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35화
29. LA 아리랑 (2)
4
“여기 괜찮을 거 같은데요?”
노우민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녀석이 미국에서 지낼 원룸이었다.
코리아타운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월세는 한화로 치면 115만 원 정도.
원룸치고 평수 자체는 넓은 편이었다.
보증금은 한국과 다르게 매달 내는 월세만큼만 묶어두면 됐다.
집주인에 따라 보증금의 크기가 좀 더 커질 수 있긴 했지만, 보통 1개월이 일반적이었고 많아 봤자 3개월 치였다.
금발에 새하얀 치아와 푸른 눈을 가진 중년 여자가 생긋 웃어 보였다.
“이 정도 되는 집을 이 가격에 구하시기는 정말 힘들어요.”
부동산 업자인 캐서린이었다.
LA에서 최고는 아니어도 베스트 10에는 들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여기저기 버스나 벤치에 광고로 그녀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기도 하다고.
캐서린은 평소에 이런 매물을 다룰 사람이 아니었다.
고급 아파트나 주택만을 취급했는데, 정인혜의 부탁으로 이런 원룸까지 알아봐 준 것이었다.
당연히 원룸 하나 구하는 데 업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정인혜는 지금도 나도혜가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도와주고 싶었다고. 그리고 캐서린에게 정인혜는 중요한 고객이고, 개인적으로도 친하다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반드시 어떠한 이익을 위해서만 누군가와 친분을 쌓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좋은 인연을 맺는다면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무슨 일을 하든 결국 완전히 혼자서 해내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혼자서 해내더라도 그 결과물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
전에는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캐서린이 미소를 한껏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럼 여기로 결정하신 건가요?”
나는 노우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음 정했어? 다른 곳 더 둘러볼 수도 있어.”
“이미 좋은 곳들 다 보여주셨잖아요. 위치도 그렇고 여기가 좋은 거 같아요. 무엇보다 여기만 유일하게 화장실이 습식이잖아요.”
미국의 집들은 화장실이 대부분 건식이었다. 씻기 위해서는 따로 마련된 공간 혹은 욕조 안쪽에서 샤워커튼을 쳐야 했다.
그 외의 공간에는 따로 배수구가 없기에 물이 닿으면 안 됐다.
나름대로 장점이 있긴 하지만, 습식 화장실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마냥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항상 습기에 찌드는 샤워커튼의 오염 문제도 있고, 물이라도 한번 튀면 일일이 닦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은 덤이다.
미국에서 노우민이 지낼 보금자리는 그렇게 결정됐다.
다음은 김밥을 팔 곳을 알아봐야 했다.
이 역시 캐서린의 도움을 받았다.
평소에 상가는 아예 취급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특별히 아래 있는 직원들을 시켜 알아봤다고.
매장은 금방 선택할 수 있었다.
원래 잡아뒀던 예산보다 월세는 싸고 넓은 곳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월 500달러의 가게였다. 코리아타운에서 살짝 떨어져 있었는데, 걸어서 10분 정도였다.
유동 인구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매장을 보러 온 지금도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게 신기했다. 대낮에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다니. 뭔가 여유로워 보였다.
미국에 대해 그다지 환상은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장단점이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주변 풍경에 집중하며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좋아 보였다.
카페 같은 곳에서 스마트폰에 다이빙이라도 할 것 같은 1, 20대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긴 했지만.
캐서린은 탈색을 한 양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럼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노우민도 그랬고.
하지만 캐서린은 센스 있게 자신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캐서린이 간 뒤에 정인혜가 깔깔 웃었다.
“여기서는 그렇게 인사 안 해도 돼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하고 나서 아차 싶었네요.”
“뭐, 그래도 그게 나쁘지는 않아요. 그게 동양인 방식의 인사라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정인혜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결정해도 괜찮아요?”
노우민이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많이 알아봐 주셨고, 볼 만큼 봤다고 생각합니다. 하자도 없고요.”
“기운 넘치시네.”
“네? 아, 네, 네.”
녀석은 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정인혜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럼 이제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정인혜가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이제 여기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지 봐야죠.”
“아, 그 부분도 업자들 리스트 뽑아놨어요. 4명 정도 알아놨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친구를 추천해요. 제 스튜디오도 그 친구가 인테리어 다 했거든요.”
“저희는 들어와서 식사하는 것보다는 테이크아웃 전문을 생각하고 있어서 예쁘게 꾸미는 것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지만, 그보다는 실용성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주방 쪽도 김밥인지라 어려울 게 없고요.”
정인혜가 생긋 웃어 보였다.
“그 친구는 예쁘게 잘해요. 제 소개라면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될 거고요.”
“그래요? 싫다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말을 싹 바꾸시는 거 같은데?”
“그럴 리가요. 애초에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
“보통이 아니시네.”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사실 그런 게 아니라 초면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신세만 지는 거 같아서요.”
“신세는요, 애초에 도와드리려고 이렇게 보게 된 건데. 그리고 저야 전화 몇 통 하는 게 전부인데요. 뭐. 방이랑 매장은 직접 보러 다니긴 했지만.”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요, 부담 가지지 마세요.”
“아뇨, 가져야죠. 은혜는 꼭 갚습니다.”
정인혜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이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도혜가 남자를 잘 고른 거 같네요.”
5
인테리어 업자인 데이브는 조금 거칠어 보이는 백인 남자였다.
미국 인테리어 관련 TV 프로그램에서 남자 인테리어 업자들은 전부 섬세해 보이는 게이들이 많았는데.
데이브는 노동의 세월이 느껴지는 손으로 악수를 하며 씩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고 맡겨둬요. 눈이 튀어나오게 해줄 테니까. 이 가격으로 이렇게 해주는 곳은 미국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을 거요.”
나는 웃으며 손에 가볍게 힘을 줬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그렇게 매장도 정했고, 인테리어도 어떻게 할지 얘기를 마쳤다.
매장 여러 곳을 운영하면서 항상 내가 모든 인테리어에 신경을 쏟았었다.
그 경험들 덕분에 어떻게 인테리어를 할지는 얘기가 금방 됐다.
데이브가 호언장담한 대로 눈이 번쩍 뜨일 아이디어들을 내놓기도 했고.
변수라면 기존에는 예정에 없던 테이블 몇 개가 생긴 것이었다.
나는 이를 두고 가장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공간을 그냥 죽이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고 판단했다.
꼭 안에 들어와서 먹지 않아도 잠시 앉아서 기다릴 공간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여기서 붙은 아이디어는 당장 실행에 옮기지는 않더라도 주스나 즙을 팔아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니면 서비스 개념으로 작은 컵에 나가도 괜찮을 듯했고.
미국에서 공수가 가능한 거로 가야겠지만.
당장은 김밥에 집중할 예정이었다.
한 번에 여러 마리의 토끼를 쫓다가 일을 망칠 수는 없었으니까.
노우민은 처음부터 줄곧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집중하는 중이었다.
나는 녀석을 믿는다. 알파벳과 기본적인 단어들만 알던 수준에서 간단한 일상 회화가 가능하기까지 불과 수개월.
그러면서 김밥에 관한 연구도 잊지 않았다. 필히 피나는 노력을 했으리라.
나도 당분간은 함께 지내면서 도와줄 것이기도 하고.
모든 게 수월했다.
6
“아리랑 김밥이요?”
정인혜가 살짝 놀라며 물었다.
나와 노우민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가려고요.”
“너무 토속적인 거 아니에요? 한국을 엄청 사랑하시나 봐요.”
“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것보다도 일단 한국적이면서 기억에 남을 이름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죠. 그러다 어렸을 때 봤던 시트콤이 떠올랐고, 여기는 LA 코리아타운 근처잖아요. 그래서 아리랑을 선택했어요. 미국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아리랑이 뭔지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걸요?”
“그렇겠죠. 그건 괜찮아요. 그냥 아리랑이라는 단어를 기억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간판에 따로 문구도 추가할 거고요.”
“어떻게요?”
나는 눈썹을 한번 들썩거리며 대답했다.
“코리안 스타일 롤이라고요. 롤은 모두에게 익숙하니까.”
“아마 괜찮을 거예요. 요즘 미국에도 쌀 소비량이 좀 늘었거든요. 건강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비건들도 늘어나면서 더 건강한 채식에도 집중하고 하니까.”
정인혜가 활짝 웃었다.
“분명히 잘 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죠.”
“오픈하면 저도 시식할 수 있는 거죠?”
“당연하죠! 얼마든지요.”
“확실해요? 저 엄청 많이 먹는데?”
그때 노우민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드시고 싶은 만큼 말아드리겠습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녀석의 힘이 들어간 목소리에 나와 정인혜는 그 자리에서 빵 터져 버렸다.
노우민은 아차 싶었는지 혹은 무안했는지 뒤통수만 긁적거렸다.
“벌써 저녁 7시가 넘었네요.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일단 급한 건 그럭저럭 끝냈죠? 아직 해결할 것들이 제법 남아 있긴 하지만.”
정인혜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요한 거 하나를 못 마쳤네요.”
“어떤 거요?”
“저녁 식사요.”
“아, 저녁 식사.”
정인혜는 잠깐 고민하다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밥을 먹긴 해야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나는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체력을 가지고 있다. 특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계속 치료하니까.
언제나 몸이 가장 필요로 하고 원하는 걸 섭취한다.
“당연히 괜찮아야죠. 지금까지 일보는 거는 괜찮았는데, 저녁 식사는 힘들어서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하하하, 그것도 그러네요. 그런데 우민 씨는 괜찮으려나?”
정인혜가 눈길을 주자 노우민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어필하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완전 쌩쌩합니다.”
정인혜는 다시 깔깔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때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같이 못 갈 거 같아요.”
노우민은 흠칫 놀라면서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요?”
정인혜의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있으면 한국도 아침이잖아요. 그쪽 일들도 처리할 것들이 많거든요.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곳들도 있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 있는 곳도 관리하고 해야 돼서요. 식사 중에 업무 전화하고 그러면 실례잖아요.”
“그래요? 시차가 많이 나서 한국은 너무 이르지 않아요? 그래서 괜찮을 텐데.”
“새벽부터 출근하는 직원들도 있어서요. 저도 같이하는 식사는 다음에 하죠. 내일도 좋고, 모레도 좋고, 시간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내일도 뵐 거잖아요? 일단 저랑은 점심 식사부터 시작하시죠.”
“그래요, 그럼.”
나는 노우민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면서 뒷주머니에는 현금 500달러를 꽂았다.
“무조건 이걸로 사라. 잘 모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와.”
나는 노우민의 등을 탁 치고는 엄지로 한번 꾹 눌렀다. 잘해보라는 의미였다. 자리는 만들어줬으니까.
그렇게 노우민은 정인혜의 차를 타고 어디론 갔다. 혼자 남은 나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뒤 깨달았다.
집 열쇠가 노우민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