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4화 (14/320)

5. 가장 무서운 칼날 (1)

수릿날(단오)이 막 지났건만 매미 울음소리는 벌써 요란했다. 새로 지어 널찍한 운현궁(雲峴宮) 마당에 그 소리가 울려 퍼져, 한쪽 벽에서 다른 쪽 벽을 오가며 메아리쳤다. 그 은은한 반향이 도성 전체를 울리는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해, 집 주인 흥선군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상갓집 개라 손가락질을 받으며, 뒷골목의 천한 일을 맡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자신이 하일평을 시켜 한강 바닥을 구경시켜준 사내만 족히 쉰은 될 것이요, 장천동을 부려 가산을 턴 집은 백 호(戶)는 거뜬히 넘으리라.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지금의 대업은 꿈속의 꿈이었지만, 그래도 가진 눈썰미와 잔머리는 어디 가지 않았기에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에 검댕을 묻히지는 않고 적당히 처신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스스로 구차하다 여기게 되는 것이었다. 나라의 종친으로 태어나, 자신을 이런 지경에 빠뜨린 자들을 도로 자빠뜨릴 생각을 해야지, 어찌 제 한 몸에 구정물 묻지 않기만을 바란단 말인가.

그렇게 가장 분하고 서러울 때, 그는 머릿속으로 궁궐을 짓는 것을 생각했다. 저 장의동 김좌근의 저택 따위는 고작 시골 생원네 초가삼간처럼 보이게 만들 만한 웅장한 궁궐. 진흙탕을 뒹굴다가 다시 우뚝 일어선 이 나라 종실을 상징할 만한 무언가를 저 언덕 너머 경복궁 터에 세우고야 말겠다는 꿈을 한껏 꾸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그만은 못하지만 말하자면 그 경지에 오르기 전 섬돌이라 할 수 있는 운현궁(雲峴宮). 제 등 뒤에서 험담을 하는 이웃들을 모두 몰아내고 그 자리에 지은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그 사랑채에 해당하는 노안당(老安堂)에 앉아 궁궐에서 몰래 전해진 글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도 짜릿한 일이었다. 물론 이 짜릿함이란 맛보면 맛볼수록 덜해지기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스스로 채찍질하는 근본이 되기도 하였지만.

‘아, 어리석은 서생이 하늘과도 같은 성은을 입었음에도 천분지일도 갚지 못한 채 초야에 은거함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옛 기자(箕子)의 교화로 지금껏 동방에 전해 내려온 문물의 제도가 모두 무너져 온 나라가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지게 되었으니, 미천한 재주와 어두운 눈을 놀려 긴히 왕정(王政)을 다시 세우는 데 털끝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오늘 올라온 상소, 정확히는 궐내의 사람이 접수하자마자 필사하여 보내준 사본이었다. 지난 봄, 선왕의 국장(國葬)을 국고의 바닥을 긁어가며 성대하게 마친 뒤, 본격적으로 조정의 권세를 놓고 다툼이 벌어지려는 차였다. 산림의 거인 이항로가 올린 이 상소는 그 효시(嚆矢)가 되리라.

‘작금의 시무로 긴요한 것은 오로지 내수외양(內修外攘) 뿐인데, 내수의 일은 가깝고, 외양의 일은 멉니다. 외양이란 곧 바다를 막고 병기를 정비하며 정예한 병사를 가려 뽑아, 삿된 오랑캐들이 감히 선왕의 묘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왕업의 말단이니, 나라에 정도(正道)가 서면 간사한 칼날은 절로 꺾이고 막힐 것입니다.’

흥선군 또한 박규수와 그 무리들이 꾀하고 있는 바를 익히 알고 있다. 오경석 본인이 아들 녀석 글공부 선생으로 들어올 때 자신에게 『해국도지』를 선물해주기도 했고, 박규수 본인과 대담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박규수 그 자가 직접 입궐하여 주상과 독대하며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렇잖아도 지난 겨울, 경흥부(慶興府) 두만강 건너편에 아라사인들이 와 통상을 요구한 바 있었다. 통교를 허하는 문제야 차치하고라도, 군권을 잡아 국경을 방비함은 위엄을 떨치는 첫 수순이었기에, 선왕의 묘역과 강화도의 방어를 위해 문수산 일대의 성보(城堡)를 개축토록 하였으며, 북도의 포수들을 초모(招募)하고 해안 각 진의 화포를 정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수의 일은 곧 사람으로 비유하면 몸 안의 병이니, 그 심각함은 마치 병자의 집에 강도가 들면 막지 못함과도 같습니다. 나라가 선비를 숭상하고 문헌(文獻)을 갖춤이 이제 오백 년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데, 사림(士林)을 자처하는 이들이 선유(先儒)들의 큰 뜻을 저버리고 서원(書院)의 이름을 더럽힘이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니 고황(膏肓. 몸의 깊숙한 급소)에 병이 든 형국과 하등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본의를 잊고 군오(軍伍)를 도피하는 자들이 모여 서로 공갈하며 다투고 백성을 핍박하니, 차라리 선현의 아름다운 덕에 흠이 되기 전 허물어 없앰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항로가 (의도치 않게) 지적하였듯 결국 저 모든 정책은 집안 정리가 되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 하였겠는가. 조정의 령이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이유는 대개 재정의 부족이나 내부의 반대로 인함이었으니, 지금 박규수의 개화당이 끌어들인 것과 같은 무리들을 제치기 전에는 될 일도 안 될 터였다.

‘이러한 이치는 타고난 천성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니, 하물며 천성이 빼어나고 성스러우신 전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전하의 영명하고 효성스러우심은 마치 동지(冬至)에 비로소 양기가 동함과 같으니, 이러한 흐름을 타고 나라의 큰 근본을 다시 세우신다면 어찌 공효(功效)가 없겠습니까.’

흥선군의 눈이 필사한 상소문의 끝에 가서 닿았다. 그렇다. 필히 공효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주고야 말 테다. 굳은 다짐이 마음 속 화로에 기름을 붓는다. 지금 그는 비록 국태공(國太公)이라 하지만 겉으로 보이기에 실권은 없는 몸이다. 그러나 저를 대신해 실권을 잡을 만한 이들을 모두 쳐내고 나면, 가장 명분이 강한 것은 결국 자신뿐이다. 지금의 조정은 장동 김문이 태반이요 나머지를 그간 기를 펴지 못하던 몇몇 명문과 몰락한 옛 붕당의 잔재들, 그리고 개화당이 겨우 메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번 일로 꼬투리를 잡아 조정의 반절을 쳐내고 나머지 반절의 기세를 누를 것이다. 박규수 그 위선자도, 명을 붙여준 것을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감히 기어오를 궁리를 하는 김문의 잔당들도. 김문이 세도를 잡아 나라에 붕당이 없어진 지 반백년이 넘었다. 처절한 사화(士禍)와 환국의 기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같은 책에 한두 구절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토록 더럽던 세도가의 전횡 덕에 오히려 조정에 싸움이 없어져 절로 깨끗해졌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그에게는 환국 당일 장의동 김좌근의 집을 이 잡듯 뒤진 끝에 찾아낸 서찰들이 있다. 김문에 청탁하여 향반들 사이의 싸움에 기세를 얻고자 하는 이들, 몰래 과거의 합격을 청탁하는 이들, 옆 골짜기의 문중과 겉으로는 화해했지만 뒤로는 해치고자 음해하는 이들, 조선 팔도 선비라 자처하는 이들의 시커먼 속이 오롯이 드러난 이 증좌들이 있다. 박규수를 대업에 끌어들인 덕에, 흥선군은 김문을 거의 그대로 삼키다시피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 서찰들은 불태워짐을 면하고 ‘다른 장부들 사이에 끼어’ 이곳 운현궁으로 올 수 있었다.

저 돈화문 앞에 감히 소청(疏廳. 집단으로 상경해 상소할 때 쓰는 현장본부)을 차리려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것으로 이간질하고 협잡질하면 될 일이다. 이 나라 조선이 잊어버린, 정사의 더러운 이면을 다시 되살릴 것이다. 앞에서는 명망 높은 화서 선생이 저들을 손가락질하고, 뒤에서는 상경한 선비들 사이로 숨어든 바람잡이들이 귓속말을 속삭인다면, 저들은 필히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저들이 두려워하며 절로 물러간다면 필연 나머지 무리들은 무언가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스스로 몸을 사릴 터. 박규수와 김병학·김병국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산림들까지 자중지란 속에 무너져버린다면 그 다음에는 자신과 어깨를 겨룰 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그 날이 오면, 조선 팔도가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 다섯 글자에 벌벌 떨게 되리라!

“나으리, 궁에서 또 사람이 왔습니다요.”

중늙은이 노복이 문 밖에서 조용히 말해, 행복한 모의에서 깨어났다. 들어온 이는 홍문관(弘文館)에서 교리(校理) 노릇 하는 이로, 풍양 조문의 인척이라 들었다.

“삼가 대원위 대감을 뵙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오늘 상께서 친정(親政)하시어 당상(堂上)들의 진언을 들으시며 화서 선생의 상언에 비답(批答)을 내리셨는데, 이것이 그 전교(傳敎)하신 바입니다.”

아마도 사초를 한 부 더 만든 듯, 오간 이야기가 거의 그대로 적혀 있는 듯했다. 나름 정5품인데 어쩌다 심부름꾼 신세가 된 젊은이에게 공치사 한두 마디를 해 주고는 내보내었다. 펼쳐서 한 줄씩 읽어내려가니 눈앞에 조정의 모습이 선했다.

본디 조정의 중신들은 국법에 따라 저마다 해야 할 일과 관여하지 않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허나 그 법도가 깨져 관직의 품계가 아닌 이름 앞에 붙은 성(姓)이 더 중해졌으니, 아직도 그 유풍(遺風) 아닌 유풍이 남아 신료들은 저들 중 좌장 노릇하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었다.

산림에서 들어온 뜻밖의 반격에 당황한 김병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항로는 실로 은일(隱逸)이라, 그 명망이 높고 인품은 고매해 나라의 큰 인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일을 멀리서 들었기에 그 살핌에 부족함이 없지 않은 듯하오니, 바라건대 상께서는 깊이 헤아리소서.”

물론 아직도 산야에 묻힌 이들 중 소론과 남인의 무리들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다. 개중에 이항로나 멀리 전라도 바닷가의 기정진(奇正鎭)처럼 이름 높은 이들도 있음 역시 익히 알았다. 하지만 서원과 같이 중한 문제에 있어, 어찌 저만 살겠다고 이렇게 나올 수 있는가? 미처 그의 생각이 닿지 않은 부분이었다. 권력의 달콤함에 취한 이들은 그 달콤함을 남도 원한다는 것을 종종 잊곤 하였는데, 지금 김병학이 그런 꼴이었다.

“비록 절목(節目) 하나하나까지 따지면 미진함이 있을 수 있겠으나, 신이 보건대 그 대의(大義)는 참으로 아름답고도 시의적절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열성조께서 사액(賜額)하심은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김인데, 이제 그 도를 겉으로 내세우며 스스로 더럽히는 무리들이 있으니 응당한 처분이 없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이조참판 유후조(柳厚祚)가 조용히 반박했다. 근 백년을 억압받던 영남에서 환국 후 발탁된 고관으로, 일수가 차면 내후년쯤에는 원상(院相. 영·좌·우의정)의 자리에 오르리라 모두가 여기는 이였다. 자신과 문중의 이익과 일치하는 한 대원군의 편에 서는 것이 당연했고, 실제로도 그러하였다.

“민결(民結)을 함부로 빼앗고 원생(院生)과 보솔(保率)의 수를 속이는 폐단은 나라의 국용(國用)을 빈궁케 하고 백성의 살림을 고되게 하는 것이니, 존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칫 일시의 편의를 위하여 선왕들께서 성현을 높이신 뜻에 누가 될 수 있으니, 도감(都監. 특정 업무를 도맡아 추진하는 임시 기관)을 설치하여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조처함이 가할 것입니다.”

환국 후 이조판서로 올라온 박규수는 본인이 지금 일어난 일에 부분적으로나마 책임이 있기도 하거니와, 개화당의 다른 안건에 유림의 눈길이 쏠리지 않기를 원했기에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지금 조정의 세 파벌에서 사실상 좌장으로 있는 이들이 발언을 마치자, 용상에 앉은 어린 임금을 제외한 뭇 사람들의 눈이 살며시 임금 뒤에 드리운 발(簾)로 향했다. 특히나 김병학과 김병국의 눈빛이 유난히 간절해 보였다. 발 뒤편의 인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신(諸臣)도 능히 짐작하겠거니와 이 일은 그 뿌리가 깊으니 함부로 처리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이를 살펴주시옵소서.”

형식은 요청이되 실제로는 완곡한 거절의 뜻이다. 대비까지 김문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자 누군가는 낯이 어두워지고, 또 누군가는 올라가는 입 꼬리를 애써 감추었다. 이제 임금이 ‘그리하라’라는 말만 하면 될 일인데...

“경들에게 묻겠소. 대저 서원이란 무엇을 말함이오?”

뜬금없는 질문에 나이 많은 이들은 제 귀를 의심하고 젊은이들은 제가 늙었는지를 근심했다. 두루마리를 펼쳐 읽던 흥선군은 아내 민씨 말마따나 슬슬 경주산 수정 애체(靉靆, 안경)를 마련하여야 하나 고민하였다.

“선현을 높이고 학문을 닦아 아름다운 도와 밝은 교화를 펼치는 곳입니다.”

사세를 관망하던 좌의정 조두순(趙斗淳)이 말했다.

“그러면 그렇게 좋은 곳을 어찌 더 지을 생각은 하지 않고 외려 철폐한다는 것이오?”

“주상, 그것은 경연(經筵)에서 질정(質正. 질의)할 일입니다. 우선은 정사를 논하시지요.”

그러나 미숙한 왕을 움직여 자신의 뜻에 따르게 하는 데 이력이 난 김병학이 빈틈을 놓칠 리 없었다. 사촌 누이가 눈으로 만류하였지만 한 발짝 나와 아뢰었다.

“상께서 전교하심이 간략하되 그 뜻이 지극하옵니다. 부자(夫子)의 도는 궁구하여도 다함이 없으며, 선현의 이름은 아무리 널리 퍼뜨려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지금 국법으로 둔 향교(鄕校)만으로는 이를 홀로 감당할 수 없으니 뜻있는 선비들이 나와 서원을 세운 것으로, 다만 서원에서 자비(自備)한 전결에 면세의 은(恩)을 내림에 다소 누락되고 덧붙여짐이 있을 뿐입니다. 이를 바루어 교화가 퍼짐에 막힘이 없게 한다면, 그 폐단이 사라지게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허어, 그처럼 아름다운 뜻이 있거늘 어찌 나라에서 베풀어주지는 않고 고작 면세의 혜택만을 준다는 말이오? 그러니 백성들에게 토색질하는 것은 아니요?”

‘아, 아직 어리시구나.’하고 조금 풀어지던 긴장의 끈이 다시 확 당겨졌다. 저리 하문(下問)하심은 실로 물어 알고자 하심인가, 아니면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려주므로 원생에게 공량(貢糧. 수업료)만을 받으면 될 일 아니냐며 작금의 세태를 비꼬심인가?

“나라의 법으로 제수를 내려주고는 있사오나, 아름다운 이름을 빛내는 데 모자람이 있을 수 있으니 면세의 은전을 더하여 내려주는 것입니다. 또한 밝은 덕으로 교화함에 귀천의 구분이 없으니, 서원 인근의 거민(居民)과 더불어 배향하는 도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를 간혹 배움이 일천한 백성들이 오해할 뿐이니, 이 또한 타이르고 가르치면 해결될 일입니다.”

궁색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지척의 중신들이 언뜻 주상의 용안을 살피니 저것은 괴롭힐 놀잇감을 찾았다는 개구쟁이의 눈빛인지, 호구를 잡은 노련한 장사꾼의 눈빛인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다면 백성을 타이르고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발 뒤에 앉은 대비도 이 문답에 무언가 속뜻이 있음을 짐작하였는지 쉬이 나서 막지 못했다.

“사람이 배우지 못하면 그 품성이 뛰어나도 이적(夷狄)과 다를 바 없으며, 품성이 용렬하다면 두 발로 걷는 금수가 될 뿐입니다. 그리하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구실을 다하지 못하니 한 사람으로서도 안타까운 일이며, 관에서 입히고 먹이는 은혜를 베풀어도 고마움을 모르고 반민(叛民)이 될 테니 나라의 손실입니다. 하교하신 대로 서원을 진흥하고 교학(敎學)을 다시 일으키면 이를 어찌 막지 못하겠습니까?”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힌 형을 대신해 동생 김병국이 나섰다. 임금이 히죽 웃어 하얀 이가 잠깐 드러났다.

“그러니 서원을 늘림이 어떻겠소? 면세의 은전을 거두고 제수만을 내려준다면, 그만큼 더 많은 서원을 허여(許與)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 말하는 이로움이 더해진다면 더해졌지 덜해지지는 않을 것이오.”

여기까지 읽은 흥선대원군은 쩔쩔매는 신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해야 할지,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 서러워 장탄식을 내뱉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저 내막을 파악한 뒤, 입궐을 하든 서신을 보내든 해서 아들의 심산을 꼭 들어보아야겠다 다짐했다.

바깥에서 여전히 울리는 매미 소리가, 문득 ‘너희들도 퍽 재밌게들 산다’ 하며 비웃는 듯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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