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2화 (12/320)

4. 삐거덕대는 문돌쩌귀 (2)

어제부터 날이 영 흐리더니, 오늘은 싸라기눈이 종종 흩뿌렸다. 간혹 몇 송이가 삭풍을 타고 날아들어, 희정당(熙政堂)으로 걸음을 옮기는 박규수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하였기에 그는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세간에서는 그를 개화당의 영수(領袖)라 부르고 있었다. 현재의 개화당이란 오로지 박규수 한 사람의 당이라 해도 무방하였으니 이치에 닿는 말이기는 했다만, 정작 박규수 본인은 그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 개화당의 중역이 되었을 젊은이들은 아직 과거는커녕 태반이 관례(冠禮)도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들이다. 박규수도 익종(翼宗, 효명세자)의 총애를 받았기에 그 아내 되는 조대비에게서도 비호를 받고 있을 뿐. 오경석이 흥선군과의 연을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아직 재동 사랑방에서 후학들이나 가르치고 있을 터였다.

그나마 유서 깊은 명문인 그의 집안을 이용해 도성 곳곳의 명문가들을 흥선군의 편으로 묶어주는 공을 세웠기에 환국 이후 권세를 쥘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쓰임이 다하였으니 새 조정에서 무언가를 해 보려면 흥선군의 아래에 들어가거나 그와 어깨를 비벼볼 만한 기세를 얻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서원을 철폐한다는 대원군의 뜻에 동참하는 시늉을 하면서, 훼철(毁撤)할 것으로 점찍은 서원의 명단을 장의동에 넘겨준 것은 오직 조정에 균세(均勢)를 이루어 개화당이 힘을 본격적으로 얻을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고식지계(姑息之計)였다.

그러나 그것도 우선 당면한 사안, 즉 대행대왕(철종)의 능묘를 조성하는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한 뒤의 일이었다. 아직 국상(國喪)이 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서원을 철폐하겠다고 나선다든가, 철폐의 령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지레 반발하고 나온다면 누가 보아도 비례(非禮)다. 그러니 당장 불거진 묘역의 건을 놓고 전초전을 벌일 수밖에.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붓으로 다투고 혀로 싸운다. 공론을 저의 편으로 조금이라도 돌리고자 운현궁과 재동, 장의동에서 발한 수많은 서한과 기별이 팔도의 이름난 선비들에게 향했으며, 궁중에서는 장차 벌어질 갈등에서 누가 자신의 편인지를 놓고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묘(正廟. 정조)조에 화성(華城)을 수축한 일을 연상하였는지, 아니면 후일 척양(斥洋)의 명분으로 삼기 위함인지 대원군은 선왕의 능을 김포 문수산 자락에 조성하자는 주상의 뜻에 찬동했다. 애초에 문수산이 묘역으로 추천된 데도 대원군의 손이 닿았을 것이 명백하였다.

자신이 포섭한 한양의 명문가들도 개중 몇몇은 대원군의 편을 들 모양인지 성상의 뜻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고, 약조한 대로 김병학·김병국과 영류의 신료들은 국용(國用)이 지나치게 드는 것이야말로 효의 도가 아님을 내세워 성상을 만류하였다. 작게는 효의 도리를 놓고 벌어진 다툼이었으나, 크게는 누가 김문의 빈자리를 차지할지의 싸움이었다. 오경석·유홍기처럼 집안이 한미한 이들을 압박하기 위함인지 대원군의 바람잡이들은 ‘승하하신 임금님의 마지막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무정한 대신들’의 소문을 퍼뜨렸다. 명순대비는 지아비의 마지막 뜻을 따르지 않기도, 친정의 편을 들지 않기도 모두 곤란하였는지 원론적인 답만을 내렸다.

정국을 둘러싼 셈법에서 이처럼 법(法. 방정식의 미지수)이 모두 밝혀졌으니 이제는 실(實. 방정식의 상수), 즉 임금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만 남았다. 이를 헤아려 그에 맞추거나 돌려놓는다면, 뒤이어 벌어질 다툼에서 기세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귀남은 질화로에 밤을 굽고 있었다. 본래 잘하는 일이 이것뿐이라 입에 풀칠하는 방편으로 시작한 군밤장수 노릇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런 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편안하였다. 그래도 명색이 임금의 체면이 있으니 가급적 삼가려 하였지만, 원범의 묘를 놓고서 온갖 공박(攻駁)이 오가는 지금은 어떻게든 심신을 평안케 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이 지긋한 상선이나 상궁들은 영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지만, 구운 군밤을 먹게 시켜 자신의 공범으로 만든 뒤에는 다들 조용해졌다. 요새는 오히려 질화로와 밤을 내오라 하면 기쁜 낯을 서둘러 감추는 이들이 종종 보일 정도였다. 하기야, 산신령을 감복시킬 맛이라면 고작 내시와 나인들 정도는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한참을 뒤적거리며 굽고 있는데, 문지방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이조판서 박규수 입시이옵니다.”

박규수는 제 스승 오경석의 친우라 하였다. 요새 조정에서는 틈만 나면 분란을 일으키려는 듯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할머니 되는 조대비가 직접 챙겨주는 이요, 오경석에게 듣기로는 흥선군이 자신을 세자로 추천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였다. 아마도 무슨 심산이 있으리라 생각하던 차, 이번 기회에 속뜻이나 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를 갖추고 치사(致辭)와 덕담이 몇 순 오간 뒤 박규수가 묻고자 하는 바를 꺼내었다.

“미신(微臣)이 감히 전하의 성심(聖心)을 헤아리고자 찾아뵈옵나이다. 전하께서 대행대왕을 오직 성심(誠心)으로 봉양하심은 고사를 상고하여도 그 아름다움을 비할 수 없나이다. 연후 능묘를 정하는 일로 내리신 하교도 뜻이 지극하니, 노둔한 신도 효심의 발로임을 익히 알 수 있었나이다. 허나 국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정해진 제도는 아니나 능묘는 경사(京師. 서울)의 지척으로 자리를 잡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으며, 물가에 자리를 잡는 일은 전례가 없었습니다.”

감추려 해도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빙빙 돌려서 얘기하는 이 시대의 풍습이 마뜩찮은데, 몇 번 들은 얘기를 겉치레만 다르게 해서 다시 들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판. 내 이미 지난 며칠간 들은 얘기로 족하오. 내가 그 전례가 있다고 하면, 또 경은 곤릉(健陵. 화성 소재)이나 영릉(英陵. 여주 소재)은 권도(權道. 임시방편)를 따른 것으로 지금처럼 국용(國用)이 빈궁할 때는 맞지 않다고 할 테고, 또 내가 선왕의 유지가 그러하였다고 하면,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효의 본질이 아님을 말할 테지. 내 아직 연소하여 부족하나, 듣던 말을 또 듣는 것은 결코 즐기지 않소.”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지난 며칠간 이 문제에 대한 의론이 저러하였으니, 박규수는 딱히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도 경이 굳이 이렇게 찾아온 것은, 다른 이들 앞에서 내게 올릴 말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소?”

“실로 그러하옵나이다. 전하. 어리석은 신이 크게 우려하는 바가 있사오나, 식견이 짧은 무리들이 성총(聖聰)을 흐릴까 두려워 감히 논하지 못하였나이다. 이때를 만나 상언(上言)코자 하니 깊게 살피어주시기를 바랄 따름이옵나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굳이 예를 지켜 돌려서 말한다면, 오히려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짐작한 박규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본론을 내질렀다.

“전하. 시중에서 신 등을 일컬어 개화당이라 부름은, 저희가 양이(洋夷)와 교류하여 국운을 흥성케 함을 시무(時務)의 큰 계책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릇 오랑캐라 함은 교화가 닿지 않으면 쉽게 흉포해지기 마련입니다. 서역의 무리들도 비록 그 가진 무기가 빼어나고 기물이 정교하나 근본은 다르지 않으니, 개중 악독한 이들도 적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 해도 쉽사리 흉포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지난 경신년(庚申, 1860년)에 연경(燕京)에서 큰 소란을 일으킨 것으로 이를 증험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아편전쟁). 하물며 지금 나라의 곳간이 비고 백성이 빈궁한 아국(我國)은 어떻겠습니까?

아국의 물산이 중국에 비할 바가 못 되고, 또 선왕들께서 굳건히 국본(國本)을 지키셨으므로 아직까지 저들이 내침(來侵)하거나 아국의 사람과 사사로이 결탁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해년(己亥. 1840년) 이래로 점차 이양선이 우리 강역에도 출몰하여, 지방 수령들이 문정(問情)하고서 돌려보내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으며 북변에서는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인들이 이미 종종 강을 건너 통상할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외양(外攘)의 대책은 시급한데 내수(內修)의 일은 미진하니, 신 등은 저들이 설령 도리를 모르는 오랑캐라 하여도 잠시 나라의 문을 열고 그 기예를 배워와 중흥의 기틀로 삼자는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 건너 오랑캐들은 배를 타고 오니 필시 포구에서 교류할 것인데, 지금 선왕의 능묘를 강화도의 맞은편에 두신다면, 불측한 마음을 먹은 이들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흉악한 난행을 저지를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또한 이를 빌미로 용렬한 무리들이 척양(斥洋)을 내세워 나라의 대계를 그르치게 하는 단초로 삼을 것이니, 전하의 지극한 효성을 더럽히고 아름다운 이름을 흐리게 만들까 어리석은 신은 근심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지금 경의 말은, 바다 건너 오랑캐들과 교역도 하고 배워올 것은 배워오고 해야 하는데, 선왕의 묘를 바닷가에 놓으면 곤란하다, 그런 말 아니오?”

직설적으로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일을 상소문 한 편에 달할 만한 일장연설로 갈음하니, 빙빙 돌려 말하는 화법에 짜증이 더해져 평소 말투가 튀어나왔다.

지난 생에서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 노점상에게 무슨 규제를 한다기에 시청에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담당자는 항상 어딘가 휴가나 출장을 나가 있고, 찾아가는 사무실마다 자기네 업무가 아니라고 우겨대었다. 그러다 보니 길가에서 밤을 팔아도 잔소리를 듣고, 건물 사이에서 팔아도 경고를 받고, 프로판가스를 써도 한 소리, 연탄을 써도 한 소리. 누구 하나 확실하게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 단언해주지는 않으면서 토는 퍽 많이도 달아대었다. 복잡한 관료제의 실태나 시정(市政) 노선, 안전이니 관광객 유치니 하는 거창한 목표들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잘 알지도 못하였기에 그는 다른 노점상들을 만날 때면 ‘높으신 분들은 항상 너무 일을 복잡하게 한다’고 불평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일이 생각해보니 그러하였다. 궐 안의 유일한 말벗 철종이 죽고 나서 그간 받은 정에 보답하고자 묫자리라도 생전 원하던 대로 해주고 싶었는데, 하도 안 된다고 해서 그 내막을 들어보았더니, 무조건 안 되는 것은 아니면서 복잡다단한 사설만 가득하였다.

“그러면 왕래를 허하고서 묘역 근처로는 오지 못하도록 잘 막으면 될 일이겠구려. 결국 국용의 빈곤함은 핑계였고, 이게 진짜 속사정이었다는 얘기인데, 내 보건대 경들은 항상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소. 다음 조회에서 바로 이렇게 결론을 짓도록 경이 도와주시오.”

그가 지난 생에 듣기로 조선 망국의 원인은 우물 안 개구리로 지냈기 때문이었다. 귀남은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저처럼 온갖 핑계를 대면서 고민하였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과연 이렇게 간단한(?) 비답을 듣자 박규수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니, 저것은 당황이 아닌 불신의 눈빛이었다. 하기야, 아직 목소리도 다 굵어지지 않은 소년의 몸으로, 저처럼 무심하게 답변하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정선방에서 효자밤을 팔던 시절에도 ‘고작 어린아이이거늘 무엇을 알겠느냐’하는 이들을 한둘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럴듯한 말로 쐐기를 박아주면 될 일이다.

“내 앎이 일천하나, 지금 사직이 위태로워 계란 포갠 듯한 형국임은 알고 있소.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근시일 내로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오. 아무리 천한 재주라 한들 지금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찌 내칠 수 있겠소. 마땅히 배울 것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배우고,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내쫓지 말아야 할 터. 하다못해 나도 이 군밤 굽는 재주로 부끄럽지만 효를 이루지 않았소이까. 자, 그 사이 또 익었구려. 경도 한 톨 받아가시오.”

박규수는 공손히 받아 – 뜨거울 테지만, 어느 누가 지엄한 임금 앞에서 그런 티를 내겠는가 – 소매에 군밤을 넣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 확실히 효험이 있는 듯했다.

“헤아리심이 지당하옵나이다. 신이 망령되이 입을 허투루 놀려 심기를 어지럽힌 듯하옵나이다. 성상의 깊은 뜻은 새겨들었사오나, 하교하신 바가 중신들에게 알려지면 다시 공론이 분분해질 것이 자못 우려되오니, 감히 청하건대 왕래를 허통함은 국상이 끝나고 적절한 때를 기다려 재론하시옵소서. 그 때가 오면 신이 직첩을 내걸고 반드시 하교하신 바를 이루도록 하겠사옵나이다.”

퇴궐하면서 박규수는 잠깐이나마 고민에 빠졌다. 주상께서 하사하신 군밤은 서서 먹는 한이 있더라도 궐내에서 먹음이 옳은가? 아니면 사저에 돌아가 정갈한 단상에 놓고 공손하게 먹음이 옳은가? 그러나 군밤은 자고로 따뜻함을 귀하게 여기니, 이 자리에서 바로 맛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예가 아닐 듯했다.

질화로에 놓고 하나씩 신경쓰며 구운 군밤은, 이전에 재동에서 오경석을 통해 받아먹었던 효자밤과는 또 다른 경지의 맛을 보여주었다. 어찌 감히 어제(御製) 군밤의 맛을 함부로 품평하겠냐마는, 달달하면서 구수하고 또 은근히 향긋하기까지 하니 같은 양의 조청보다도 더 입맛을 돋우는 듯했다. 맛있는 것이 혀 위에서 녹아내리면 굳었던 기분도 절로 풀어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박규수도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앞서 문답을 복기해보았다.

성심을 어설프게 지레짐작하느니 차라리 직접 상언하여 살피라 한 김병학·김병국 형제의 조언은 적중했다. 당장 내일 다시 능묘의 일이 거론되면 그는 입장을 바꿀 마음을 먹었다. 상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저와 같으니, 문수산 자락을 택지(擇地)한 것에 다른 뜻은 없을 터. 오히려 이 일로 훗날 양이(攘夷)의 의론이 불거진다 하여도 오늘 상이 그에게 내비추어 준 복심(腹心)을 보건대 충분히 타파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오경석의 평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잠저에 계실 제도 주상은 주의가 산만하고 명석함도 둔재를 겨우 면한 수준이라 하였지만, 흉중에 품은 기개는 이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가 아니요, 세상살이의 이치는 오히려 나이 여든 먹은 노인보다도 통달한 듯해 비범하다 하였다. (황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잡은 격이었지만, 어쨌든 미래의 사람이요 내용물은 구순을 내다보는 노인네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앞서 한 하교도 언뜻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는 아이를 보는 듯하였으나 그 안에 담긴 형형한 의지만은 확연하였다.

명군의 재목은 아니로되, 품은 뜻은 높다. 엉뚱한 면은 있으되 한 번 마음먹은 일을 내려놓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이를 거두어 아래에서 재주를 펼치게 하면 필히 다스림의 묘를 얻을 수 있으리라. 얄팍한 수작으로 벌어놓은 잠시의 기회를 잡아 능히 무언가를 일구어낼 수 있으리라.

문득 이 군밤도 어떤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분명 같은 군밤인데 식으면 맛이 없으니, 시무(時務)의 중함을 넌지시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떠올리자마자 터무니없는 생각이라 일축하였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는 이 당돌하고 예측불허인 주상이 장성하여 국운을 중흥케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이 저도 모르게 꽃피었다. 싸락눈이 때마침 개면서,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조금씩 비추었다. 군밤을 담았던 소매는 돈화문을 나설 때까지도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와 귀남 모두 몰랐던 것은, 처음 질화로와 군밤을 놓고 나갔던 내시와 이 모든 일을 지켜보던 사관이 있어, 제 응당 하여야 할 일은 제쳐놓고 운현궁에 알릴 이야기를 찾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자마자 벌어진 정쟁은 한쪽이 오해를 풀면서 해결되는 듯했지만, 그 앙금은 남아 다시금 불이 붙을 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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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가 말하는 법(法)과 실(實)은 동아시아 산술에서 고차다항방정식을 풀 때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이 중 법은 엄밀히 말해 미지수가 아니라 미지수가 포함된 항의 계수를 의미하므로, 우리가 익히 아는 미지수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의외로 고종 집권 초기까지만 해도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척사를 주장하는 진영의 간극은 넘을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개화파(가 될 사람)들은 아직 화이론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고, 재야 산림들도 서구 문물을 완전히 막아버려야 한다는 정도까지 (일부를 제외하면) 치우치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그러다가 터진 두 차례의 양요가 인식의 대전환을 불러일으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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