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42화
30. 한인 (2)
―이제 그만 자.
나도혜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좀 더 통화해.”
―내일 일찍 나가기로 했다며. 그리고 지금 밖에서 통화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컨디션 관리 잘해야 될 거 아니야. 얼른 들어가서 자.
“그래도 좀 아쉽네.”
―아쉬울 거 하나도 없어.
“잉? 말을 왜 그렇게 하신대?”
―컨디션 관리 잘해서 일에 열중해야 되잖아. 거기가 빨리 잘 돼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거기서 우민 씨랑 살림 차릴 거 아니지?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금방 돌아가야지. 한국에서 해야 될 일들도 많고.”
―됐어, 오지 마.
“뭐야, 갑자기 또 왜 그래?”
―내가 아니라, 일만 생각하지. 맨날 일일일.
“그런 이유도 있다는 거지. 당연히 보고 싶으니까 빨리 돌아가려고 하는 거지.”
―진짜?
“그럼.”
―돌아오기 2주 전에는 꼭 말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따.
“그건 왜?”
―그런 게 있어.
“뭔데? 선물이라도 준비하려고?”
―딱히 뭘 주거나 하려는 건 아닌데, 선물이라면 선물이지.
“뭔데? 말해봐.”
―싫어. 안 알려줘.
“에이, 말해봐.”
―직접 오셔서 확인하세요.
“치사하게.”
―소용없어.
“뭔지 말해주면 내가 그걸 위해서 더 빨리 가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나도혜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안 알려주면 일부러 천천히 오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영상통화도 아닌데 그녀가 눈을 흘기는 게 보이는 듯했다.
“알았어, 알았어. 가서 확인할게. 기대해도 되는 거지?”
―글쎄, 막상 보면 또 실망할지도 모르지.
“뭐야…….”
―아무튼 너무 늦었다. 얼른 들어가서 푹 자. 시간 될 때 또 연락하고.
“알았어. 저녁 잘 챙겨먹어.”
―응, 끊어어어어.
통화를 마친 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떨어져 있게 돼서 내심 걱정도 됐는데, 오히려 한창 불타오를 시기에 보지를 못하니 더 뜨거웠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만나면서 이렇게나 대화가 잘 통했던 것은 처음인 듯했다.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즐거웠다.
뭐만 해도 웃기 바빴다.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굉장히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함께 시간을 보낼 때 가장 재미있어야 했다. 나도혜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능력도 좋고, 외모도 빼어났다. 내게 과분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름대로 유명세를 탔다. 좋지 않은 일도 수차례 겪은 덕분에 얼굴이 팔린 것에 가깝긴 했지만.
나도혜는 그런 나와는 다르게 여러 방송들을 거치며 착실히 이름을 알렸다. 젊은 미인 한의사에 세계 피트니스 대회 우승까지 한지라 더 화제가 됐고.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최근에 나도혜를 검색해보다가 알게 된 게 있었다. 그녀에게 대시했던 남자들이 꽤 많았다는 점이었다. 능력 있는 기업인들부터 시작해 운동선수와 연예인들까지.
나와 나도혜는 서로의 과거 연애사에 대해서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과거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거기에 묶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과거는 좋은 추억 몇 개만 가끔 떠올리며 히죽거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다.
그렇기에 나도혜의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다. 지금은 나를 만나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만.
내 인성도 아직 멀었는지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 검색을 하게 된다. 검색을 하면 여러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이상한 루머까지 있다.
심지어 나도혜가 여러 프로그램들에 나오고 유명해진 게 방송국 PD인지 국장인지랑 만나서라는 말도 있었다.
이때는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는데, 사실이 아닌 걸 알기에 금세 진정할 수 있었다.
나도혜는 그전부터 유명했고, 연줄을 사용하고 싶다면 인맥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금수저인 그녀가 아쉬울 게 뭐가 있어서 더러운 꼴을 봤겠는가. 가뜩이나 자존감도 높고, 자존심도 센 사람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불타오르는 내게 기름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상한 자부심 비슷한 것도 있었다.
지금 나도혜와 함께하는 것은 나였으니까.
3
내일을 위해 매트를 깔고 잠을 청했다.
노우민은 고단했는지 진작 잠에 들어 있었다.
언제 잠에 들었을까.
눈을 뜨니 반가운 공간에 들어서 있었다.
요단 방이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히죽히죽 웃으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오랜만에 오는지라 약간의 설렘이 있었다. 누구와 마주하게 될지도 궁금했고.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다시 본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내게는 그랬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매일 보고 싶었다.
나는 등을 편하게 기대고 양쪽 팔걸이에 손을 걸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며 누군가 모습을 나타내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맞은편 소파에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전에 봤을 때처럼 젊은 모습 그대로였다.
“할아버지!”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를 높이자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넌 좀 어떠냐?”
“못 보셨어요?”
“못 보지는 않았지.”
“그럼 잘 아시겠네요.”
“아니, 잘 안 봤어.”
“예에?”
내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목소리를 높이자 할아버지가 크게 웃다가 말했다.
“요놈아, 내가 너만 보면서 살아야겠느냐? 나도 내 시간을 보내야지.”
나는 멋쩍음에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뇨, 뭐……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항상 잘 알고 계셨으니까요.”
“알지, 잘 알지. 안 봐도 훤하다.”
“그래요?”
“그럼. 아주 자아알 지내고 있잖느냐.”
“맞아요, 정말…… 제 인생에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항상 감사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도 많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할아버지는 조금 전과는 다른 웃음을 지었다. 부드럽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점잖은 미소였다.
“넌 항상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에요. 부끄러운 과거가 많습니다.”
“네가 제일 잘못한 거라고 해봤자 예전에 좀 게을렀던 거밖에 더 있느냐.”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뭐…….”
“나도 소싯적에 쌈박질 많이 하고 돌아다녔다.”
“할아버지가요?”
할아버지는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럼. 한 번은 도둑놈을 잡아다가 혼쭐을 내준 적도 있었지.”
“그건 싸움이 아니죠.”
“애들끼리 싸우기도 했지. 소학교 다닐 때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쭉.”
“그래요? 상상이 잘 안 되네요. 할아버지 같으신 분이…….”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나라고 뭐 특별했겠느냐? 내 무슨 성인(聖人)도 아니고, 다 똑같은 사람인데.”
“저한테는 그렇게 느껴져요.”
“애쓴다, 애써.”
할아버지는 잠자코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건희야.”
“네, 할아버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예?”
“나는 말이다, 네가 좋은 일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긴 하다. 그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잘 살 수 있게 하기를 바라.”
“예, 물론이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거기에만 매달려 있을 필요도 없어.”
“네……?”
당황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넌 이미 잘하고 있어. 네 정성이 들어간 것들이면 분명히 효과를 보게 될 거고. 그러니까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라는 말이다.”
“크게 무리는 안 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쫓기듯이 하지 말거라. 네가 원치 않아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순간이 올 게야. 그러다 또 한가해지고. 원래 인생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 그러니 뭐가 오든 간에 묵묵히 받아들이고, 거기에 휩쓸리지 말거라.”
“예.”
“정한 대로만 해.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지켜보지 않았다고 했지만, 내 마음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마음을 좀 더 편하게 먹어야지.
할아버지가 양쪽 입가에 미소를 흠뻑 머금고 말했다.
“너 자신을 믿거라. 그게 가장 중요하다.”
“네, 네.”
“스스로를 못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없단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내가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는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구나.”
“벌써 가시나요? 아무래도 공력…… 같은 것 때문이지요? 여기 머무시는 시간을 길게 가지지 못하시는 거요.”
할아버지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역시 내 예상이 맞는 듯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아닌데? 그냥 가고 싶어서 가는 건데?”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했다.
“예? 그냥 가시는 거예요?”
“응, 오늘 내기가 있거든.”
“내기요?”
“어어, 독일 영감 하나랑 꽤 친해졌는데, 요즘 서로 장기랑 체스를 알려주고 있거든. 오늘 장기로 붙는 날이라 꼭 이겨야 되거든. 체스로 붙을 때는 그 영감이 이길 때가 많아서 말이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잘 지내시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네 녀석이 내 걱정할 거 없다.”
“할아버지.”
“왜?”
“할머니는 잘 계시죠?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도…….”
“할멈은 잘 지내지. 지금도 너 지켜보고 있을 거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양팔을 크게 저었다.
“할머니! 손자 잘 지내고 있어요! 다음에 꼭 봬요!”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이제 진짜 가봐야 될 거 같구나.”
“네, 네. 절 받고 가십쇼!”
나는 곧바로 할아버지를 향해 절을 올렸다.
할아버지는 씩 웃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이만 가볼 테니 얘기 좀 나누다가 가거라.”
“네? 얘기요? 누구랑 무슨 얘기를…….”
“너를 꼭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 아들보다 너를 먼저 보러 온다는 대단한 사람이니…… 꼭 얘기 잘 들어드려라.”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서서히 사라졌다.
요단 방에는 나 혼자만이 남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다 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씀이시지……? 누가 나를 보러 온다는 건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였다.
할아버지가 앉아 있던 소파에 한 젊은 여자가 자리했다.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할 외모는 아니었지만,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를 보고 싶어 한…… 분이신가요?”
“네, 맞아요. 역시 못 알아보시네요.”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기억이 잘…….”
“무리도 아니죠. 지금 모습은 처음 보셨으니까.”
“그래서 누구신지……?”
“저 김현잡니다. 우민이 엄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