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삐거덕대는 문돌쩌귀 (1)
국상(國喪)이 난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도성 전체에 내려앉았던 쓸쓸함은 어느새 또 돌아온 설을 맞이하여 적잖이 걷히었다. 물론 함부로 즐겼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므로 어른들은 최대한 조용히 지내려 노력하였건만, 멋모르는 개구쟁이 아이들이 언제는 그런 것을 신경 썼던가. 장의동 김병학의 집에서도 하늘에 두둥실 뜬 연이 여럿 보였다.
그러나 집주인 김병학은 설에 연을 볼 여유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형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수려하신 얼굴에 해가 될까 아우는 두렵습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아우 김병국이 가볍게 말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던가. 세태(世態)의 염량(炎涼)함이 야속하기 그지없구나. 명색이 원단(元旦)이거늘 문객들을 제하고 여지껏 아무도 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정말 우리네 김문에 대한 마음을 버린 탓이겠습니까? 도성 여기저기 깔린 대원위의 끄나풀이 두려운 것이겠지요. 자, 형님, 그러지 마시고 여기 군밤이라도 드셔보십쇼. 작년 군밤보다야 덜합니다만 그래도 맛이 좋습니다. 나라의 법도에 국상 중 군밤을 먹지 말라는 것은 없잖습니까.”
수심 가득하던 김병학이 저도 모르는 새 밤을 집었다.
“그리고... 어차피 일이 이리 될 줄 모르고서 대원군 합하(閤下)의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잖습니까.”
농을 던지듯 가벼운 말투였건만 씁쓸함이 묻어 나옴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김문이 처음으로 세도를 잡은 지도 수십 년이 족히 되는 세월이 지났다. 그 이전의 시절을 기억할 리 없는 이 두 젊은이들은 가문이 이토록 영락(零落)한 데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난 설에 김좌근의 집에 모두 모였을 때만 하더라도, 김문의 성대함이 적어도 자신의 대에까지는 유지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이제는 기껏 김좌근의 집에 병문안을 겸한 세배를 다녀오니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겉에서 보았을 때 여전히 도성 최고의 명문가는 이곳 장동 김문이었다. 도성과 궁궐을 지키는 군관들은 모두 김문의 은혜를 입은 이들이며, 환국 이후로도 벼슬길에 나와 있는 이들 중 태반은 장의동 저택의 단골들이었다.
하다못해 사왕(嗣王)의 연소함을 이유로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명순대비(明純大妃. 철인왕후 김씨)도 김문 소생이 아닌가. 본래대로라면 대왕대비 조씨가 청정하여야 할 것이나, 흥선군이 마치 엄청난 인심을 쓰는 듯 전례를 비틀어 김문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물론 정사에 크게 관여치 않는 대비의 성격을 알고서 그런 것이겠지만,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흥선군이 크게 양보해 김문의 몫을 남겨둔 것처럼 보일 터, 이것을 가지고 영락하였다 일컫는다면, 당장 저 풍양 조문이나 여흥 민문의 사람들은 누구를 놀리냐며 발끈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문의 위세는 결국 그 문중의 재산이나 인맥이 아닌, 오직 휘두를 수 있는 권력에 의해 결정되는 법. 그러니 흥선대원군이 김병학·김병국 형제에게 넘겨준 장의동은 보이기에는 알맹이로되 실지로는 껍데기에 불과하였다. 지금이야 위세가 남아있다지만, 사왕이 친정(親政)하게 되고 지금 벼슬길에 있는 이들이 하나둘 물러나면 세도를 부리던 것은 한낱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릴 터였다. 허나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어쨌든 김문이 영류와 사류로 갈라져 싸우다 이 꼴이 나게 만든 책임의 반절은 이들 형제에게 있지 않던가.
그때였다.
“이리 오너라!”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요란하고도 육중한 문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정초(正初)임에도 하도 문 열 일이 없어 문돌쩌귀가 얼어붙은 듯했다. 두 형제는 서둘러 사랑채에 올라 손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내방한 이는 다름 아닌 유홍기(劉鴻基)였다. 세배를 하러 올 사람들은 아니 오고 정작 이 젊은 유의(儒醫)가 온 까닭은 무엇인가 싶어 물으려 하니, 그 눈치를 챈 듯 잽싸게 답변이 왔다.
“허허, 두 분 모두 새해 무탈하십시오. 옆집에 들리는 길에 함께 뵙고자 들렸습니다. 그 댁 양아들 되는 옥균(玉均)의 스승을 맡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이 장의동을 왕래할 일이 생긴 것이지요.”
옆집이라 함은 김병기(金炳基. 사영 김병기金炳冀와는 다른 사람)를 말한다. 비록 겨우 음서로 벼슬길에 나서 외직을 전전하는 못난 인물이라 하지만 엄연히 병학·병국의 손윗사람. 애초에 개화당의 중진인 그가 장의동에 세배하러 왔다는 것이라면 모를까, 옆집에 먼저 들렸다는 것은 딱히 트집 잡을 일은 아니었다.
“바로 담 너머 일인데 설마 내가 모르겠는가. 말은 그만 돌리고 얼른 용건으로 넘어가세.”
“예,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환재(瓛齋, 박규수) 대감께서 묻고자 하시는 바와 전하라 하신 바가 각각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환국 이후로 은밀하게 개화당과 말길을 트고 있던 김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김문의 숨통을 터준 것이 아니요, 오직 서서히 말라죽어가도록 내버려두리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남은 선택지는 대원군과 함께 떠오르는 개화당뿐이었던 것이다. 인물은 부족해도 처세에는 밝은 옆집 김병기가 개화당 중진인 유홍기를 글공부 선생으로 모셔온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그래, 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혹 대비 전하로부터 능묘의 일에 대해 어심(御心)의 향방을 전해 들으신 바가 있으셨는지요?”
대행대왕(철종) 승하 후 대비로서 존호를 받은 철인왕후 김씨는 김병학·김병국 형제와는 사촌지간이며, 몇 남지 않은 궁궐 내의 연줄이었다. 저 나름의 원칙을 우직하게 지키는 성정으로 인해 환국 전에는 친족의 정을 잊었다 – 즉 주상을 저들 맘대로 움직이는 일을 돕지 않는다 – 하여 문중 일부에서 불만이 있기도 하였으나, 김문이 수세에 몰린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내 전해 들은 바로는, 대행대왕 전하의 유지(遺旨)이므로 꼭 지켜져야만 한다고 이미 어심을 굳히신 듯하네. 자네 당이 걱정하는 그 일 때문인지는 대비께서도 끝내 아실 방도가 없다고 하셨고.”
주상은 선왕의 유지에 따라, 능묘를 통진 문수산(文殊山. 현 김포)에 정하고자 하였다. 물론 강화도가 바라보이는 곳이 그 뿐은 아니요, 개풍이나 연안에도 자리가 없지는 않지만, 그 거리가 김포에 비할 바가 못 되며 문수산보다 높은 곳 또한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그대의 당이 서쪽 오랑캐들과의 통교를 시무책(時務策)으로 내세우고자 논의하고 있음은 우리 또한 알고 있네. 그대들은 아마도 운현궁 쪽에서 선왕의 묘역을 지켜야 함을 내세워 오랑캐들이 포구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명분으로 삼으리라 근심하는 것이겠지. 맞지 않은가?”
“판서 대감께서 이처럼 현명하시니 역시 풍문이 헛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방(海防)의 명목을 내세워 양이(洋夷)와 교통하기는커녕 보이는 대로 쏘아 흩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예로부터 강화도가 강도(江都)라 불리며 중시되었던 것은, 전조 고려의 피난처이기도 하였으나 그보다 한성으로의 수운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거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능묘는 모름지기 능행차로 백성에게 수고를 미치고 오가는 비용이 지출되는 폐단을 꺼려 도성 가까운 곳에 조성함이 전례였는데, 아무리 선왕의 유지라 하나 전례를 깨고 한강 너머 바닷가 김포를 묫자리로 굳이 삼고자 하는 데는 이면의 심산이 있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신하된 몸으로 성상의 지극한 헤아리심을 어찌 함부로 거론하겠냐마는, 본래 잠저에 계실 적부터 품으신 포부가 남다르셨던 분이시네.”
김병국이 단언했다. 즉 이 일에 – 자기가 아는 한 – 흥선대원군이 개입한 정황은 없으니, 직접 임금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재 대감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잘 알겠다만, 이 일은 운현궁에서 의논할 것이 아니라 직접 상언(上言)하시어 성려(聖慮)에 혹 미진함이 있는지 아룀이 가할 것이야.”
김병학마저 저렇게 말하니 유홍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다음으로 환재 대감께서 전해주기를 청하신 말씀은, 곧 대원위께서 집정(執政)하시면서 경장(更張)의 뜻을 펴실 터인데, 혹 어긋나거나 덜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산림의 뜻을 모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는 동시에 제 귀를 의심하였다.
“무어라? 지금 산림의 뜻이라 하였는가?”
김병국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보게, 자네 동리를 잘못 찾아온 듯하네. 산림을 말하려면 저기 벽계의 화서(華西) 선생을 찾아가야지.”
벽계의 화서란 곧 이항로(李恒老)로, 최익현(崔益鉉), 김평묵(金平默) 등 쟁쟁한 인물을 문하에 두고 있는 산림의 거두다. 그러나 지난 임술년(1862) 김문이 꾸민 돈녕부정 이하전의 옥사에 공범으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른 바 있었다.
김병국의 비꼬는 대꾸를 듣자 유홍기는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한 뭉치 두루마리였는데, 펴 보니 전국 팔도의 서원 이름이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내로라하는 유서 깊은 곳들도 몇 있어 병학과 병국의 눈에 들어왔다.
“대원위께서 환국 후 반 년 간 운현궁에 계시면서 난초만 치신 줄 아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국장(國葬)의 일이 마무리되면 곧 서원 철폐령이 내릴 것입니다.”
“무어라? 서원을 철폐해?”
세도가들의 등쌀에 밀려 지방에 남은 사족(士族)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김문은 서원의 폐단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하였다. (적당한 청탁을 넣지 않는 한) 과거를 본다 하여 벼슬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대신 부족한 이들은 향시에, 그나마 능력 있는 이들은 진사, 생원 자리에 만족케 하고 서원에 모여 양껏 위세를 부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고 적당히 추려내기는 하겠다 싶었는데, 철폐령이라니?
“듣기로는 그간 보부상들을 부려 팔도 방방곡곡을 돌게 하며 수소문케 하셨다 합니다. 하여 배향하는 선현이 중복되는 곳, 근래 등과자가 없는 곳, 백성을 수탈하였다고 고변된 곳은 모두 폐하겠다 합니다.”
배향하는 선현이 중복되는 것이야 전국에 서원이 천여 곳이 넘으니 당연한 일이요, 등과자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백성을 수탈하였다는 고변은 전국 어디를 뒤져도 나오지 않는 곳이 더 드물 터였다. 비록 권력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하기는 했지만 대신 김문과 개화당의 협조로 쓸 만한 인재들을 확보한 대원군은, 원 역사보다 훨씬 이른 이 시점에 서원 철폐를 추진하고 있던 것이다.
“사세가 이러하니 마땅히 구원(舊怨)은 잊고 올바른 정사에 흠이 가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무렵의 사족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위신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다. 물론 대대로 벼슬을 하며 이름을 떨치는 집안도, 또 만석꾼 노릇하며 화식(貨殖)으로 이름을 남기는 집안도 적잖이 있기는 하지만, 절대 다수는 그런 집안에 어떤 식으로든 빌붙는 이들. 서원을 철폐함은 이들에게 손해인 정도를 넘어, 정체성 자체를 무너뜨리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위협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고 김문이 먼저 깃발을 들게 되면, 세도가 자체에 불만을 품은 몇몇 지조 높은 선비들이 아니고서야 모두 김문의 편을 들 것이다. 김문의 남은 세력과 개화당 일파들이 조정을 나누어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니, 이들 중 어느 한쪽을 내치지 않고서는 벼슬자리를 가지고 지방 사족들을 회유할 수도 없을 터. 이대로라면 서서히 고사해나갈 김문으로서는 다시 산림의 지지라는 든든한 뒷배를 얻게 되는 셈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예전과 같이 끝없는 재화 속에서 호사를 부릴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흥선대원군이라는 용의 꼬리, 그것도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겉 비늘 신세는 면할 수 있으리라.
궁리가 이에 미친 김병학은 꽤 솔깃한 듯했지만, 김병국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우리야 이 일로 개화당도, 운현궁을 따르는 무리도 아닌 뭇 선비들의 중론(衆論)을 모을 수 있겠다지만, 이번 일로 개화당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화서 선생처럼 당장 천주학을 퍼뜨리는 무리들을 모조리 주살(誅殺)하자는 의론까지야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굳게 방비한 국경의 빗장을 사소한 이익을 위해 연다고 하면 좋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터.”
기다렸다는 듯 유홍기가 대답했다.
“대감,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지금 산림의 고명한 선비들이 대원위의 영에 반대하는 공론을 모은다면 그 좌장으로 누가 우뚝 서겠습니까? 설령 화서 선생은 아니라 하여도 비슷한 이들이 나올 테지요. 이는 우리 당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김문을 통해 양이와의 통교에 반대하는 이들이 도를 지나쳐 어지러운 말로 성총(聖聰)을 흐리게 하는 일을 미리 막겠다, 그런 말이로군.”
내키지 않는다는 듯 김병학이 말했다. 사촌인 대비만큼이나 우직한 성격인 그는, 어찌보면 세도가의 자제답지 않게 고지식한 선비의 풍모가 있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그리고 가문의 번영을 위해) 자신에게 쥐어진 세도를 부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술책을 부리는 것은 썩 뒷맛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시무(時務)를 논하자면, 대행대왕 전하의 능묘에 대해서도 중지(衆志)를 능히 모아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척양(斥洋)으로 치우치지 않게만 해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저희 당에서도 힘을 실어드리겠습니다.”
“하하, 이보게 대치(大致), 이 계책은 설마 환재 대감께서 마련하신 것인가? 이것 참.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신 줄 알았더니만 사마중달(司馬仲達. 사마의)이셨군!”
김병국이 뼈 있는 농을 던졌다. 저보다도 젊은 이 의생이 어찌 이러한 제안을 홀로 내었겠는가. 필히 뒤에 박규수가 있을 터. 김문의 회유와 외면이 반복되는 동안에는 『춘추(春秋)』에 나올 법한 고고한 우국지사로 행세하던 박규수가, 정작 자신이 정사에 관여할 수 있게 되자 『전국책(戰國策)』 속 모사들처럼 계책을 꾸몄다는 사실이 제법 재밌게 느껴졌다.
고심하던 김병학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직 사왕께서 즉위하시지도 아니하였는데 헤아리심에 치우침이 있어 교화(敎化)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 내 연통을 돌리도록 하겠소. 그대의 당도 지금 약조한 대로 지켜주기를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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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기는 당연히 중인일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오히려 무관 집안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역관이나 의생 등 중인에 가까운 직업을 가진 친척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애초에 중인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신분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