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밤으로써 밤을 논하니 (1)
율란(栗卵)의 제법은 다음과 같다.
삶은 밤의 알맹이를 으깨어 꿀과 계피가루를 넣고 반죽해준다. 꿀만으로는 단맛과 향이 온전해지지 않을 수 있으므로, 여차하면 반죽에 소금도 적당히 넣어 준다. 그 뒤 반죽을 빚어 얼추 밤 모양을 되찾게 한 뒤, 고명을 살짝 얹어주면 끝난다.
군밤보다야 복잡하지만, 밤 굽기가 그러하듯 여기에도 깊은 도가 있으니, 밤마다 영근 정도가 다르고 또 향의 얕고 깊음이 다르므로 이를 살려야 한다. 비슷한 것들을 모아 따로 삶고 또 으깨어 반죽하면, 각각의 맛에 맞추어 꿀과 계피, 소금의 비율을 달리할 수 있으니 달콤한 밤은 달콤한 대로, 구수한 밤은 구수한 대로 그 맛의 궁극을 능히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생에서는 이렇게 하고 싶어도 밑천이 없어, 언제는 번데기 장수 노릇, 또 언제는 ‘민속과자’ 장수 노릇을 하며 여름을 보내었다. 그러나 이제 밤 다루기를 생업이 아닌 취미로 삼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작년 여름 이래로 종종 상궁과 내관 몇몇과 모의하여 이 수련 아닌 수련을 해 왔던 것이다. 한여름까지 질화로 가져다 놓고 군밤을 구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옥수(玉手)에 밤이 묻게 할 수는 없으니 그는 그저 밤을 식별하고, 각각에 맞는 조리법을 일러주고, 맛보는 일만 하였다. 비록 올해는 대비가 철렴(撤簾)을 선포하여 지난해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지만, 지난해에 쌓아둔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으므로 훨씬 수월하게 조리할 수 있었다.
일국의 왕이 슬슬 야참 올릴 시간인 수라간을 수고롭게 하는 이유는 곧 손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한창 석강(夕講) 중일 때 운현궁에서 기별이 와, 엊그제 조정에서 논의한 대로 법국인들에게 통첩을 하였더니 저들이 받아들여 신헌과 남종삼 두 사람을 석방하였으며, 두 사람 다 운현궁에 잠시 머물며 놀란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하였다.
또한 서한 가장 안쪽에 또 얇은 두루마리 한 장이 밀봉되어 있기에 펼쳐보니, 저들과 함께 저 백 아무개라 하는 법국인 우두머리가 상경하는바, 대동하고서 오늘 밤 몰래 알현코자 하니 비답을 기다리겠다는 대원군의 친필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대원군을 믿고 맡기기로 이미 결심을 내린 터. 윤허(允許) 외에 다른 답이 있을 리 없었다. 잘난 것 없는 그를 도와 무너져가는 나라를 그나마 지탱해줄 사람이 대원군 아니던가. 최소한 귀남이 알던 몇 안 되는 과거사의 지식에 따르면 그러하였다.
그러니 이 늦은 밤까지 자신의 요청으로 인해 중차대한 국사를 돌보아야 하는 대원군을 위로하고자 율란을 빚고, 또 통역으로 올 남종삼은 포로로 잡혀 마음고생을 하였는데다가 쉬지도 못하고 도로 불려오게 되었을 터이니 그 노고를 생각해 또 율란을 더 빚는다. 비록 행패를 부리다가 뜻을 접혀 숙이고 들어오는 처지라고는 하지만,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공력을 들였을 것이니 그 백 아무개라는 프랑스인을 위해서도 또 조금, 계속 빚다 보니 저도 군것질이 당겨 자신이 먹을 것까지 조금. 그리고 이왕 이만큼 한 것 수고로운 일을 도맡아한 궁인들에게 나누어줄 것까지 해서 조금 더.
이렇게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옆을 지키던 상선(尙膳) 윤형은(尹衡殷)이 고개를 숙이며 여쭈었다.
“전하, 이미 때가 해시(亥時)에 가까우니, 곧 대원군이 입궐할 것입니다. 어디로 들라 이르면 되겠나이까.”
잠시 곰곰이 생각한다. 국사 돌보기 귀찮을 때마다 후원으로 도망하는 일이 적잖았으니, 지리 정도야 꿰고 있다.
“기오헌(寄傲軒)이 호젓하니 좋겠다. 상선은 가서 주변을 소제(掃除)케 하라. 대원군과 더불어 입궐할 입이 적지 않으니 그들 몫까지 다 빚으면 가도록 하겠다.”
입궁해도 좋다는 기별을 확인하자마자 대원군은 길을 나섰다. 마포 대신 모래내(沙川) 쪽으로 올라와 은밀하게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온 법국인 백가(벨로네) 일행 중 이경하와 신헌은 운현궁에 머물며 내일 아침에 입궐토록 얘기해두고, 이복명(리델)은 적당히 치사한 뒤 내보냈으니, 호위하는 자들을 빼면 따르는 것은 역관 노릇할 남종삼과 화근 덩어리 백가 이렇게 둘 뿐이었다.
혹 주변 이목이 있을까 싶어 미리 패거리를 풀어 단속해둔 덕에, 간혹 마주치는 행인들은 보아도 보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가갈 한 번 하지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니, 공북문(拱北門) 밖에 내관이 호위하는 이들과 함께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기오헌으로 들라 하십니다.”
“기오헌이라! 상께서 실로 옳게 정하셨으니 찬탄할 뿐이오.”
어찌 적절하지 않은가. 하는 짓을 보면 여전히 철부지 같건만, 가끔 이렇게 속을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호부(虎父) 아래서는 운이 좋으면 호자(虎子)가 나오고, 여의치 않으면 견자(犬子)가 나옴이 온당할 텐데, 제 아들인 주상은 그 마음을 쉬이 헤아릴 수 없으니 혹 용(龍)은 아닌가 싶었다.
대보단(大報壇)을 우회하여 후원 쪽으로 들어서면서, 대원군은 문득 상념에 잠기었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이르기를, ‘남쪽 창가에 기대어 오만함에 마음 맡기니, 무릎만 겨우 들일 좁은 집에서도 편안함을 찾는다 (倚南窓以寄傲 / 審容膝之易安)’라 하였다. 훗날 경복궁을 다시 지을 생각에 지금 있는 궐내의 전각들의 내력과 기능을 조사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듣기로 기오헌은 저 시구에서 그 이름을 따와, 익종(효명세자) 생전 국사를 돌볼 때 간혹 들려 홀로 독서하던 곳이라 했다.
그러니 ‘오만함에 마음 맡김(寄傲)’이라 함은 본디 시인이 뜻하기로는 제 처지를 자랑스레 여긴다는 말이었겠지만, 익종이 저리 당호(堂號)를 붙일 때는 대리하여 청정(聽政)할 무렵이니, 임금의 권위에 기대어 나라의 권세를 되찾겠다는 포부가 담겼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아들이 자신을 하필 기오헌에서 맞이하겠다 함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수완을 믿고 지금의 대사를 맡기겠다는 속뜻이 담긴 것이리라.
물론 사람의 이목을 피하여 몰래 입궐하는 것이고, 영 불편한 객 한 명을 대동하고 가는 길이므로 후원 한쪽 한적한 곳에 자리를 마련하려다 저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원군은 그보다는 제 아들이 깊은 뜻을 품었기에 저리 하였으리라 여기며 기꺼워했다.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로 아들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끼던 차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저 법국인들의 함대가 영종진에 들렸을 때 허투루 혀를 놀린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일전의 다른 이양선들처럼 그저 국교를 트고 통상할 것을 청하고자 왔다고 하면 될 일을, 굳이 ‘그대 나라의 섭정이 불러서 왔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일이 이렇게 될 수 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영종진 첨사야 도성의 사정을 알래야 알 턱이 없은즉 자신이 문정한 바를 그대로 조정에 고하였고, 덕분에 제물포 바닷가에서 사달이 나기도 전에 조정은 한바탕 난리를 미리 치러야 했다.
“지금 대비께서 철렴하시어 정사에서 물러나심이 어언 넉 달 째이건만 어찌 이 나라에 섭정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일은 앞뒤를 세세히 헤아려, 혹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고자 저들 오랑캐를 끌어들이려 한 자가 없는지 살피고 엄중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김좌근이 칭병(稱病)하여 기로소(耆老所)로 물러나면서 영의정 자리를 꿰어 찬 조두순(趙斗淳)이 먼저 꼬투리를 잡았다. 그간 개화파와 손잡고 국정을 장악하다 보니, 다른 거족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도성의 유력가들이 대원군 자신의 뜻을 순순히 따른 것은, 결코 자신의 집권을 흡족히 여김이 아니요, 그저 장동 김문이 홀로 세도를 잡음을 질시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명문가들과 줄이 닿아 있는 박규수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 그는 신법에 대해 대국의 양해를 구하고자 연경에 사행을 가 있었다. 장동 김문의 위세가 무너지고, 박규수까지 자리를 비웠는데 마침 물어뜯을 좋은 건수가 나타났으니, 임금에게 직소하여 대원군 자신의 발밑을 꺼트리고자 달려든 것이리라.
그 다음날, 제물포에 오랑캐 함대가 상륙하여 양민을 살상하고 관원을 잡아갔다는 인천부사의 급보가 올라온 뒤에는 자신을 탄핵하는 여론이 더욱 비등하였다.
“계해년(1860) 연경에서 오랑캐가 소동을 벌인 일의 전후를 살펴보면, 필히 그 가운데 공친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자의 숙부된 자로서, 주공(周公)의 예를 따르지는 못할망정 오랑캐들의 기물과 재화에 마음을 빼앗겨,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오랑캐를 물리치기는커녕 강화를 주선하였으니 이는 인정(人情)이 아니며 신도(臣道)는 더욱 아닙니다.
대저 나라의 강상(綱常)이 어지럽혀지는 근원은 이익만을 탐하여 화망(禍亡)이 찾아드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전하께서 신법을 펼쳐 그 아름다운 덕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지금 저 오랑캐 무리는 이를 걷어차 개흙 사이에 빠뜨렸으니 그 본성이 금수를 넘지 못함이 이로써 밝혀졌습니다. 부디 상께서는 깊게 살피시어, 나라 안에 혹 공친왕과 같은 이가 있어 사사로이 저들과 화친하려 하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주시옵소서.”
이는 다름 아닌 좌의정 유후조(柳厚祚)가 올린 상소였다. 그를 필두로 대원군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궁궐은커녕 도성 구경도 못했을 자들까지 탄핵에 동참하였다. 한 번 입궐하면 임금은 가깝고 대원군 자신은 운현궁에 떨어져 있으니, 이렇게 직소하여 어심을 흔들면 마침내 자신을 내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리라.
애초에 임금의 생부된 자가 섭정하는 전례도 없었거늘, 공식적으로 임금이 성인이 된 뒤에 국정에 손을 댈 명분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찌를 엄두를 내지 못한 정곡을 이제는 누구든 나서서 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수가 자리를 비우니 개화파는 그저 우왕좌왕할 뿐이고, 그간 자신에게 원한이 있던 장동 김문의 잔당들도 대놓고 무어라 입을 열지는 않아도 결코 대원군 자신의 편을 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끓어오르던 여론은 임금의 비답 한 번에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경들이 국사를 생각함이 이처럼 지극하니 사직의 큰 복이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홀로 잘못 헤아린 데 그 까닭이 있으니, 경들은 헛되이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도록 하시오. 아라사인들이 경흥부에서 소란을 일으키니, 몰래 이이제이의 술책으로써 이를 방비하려 한 것인데, 과인이 부덕하고 어리석어 지금 같은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소.
지금의 소란이 끝나면, 내 마땅히 잘못한 일을 반성하여, 국사를 행함에 매양 제신(諸臣)의 중론을 경청토록 하겠으니 우선은 당면한 화를 다룰 대책을 마련토록 하시오.”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킨 것이 오롯이 임금 자신의 탓이라 하니, 사태가 진정된 뒤라면 모를까 당장 지금 무어라 더 말할 수도 없으며, 대원군에게서 책임을 찾는 것은 더욱 하지 못할 일이 되어버렸다. 그 대신 지금껏 쌓아올린 왕의 권위는 적잖이 손(損)을 보았으며, 어쩌면 국정을 논할 때마다 이 일을 핑계로 발목을 잡힐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대원군은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왕으로 만들어준 것을 빼면 딱히 해준 것도 없는 아비였는데, 홀로 국정을 농단하려 한다 원망하기는커녕 무엇을 믿고서 자신을 저리도 비호해준다는 말인가?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으리라 짐작하는 대원군으로서는, 임금의 속마음을 헤아리려야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원군 자신이 지닌 일신의 재주가 출중하고 임금은 용렬하다 할지라도, 결국 권력을 탐하는 것은 누구든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자신이 지금 임금의 나이였을 때만 하더라도,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어 글공부는 제쳐놓고서 알량한 계획을 꾸미고 또 꾸미지 않았던가.
그런데 임금은 원한다면 말 한 마디로 아비를 내치고 아비가 일구어놓은 권력의 기반을 냉큼 집어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다. 입궁하기 전날 사랑방으로 불러서, ‘이 나라 조선의 모든 것이 응당 누구의 손에 있어야 하는지’를 잊지 말라 당부하였던 아비가 아니었던가. 마음속 군밤장수를 죽여 없애고 오직 왕실의 위엄을 높일 궁리만을 하라고 일러주지 않았던가.
조정의 공론이 저와 같이 벌떼처럼 일어났으니, 임금의 말 한 마디면 자신은 끈 떨어진 뒤웅박이 되었을 것이며, 만일 임금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삼으려 한다면 오랑캐와 결탁해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는 죄목까지도 씌울 수 있을 터였다. 아마 대원군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리 아비라 할지라도 필히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로, 임금은 자신이 망신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생부를 지켜주었다.
못난 아비 고수에게 효행을 다한 순(舜) 임금의 고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들이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저처럼 어진 이로 남겠다 한다면, 그 손에 피가 묻지 않도록 미리 더러운 일을 모두 끝내놓는 것도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리라. 그것이 흥선대원군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그러니 지금 마음을 두어야 할 일은, 주상의 마음속이 어떠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열심히 두리번거리면서도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이 오랑캐 젊은이를 벗겨먹을지 궁리하는 것이었다.
국외인은 물론이요 같은 조선 사람도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 이곳 궁궐이요, 그 구중궁궐 안에서도 이곳 후원(後苑)은 차라리 비원(祕苑)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큼 은밀하고 그윽한 곳이다. 게다가 때가 그믐 즈음이라 해가 넘어가자마자 암흑천지가 되었지만, 앞에 길잡이 하는 내관이 청사초롱을 들었기에 그 불빛에 비추어 후원의 경치가 더 신비롭게 보였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라도 요지경이라 여길 법한데 이 청년은 어떻겠는가.
내관의 뒤를 따라 일행은 곧 기오헌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상선 윤 모(某)가 지키고 있을 뿐 아직 임금은 오지 않은 듯했다.
“상께서는 아직 못 다하신 바가 있어, 소관에게 먼저 와 지키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우선 편히 계심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임금을 섬돌 위에서 맞이할 수는 없는 법이니, 우선 안에 들었다. 남종삼이 이곳에서는 신발을 벗는 것이 예임을 설득하느라 꽤나 애를 먹기는 했지만.
어린 임금이 자신을 신임해주었으니, 왕림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도의에 맞겠지만, 우선은 그 전에 기선을 확실히 제압해둘 필요가 있었다. 저들의 기세가 강성하고 자신은 저들의 사정을 모르는 상황이라면야 몸을 사리고 상대를 파악하는 데 치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복명을 쥐어짜서 관련된 정황을 최대한 알아두었으며, 또 전해 듣기로 저들은 문수산성을 치려던 중 패퇴하여 물러갔을 뿐 아니라 전선 두 척은 조수에 휘말려 모래톱 위에 올라앉았다 했다.
그리고 약점을 잡힌 사람을 을러대어 제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라면 단연 대원군이 파락호 시절부터 갈고닦은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딱딱 들어맞는 상황을 만들어준 것도 아들의 효성에 감복한 천지신명의 보우가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잠시 하면서, 대원군은 양혜왕(梁惠王)에 스스로 빗대며 말하였다.
“젊은이가 멀리서 만리(萬里) 길을 멀다 않고 와 주었으니, 이로써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것이 있지 않겠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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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얘기지만, 실제 율란을 만들 때는 그냥 밤을 한꺼번에 삶아서 으깹니다. 산신령을 감복시킬 만큼 밤에 통달하지 않은 한 저렇게 따로따로 삶아서 반죽한들 딱히 맛이 좋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집에서는 따라하지 마세요.
실제 역사에서도 조선 조정의 척화파들은 제2차 아편전쟁의 전개 과정에 공친왕 이힌의 잘못도 있다고 여겼던 듯합니다. 승정원일기에서 공친왕이 언급되는 것은 크게 두 차례인데, 철종 연간 문안사로 열하를 다녀온 사신이 북경의 정황을 보고할 때는 비교적 중립적으로 나오지만, 이후 그에 대한 언급이 끊겼다가 신미양요 당시에 재론됩니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척화론의 입장에서 ‘공친왕이 화친만 안 했어도 저러지는 않았다.’, ‘아마 오랑캐의 뒷돈을 챙겼을 거다’ 등의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지요.
어쨌든 여기서는 이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조선이 근대적 국제관계를 수립할 단초가 생겼습니다. 기괴하고 복잡한 19세기 서세동점의 정세 속에서 어떻게 대원군과 군밤왕이 기회를 노려나갈지, 앞으로 지켜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