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연평 바다에 바람이 분다 (1)
북경의 5월은 봄이라기보다는 이른 여름에 가까워, 공기는 말라가고 슬슬 햇빛이 뜨거워질 때다. 허나 공왕부(恭王府) 후원의 무성한 수목 사이로는 그나마 선선한 바람이 감돌아, 잔에만 머물던 작설차(雀舌茶)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얼마 전 새로 큼직하게 제작하여 벽에 걸어둔 『만국전도(萬國全圖)』를 감상하는 두 사내의 복잡한 머릿속을 달래주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향이 매우 좋으니, 가히 명품이라 할 만합니다. 공친왕(恭親王) 전하.”
생긴 것은 항우(項羽)이되, 그 속은 능구렁이니 유방(劉邦)과도 같다는 평을 듣는 육 척 거한 이홍장(李鴻章)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소전(少筌) 그대도 좋다 하니 다행이네. 검남(黔南. 귀주성 남부)에서 올라온 백모첨(白毛尖)일세. 하도 영국 놈들이 사가서, 요새는 상등품 차로 말할 것 같으면 부르는 게 값이라지.”
언뜻 왜소한 듯하나 자세히 보면 체구가 옹골차고 눈빛이 형형해 여간내기가 아님을 범인(凡人)이라도 쉽사리 알 법한 이 사람은 바로 집주인 아이신기오로 이힌(奕訢), 공친왕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기 걸어두신 지도도 영국인들이 만든 모양이군요.”
“하, 역시 그대는 명석하군. 글씨를 읽은 겐가? 내 눈에는 다 같은 박새 발자국인데.”
“분명 구주인들에게 시켜 제작하셨을 터인데 감히 천조(天朝) 대신 영국 격림위치(格林威治. 그리니치) 현을 가운데에 둔 지도를 만들어놓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로 방약무인한 자라면 아무래도 영국인들이겠지요.”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네. 오히려 스스로 담금질하게 만들어주지 않는가. 부차(夫差)마냥 쓸개를 매달아놓고 핥는 것보다야 이게 훨씬 낫지. 보기에 좋기도 하고.”
공친왕의 너스레에 가벼운 웃음이 돌아왔다.
“그보다, 우선 당면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불렀다네. 아무래도 요새 양인(洋人)의 동향은 그대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는가.”
“과찬이십니다. 전하.”
듣기에 썩 성의는 없는 겸양이었지만, 어쨌든 사실이 그러할진대 무어라 하겠는가. 그래도 곧 나올 이야기가 천하의 시무에 관한 것임을 짐작했는지, 이홍장의 표정도 진중해졌다.
“일전에 서신으로 말씀주신 것처럼, 지금 조선의 성절사(聖節使)가 입조(入朝)한 일은 예사롭지 않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제일가는 번국(藩國)이라 하나, 동지사(冬至使) 편으로 함께 올라옴이 통례이지 않았습니까.”
성절사란 곧 천자의 탄신일에 맞추어 보내는 조공 사절이다. 물론 실제로는 매해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보내는 동지사(冬至使)가 겸하여 수행할 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공식적으로 ‘성절사’라는 사명(使名)을 내세워 입조함은 확실히 이례적이었다.
“그렇지. 저들이 성절사를 제때 보낸 게 과연 아조(我朝)가 입관(入關)한 이래 몇 번이나 될 것 같은가? 심지어 함풍(咸豐) 10년(1860. 제2차 아편전쟁)에도 동지사를 문안사(問安使)로 삼았을 뿐 따로 사행을 보내오진 않았다네.”
“그만큼 저들이 입조하여 우리 조정에 아뢴 ‘신법’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뜻이리라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자강(自强)을 꾀함을 전해 듣고 따라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번국으로서 대놓고 외국과 통교할 수 없으니 양두구육(羊頭狗肉)의 형세를 갖추려는 게 아닐는지요.”
역시 이 자와는 그나마 말이 통했다. 아직도 세상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며, 또 돌아야만 한다고 여기는 조정의 어리석은 무리들과는 결이 달랐다.
“허나 듣기로 조선의 물산은 심히 곤궁하여, 내세울 만한 물건은 인삼이 전부라 하였습니다. 양인들은 오직 이익만을 좇아 움직이거늘, 조선왕은 무슨 요량으로 저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일까요?”
“우선 사정을 마저 들어보고 함께 헤아려 보세나. 법국 공사대리라는 자가 얼마 전에 서한을 또 보내어 감히 말하기를, 조만간 조선에 군함을 보내 통교하겠다 하더군.”
얼마 전 병마에 시달리던 전임 법국 공사를 대리하여 새로 부임해온 오랑캐 관리가 안하무인의 애송이라는 것은 이홍장도 익히 전해 들었는데,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아무리 쇠하였다 하나 엄연한 중화대국이거늘, 어찌 저렇게 일방적으로 번국을 채가겠다 통보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조선은 천조(天朝)에 신속(臣屬)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법국이 제멋대로라 한들 이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 이렇게 방자하게 굴겠다는 것일까요? 설마...?”
“그래, 시기가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나는 저들이 우리가 5년 전 굴욕을 당한 것을 보고서, 다른 상국(上國)을 모시겠다고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네.”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홍장이 보기에도 조선의 정사(正使) 박규수라는 자가 아뢴 신법의 조목들이 지나치게 세세하고 잘 짜여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포조(浦租)니 교첩(敎牒)이니 하는 제도들이 모두 대청이 간사한 양인의 농간에 놀아나면서 놓친 점들을 보고서 보완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유림을 설득하고자 박규수가 어린 임금과 머리를 맞대고 갖은 핑계를 끌어다 댄 것이 그 까닭이었지만, 이런 내막을 모르는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이리도 주도면밀히 준비한 것을 보니 필히 더 깊은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한들 조선이 아조의 번국임은 두 눈 달린 이라면 누구든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명명백백히 법국인들에게 알려 망동치 말 것을 정중히 권한다면, 어찌 저들이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조선 또한 분수를 알고 다시 물러나겠지요.”
“실은 그건 또 그것대로 곤란하다네. 일전에 천진(天津. 톈진)에서 약조할 때, 영·법 양국이 조약의 범위에 조선까지 집어넣자고 우겨대기에, 비록 조선이 자주지방(自主之邦)은 아니라 하나 엄연히 다른 나라라고 못박아두었지. 그때야 놈들이 조선을 통째로 삼켜버릴까 두려워 둘러댄 핑계였는데,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겠는가?”
“하하... 외통수로군요...”
공친왕이 열기가 적당히 빠져 기분 좋을 만큼 따뜻해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과연 향만큼 맛도 훌륭한지, 씁쓰름하던 표정이 조금은 개었다. 이홍장도 곧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잔을 입에 대었다. 두 사내는 말없이 지도를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전하, 감히 생각건대 조선왕이 양인들을 받아들임을 허락하는 것이 상책일 듯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어차피 지금 아국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직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고, 신강(新疆)의 동향도 심상치 않습니다. 총리아문에서 관리를 보내, 조선왕이 함부로 도적을 들이지 않도록 자문케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일이 양인들과의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는다는 말인가? 제일가는 번국을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넘겨주자는 건 아니리라 믿네.”
“전하, 제 어찌 그리 농을 하겠습니까. 생각건대 조선이 지금 양인과 통교하려는 속뜻은 아마도 아라사를 두려워하는 데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지난 경신년(1860) 약조 이래로 그 자들이 저쪽 해삼위(海參崴. 블라디보스토크) 근방으로 남하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조선의 북변(北邊)에도 도달했을 것입니다. 암만 조선인들이 물정에 어둡다 한들, 대문 밖에 외인들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심복(心服)까지야 않더라도 적어도 겉으로 천조의 다스림을 거스르는 짓은 거의 하지 않던 조선이다. 아마 대청이 바다 건너 오랑캐들에게 무너지는 꼴을 보고서 공포에 빠져서 궁여지책으로 문호를 열어 다른 오랑캐를 들이겠다 한 것이리라. 공친왕이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눈을 지그시 감음은 향을 즐김인가, 아니면 이홍장의 말을 심사숙고함인가? 둘 다일 것이다.
“지금 아조에 급한 일로는 오직 자강하여 양인의 기기로 군력을 재건함이 있을 뿐입니다. 저 염군(捻軍)을 자칭하는 도적 무리를 모두 진압하고, 전국에 설립된 기기창(機器廠)과 제조총국(製造總局)에서 화포를 생산하기 시작한다면, 이 나라가 위엄을 되찾는 것도 먼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승냥이 같은 무리들이 중하(中夏)의 땅에서 해동(海東)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어, 그곳에서 먹이다툼을 하게 만들자는 것이로군.”
“예. 제가 듣기로 법국인들은 그 천성이 허장성세 부리기를 즐기며, 또 영국인들은 아라사를 크게 두려워해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바다에 닿을 것을 항상 근심으로 삼는다 합니다. 그러니 저 둘의 눈이 잠시 조선으로 몰리면 그만큼 아조의 물화(物貨)를 덜 뽑아갈 것이며, 또 영불 양국이 조선에 힘을 쏟는 것을 보면 아라사 역시 물러날 수 없다고 여겨 조선을 더욱 거세게 노릴 터이니 성경(盛京)과 길림(吉林)을 노릴 힘이 다하여 없어질 것입니다.”
“좋은 얘기일세! 그리고 저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며 조선 땅을 피폐케 할 때, 힘을 기른 아조가 다시 다가가 승냥이 무리를 잠재우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어주면 감읍하며 천조의 품으로 돌아오겠지. 그렇지 않은가?”
“전하께서 영명하시기 이를 데 없으니 대청의 홍복입니다.”
이홍장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시종 하나가 조용히 다가와 수본(手本) 두루마리를 바치고 갔다. 내용을 흘깃 살펴본 이힌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도로 평온해졌다. 암투가 성행하는 조정에서, 지금껏 한인으로서 살아남은 이홍장이 저 중 전자가 진심이요 후자는 겉으로 드러낸 것임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바쁜 사람을 함부로 불러서 미안하게 되었네. 미안하지만 황실 안의 일이 있어, 오늘은 그대에게 이만 물러날 것을 권해야만 하겠네.”
“감사합니다. 군국(軍國)의 사무를 도맡고 계신 전하께서 부르셨으니, 찾아뵙고 하명하실 바를 듣는 것이야말로 제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관이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또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앉아있을 때도 거의 머리 하나가 더 큰 이홍장이었다. 그가 일어서니 벽에 걸어둔 지도가 일순 가리어, 호주부터 면전(緬甸. 버마)까지 그림자가 드리웠다. 예를 갖춘 뒤 성큼성큼 물러나는 이홍장을 보며 이힌은 다시 문제의 수본을 펼쳐보았다. 내용은 여전히 암울할 뿐이었다.
“자사그 보두올러거타이 친왕 전사. 전군복멸(全軍覆滅)이라...”
보두올러거타이 친왕이란 곧 몽골의 자사그 호쇼이 친왕 셍게린첸(僧格林沁)이다. 마치 제 조상이라는 초원의 늑대처럼, 설령 한 번 사냥에 실패하더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상대의 목덜미를 끊임없이 노리는 숙장(宿將)이었다. 안휘성을 뚫고 산동까지 진군한 염군(捻軍)을 막아내기 위해 출정한 그가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만주와 몽골팔기의 마지막 정예군도 이 중원의 한줌 흙으로 돌아갔다.
다이칭 구룬의 황족들은 항상 의심할 것을 교육받는다. 권력 앞에서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며, 믿을 수 없는 이를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게 되면 그것은 얻어맞은 이의 잘못일 뿐이다.
어린 시절, 선대 칸이자 자신의 이복형 되는 이주(奕詝. 함풍제)와 함께 무예 교습을 받던 시절, 저들끼리 겉멋 든 검법이니 보법이니를 만들면서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자고 약조한 일이 있었다. 적서(嫡庶)와 장유(長幼)의 변별이 엄연히 있는데 먼저 그가 나서주니, 어린 이힌은 그저 감복하며 따를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셍게린첸의 몽골팔기가 팔리교(八里橋)에서 목숨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칸의 자리에 오른 형은 열하(熱河)로 도망가면서 자신을 뒤에 버리고 갔다. 어찌어찌 갖은 기지를 발휘하여 뒷수습을 해 두었더니, 그 사이 칸은 열하에서 붕어하였고, 돌아오는 것은 수슌(肅順) 그 잡놈 패거리의 냉대뿐.
그리하여 서태후의 손을 잡고서 정변을 일으켜, 동·서 두 태후와 자기 자신을 섭정으로 세우고 수슌과 그 일파의 목을 베었다. 그 사이 나라를 바꾸어보려 했지만 강남에서 일어나는 사교(邪敎)와 도적 떼들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그렇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자금성 안에 앉아 세력 불리기에만 열중하던 서태후는 어느새 쳐내려야 쳐낼 수 없는 권력자로 뿌리를 내렸다.
불과 지난달,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채수기(蔡壽祺)가 자신을 탄핵하면서 섭정의 권한을 내려놓은 그였다. 물론 총리아문(總理衙門)의 자리는 겨우 지켜냈지만,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억지 눈물을 흘리며 어린 황제-그리고 그 뒤의 서태후-에게 무릎을 꿇고 하지도 않은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선대 칸과 서태후가 중용한 한인들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애초에 지금 양강총독(兩江總督)으로 저 남쪽에 내려가 있어야 할 이홍장이 지금 북경에 있는 것도, 서태후가 북경 근방에 서양식 화포 기기창을 세우는 데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증국번, 이홍장, 장지동 같은 한인 관료들이 서양식 무력을 독점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은 서태후를 돕기는커녕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사실상 태업을 하고 있었다.공친왕은 만약 이홍장이 다른 일로 상경했더라면 자신이 불렀을 때 이렇게 재깍 와 주었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아마 이홍장은 이대로 소일하다 전국(戰局)이 급함을 들어 도로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산동에서 팔기의 얼마 남지 않은 정예가 전멸해버렸으니, 이제 증국번의 상군(湘軍)과 이홍장의 회군(淮軍)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홍장이 제게 진언한 것.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하니 조선의 개항을 허용하고서 가만히 지켜만 보자는 제안을 언뜻 들었을 때는 솔깃했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또 그 속뜻이 무엇일까 싶어 의구심이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이홍장 그 자가 셍게린첸의 팔기가 전멸한 것을 모르고서 제게 와 그런 진언을 했을까? 과연 그가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한 것은 다이칭 구룬을 위함인가, 아니면 이홍장 본인의 회군을 위함인가? 애초에 저 한인들이 이렇게 군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된다면, 그 옛날 말당(末唐)의 절도사들과 같은 길을 걷고자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물론 아무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다 한들 없던 군대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이홍장이 말한 것처럼, 지금 직면한 조선의 문제에 있어서도 가만히 방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저 가만히 힘을 기르며, 저 양귀자(洋鬼子) 놈들의 전횡을 참다못한 조선왕이 마치 그 옛날 삼전도에서 칸에게 했던 것처럼 구명을 청할 것을 기다릴 뿐.
이힌은 고개 들어 다시 지도를 보았다. 앞서 이홍장이 지도의 가운데가 북경이 아님을 지나가듯이 한탄한 것이 떠오른다. 그러나 한인들이 무어라 착각하든, 북경이 천하의 중심이 된 까닭은 그곳에 천자가 거하기 때문이지, 결코 북경 그 자체가 세상의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천자가 칸으로서 성경에 거하면 그곳이 중심이요, 몽골과 서장(西藏)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열하로 거둥하면 또 그곳이 중심이다.
그리고 지금 세계의 중심은 북경도, 열하도, 성경도 아닌 영국이었다. 중원 땅은 그저 중심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극동’일 뿐이었다. 과연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지도의 가운데로 돌아올 날이 제 눈 감기 전에 돌아올까 싶어, 이힌은 불현듯 아득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젊은 외교관은 호재를 만났다며 날뛰고, 청국은 방관하는 가운데 연평도 앞바다에 이양선 함대가 출몰하게 되었으니, 한 쪽에서 세는 방식으로는 주의 해로 1865년 6월 20일이요, 다른 쪽에서 보기에는 을축년 5월 2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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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홍장을 중당(中堂)이라 부르고는 하는데, 이는 본디 대학사(大學士) 직의 별칭이고, 종종 재상을 일컫는 말로 쓰였습니다. 이홍장의 호는 소전(少筌. 혹왈 少泉)이라고도 하고, 의수(儀叟)라고도 하는데, 이 중 의수는 노년기에 새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여기서는 전자를 택했습니다.
이홍장과 공친왕 사이의 관계는 추측하건대 아마도 편의의 동맹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직 1860년대면 이홍장도 군벌이라 할 만한 권력을 잡기 전이었으니 중앙에 연줄을 더 얻고자 했을 것이고, 또 공친왕 입장에서는 서태후의 지속적인 견제 속에서 자신의 유일한 기반인 군권과 외교권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지방의 군벌(진)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조선이 청의 번국이면서 별도의 국가이고, 또 그러면서도 자주국은 아니라는 저 애매한 입장은 실제로 공친왕이 취했던 자세로 보입니다. 벨로네가 병인양요 직전 공친왕에게 일방적으로 조선을 침공해 강제로 개항시키겠다는 것을 통보하면서, ‘그때 당신이 조선은 별개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언급한 데서 착안했습니다.
셍게린첸은 칭기스칸 테무진의 피를 직접 이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보르지긴 일족의 후예입니다. 태평천국의 난에서 북진하는 태평천국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제2차 아편전쟁의 결정적 패전인 팔리교 전투에서 지휘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염군을 추격해 깊숙이 들어갔다가 산동성에서 매복에 당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끌던 팔기의 (상대적) 정예가 전멸하면서 그 자리는 증국번의 상군과 이홍장의 회군이 채워나가게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