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장 무서운 칼날 (2)
귀남의 전생 여든여섯 해 동안 한 맺힌 일이 어디 한둘이겠냐만, 그 중 하나를 꼽자면 짧은 가방끈이 있었다. 나이가 찰 무렵 면에 있는 소학교에 이름을 올려놓기는 했다만, 월사금(月謝金. 수업료)이 밀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학적에 이름을 올린 햇수로는 아마 서너 해쯤 되었을 것이었지만 실제 교실에 앉아있던 날은 모두 합쳐야 삼백 일이 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귀남은 소학교를 마친 마을의 인재 큰형이 부러웠기에 근근이 학교에 나갈 수 있을 때면 악착같이 달라붙어,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뀔 즈음에는 왜말도 그냥저냥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산수도 간단한 사칙연산 정도는 터득하였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쓰러지셨고, 병구완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제 머리도 굵어버려, 이제는 학교가 아니라 논밭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되었다. 그러고서 다시 몇 년이 지나,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되자 무작정 상경해 군밤을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기를 수십 년.분명 그가 한때 알던 세상에서는 소학교만 나와도 수재 대접을 받았건만, 중등은 물론이요 고등학교까지는 나와야 사람 대접 받는 세상에서 귀남은 무식쟁이 군밤장수가 되어 있었다. 가끔 노점상 단속한다고 나오는 경찰들도, 사람 좋은 척 비위 맞추어 주는 시청 직원들도 흘낏 쳐다보는 눈치를 보면 자신을 깔봄이 명백하였다. 억울하다면 억울한 일이건만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비록 앞으로 사오십년 안에 망할 것이라고는 하나 엄연한 일국의 왕. 나라가 망하기 전에 좋은 일 좀 하고 간들 손해 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서원이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어차피 학교는 거기서 거기리라고 생각했다. 억울하게 무식쟁이 소리를 듣는 사람이 줄어들면 그것으로 족한 일 아닌가?
귀남이 알 리 없던 것은, 무식이 허물이 되는 것은 근대 의무교육이 제도로서 자리를 공고히 잡은 뒤에야 가능한 일이라는 점이었다. 그걸 모른 채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교육의 모습을 그대로 대입하니, 서원을 늘리면 되겠다 하는, 그를 제외한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발상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물론 대신들의 당혹감 어린 표정을 보자마자 자신이 제법 급소를 찔렀음을 깨닫고 흐뭇해하기는 했지만.
물론 이러한 내막을 알 리 없는 흥선대원군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사초를 계속 읽어내려갈 따름이었다.
먼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김병학이 수습을 시도했다.
“주상 전하의 심모원려하심이 범인(凡人)의 헤아림을 벗어나시니, 나라의 큰 복이옵나이다. 하오나 전하, 무릇 서원의 제사란 배향(配享)한 선정(先正)의 덕을 기리기 위함인데, 조세를 면하는 은덕을 거두신다면 이를 이루기 어려워 차마 누가 됨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자(夫子)께서도 제사에 양을 아끼지 아니하신 고사가 있으니, 성인께서 살피기에도 이러하였음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논어』 <팔일(八佾)>]
‘양을 아낀다’ 함은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제사에 바치는 양이 아깝다 하자, 공자가 자신은 제사의 예(禮)를 더 중시한다 답하면서 반박한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 서원의 제사가 문중과 재지사족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얼마나 화려하게 치러지는지를 알 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임금 앞에서는 무의미한 항변일 뿐이었다.
“나라에서 서원에 내려주는 제수(祭需)는 그대로 두겠다 하였으니, 양은 그대로 둔다는 것이나 매한가지요, 만약 경의 말대로 부족함이 있다면 사여하는 제수를 늘리면 될 일이지, 어찌 면세의 은전과 이를 함께 내려 일의 번거로움만을 늘린단 말이오?”
나라가 오래 되다 보니 자연히 글로 되어있지 않고 관습으로 알음알음 내려오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것들은 싹 무시하고 ‘내가 너희 사정까지 신경쓰랴’ 하는 투로 태연자약하게 주상이 답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관에서 내리는 제수를 늘려달라 하면, 그건 그것대로 패착이다. 이미 제수를 늘려주었으니 다시 면세전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으며, 그 외에 서원 인근 주민들에게 이것저것 뜯어내던 일도 앞으로는 모두 고스란히 난행(亂行) 취급을 받게 되어버린다.
끗발 안 서는 투전판에 마지막 엽전 한 닢을 던지는 심정으로 김병국이 형이 할 대답을 갈음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나, 지금 나라의 곳간이 바닥을 드러냄이 여러 해인 고로, 관에서 제수를 내준다 하여도 부족함이 많아, 자칫 흠례(欠禮)하는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부디 상께서는 바르게 헤아려주시옵소서.”
하고 아뢰었더니,
“내 듣기로 가난한 이는 재물을 흩뿌림을 예로 삼지 않는다 하였소. 그리고 그처럼 곤란한 사정이 있으면 더욱 면세하는 혜택을 거두어 어려움을 겪는 관을 돕고 물산이 빈약해 서원을 열지 못하는 고을에 학풍을 북돋아야 하지 않겠소?” [『예기(禮記)』 <곡례(曲禮)>]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데 특화된 오경석의 속성 강의가 빛을 발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문답이 끝나자 임금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이 확연해졌는데, 서원의 훼철을 막기 위해 온 유림을 동원하려 했던 김씨 형제는 바닥만을 보고 있고, 나머지 신료들은 서원이 늘어나면 자신의 가문과 동네에 어떤 손익이 있을지 속셈을 하느라 눈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좌의정 조두순이 정리에 나섰다.
“주상 전하의 하교하심이 지당하니 장차 우리 동방의 학풍이 재흥(再興)하여 성세(盛世)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날이 늙은 신의 눈앞에도 아른거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전국의 서원이 이미 적지 않은데 더욱 허여하게 되면 필히 어지러움이 있을 터이니, 이판이 진언한 대로 권학도감(勸學都監)을 마련하고 적임자를 두어 전하께서 하교하신 깊은 뜻을 이루도록 함이 좋겠사옵나이다.”
그 뒤로도 몇 줄 더 있었지만 굳이 볼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유후조가 이 ‘권학도감’의 일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자신의 의중을 궁금해 하고 있을 터. 답을 써 도로 궐로 보내주면 아마 그대로 조정의 공론으로 밀어붙일 것이다.
“놈이 아범, 게 있는가.”
“예. 대감마님.”
“앞서 홍문관에서 온 남 교리에게 한 식경(食頃)만 더 기다려달라고 전해주게나. 그리고 연적에 물이 말랐으니 가서 새로 받아와주게.”
서안에 문방사우를 차려놓고 놈이 아범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무엇을 쓸지를 궁리했다. 먼저 거추장스런 인사치레는 적당히 넘기고 용건으로 넘어가야 하리라.
‘상께서 말씀하신 권학도감의 일이 장차 도성을 벗어나 향반들에게 퍼지면 큰 소요(騷擾)가 있으리라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계시리라 믿소. 그러니 이는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일이니, 혹 산림에 연이 많은 이들이 도감의 중책에 앉아 사무를 누설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
다시 말해, 김문은 이번 기회에 배제하자는 것이다. 도제조(都提調. 도감의 총책임자)로는 어차피 영남의 남인들을 배려해서라도 조만간 벼슬을 올려야 할 유후조를 올리고, 자신의 부름에 응한 이항로에게도 삼사(三司)나 승정원(承政院)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한 뒤 도감의 실무를 겸직케 한다. 어차피 김문을 따르던 향촌의 한미한 무리들에게 비수를 찌르는 일이니, 김문의 두 형제 딴에도 여기서는 물러나게 해줌을 고맙다면 고맙게 여기지 결코 원한으로 삼지는 않으리라.
그때, 놈이 아범이 돌아와 서안 위에 공손히 연적을 올려놓았다. 문득 무언가 흥미로운 생각이 흥선군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 그리고 지금 장 서방과 안 서방이 있는지 한 번 찾아보고, 있으면 데려오고 없으면 그 사람들이 부리는 이들에게 행방을 물어보도록 하게.”
그러고는 바로 벼루에 물을 댔다.
난초뿐 아니라 당대에 글씨로도 이름 높은 이가 석파, 즉 대원군이다. 비록 급히 보내는 서간이지만, 범은 산토(山兔) 한 마리를 잡을 때조차 온 힘을 다하는 법.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게 나왔다. 신명나게 종이 위에서 붓이 춤추는데, 글씨 쓰는 흥선군도 절로 흥이 솟았다. 경기에서는 한두 순(旬. 열흘) 뒤, 나머지 일곱 도에서는 두세 달 뒤에 벌어질 난리통이 눈에 선하였던 것이다.
조선 전역에 서원이 천 곳을 넘는다지만, 지금 대부분은 노론과 연이 있는 집안들이 장악하고 있다. 남인이나 소론 집안들은 그 등쌀에 밀려 낙향해서도 숨을 죽이고 있고, 거기에도 못 드는 향반들은 대개 서원에 겨우 원생(院生)으로 등재되어 있을 뿐 제 목소리를 거의 못 내는 형국이다. 족보를 위조해 양반 흉내를 내는 무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도성에는 서원 훼철의 령이 거론되었다는 풍문만 들어도 바로 돈화문 앞을 하얀 도포로 메울 채비를 하고서 상경한 시골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제 이들은 곧 소식을 듣고 터덜터덜, 삼삼오오 고향으로 돌아갈 터. 그 중 몇몇은 길에 오르기 전, 생면부지의 사내 한둘이 은근슬쩍 다가와 귓속말로 무언가를 알려주고서는 꽤 연수가 묵은 듯한 서찰을 품에 쑥 집어넣고 가는 일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간 그들은, 이간질에 넘어가 그 선비 축에도 못 드는 옆 동네 놈들을 기필코 결딴내겠다며 날뛸 것이다. 그리하여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발붙일 데 없는 집안의 자제들은 한탄하고, 까막눈을 간신히 면해놓고서 나 양반입네 하고 있는 백성들은 어찌하면 이득을 볼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전국 관아에 ‘대원위분부’ 다섯 글자로 시작하는 공문이 내려갈 것이다.
글귀야 더 다듬어야 하겠지만, 아마 그 내용은 얼추, ‘곧 서원의 면세전을 모두 거둘 것이며, 앞으로 서원을 세워 배움을 펼치고자 하는 이들은 관의 허가만 득하면 적절히 제수를 내려줄 것’이라 고지하는 것이리라.
한 가지 짜증나는 일이라면, 이 일로 서원이 어쨌든 늘어는 날 것이므로 모조리 밀어버리려던 자신의 원 계획에 비해 나라의 세수가 늘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아직 주판을 굴려보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서원의 폐단을 없애 조금 풍족해지나 했던 나라의 살림은, 바다와 국경의 군비에 조금, 비 온 뒤 죽순마냥 모든 고을의 동리란 동리마다 세워질 서원들을 위해 조금. 그리고 슬슬 생각해두어야 하는 국혼(國婚)에 조금. 이렇게 나누면 도로 제자리가 될 모양이었으니 재건될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 전경까지 이미 혼자서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흥선대원군으로서는 잠시 뜻을 접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흥선군이 잘 하는 게 하나 있다면, 지금처럼 자기 가슴을 조막돌 하나 얹은 만큼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이 가슴팍엔 묵직한 바윗돌을 얹어주고, 제 눈에 눈물 핑 돌게 하는 이는 사흘 밤낮을 대성통곡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감히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들을 모두 후려쳐 없애지 못하게 되었으니, 대신 서로 싸워서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대원위 대감, 부르셨습니까.”
때마침 장천동이와 안동수가 들어왔다. 이제 구름재댁이 운현궁이 되면서, 저들도 어엿한 문객으로 자칭하게 되었다. 물론 아무리 신수가 훤해져보았자 하루라도 정직한 일을 하면 온 몸에 부스럼이 돋을 듯한 저 인상들은 그대로였다만.
“자네들이 손을 써줄 일이 생겼네. 내 몇 달 전에 도성을 드나드는 부보상(負褓商. 보부상)들 중 우두머리 노릇하는 이들이 있는지 찾아보라 하였는데, 기억들 나는가.”
그때 그 일을 맡았던 장천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조정에서 영이 떨어져서, 전국에 새로 서원을 열게 할 것이야. 마땅히 나라에서 서책을 내려주고 여러모로 챙겨주어야 할 것인데, 그대들도 알지 않는가. 꼭 향반들 중에는 저가 잘난 줄 알고서 포악질을 하는 놈들이 마을마다 한둘씩은 있게 마련. 그러니 누군가는 조정과 이 나의 눈과 귀가 되어주어야 그런 천둥벌거숭이같은 놈들이 기를 못 쓰고 어진 선비들은 힘을 얻지 않겠는가.”
배움이 얕아서 그렇지 머리는 잘 돌아가는 ‘천하장안’의 두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둘 다 짖궂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본래 있던 서원에서 방귀깨나 뀌던 무리들이 텃세를 부려서 쫓겨난 이들이 앞장서서는 따로 어디 터를 잡아서 서원을 세울 것이야.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호민(豪民. 부농) 몇몇이서 작당해서 잔반 한둘 데려다 스승으로 모시고는 마을 한 가운데에 서원을 세우겠지. 그러면 이제 고을에 양반 자제만으로는 원생을 채우지 못할 터이니 별 어중이떠중이들까지 학동이랍시고 들이게 될 테고.
우선은 부보상들을 모아 그런 곳에 상께서 내려주시는 경전들을 제때 가져다줄 수 있게 안배해놓게나. 그리고 우선 겉으로는 그게 가장 큰 직분이되, 말썽을 부리는 무리들이 있으면 적당히 타이르고, 돌배주먹과 육모방망이로 막힌 성정(性情)을 트게 해주고 하는 일도 해야겠지.”
음, 마지막 부분은 사실 이 두 사람보다는 천덕기의 취향이기는 하다.
“대감, 그러면 부보상들은 무엇을 받게 됩니까? 말씀하시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이전에 김문 끄나풀들에게 베푸셨던 것처럼 한두 번 곳간 문을 열고 끝내시지는 않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몇 번 마주치다 보니 부보상의 생리를 잘 알게 된 장천동이었다.
“역시 눈치가 죽지 않았군. 맞는 말이네. 조선 팔도에 선비가 한둘이 아니니 못 된 마음을 품는 놈들도 어찌 한둘이겠는가. 계속 오가면서 서로 싸우는 일은 없는지, 괴롭히고 핍박하지는 않는지, 만에 하나 큰 잘못이 될 일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할 게야.”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면 고변하여 뿌리채로 뽑아 없애는 것이겠지요?”
“하하, 역시 자네들 둘 다 나라는 사람한테는 이력이 난 모양이구만! 그리고 그러려면 자네 말마따나 그런 일을 한두 번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명분을 끌어붙여서 위에서 계속 떨어지는 게 있게 해주어야겠지.”
그리고 저기에 더해, 다른 서원의 비위나 이단(異端. 여기서는 정통 학설에 어긋나는 유학 사상)에 빠지는 일, 그리고 예컨대 ‘군밤도령’처럼 불측한 언사를 입에 담은 일 등을 옆 서원이 고변하면 그 한 해에는 면세의 은혜를 베풀고, 내리는 제수도 더 성대하게 해 줌으로써 향반들끼리 알아서 스스로 치고박고 하게 만들 것이다. 도성 뒷골목의 주인 노릇하던 흥선군이 아니라면 이 시대의 이 땅 조선에서 어느 선비가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으랴.
“그런데 대감, 전국 팔도를 모두 누비고 다니려면 머릿수가 족히 기천은 될 터인데, ‘장돌뱅이들’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아쉽지 않겠습니까?”
사람 심리에 안동수처럼 민감한 이도 많지 않다. 확실히 똑같이 지저분한 일을 해도 거기에 거창한 이름이 붙으면 때리는 사람도 기운이 나고, 맞는 사람은 더 위압이 되기 마련. 잠시 고민하던 대원군이 답했다.
“그래. 그럴듯한 이름이 필요하겠지. 음, 온 나라에 성인의 말씀을 담은 책을 돌리는 일이니, 익문사(益文司)가 어떻겠는가?”
예로부터 사람 괴롭히고 해치는 일에는 이골이 난 세 사람들이다.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니 치열하기로는 조정과 다를 바 없어, 어느새 햇빛이 누렇게 물들고 담장 그림자는 길어졌다, 한 식경을 기다리라는 얘기를 듣고서 마냥 기다리다 졸지에 해가 저물 때까지 머물게 된 홍문관 남 교리는 제 제비뽑기 운을 탓하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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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온 익문사는 물론 우리가 아는 실제 제국익문사와는 다릅니다. 그쪽은 益聞社고 이쪽은 益文司입니다. 작가의 말장난일까요, 아니면 역사의 억지력일까요?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한편, 19세기 서원의 기능을 놓고는 지금도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서원 철폐 직전까지도 (심지어는 서원 철폐 후 수십 년이 지난 20세기 중반까지도) 서원을 둘러싼 지역 재지사족 집단의 ‘밀당’은 지속되었다는 겁니다. 같은 노론계 집안 내에서도 누굴 어떻게 모실 것인지를 놓고 분쟁이 있었고요, 중앙 정계에서는 밀려났다지만 여전히 자신의 기반이 되는 동네에선 살아있던 남인, 소론계 집안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익히 아시겠지만 족보를 사거나 위조해서 새롭게 양반이 된 사람들도 향안(鄕案)에 이름을 올리고자 노력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