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종, 군밤의 왕-1화 (1/320)

서장

“에구야... 올해 장사도 끝났구먼 인자...”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거리를 보며 쓸쓸히 말했다. 종일 내리던 비는 날이 저물자 거짓말처럼 잦아들었고, 청명한 밤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밤인데도 서늘한 기운만이 살짝 감도는 것이, 이제 확실히 겨울은 지나간 듯했다.

화통의 불을 끄기 위해 간신히 허리를 굽혀 낑낑대고 있는데, 익숙한 단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군밤 이천원 어치만 주시오.”

얼마 안 되는 매상을 그나마 책임져 주는 이였다. 얼추 보기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이건만, 신수는 훨씬 훤했다. 종종 자신이 저기 뒤편 북악산 산신령이라고 흰소리를 하는 것만 빼면 영락없는 신사였다.

“좀만 기다리슈. 오늘 장사 공치는 줄로 알고 미리 구워놓질 않아서리...”

“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하시오. 나야 뭐 남는 게 시간이외다. 헌데 영 벌이가 신통치 않은가보오?”

“에휴... 볼 때마다 허는 소리지만은 예전 같지가 않해요. 그렇잖아도 겨울은 따뜻허지, 거기에 뭔 고라니인지 고로쇠인지 역병이 돌아서 사람들은 도통 돌아댕기지를 않지. 게다가 요즘 젊은 것들이 어디 생율밤이고 뭐시기고 군밤 맛을 알기나 하우? 군것질 할 것 같으면 맨 도나스니 츄라스니 하는 물 건너온 걸루다 하지.”

“아이고, 그래도 임자만큼 밤 잘 굽는 사람도 없수다. 요 근방에 다른 군밤장수들은 진즉에 장사 관두었는데 임자는 용케도 버티고 있잖소.”

노인의 신세한탄에 단골이 웃으며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정작 노인은 별로 수긍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야 헐 줄 아는 거이 이 밤 굽는 것뿐이니 그렇지, 어디 나도 남들마냥 봉양해줄 아들딸 있었음 늘그막까지 이러고 있었겠수? 그냥 팔자려니 하는 거지.”

단골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팔자라? 임자, 그 팔자 혹시 팔아볼 생각은 없소?”

“으이구, 그게 판다고 팔아지는 물건이유?”

“아, 산다는 사람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내 얼마 전에 요 옆 동네에서 웬 어린 놈이 원없이 군밤이나 먹고 싶다고, 그걸 소원이랍시고 비는 걸 봐서 하는 얘기요. 그놈도 가만히만 있으면 후대에 욕 좀 먹는 것 빼면 나름 출세해서 호의호식할 팔자인데... 쯧쯧. 여간 철부지가 아니지.”

노인은 군밤에 집중하기로 했는지, ‘아이고, 저놈 또 시작이다.’하는 표정을 지을 뿐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러건 말건 기이한 신사의 허풍은 계속 이어졌다.

“응?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얘기 안 해요. 내 북악산 산신령으로 지낸 게 그래도 한 천 년 되었는데 임자만치 밤 잘 굽는 사람은 못 봤다니까? 저어기 인왕산부터 해서 목멱산, 관악산, 도봉산 산신령도 모두 임자네 군밤 한 입씩 들더니 그럽디다. 이 정도면 그 옛날 비류랑 온조가 내려온 시절 이래로 가장 맛난 밤이라고.”

화통을 뒤적이며 노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흰소리도 작작 하시우. 거 말이야 고맙다만은, 어떤 얼 빠진 놈이 나 같은 놈 팔자를 원한단 말이우? 천애고아에 자식이라고 있던 놈은 먼저 홀라당 가 버리고. 나인들 호의호식하기 싫겠냐만은...”

“아이고... 저가 좋다면 좋은 것이지 그야. 여하간 임자도 팔자 고칠 수만 있다면 요 장사 때려칠 마음이 있다는 거 아뇨?”

“그걸 말해야 아우? 자, 다 구웠수. 이천 원이유.”

군밤을 건네받으며 단골이 말했다.

“고맙소. 그럼 임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리다. 그간 군밤 맛나게 먹은 값이라 생각하시오.”

헛소리라도 고맙다고 해주려 했더니, 어느새 단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화통에 불을 끄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세상에 별 실없는 놈도 있구나, 생각하며, 노인은 털레털레 자신이 기거하는 한 평 반짜리 쪽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펴고 눈을 감았다.

이것이 일신에 밤 굽는 재주밖에 없는 종로구 군밤장수 김귀남(86, 노점상) 옹이, 훗날 운현궁이 될 옆동네 구름재댁에서 철없는 소원을 빌던 개똥이(10)로 다시 눈을 뜨게 된 사연이었다.

그로부터 꼬박 한 해가 지났다.

엉뚱한 천장 아래서 눈을 뜨게 되자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귀남의 나이도 어느덧 여든여섯.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서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뜬금없이 돌아갈 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체득한 터였다. 언제는 서울에 탱크가 예고를 하고 밀어닥쳤던가? 오히려 영 시리던 무릎이 멀쩡해지고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서 뚜둑 소리가 안 나는 것이, 퍽 편했다.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도 모두 귀남이 상경하기 전 시골에서 익히 접했던 것이라 오히려 마음을 편안케 했다.

듣자하니 그의 아버지는 성이 이씨요, 이름은 하응이라, 말로만 듣던 파락호 흥선군이었다. 학교 문턱만 살짝 밟았던 게 학력의 전부였던 귀남은 흥선대원군과 그 아들 고종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몰랐다. 그래도 어렸을 적, 왜정 시절 소학교를 마친 인재로 여기저기 징용이다 뭐다 해서 조선 팔도를 쏘다녔던 큰형이 종종 들려주던 – 본래 생에서 귀남은 유복자였다 - 이조(李朝) 시절 옛 이야기는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대충, 조선은 어차피 망할 만한 나라였다. 흥선대원군은 그래도 꽤 대단한 사람이다. 민비였나 뭐였나 했던 고종의 마누라는 영 글러먹은 여인이다. 이 정도가 그의 머릿속에 남은 인상의 전부였다.

이왕 이렇게 태어난 거, 적당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군밤장수나 하던 그가 무너지는 나라를 다시 고쳐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니, 그냥 비명횡사나 하지 않고 왕 노릇이나 오래 하면 그것으로 족할 터였다.

개똥이, 그러니까 이명복이는 귀남의 넋이 들어오기 전에도 썩 총명한 녀석은 못 되었던 것 같았다. 머리가 영 안 돌아가는지, 아니면 돌아는 가는데 엉뚱한 방향으로만 튀어서 그런지. 그나마 원 주인의 기억이 몸에 남아있었고, 부족한 부분은 귀남이 그간 쌓아온 눈치로 대충 둘러대면 되었기에 덕분에 귀남은 그리 티를 내지 않고 새로운 일상에 녹아들 수 있었다. 하라는 글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짓만 한다고 종종 종아리에 석 삼(三)자가 그려지곤 했지만, 군밤장수 노릇을 갓 시작할 무렵 자릿세를 못 내서 곧장 얻어터지던 것을 생각하면 가려운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흥선군이 집을 나서며,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논어』의 한 장을 다 못 외워놓으면 경을 칠 것이라고 단단히 경고하였기에 부득이하게 마루에 앉아 글을 읽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귀남의 머리로나 명복의 머리로나 다 외우기는커녕 절반도 못 할 것 같고, 어떻게 하면 최대한 덜 맞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의 코에 익숙한 냄새가 살랑거리는 게 아닌가.

“놈이 아범. 어디서 밤 굽는 냄새가 나는 것 같소.”

마당을 쓸던 중늙은이 머슴에게 넌지시 물었다. 잠깐 까치발을 짚어 – 아범은 꽤 허우대가 컸다 – 담장 너머를 바라본 아범이 답했다.

“군밤장수 천가 녀석이 저어기 옆 골목에 자리를 깔았습니다요. 한 두 해 안 보이더니만. 아마 다른 자리로 옮겼다가 그쪽에서도 별 재미를 못 본 모양이지요.”

슬슬 시장기가 있던 차에 군밤 냄새까지 맡으니 회가 동했다. 귀남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보오, 아범, 내 잠깐 가서 주전부리나 하려고 하는데, 발설만 안 한다면 아범에게도 좀 나눠주리다.”

명복이 이렇게 글공부를 뒷전으로 미뤄놓고 엉뚱한 짓을 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기에, 놈이 아범도 크게 개의치 않아하며 눈을 감아주었다.

귀남은 조용히 개구멍으로 나가 옆 골목으로 향했다. 과연 떠꺼머리총각 하나가 열심히 밤을 굽고 있었다. 미군이 드럼통을 뿌리고 가기 전이라 화통은 훨씬 작은데다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지만, 그래도 군밤은 군밤인지 그 앞에 벌써 다른 어린것들이 줄을 서 있었다. 어디서 꺼내왔는지 엽전 한두 닢을 들고 있는 놈도, 천쪼가리를 들고 있는 놈도 있고, 심지어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지 숟가락을 들고 나온 놈도 있었다. 흥선군이 파락호로 유명하던 시절에도 주변에는 방귀깨나 뀌는 집으로 유명했는지, 귀남이 줄 뒤에 서자 다른 어린것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런데 밤을 굽는 총각의 모습을 보니, 영 어설픈 것이 아닌가. 참견을 하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군밤장수 경력 70년이 울 것 같았다.

“이보시오. 밤을 그리 구우면 골고루 익지가 않을 거요.”

“제기, 그럼 저가 구워보든가.”

나름 나이가 많은 것 같아 하오체로 던진 물음이 반말로 돌아온다.

“그럼 원하는 대로.”

시퍼렇게 젊은 녀석에게 업계 선배의 가르침을 내려준다는 마음으로, 귀남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총각 옆으로 다가갔다. 툴툴대면서도 총각은 의외로 순순히 자리를 내 주었다.

그리고 반 각 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군밤의 신세계를 맛보았다. 조선에 군밤의 왕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가도, 귀남 본인도 모르겠지만 조선의 앞날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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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귀남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왜정’, ‘민비’와 같이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조금 어색하거나 거북한 표현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해당 연령대의 일반적인 어르신들의 인식과 관념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이며, 작가의 이념 또는 사상과는 무관함을 미리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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