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34화
29. LA 아리랑 (1)
1
“사실이었네요.”
옆에 앉은 노우민이 말했다.
나도 녀석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대표님은 저보다 키랑 덩치도 크셔서 더 불편하시겠어요.”
“그러니까. 아주 고문이네 고문.”
나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이코노미로 끊었다.
재벌이나 할리우드 배우들조차 이코노미로 이동하는 뉴스를 몇 번인가 봤었다.
그런 사람들도 절약해서 이코노미를 이용하는데, 나도 아직은 아낄 때라고 생각했다.
비즈니스는 마일리지 혜택을 쌓아서 이용하는 게 경제적이라는 정보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재벌이나 할리우드 배우가 이코노미를 탄 경우 대부분 단거리 비행일 경우였다.
겨우 1, 2시간 정도의 거리에 2배 이상의 비용을 쓰는 건 확실히 경제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LA까지는 최소 11시간 이상.
생각 이상으로 답답했다.
이게 진짜 사람이 앉아서 가라고 만든 자리인지.
다음부터는 최소 비즈니스를 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몇 시간 편하자고 수백만 원을 더 쓰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수백만 원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야?
돈을 벌 줄은 알게 된 듯한데, 아직도 쓰는 법은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돈만 많이 있으면 시원하게 펑펑 쓰고 다닐 것 같았는데.
지금도 과거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긴 하다.
국산이긴 하지만 꽤 비싼 준대형 차를 몰고 있기도 했고. 풀옵이라서 웬만한 외제차 정도는 뺨을 친다.
하지만 차는 생명과 직결돼 있고 일적으로 필요했으니 투자에 가까웠다.
중요한 자리를 위한 정장도 2벌 뽑았지만, 국산 원단으로 선택한 적당한 가격의 맞춤. 내 기준에서는 옷 한 벌이 60만 원 이상이라는 점에서 사치로 느껴진다. 사실 더 비싼 수입 원단이라고 해서 더 좋은 것도 잘 모르겠고.
손목이 묵직하다. 건강상담 결과가 좋은 덕분에 선물로 받은 8천만 원이 넘어가는 명품시계. 유일한 사치품이라 할 수 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싫지는 않다. 아니, 좋다. 이따금씩 나를 위해 펑펑 써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멈춘다.
한 가지만 생각해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내가 저걸 사서 얼마나 행복해질까?
사는 순간 잠시 기분은 좋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다.
언제부터 내 꿈이 무언가를 가지는 것이었나.
가지면?
필요해서, 어딘가에 사용하고 싶어서, 즐기고 싶어서.
그럼 살 수도 있다.
진짜 내가 그걸로 더 웃을 수 있고 행복해진다면.
하지만 대부분의 물건들은 그렇지 않다.
특히나 겉치장에 집중된 것들은 결국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고, 남에게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다. 그게 직업인 사람들이야 당연히 예외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똑같은 액수더라도 훨씬 가치 있게 쓸 수 있다.
요즘은 대부분 사업에 집중돼 있는 듯하다.
기부도 꾸준히 한다. 기부한 금액도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게 좋으면서도 결국 속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부분은 신경 쓰지 않는다. 세금 부분에서 혜택을 본 만큼 다른 사람들을 더 도우면 되니까. 그래서 또 혜택을 보면? 더 도우면 된다.
보시(육바라밀 가운데 제1의 덕목, 널리 베푼다는 의미)를 해야 된다고들 한다. 공덕을 쌓아야 결국 나와 가족의 미래, 사후 세계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사실 무언가를 바라고 하면 안 되는 거지만, 이 역시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어떠한 확증은 물론, 기약도 없는 기대감을 조금 품으며 선행을 하는 게 어찌 죄가 되겠는가.
그렇다고 겉치장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아니, 사람은 누구든 첫인상이 중요하기 마련.
사람을 처음 봤을 때 무엇으로 판단하겠는가. 겉모습이다. 그런데 겉모습이 중하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단지 전부가 아닐 뿐.
쓸데없이 사치는 하지 않되 기본은 해야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이고, 기왕이면 다홍치마다.
2
LA 공항에 도착.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그 고통을 감내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우…… 죽겠네.”
노우민이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넌 뭐 젊은 놈이 벌써부터 그러냐?”
나는 같은 마음이면서도 괜히 핀잔을 줬다.
“대표님도 아까 힘들어 하시는 거 같던데.”
녀석의 반격에 웃음이 터졌다. 몸이 편해져서 기분이 좋아진 걸까. 나는 곧바로 노우민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아주 입은 살았어? 응?”
“어억, 대표님, 아파요!”
“아프라고 하는 거야, 인마.”
“어어억!”
그러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피식 웃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괜히 민망해져서 헤드락을 풀었다.
노우민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뭐야?”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목이 시원해졌어요.”
“어?”
“조금 전까지 목이 되게 뻐근했는데 헤드락 걸리고 나서 확 시원해졌어요. 뭐예요?”
“……그러게 말이다.”
나의 능력 탓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아무래도 좋다.
소소한 통증이라도 기분이 안 좋은 건 당연하고, 그게 지속되면 삶의 질을 상당히 저하시킨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빠져나왔을 때는 작은 키에 긴 생머리, 까무잡잡한 피부, 눈과 광대가 크고 조금은 사납게 생긴 여자가 스케치북을 들고 서 있었다.
[강건희 님! 노우민 님! Welcome to LA!]
정인혜.
나도혜의 친구였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강건희입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정인혜는 인조적으로 느껴질 만큼 새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안녕하세요오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뵙게 돼서 너무 반가워요.”
발음이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 왠지 한국어가 모국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약간의 어색함이 묻어났다.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안녕하세요. 노우민이라고 합니다.”
노우민이 인사를 건네자 정인혜가 활짝 웃어 보였다.
“반가워요, 정인혜입니다.”
그녀는 몸을 홱 돌리고는 말했다.
“그럼 일단 가실까요? 일단 말씀드렸던 방부터 보러 갈까요?”
“지금 바로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버리다니.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나는 곧바로 다시 말했다.
“그러시죠.”
정인혜는 씩 웃어 보이고는 앞장섰다.
공항 밖으로 나간 뒤, 정인혜가 말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차 가지고 올게요.”
“네, 네. 천천히 다녀오세요.”
그렇게 다시 노우민과 둘이 자리에 남았다.
“뭔가 화끈하시네요.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노우민이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되게 동안이시네. 나 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녀석이 내게로 시선을 옮기고 물었다.
“나 원장도 이제 32살밖에 안 됐어, 인마.”
나는 괜히 발끈한 것처럼 말했다.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노우민이 당황하며 양손을 들었다. 녀석도 내가 나도혜와 연인 관계가 됐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 아, 나 원장님이 노안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저 분이 워낙 동안이셔서.”
“나이는 나 원장보다 1살 어려. 빠른 년생이라서.”
“그거 감안해도 20대처럼 보여서요.”
“따지고 보면 너랑 3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그것도 그렇네요.”
“그나저나 뭐 하는 거야? 왜 보자마자 외모 품평회야?”
“그런 거 아니에요오오. 그냥 처음 뵀으니까 말씀드린 거죠.”
“확실해?”
“……그냥 좀 예쁘신 거 같아서.”
“저런 스타일이 취향이었어?”
“예? 뭐……. 그냥 예쁘시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노우민은 시선을 회피했다.
새끼, 귀신을 속여라. 딱 보이네.
조금 의외였다. 평소에 워낙 성실하고 건실한 이미지인 노우민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좀 더 얌전한 타입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은 못 한다지만, 그냥 그런 스타일을 선호할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예를 들자면 하얀 피부의 청순한 여자.
반면에 정인혜는 누가 봐도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나는 괜히 노우민을 툭툭 건드리며 계속 관심 있냐면서 장난을 쳤다.
노우민은 계속 부정했고.
“무슨 조금 전에 본 사람을 좋아하고 말고가 어딨어요.”
“내가 언제 좋아하냐고 물어봤냐? 관심 있냐고 물어봤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아, 그만 놀리세요. 안 그래도 진짜 미국 땅 밟아서 긴장돼 죽겠는데.”
“아, 그렇지. 우리 미국이지.”
새삼 이국적인 풍경에 눈에 들어왔다. 공기의 냄새조차 다른 느낌이었다.
살아생전에 미국 땅을 밟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평생 쳇바퀴를 굴리듯 재미없게 살 줄 알았다.
돈도 조금 주고, 일의 강도는 높고,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으며, 대우도 뭐 같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마저 없던 최악의 직장.
그곳에서 평생 썩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봄날이 왔다.
언제나 새삼스럽다.
어쩌면 평생 익숙해지지 못할지도.
그런 점이 싫지 않다.
내가 생각했던 삶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앞에 시커멓고 무식하게 커다란 픽업트럭이 섰다.
위이이잉.
조수석 쪽 창문이 내려갔고, 운전대를 잡은 정인혜가 보였다.
“타세요. 짐은 뒷좌석에 같이 실으시고요.”
역시 뭔가 남다른 여자였다.
3
나는 조수석에 자리했고, 노우민이 캐리어들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살면서 도혜 남자친구는 처음 봐요.”
남자친구라.
왠지 그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싫지 않은 어색함.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국에 계셔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저 그래도 1년에 한두 번은 한국에 꼭 들러요. 가족들이 전부 한국에 있어서.”
“그래요?”
“네, 갈 때마다 도혜도 꼭 보고요. 저희가 고등학교 때까지 엄청 친했거든요. 같이 ‘혜’자 돌림이라고, 혜자매라고 했었죠.”
“인혜 씨는 그럼 언제 미국에 오신 거예요?”
“수능 성적이 생각보다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나쁘지 않은 대학에 갈 성적은 됐지만, 스스로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으로 넘어왔어요.”
“그래서 좀 어떠세요?”
“마음에 드니까 계속 여기 남아 있는 거겠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도혜랑도 계속 사업을 하고 계신다면서요?”
“네, 네. 주스 쪽으로요.”
“가져왔어요?”
“네? 뭘…….”
“주스요.”
“하하하, 그것까지는 생각 못했네요. 생과일주스라 미국까지 보내오기는 좀 힘들어요. 하지만 같은 계열사로 즙 종류는 보내드릴 수 있는데. 어떠세요?”
정인혜가 웃으며 손을 살짝 저었다.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에요. 배송비가 더 나오겠어요.”
“그건 그래요. 그나저나 인혜 씨께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아, 저는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그림도 좀 그리고, 책도 냈고, 전에는 블로그 에디터도 좀 했었는데 요즘은 아이튜브로 대세가 넘어갔죠. 일단 지금 주업이라고 할 수 있는 건 포토그래퍼네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일하는 듯했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그대로였다.
“아, 거의 다 왔어요. 일단 방부터 보신 다음에 곧바로 매장 자리까지 확인하시죠.”
“네, 그래요.”
“제가 너무 강행군으로 달리나요?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낫죠. 괜찮지?”
룸미러를 통해 노우민과 눈을 마주쳤다.
노우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