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1)
“쿨럭! 쿨럭!”
나날이 기세를 올리는 프랑스의 국위를 반영하듯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북경의 프랑스 공사관에는 건물의 위세에 어울리지 않는 병자의 기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북경의 차디차고 건조한 겨울은 대다수 프랑스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극동전대(Station Navale des Mers de Chine)의 샤를 조레(Jean-Louis-Charles Jaurès) 제독은 꼬레(Corée. 조선)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요코하마(横浜)에서 찾아왔다가 졸지에 병문안을 겸하게 되었다.
“영 차도가 없으신 모양이군요. 작년보다도 심하신 것 같습니다.”
“보면 모르겠나.”
요즘 들어 부쩍 건강이 악화된 쥘 베르테미(Jules Berthémy) 공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둘 다 이미 1860년 북경 입성부터 올해의 시모노세키 정벌까지 함께 격무에 시달린 사이였기에 이처럼 격의 없는 대화가 가능하였다. 물론 둘 다 임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어, 본국으로 돌아가면 서로 안 볼 사이라는 점도 한몫 했겠지만.
“자네는 벌써 귀국 일정이 잡혔다지?”
“예. 맞습니다. 12월까지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을 듯합니다. 후임 로즈 (Pierre-Gustave Roze) 제독은 내년 초쯤에 부임할 예정이고요.”
“그저 부러울 따름이네. 쿨럭! 직무대행이 내정되면 뭘 하는가, 빨리 부임 일자가 나와야 인수인계든 뭐든 할 텐데.”
“벨로네(Henri de Bellonet)라고 했던가요? 통킹 쪽에서 들은 풍문으로는 꽤 야심만만한 젊은이라 하던데요.”
“하, 테헤란에서 뭔가 큰 일을 저질러서 나이 서른셋에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까지 받게 되었다지. 애초에 수훈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본국에서 발령을 여지껏 안 내주었다 하더군. 이것 참. 이 야만인들 사이에서 뼈 빠지게 노력해서 겨우 이 문명의 섬을 만들어놓았는데. 엉뚱한 사람이 날로 먹게 생겼군그래.”
“행운의 여신은 항상 짓궂다고 하지요. 그래도 최소한 이 꼬레의 건은 날로 먹지는 못할 겁니다.”
제독이 들고 온 서류철을 적당히 정중하게 건네주었다. 원정에 투입 가능한 함선의 목록이었다. 이미 극동전대의 일에는 이력이 나 있었기에, 베르테미는 한 번 슥 훑어보고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허, 심각하군. 결국 멀쩡한 건 세미라미스(Sémiramis) 하나뿐이라고?”
“예. 게리에르(Guerrière)의 증기기관 개수는 암만 빨라도 내년 여름에나 완료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통보함(Aviso)이나 코르벳 중에도 시모노세키에서 일본인들의 포격으로 자잘한 피해를 입은 함정이 적잖습니다. 보시다시피, 뒤플렉스(Dupleix)는 심지어 피해 복구보다 퇴역이 더 싸게 먹힐 지경입니다.”
“유사시 선교사들을 구출해오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예. 그 정도야 세미라미스 한 척만으로도 가능할 듯합니다. 사전에 수로조사만 해 놓는다면요. 오는 길에 부관들을 시켜 꼬레를 드나드는 체푸(Chefoo. 지부(芝罘))의 현지인 밀무역상들이 있을 테니 정보를 조금 조사해놓으라 했는데, 듣기로 그쪽 해안은 거의 무방비 상태이고 군대도 이름뿐이라 하더군요. 다만 수도로 올라가는 해역이 노르망디(Normandie)에 비할 만큼 조수차가 심하게 나서, 한 번쯤 미리 정찰을 해두지 않으면 자칫 낭패를 볼 듯합니다.”
“뭐, 그 정도면 일단은 되었네. 자네가 나보다야 잘 알겠지만, 선교사들이 요청한 건 큰 전함으로 현지인들을 위압해달라는 건데, 그러려면 그래도 프리깃함이 두 척은 넘어야 할 테니까.”
‘그러니 잘나신 후임자들이 와서 처리할 수 있을 때까지 뒤로 미루자.’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어차피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본국으로 돌아갈 두 사람이다. 어려운 일은 후임들에게 던져놓고 가자는 것이 둘이 공유하는 의견이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가만히 앉아 반년의 유예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한양에서는 그 반 년을 어떻게 보낼지를 걸고 논쟁이 막 벌어지고 있었다.
요 근래 해마다 큰일이 터졌기에, 도성 사람들은 혹 조만간 무슨 일이 또 불거지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근심하고 한편으로는 기대하였다. 임술년(1862)에는 민란이 있었고, 계해년(1863)에는 환국이 있었으며, 올 갑자년(1864)에는 서원의 일이 있었다. 입 놀리기 좋아하는 이들은 근자에 운현궁 옆 골목에 양인(洋人)이 드나들었다는 풍문을 가지고 한동안 떠들어대었지만, 서리가 내리고 첫 눈이 올 때까지도 별 일이 없자 소문은 절로 사그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조정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신법(新法) 이야기였다. 서원의 일이 엉뚱하게 마무리되면서 잠시 조정은 평온을 되찾은 듯했으나, 그 아래에 있던 파벌 간의 균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툼은 해소되지 않고 다만 연기되었을 뿐이었다.
그 다툼에 불을 댕긴 것은 박규수였다. 흥선대원군이 베르뇌의 확언을 믿고 불랑국 군함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먼저 내부 정리를 마치고 오경석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연통까지 말끔하게 돌린 박규수가 을축년(1865) 새해 벽두를 기해 선공을 가한 것이다.
“『개화소(開化疏)』라! 이런 거창한 상소를 직접 올리시다니 재동의 중달(仲達) 선생이 마침내 마각(馬脚)을 드러내신 모양입니다, 형님.”
대원군의 끄나풀이 두려워 장의동에서 다시 본래 머무르던 전동(典洞)으로 집을 옮긴 김병국이 빈정거렸다.
“나도 대충 읽어보았는데, 하루이틀 궁리한 것은 아닌 듯하였다. 뜻을 펼침이 나름대로 정교하니 쉬이 논박할 수는 없을 것이야.”
“고상한 도를 내세워 허황된 계책을 떠벌리는 것은 연암(燕巖) 이래의 내력인 모양이지요.”
“그 허황된 계책이라는 것이 세도(勢道)를 얻으면 더 이상 허황한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가 환재 대감을 잘못 본 게지. 차라리 네가 비꼬는 것처럼 사마의 같은 이였다면야 어찌어찌 대응할 수 있었겠다만, 지금 저 재동에 터를 잡은 사람은 왕안석(王安石) 아닌가.”
왕안석은 무너져 가는 북송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극단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던 사람이다. 비록 지나친 강경함으로 인해 외려 나라를 망쳤다면서 후대에 지탄을 받기는 했으나, 그 재주와 정치적 능력은 후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대파였던 사마광(司馬光)과 후대의 성리학자들도 그를 명신(名臣)으로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김문을 무너뜨린 정적(政敵) 대원군처럼 제 권력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동원하는 수단을 알지 못해 당할지언정 어째서 그러한 행동을 취하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 외에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따로 있는 박규수의 개화당은 어디까지가 진의(眞意)인지를 쉽사리 알아챌 수 없는 것이다.
“왕안석은 있지만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은 어디 계신다는 말입니까? 화서 선생께서 어찌 가만히 계시는지 알 수 없군요. 설마 임술년(1862) 일의 원한 때문일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사안에서까지 구원(舊怨)을 염두에 두실까. 오늘 일직(日直)을 서시고 퇴궐하시면서 이르시기를 조만간 『척사소(斥邪疏)』를 지어 올리시겠다 하더구나.”
“허어, 개화 대 척사라. 농으로 던진 이야기였는데 정말로 신법파와 구법파가 다투던 일이 지금에 이르러 다시 나타나 버렸군요. 이러다 설마 남도(南渡)의 화(禍)를 입게 되는 건 아닌가 두렵습니다만.” [북송이 멸망해 남송이 세워진 일을 말함]
“예끼, 말을 삼가라. 송(宋)의 쇠망은 지나친 신법을 세우고 또 한 번 세워진 령을 가볍게 혁파했기 때문 아니더냐. 화서 선생이 저렇게 나서준다는데 우리가 나서서 그 뒤를 받쳐준다면 그런 변고가 생길 리 없겠지.”
어떤 일이 터져 논란이 생기면, 사람들은 논쟁의 양 극단에 마음이 쏠리기 마련이다. 괜히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둘을 찍어 그 해악을 말했겠는가. 서원의 일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유림의 여론이 한데 모이지 못하고 있기는 하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병학·병국 형제가 서원의 훼철에 반대하였음이 널리 알려진 덕에 본디 김문을 지지하던 향촌의 사족들이 적잖이 다시 모였다.
아마 지금 조선의 모든 향안(鄕案)에 올라온 이들을 굳이 파벌로 분류한다면, 그 중 가장 수효가 많은 것은 여전히 김문의 그늘 아래 있는 자들일 것이다. 박규수의 이 ‘신법’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 결국 옛 원한은 잊고 직면한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김문을 구심점으로 다시 한 데 뭉치게 되리라.
“대원위 대감께서는 어느 쪽에 힘을 실어주실까요? 아무래도 환재의 당에 마음을 두신 듯합니다만.”
“그야 그렇겠지. 애초에 소문의 근원이 운현궁 아니었더냐. 양이와 통교하는 뜻이 없었다면 이런 소문이 아예 나지를 않았을 게다.”
대원군은 자기 아래의 무뢰배들이 도성을 꽉 잡고 있다 여겼겠지만, 듣는 귀와 보는 눈을 모두 가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얼자 출신 한량 몇몇이 사학쟁이들을 잡겠다고 작당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줄은 몰랐으리라. 서원을 난립케 하면서 생긴 예상치 못한 후과였다.
덕분에 현장에 있던 나졸들이 일의 전말을 윗선에 보고하고, 마포 일대에서 품팔이하는 천주쟁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좌포도대장 신헌(申櫶)도 이를 가볍게 흘려듣지 않았다. 신헌은 다시 추사의 아래에서 함께 공부한 제 친우들에게 이 소식을 은밀히 전하였고, 그에 따라 박규수의 귀에도, 병학·병국 형제의 귀에도 사건의 전말이 전해지게 되었다. 아마 결코 소식에 밝지 못한 이항로도 도깨비 형상을 한 양이가 경화방(慶華坊) 언저리를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나마 접하게 되었으리라.
물론 사건의 인과는 그 반대여서, 애초에 어린 임금의 뜻이 박규수와 같았음을 알고 있던 대원군이 위험을 감수하고서 양이(洋夷)를 끌어들인 것이었지만, 이미 이렇게 판이 기울어져 있음을 박규수나 대원군이 아닌 다른 이들이 얼마나 알 수 있으랴.
“그런데 아무리 화서 선생이 나서신다 할지라도 조정의 저울추가 우리 쪽으로 기울까 싶습니다. 대원군이 그 익문사인지 뭔지 하는 장돌뱅이들을 부려서 개화당이 헌상(獻上)한 그 『격몽신편(擊蒙新編)』을 전국에 흩뿌리게 한 이후로 세간의 여론이 꽤나 개화당 쪽으로 돌아선 모양이던데요.”
“하, 그래 보았자 태반은 대원군이 저들 편인 줄로 지레짐작한 잡인 모리배들일 게다. 언뜻 보기에 대원위 대감이 개화당 편인 것처럼 보이니, 개화당의 뒤를 따르다 보면 운현궁에서 콩고물깨나 떨어지리라 여기는 어리석은 무리들이지. 만약 스스로 사류(士類)에 속하고자 한다면 어디 우리 화서 선생의 고매한 명성을 따르지 않고 배기겠느냐.”
“하기야 그것도 그렇군요. 게다가 우리 사촌누이 되시는 분께서 우리 뜻대로 따라주신다면야...”
그들의 사촌누이인 명순대비는 철렴(撤簾), 즉 수렴청정을 거둘 것을 표명하기로 하였다. 항상 제 옳다고 믿는 바를 고집스럽게 따르는 누이를 설득하기 위해, 이미 성상의 지재(智才)가 완숙하였으니 박규수의 신법을 택할지의 문제처럼 나라의 대사(大事)에 해당하는 일을 대신 처리함은 옳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성상의 보령이 올해로 열넷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명분이 곧 대원군을 노리고 있음은 누구든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종친부의 직위와 대원군이라는 이름 외에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권위도 없는 대원군이다. 오직 어린 임금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휘두르는 권력인데 임금이 연소하여도 어엿한 한 명의 군주로서 홀로 설 수 있다고 한다면 더는 국정에 개입할 명분이 없어진다.
어차피 중전으로 있을 때든 대비로 있을 때든 오직 제 소신대로 행동하여 문중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던 사촌누이다. 그러니 철렴하고 궁궐 뒤편으로 물러난다 한들, 장동 김문에게 큰 손해는 아니다. 장기판에서 사(士) 하나를 버리고 상대의 차(車)를 잡는 격이다.
“그렇지. 상께서 잠저에 계실 적부터 품으신 깊은 뜻이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게 펼치고자 하시는 바가 있으시거늘, 어찌 언제까지나 생부의 그늘에 계시려 할까. 비록 지금은 환재가 잠시 총애를 받는 듯하다고 하지만, 화서 선생을 필두로 팔도의 이름난 선비들이 나서서 삿됨을 공박하면 바로 정사(正邪)의 분간을 헤아리실 수 있으실 터.”
아직 뚜렷한 줏대가 있을 나이는 아닌 임금이다. 학문과 품행으로 유명한 여러 유생들이 이항로를 필두로 집결하여 연명으로 상소한다면, 어심(御心)이 아니 흔들릴 리 없다. 대원군이 빠진 판국에서 아무리 박규수의 무리들이 요새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때, 노복 하나가 조용히 다가와 무언가를 김병학에게 바쳤다. 운현궁에서 온 서신이었다. 서안 위에 펼쳐보니 필체가 유려한 것이 한때 그들이 벗으로 여겼던 대원군이 직접 쓴 듯했다. 아우와 함께 보고자 서안 위에 펼쳤더니, 이게 웬 걸, 은수저 한 쌍이 두루마리 안에 고이 싸여 있었다.
“웬 시저(匙箸)더냐?”
날카로운 물음에 아직 미욱한 노복이 말을 더듬었다.
“소, 소인네는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보아하니 원래 서찰과 함께 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읽어보시고서 생각하시지요.”
노복더러 잠시 나가있으라 하고는 서한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곧 두 형제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겨울날이 매서우니 혹 일신에 병이 들어 불효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겠소. 아직 몸의 혈기가 왕성하다 하나,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야 할 것이오.
듣기로 화서 선생이 척사의 큰 뜻을 상께 진언(進言)하겠다 하더이다. 물론 이는 실로 아름다운 일이니, 비록 뜻이 어긋날지언정 마땅히 예를 갖추어 대해주어야 할 것이오. 헌데 그런 뜻에 편승하여 성상의 어진 정사를 어지럽히고 종실의 대업을 흐트러뜨리려는 무리들이 있어서는 아니 되리라 믿소.
조정의 공론이 어떠하니, 나라의 민심이 어떠하니 하는 이야기는 내 언급하지 않겠소. 그것이 얼마나 부평초(浮萍草) 같은 것인지 그대들 또한 알지 않소이까. 그대들이 가지고 있던 바의 편린(片鱗)이라도 간수하였음을 고맙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구밀복검(口蜜腹劍)하고 있다고 내게 와 이간질하는 자들이 간혹 있더이다.
지난 계해년 청작루에서 약조한 바가 있거늘, 어찌 벌써 잊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오?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자들의 어리석음이 저와 같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오.
끝으로, 요새 도성 저자에 도는 요언(妖言)이 있던데, 장의동에 짐새가 있어 간혹 부엌에 숨어들어 독 묻은 깃털을 흘리고 간다 하더이다. 그러나 새라는 것은 본디 날개가 달렸으니, 어디 장의동에만 머물겠소이까? 모쪼록 그대 둘 다 조심하기 바라오.’
혹시나 싶어 미리 저녁을 내오라 하고는 국에 수저를 집어넣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곧 검게 변하였다. 김병학이 우거지상을 쓰고 있는데, 그 옆 김병국은 박장대소하였다.
“하하하하! 역시 대원위 대감은 못 당하겠구려!”
그의 눈에 살짝 맺힌 것은 과연 배꼽이 떨어질 듯해 나온 눈물인가, 아니면 서러움이 사무쳐 나온 눈물인가? 김병국 본인만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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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등장하는 극동전대는 엄밀히는 중국해 파견함대(Station Navale des Mers de Chine)입니다. 1870년 극동분견함대(Division navale d'Extrême-Orient)로 개칭되고요, 명실상부한 극동전대(escadre de l'Extrême-Orient)는 1884년 청불전쟁 발발로 통킹해안 파견함대와 극동파견함대가 병합되면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익숙한 표현이 아무래도 극동전대일 듯해 조금 조기에 저 명칭을 등판시켰습니다.
1864년 9월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하면서 벌어진 시모노세키 전쟁에 프랑스 극동전대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해안포대에 접근해 무력화시키는 과정에서 꽤 피해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작중 언급된 뒤플렉스는 아예 본국으로 귀환해 퇴역했다가 적당히 수리를 받고 나중에 재취역해 일본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보신 전쟁에 휘말리면서 또 여러 이야깃거리를 남겼지요.
『격몽신편(擊蒙新編)』은 당연히 가공의 서책입니다. 작중 유홍기가 언급하는 개화사상 듬뿍 넣은 서원 보급용 교과서(?)라는 설정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신정왕후 조씨의 철렴은 병인박해와 시기상 맞물려 있습니다. 풍양 조씨에 대한 안동 김씨의 반격이라는 설이 있지요. 여기서도 정치적으로 쓰이게 되었네요.
또한 실제 역사에서도 김병학 형제는 겉으로는 대원군을 따르는 듯했지만 이면에서는 병인양요 직후 이항로를 천거하고 끝내 반 대원군 여론이 일어나는 데 한몫하는 등 지속적으로 물밑에서 대원군을 견제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병인양요로 인해 척사 쪽으로 돌아선 대원군이었기에, 같은 척사를 내세우는 산림, 그리고 그 뒤의 장동 김씨를 어찌하지 못하였지요. 이 작품 속에선 어쩌다 보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만, 자렴 선생 말씀마따나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법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짐새는 깃털에 독이 있었다고 하는, 가공의 새인지 실존했지만 멸종한 새인지 애매모호한 새입니다. 원 역사에서도 1874년 민승호를 폭탄테러(!)로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는 등 물불 가리지 않는 면이 있던 대원군이니, 독살 위협 정도는 굉장히 순한맛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