주상이었지만, 아직도 박규수는 임금이 처음 그를 불러서 군밤을 하사하였을 때가 눈앞에 선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희망이었던가. 그리고 그 희망이 연초에 서신을 주고받고 독대하면서, 신법이라는 첫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어쩌면, 제 머리 위의 저 달처럼, 이 나라 조선도 한 번 이지러진 뒤 다시 차오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벨로네 백작과 로즈 제독이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기 위해 조선을 엉뚱하게 포장하여 보고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서양에서도 조금씩이나마 관심을 끌게 되었음은 알 리 없는 박규수였다.
북경에 돌아간 벨로네는 조선이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준(準) 문명국’이며, 어리석은 군인으로 인해 비극적인 갈등이 발생할 뻔 했지만 자신의 언변과 재치로 동양의 평화와 문명 진보에 기여하게 되었다 주장했다.
반면 로즈 제독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해 책임을 면하기 위해 ‘반(半)문명국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군대를 가진’ 조선에 대해 무모한 군사작전을 지시한 벨로네를 탓했다.
이 착각, 두 사람이 각자 부풀려서 보고한 조선의 첫 인상이야말로 어쩌면 얼마 전 체결된 『조불수호조규』보다도 조선에 더 큰 자산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후기지수(後起之秀)는 무협에 하도 많이 쓰이는 단어라 작가들이 창작한 말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엄연히 『진서(晉書)』와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 출전을 찾을 수 있는 고사성어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박규수는 1860년과 1872년에 연행사로 북경을 다녀옵니다. 1860년에는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청이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고 위기의식을 품게 되지만, 1872년에는 동치중흥(同治重興)의 겉보기 성과만을 보고서 오히려 생각만큼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상황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역사에서는 아직 양무운동이 막 시작될 무렵 – 심지어 ‘양무운동’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 – 에 북경을 다녀왔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었습니다.
한편, 박규수는 흔히 실학자로서의 면모만 생각하기에 정치와 그리 연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여러모로 권력의 실세로서의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제자 박영효를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부마로 추천한 것도 그였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원군의 신임을 바탕으로 얻은 권력이었기에, 아무리 개국을 주장해도 대원군의 척화론과 반대되는 길이었기에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대원군이 실각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박규수 역시 쓸쓸하게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지요.
서장관은 정사와 부사와 함께 삼사(三使)로 불릴 만큼 꽤 비중이 있는 자리입니다만, 정사·부사와는 달리 비교적 젊은 관료들, 특히 사헌부의 간관을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항로의 학통을 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절차상으로만 따지면 최익현이 연행에 따라가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는 있는 일입니다.
한편, 달이 태양광을 반사해 밝게 빛난다는 사실은 의외로 19세기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 그러나 아는 사람만 아는 – 과학적 지식이었습니다.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의 글을 번역한 『담천(談天)』이 동아시아에 퍼지기도 하는 등, 19세기면 관심과 부를 가진 선비라면 어느 정도 서구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는 데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