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37화
29. LA 아리랑 (4)
속으로 약간은 놀란 마음을 잡아둔 채 천천히 커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는데, 가비는 여전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 맛 좋네요.”
잔을 입에서 떼자마자 괜히 웃으며 말했다.
가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쵸? 저희 커피가 꽤 괜찮아요.”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다. 가비는 내게 호감은 아니어도 호기심은 가진 걸로 보인다.
처음에는 단순한 친절이라 생각했는데, 아마도 내 생각이 맞을 거라 생각됐다.
얼마 전이었다면 식사라도 한 번 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나도혜라는 사람이 생겼다.
다른 누군가를 알아보고 싶다면 나도혜와의 관계도 정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예의다. 무엇보다 나도혜를 좋아하니까.
그러고 보니 전화 한 통도 안 했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잠이 부족하니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듯하다.
가비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커피 다 마시고는 뭐 할 거예요?”
결정적인 질문이었다.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진동을 느끼기는 했다.
“집에 가야죠.”
내가 말하자 가비가 눈알을 굴려 시간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그러지 말고, 저 20분 뒤면 퇴근하는데 한잔하러 갈래요?”
이렇게 살갑게 나오는 걸 잘라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특히나 가비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라서 더욱.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쉬웠다. 비즈니스처럼 대하면 됐다. 손익을 따지면서 결단을 내리면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색하면 딱 자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웃으면서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아마 제 여자친구가 죽이려고 할걸요?”
그러자 가비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여자친구가 있어요?”
“없어 보여요?”
가비가 깔깔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아쉽네요.”
“아쉬울 게 뭐가 있어요.”
“왠지 느낌이 좋았거든요. 그래서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알아가보려고 했죠.”
“저 아니어도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주변에 멍청이들밖에 없어서요.”
나는 가만히 가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좀처럼 나이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도 20대 중반?
“사람 나름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20대 중후반 정도 되면 천천히 정신을 차리는 거 같아요.”
내가 말하자 가비가 물었다.
“당신도 그런 거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좀 더 늦었죠. 아직 더 노력해야 할 부분들도 많고요.”
가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몇 살이에요?”
“저요? 35살이요.”
만 나이였다. 한국 나이로는 벌써 37세. 새삼 한국에서만 왜 나이를 더 많게 세는지 의문이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계산하는 만 나이가 나은 거 같은데.
가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목소리를 크게 냈다.
“35살이라고요?”
다른 손님들은 거의 없긴 했지만, 조금 민망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게 제 나이를 광고할 것까지는 없는데.”
“아…….”
가비는 주위를 살피다가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사장은 컵을 닦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비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소곤거리듯 말했다.
“진짜 35살이에요?”
“네.”
“저는 많아도 26살이나 27살 정도인 줄 알았어요.”
“그냥 제 나이로 보는 편인데.”
“아니에요, 피부도 엄청 좋고 진짜 어려 보이는데.”
“그쪽은 몇 살인데요?”
“저 20살이요. 다음 달이면 21살 돼요.”
가비는 생각보다 더 어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같이 술을 마시러 가기 전에 나이를 알아서 다행이죠?”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여자친구가 있는 게 문제지.”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아무튼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연락처나 좀 알려줄래요?”
“연락처요?”
나도 모르게 조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는지 가비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집적거리려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다음에 가게 오픈하며 놀러가려고 그래요.”
“아, 네.”
그렇게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했다.
가비는 사장의 눈치를 살피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눈치가 보여서 이만. 필요하신 거 있으면 또 말씀하세요.”
그녀는 커피포트를 가볍게 들어 보였다.
“공짜 커피도 더 있고요.”
“하하, 그럴게요.”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 자리에 남아 있었다.
부드럽게 풀어간 듯했다. 약간의 자존감도 충족됐고.
이런 걸로 자존감이 올라가는 게 바람직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존감이란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남자다. 남자로서 다른 이성에게 호감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남성성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나 할까.
일적인 부분에서도 좋다고 생각한다. 로컬 손님 하나를 확보한 셈이니까.
손님 하나를 놓치면 열을 놓치는 셈이다.
반대로 손님 하나를 잡으면 열을 데려올 수도 있다.
진짜 괜찮은 음식을 내놓으면 단골손님 하나가 10명을 더 불러오고, 그 10명을 다 잡으면, 그 10명이 또 다른 10명씩을 데려온다.
절대 장사라는 게, 사업이라는 게 쉽지는 않다. 특히나 요즘은 더욱 그렇다.
대박의 기준이라는 게 애매하지만, 누구나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는 벌 수 있다. 그만한 노력만 한다면 그렇다.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는 지갑을 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음식값 그리고 팁으로는 30%를 영수증에 끼웠다.
8
―깜빡할 게 따로 있지.
“미안,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정신이 없었어.”
―그렇다고 나를 까먹어?
“그런 게 아니지. 계속 떠올리기는 했는데, 일하는 자리에서 전화하겠다고 자리를 비우기도 그렇잖아.”
나도혜와 통화 중이었다. 다행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정도였다.
―아무튼 조심히 들어가. 무슨 미국에 가자마자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녀? 겁도 없어.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뭐.”
―그래도 조심해야 돼. 치안이 한국처럼 좋지 않단 말이야.
“알았어, 걱정 마.”
―그럼 들어가서 다시 연락해. 다음부터는 밤에 차 몰고 다니고.
“그럴게.”
―그럼 또 연락해. 난 병원 나가봐야 돼서.
“응, 밥 잘 챙겨먹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평범한 짧은 통화였는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벌서 나도혜에게 마음이 많이 가는 게 느껴진다.
나도혜 역시 그럴 거라 생각한다.
정식으로 만나게 된 지 얼마 안 돼서 이렇게 외국으로 나와 떨어져 있다는 게 묘하다.
나름대로 더 애틋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끝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길 바라고.
“꼼짝 마.”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등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게 총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며 말했다.
“진정해요, 진정해요.”
“움직이면 등에 바람구멍이 날 줄 알아.”
거친 손이 내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갑을 빼갔다.
“뭐야, 이거? 15달러? 이거밖에 없어?”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게 전부에요.”
“이런 개 같은…….”
그때 뒤쪽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꼼짝 마.”
나는 앞만 보고 있느라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뒤돌아보지 마! 바로 대가리가 날아갈 줄 알아!”
가비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총 버려. 총 버리라고!”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총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지갑도 내려놓고 얼른 꺼져.”
남자가 옆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몸을 돌렸다.
얇은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은 가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아요?”
“아, 네. 덕분에요.”
가비는 안심한 듯 피식 웃었다.
“별일을 다 겪죠?”
“그러게요. 태어나서 처음이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해요?”
“원하는 걸 내주면 그냥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지갑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권총은 발로 차서 골목 쪽에 날려버렸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가비는 헛웃음을 쳤다.
“진짜 너무 태연하시다.”
“아니에요, 많이 놀랐죠. 그런데 권총을 가지고 다녀요?”
나의 물음에 가비는 재킷 주머니에 꽂고 있던 오른손을 빼들었다. 그녀는 손에 바나나를 쥐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가 헛웃음을 쳤다.
“바나나로 위협한 거예요?”
“진짜 총이었어도 쏠 건 아니었으니 그게 그거죠. 그리고…….”
가비는 내게로 다가와 바나나 끝으로 옆구리 쪽을 찔렀다.
“이렇게 하면 권총이랑 구분도 어렵고요.”
갑자기 확 가까워져서 조금 당황했다. 오묘한 향기가 났다. 특유의 체취와 향수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좋은 냄새였지만 이국적인 그런 향이었다.
나는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로 온 거예요?”
“이 길로 갈까봐 온 거였어요.”
“네?”
“이쪽에 요즘 밤만 되면 이상한 놈들이 많이 돌아다니거든요. 가게도 이제 막 준비한다고 하셨고, 여러 가지로 원래 이쪽 동네 살던 분은 아닌 거 같아서, 혹시나 해서 와봤죠.”
“제가 이쪽 길로 안 왔으면요? 당신이 위험할 수도 있었어요.”
가비는 피식 웃었다.
“저야 원래 이쪽 동네 살던 사람이라서 대충 알잖아요.”
그리고 바나나를 들어 보였다.
“저한테 이게 있기도 하고요.”
내가 웃음을 터트렸고, 가비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쪽으로 와요. 제가 길 알려드릴 테니까.”
가비가 몸을 돌렸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따랐다.
9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가비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진짜 안 바래다줘도 괜찮아요?”
“괜찮다니까요. 아까 보니까 오히려 제가 바래다줘야 될 거 같은데.”
“하하하하!”
“아무튼 다음에 또 봬요.”
“네, 가게 오픈할 때 연락드릴게요. 그전에 일하시는 식당에 들를 수도 있고요.”
“그래요.”
“아, 그런데 있잖아요.”
“네?”
나는 돌아온 길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 그거 총… 거기 있었는데 신고 안 해도 될까요?”
“제가 신고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갈게요.”
“네, 잘 들어가요. 그리고 오늘 고마웠어요.”
“고맙긴요, 팁을 두둑하게 주신 덕분이에요.”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몸을 돌려 가비가 가르쳐준 길을 통해 오늘 계약한 방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데 순간 휘청거렸다. 다리가 살짝 풀렸다.
“어라…?”
이제야 실감이 나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뻔 했다.
나는 주변 건물들과 하늘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좋기만 했는데, 마지막에 점수를 왕창 깎아먹었다. 첫인상이 아주 좋지만은 않았다.
10
“진짜에요?”
노우민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그럼 내가 거짓말하겠냐?”
“와……. 미국 진짜 무섭구나.”
“흔한 일도 아니고, 밤에 혼자 으슥한 곳만 돌아다니지 않으면 괜찮대.”
“별일 없어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진짜 무슨 영화에서나 보던 일인데.”
나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신 뒤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진짜 바보 같다.”
“그러게요.”
원룸이지만 방은 구해뒀다. 전에 살던 사람이 소파와 침대도 원하면 사용할 수 있었다. 웬만하면 새 제품으로 구입했겠지만, 워낙 깨끗해서 그대로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문제는 이불 하나, 베개 하나도 없었다.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일은 더 바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