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2화 (2/320)

1. 비틀림의 근원 (1)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의 도(道)가 있는 법이다. 군밤을 굽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냥 밤을 집어다 화통에 넣고, 적당히 구워지면 꺼내서 먹으면 된다고 하는 건, 적당히 싸게 사서 비싸게 팔면 돈이 벌린다, 적당히 씨 뿌리고 김 매주면 벼가 영근다, 대략 이 정도의 무식한 소리다.

밤톨도 나무의 어디에 언제 열렸느냐에 따라 그 실한 정도가 다르다. 불도 무엇을 때느냐, 화통의 어디에 밤을 놓느냐에 따라 그 화력이 달라진다. 적당한 온도로 밤톨 전체가 적절히 익혀져야만 비로소 밤 고유의 구수하고도 달달한 맛을 오롯이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까지 설명했더니, 군밤장수 총각의 입이 떡 벌어진다. 어린놈이 하도 당당하게 나서기에, 어디 맛이나 보자 했다가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뜬 군밤장수 천가였다. 소년이 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리고 어떻게 그걸 다 터득했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군밤장수 노릇을 나름 서너 해는 했던 그였기에 눈앞의 소년이 말하는 것이 실로 엄청난 심법(心法)임은 짐작할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재주라도 확실히 배워두면 입에 풀칠은 할 것이요, 그의 망나니 작은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일도 더는 없을 것이다.

“얘, 내 뭐든 할 테니 그것 좀 가르쳐주라.”

“맨입으로는 안 되우.”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무엇으로 값을 받을지 고민하는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은 뭐라도 받아낼 궁리를 해야 한다. 앞서 놈이 아범에게 약조한 것이 문득 떠올랐다. 일단 군밤이라도 몇 톨 챙겨가서 물려줘야 후환이 덜할 것이다. 그리고 이왕 그럴 것 이 총각에게서 왕창 뜯어내 어머님께도 드리고, 형님께도 드리고, 누님께도...

“그럼 뭣으로 값을 치르란 말이니? 보아하니 그래도 꽤 사는 집 아들 같은데...”

“어차피 구워가면서 가르쳐야 할 거 아뇨? 내가 구운 밤은 내 몫으로 주쇼. 명색이 이것도 재주인데 공량(貢糧, 수업료)은 받아야지.”

자기가 갑의 위치에 서자마자 처음 공대하던 말투가 바로 원상복귀된 귀남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도 입에 풀칠해야지, 인석아. 쬐끄만 놈이 욕심은 많아가지고.”

“뭐, 그럼 배우질 말던가. 댁 말고도 세상에 군밤 파는 사람은 많지만 이만치 잘 굽는 사람은 여기 구름재 사는 나 빼곤 없을 터요.”

“옘병. 말이나 못하면... 알았다, 알았어. 대신 약조한 대로 꼭 가르쳐줘야 한다? 안 그럼 네가 뉘 집 아들인지 캐물어서 네 녀석이 하라는 글공부는 안 하고 밤이나 굽는다고 느그 집에 일러바칠 게야.”

“댁이나 무르지 말기요. 내 집에서 됫박을 들고 와서 가져갈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있으쇼.”

쪼르르 개구멍으로 다시 들어가 바가지를 들고 나와서 보니, 총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물론 다른 곳으로 도망을 치려해도, 귀남이 앞서 구워둔 군밤 맛을 본 다른 아이들이 동무들까지 끌고 우르르 몰려왔기에 여의치 않았겠지만.

귀남은 곧 다시 화통 앞에 앉았다. 익숙한 동작으로 밤을 몇 번 쥐엄쥐엄 한 뒤 집어넣는데, 문득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차피 오늘 공부도 밤 굽느라 공칠 공산이 큰데, 그렇다면 이왕 집안사람들에게 군밤을 나눠주는 길에 흥선군에게도 몇 톨 바치면 그나마 덜 얻어맞지 않을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단 게 들어가면 품어놓은 독기도 금방 흩어지는 법. 이 방법으로 다리가 부러질 일을 쪼인트 몇 번으로 퉁친 게 비일비재했던 종로구 터줏대감 귀남의 사회생활 비법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종로구 경찰서에서도, 인사동 주먹패들 앞에서도 잘 먹혔던 이 수법은 파락호 흥선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날이 어슴푸레 저물 무렵, 추레한 행색에 눈빛만 형형한 채로 돌아온 흥선군은, 귀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물어본 것이다.

“그래, 읊어 보거라. 자위공야장(子謂公冶長)하시되?” [『논어』 <공야장(公冶長)> 첫 구절]

“그... 아부지, 그보다 소자가...”

“자위공야장 하시되?”

“군밤을...”

바람을 가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번뜩 하더니 얼굴이 팩 옆으로 돌아갔다. 흥선군은 몸종 말뚝이에게 회초리를 가져오게 시키더니 팔뚝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이어진 가정 훈육의 시간이 끝났을 때는 부르튼 양쪽 뺨과 볼기짝과 종아리 중 어디를 먼저 주물러야 덜 아플까 고민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날 밤, 사랑방.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간만에 이하응은 붓을 잡았다. 밥벌이를 위해 한동안 열심히 팔아치웠던 석파란을 간만에 그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날 장남 이재록(아직 이재면으로 개명하기 전)의 등과(登科, 과거 합격)를 청탁하기 위해 세도가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 찾아갔다가 받은 모욕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이미 김병기에게 한 번 퇴짜를 맞은 뒤 궁여지책으로 찾아간 터였다. 천덕기와 하일평이를 시켜서 며칠간 열심히 난전 상인들에게 토색질을 한 끝에 겨우 마련한 달피(獺皮)를 아니꼬운 속을 비치지 않으려 꾹 참으면서 바쳤더니, 남병철 그 놈이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암, 내 마땅히 도와드려야지. 등과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남겨야 할 것 아니오. 그렇잖아도 요새 반가의 자제들이 영락하여 난을 쳐서 파네, 글월을 써서 값을 받고 파네 하는 안타까운 소문이 돌던데, 흥선군의 자제에게 그런 일이 있으면 아니 될 일 아니겠소이까, 허허허.”

어찌 하면 이 모욕의 대가를 훗날 돌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겨우 참지 않았더라면, 성질을 못 이기고 ‘종친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는 더 안타까운 소문을 만들어주겠노라 대꾸할 뻔했다. 차라리 그렇게 대접을 받고서 청탁한 대로 해주겠다는 확언이라도 받았다면 모를까, 속을 긁어놓고서는 한다는 말이 ‘과거도 엄연한 나라의 일이므로 사영(思穎. 김병기의 호) 대감의 뜻을 물어야 할 것’이라는 게 아닌가. 자신이 김병기에게 청탁했다가 한 번 허탕을 쳤다는 것을 뻔히 알 만한 자가 천연덕스레 그리 둘러대니, 겨우 눌러 앉힌 심화(心火)가 다시 폭발하여 폐부(肺腑)를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돌아왔더니 자신의 장구지계(長久之計)의 중추가 되어야 할 작은아들놈은 하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어쭙잖은 발명(변명)이나 주워섬기려 하고 있었다. 무어라 엄하게 꾸짖기도 전에 손바닥이 먼저 나갔다. 딴에 그래도 아버지를 닮아 깡이라도 생겼는지, 두서 해 전이라면 다 맞기도 전에 엉엉 울며 도망치다 붙잡혀 매타작을 당했을 터인데 이번엔 묵묵히 후려치는 대로 얻어맞았다.

어디 부러뜨리지 않고서 때릴 수 있는 곳이 동나서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낸 뒤 사랑방에 들어와 의관을 풀고 있는데, 부인 민씨가 조용히 들어와 무언가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손아귀에 뜨끈한 것이 무엇인가 살피니 군밤이었다.

“명복이가 오늘 구운 밤이오. 재선 어멈(흥선군의 첫 첩 계성월)이 놈이 아범에게 들었다는데, 저기 옆골목 군밤장수한테 열심히 배웠는지 자기가 직접 가서 굽더랍니다. 녀석 딴에는 효도한다고 구워온 것인데 성의 봐서 한 번 자셔라도 보시오. 식었을까 해서 방금 전 군불에 조금 데워 왔소.”

무심결에 한 톨을 입에 집어넣었다. 한 입 깨무니, 그 달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그 옛날, 아버지 남연군 몰래 뒷골목에서 먹던 그 맛, 아니, 그보다도 더한 맛이었다. 그러자 기묘한 부끄러움이 마음 한 구석에서 느껴졌다. 아비와 달리 딱히 손재주가 있지는 않은 작은아들이다. 그 아이가 부모님께 바치겠다고 성심성의껏 준비한 것 아니겠는가. 이 정도 맛은 하루이틀 구워본 솜씨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왜 명복에게 그처럼 화를 내었던가. 물론 그날 당한 모욕의 화풀이도 있었겠지만. 또 돌이켜보면 정말 아들에 대한 걱정만으로 매를 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심대한 계획에서 핵심이 되어야 할 아들이다. 용상에 올라서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말하며 국새를 찍어주어야 할 아들. 금상(철종)이 저 장동의 김문(金門, 안동 김씨) 놈들에게 꼭두각시처럼 놀려지듯 자신을 위해 꼭두각시가 되어야 할 아들이다. 그러려면 최소한 용상에 오른 뒤 금상처럼 궁궐 구석에서 비웃음당할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자신까지 망신을 살 일은 없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그가 이 대업을 꾀하기 시작한 이래 진실로 작은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글공부를 시키거나 살아가는 도리를 말해준 적은 없다. 권력을 위한 수단, 용상에 오르기 위한 받침돌. 어느새 자신이 생각하는 작은아들은 그 정도였고, 암만 노둔한 명복이라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복이는 자신과 민씨를 위해 이 군밤을 구웠다. 제가 글재주나 공부머리는 없음을 깨닫고 어떻게든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궁리한 결과가 이 군밤이었을 것이다. 궂은일을 해보았을 턱이 없으니 아마 저 소매 안쪽에는 여기저기 생채기와 화상이 나 있을 것이다. 군밤장수가 화통을 그냥 빌려주었을 리 없으니, 천방지축인 제 성정을 죽이고 무얼 원하든 그대로 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착한 아이였다. 아버지 남연군과도, 자신과도, 형제와 다른 종친들과도 다르게 순수하고 착한 아이였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저렇게 착한 아들을 어찌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그는 붓을 놀렸다. 일필휘지로 그은 난초 이파리. 아직 마르지 않은 먹물에 등잔불이 비추어 마치 살아있는 난초에 이슬이 맺힌 듯했다. 몇 번 더 내리긋고 휘둘러 석파란을 완성한다. 그의 스승 추사도 감탄했던 빠르기요 솜씨다. 잠시 숨을 돌리고는, 차갑게 식어가는 군밤 한 톨을 다시 입에 넣었다. 식었지만 그 구수함은 여전하다.

그의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이 군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까 하는 궁리가 스쳐지나간다. 재간꾼 장천동이와 바람잡이 안동수를 시키면 이걸 그럴듯한 효행으로 포장해서 저자의 소문으로 횡행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소 효성으로 이름난 흥선군의 차자 이명복이’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비범한 능력도 아니므로 김문의 노괴들에게서 경계심을 사지도 않을 것이며, 그의 대계에 의해 명복이가 용상을 이을 자로 지목될 때 이를 뒷받침할 명분도 조금은 더 생길 터이다.

결국 아들의 착한 심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는 꼴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권력욕을 사직(社稷)과 전주 이씨 왕실을 위한 것으로 자기합리화하고 있던 흥선군이었다. 그는 오히려 이것을 아들이 난세에 휘말려 그 선한 심성에 때가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가 대업을 이루어야 할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고, 잠시 들었던 의심은 더욱 강한 결심이 되었다. 고운 종이 결을 타고 번지던 먹물이 말라붙어 날카로운 난초 이파리의 형상을 이루었다.

한편, 다음날부터 한층 열의를 띄게 된 흥선군의 지도편달에 당황한 귀남은 흥선군은 군밤을 싫어하는 게 틀림없다고 지레짐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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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묘사된 흥선군의 자녀 훈육 기법에 대해 당연히 작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군밤장수 천덕만은 짐작하셨겠지만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작중 알게모르게 등장한 천하장안 4인방은 야사에 따르면 실존인물입니다만, 제가 아는 한 이름과 행적이 따로 전하지 않아 재량껏 창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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