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08화
24. 기회 (3)
8
“먼저 가볼게. 푹 쉬면서 마음 추스르고 나와.”
내가 노우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 발인하는 곳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뭔 또 감사냐. 아무튼 며칠 쉬다가 괜찮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괜찮지는 않겠지. 그래도 기운 좀 나면 연락해라.”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또 그런다. 며칠 쉬어.”
“그럼 하루만…….”
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3일 쉬고 나와.”
그리고 따로 준비한 봉투를 녀석에게 내밀었다.
“저 이거 못 받습니다. 이미 부조도 너무 많이 하셔서…….”
“이건 얼마 안 돼. 쉬는 동안 동생들 데리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그러라고 주는 거야. 할머니도 좀 잘 모시고. 너 쓰라고 주는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아무튼 푹 쉬고 나와라. 마음 잘 추스르고. 어머니 좋은 곳으로 가셨고, 지금도 지켜보고 계신다. 그거 잊지 마라.”
“네, 감사합니다.”
나는 노우민의 어깨에 손을 한 번 얹었다가 몸을 돌렸다.
바로 떠나려는데 노우민의 동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동생들은 어찌나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더 안쓰러워 보였다.
노우민의 동생들 중 군인인 녀석이 눈에 밟혔다.
임종을 지키기는커녕, 복무 중에 갑자기 연락을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나는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안 되겠지만, 그래도 힘내. 어머니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실 거다. 건강 잘 챙기는 게 가장 중요해.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각이 잡혀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군인의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너무 억누르고만 있지 마. 그래도 너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감사합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길은 2시간 이상이었다.
제법 피곤하긴 했지만, 발인까지 참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내줄 때는 보내줄 줄도 알아야 한다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인연이라는 게 이어지면, 언젠가 어떠한 형태로든 매듭이 지어진다.
그 매듭을 어떤 모양으로 마무리하느냐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김현자와의 매듭은 지어졌을지 모르지만, 그 인연이 완전히 끊겼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단순히 사후세계를 놓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녀와의 인연은 노우민으로부터 이어졌고, 여전히 그 가족들과 얽혀 있다.
아무쪼록 김현자가 사후세계에서는 편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마음을 놓고 자식들과 어머니를 지켜보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하늘에 있는 나의 가족들도 그러길 바라며.
9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나를 찾아온 것은 바른 농부단 대표 엄현석이었다.
우리는 상부상조하는 사이였다.
지금 내가 이렇게 올라올 수 있던 것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엄현석도 크게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질 좋은 유기농 과채류들을 그렇게 저렴하게 들일 수 없었을 테니까.
엄현석 역시 나로 인해 큰 이득을 봤다. 나와 함께 사업을 진행한 뒤로 바른 농부단 소속 업체들 수만 해도 3배 가까이 늘어난 상태였으니까.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빠르죠. 이제 올해도 다 갔네요.”
내가 말하자 엄현석은 멋쩍게 웃었다.
“연말이라 한창 바쁘실 텐데, 이렇게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좋네요.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한식당 크게 차리시는 거 여러 가지로 기대가 많이 됩니다. 오픈하시면 저도 가족들이랑 꼭 한 번 가겠습니다.”
“아,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오실 때 꼭 말씀해 주세요.”
“네, 네. 그럼요. 연락드려야죠. 그런데 오픈은 언제쯤 생각하고 계신가요?”
여러 가지 목적이 담긴 질문이었다.
진짜로 다온에 오겠다는 것도 있었지만, 재료들의 상당량을 엄현석이 공급할 예정이었으니까.
“빠르면 내년 2월이 될 것 같습니다. 늦어지면 3월 초나 중순을 바라보고 있고요.”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리시네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약간 문제가 있어서요.”
“어떤 문제요?”
“셰프님 모시기가 참 어렵더라고요.”
엄현석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 그냥 한식당이 아니라 레스토랑을 차리시는 거였나요?”
“뭐…… 그 중간쯤에 있다고 봐야죠. 그렇다고 전부 셰프들로 할 건 아니고요, 중심에서 끌어주실 분을 찾는 거죠. 그래서 더 어렵고.”
“아, 그러시구나. 저 아는 사장님께서 이번에 가게 내놓으셨거든요. 그분 한 번 만나보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어떤 가게인데요?”
“한식당이요. 그분의 어머님이 하시던 가게인데, 규모는 작아도 전국 여기저기서 찾아올 정도로 맛이 좋았어요. 그 사장님도 어릴 때부터 가게 일을 도왔고, 음식 경력이 20년 가까이 되니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저희랑 맞을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요. 아직 영업 중이면 좋았을 텐데.”
“아직 영업하고 계세요.”
“그래요?”
“예, 가게도 다른 사람이 맡아주길 기대하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자녀 교육 문제로 이사할 예정이라서 안 나가면 안 나가는 대로 놔둘 거라고 하셨거든요. 가게 싹 들어내고 업종 바뀌는 것도 괜찮다고. 어차피 땅이 자기 거니까.”
“그럼 조만간 한 번 가서 식사해 봐야겠네요. 그 다음 제안을 드릴 수도 있는 거고요.”
엄현석은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는 생각하는 듯하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식사 아직이시죠?”
“그렇죠. 아직 오전 11시니까요.”
“그럼 지금 같이 가시겠습니까?”
“예? 지금요? 어디 있는데요?”
“평창이요.”
“지금 평창으로요?”
“힘드시려나?”
엄현석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저는 아무래도 말 나온 김에 같이 가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 사장님 정말 괜찮은 분이시거든요. 요리 실력도 진짜 좋으시고, 어머님한테 전수받은 비법들도 있고요.”
“근데 자기 가게 안 차리시고 다른 데서 일을 하실까요?”
“아직 어떻게 할지 고민이라고 하셨거든요. 아마 조건만 맞으면 일하실 의향도 충분히 있으실 겁니다.”
“그래요?”
“네, 아무래도 혼자 가셔서 식사해보신 다음 말을 꺼내는 것보다는 저랑 같이 가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게 자칫 잘못하면 몰래 평가해 본 다음 얘기를 꺼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차라리 공식적…… 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가 연락을 드려서 아예 자리를 만들어 보는 게 낫지 싶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말했다.
“그것도 괜찮기는 한데, 마음에 좀 걸리는 부분들이 있네요.”
“말씀하십쇼.”
“일단 이렇게 갑작스레 일정을 잡아서 진행하는 게 맞는 건지, 그분께서 수락을 하실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진행을 하신다고 해도, 제가 엄 대표님 소개라는 이유로 무조건 긍정적일 수는 없는 거거든요. 원하는 조건이 터무니없거나, 음식의 맛이 제게는 안 맞을 수도 있는 것인지라.”
“그거야 당연하죠. 대표님께서 고용인 입장이시니까요.”
“아, 한 가지 더. 만약에 가게 된다면 저만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요?”
“실질적으로 저희 작은아버지께서 운영을 하실 예정인지라 무조건 같이 가야 됩니다. 뵌 적 있으시죠?”
“네, 네. 지난번에 뵀었죠. 시원시원하시던데.”
작은아빠의 성격을 떠올려보면 엄현석의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러신 편이죠. 그때 같이 뵀어야 했는데……. 아무튼 이런 부분들이 다 괜찮다면야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저도 작은아버지께 연락을 드려봐야 되긴 하는데, 아마 괜찮으실 겁니다. 이번 식당 오픈에 관련된 일이니까요.”
“그럼 제가 그쪽 사장님한테 전화를 한 번 드려볼까요?”
“예,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기회는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거나, 멀리 있지 않다. 때로는 가까운 곳에서 고개나 손을 내밀고 있기도 하다.
10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조수석에는 엄현석이, 뒷좌석에는 작은아빠가 자리하고 있었다.
“진짜 이렇게 당일에 곧장 가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제가 조금 무리하게 일을 벌이나 싶었는데, 이렇게 바로 진행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은아빠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엄 대표님이 고마울 게 뭐가 있어요? 엄 대표님이 우리 위한답시고 자리 마련해 주신 건데. 우리가 고마워야죠.”
“대표님들께서 잘 되실수록 저도 잘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바른 농부단이 이렇게 커질 수 있던 것도 다 여기 강 대표님 덕이고, 이번에 오픈하는 식당에도 제가 물건 많이 넣기로 했잖아요. 당연한 거죠.”
“당연한 게 어디 있어요, 다 서로서로 빚지고 갚고 하는 거지.”
그때 세월이 느껴지는 나무 간판이 보였다.
“다 왔네요.”
엄현석이 말한 한식당은 차가 없으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상궁.
담백하고도 어떤 음식들이 있을지 상상이 되는 곳이었다. 수라상이 차려질 곳이라기에는 초라해 보였지만.
세월의 흔적이 또렷한 아담한 가게였지만 깔끔했다.
평일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을 때라 다른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가게에 들어가지 않아도 주차된 차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서기 전부터 느낌이 좋았다. 겉에서 보는 분위기도 그랬지만, 주차장과 출입구가 굉장히 깔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작은 부분 하나에서부터 드러나는 법.
“엄청 깔끔하네. 사장님이 엄청 부지런하신가보다.”
작은아빠가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이러한 부분들을 세심하게 보는 것도 생각해보니 작은아빠의 영향이었다.
“그럼 들어가시죠.”
엄현석이 미소를 머금은 채 가게 문 쪽으로 걸음을 조금 서두르려는 찰나였다.
가게 문이 열렸다. 키가 작고 짧은 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남자가 나와서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상궁의 사장 권호순이었다.
음식 경력이 20년이라고 해서 나이가 제법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흔이 안 돼 보였다.
엄현석이 먼저 권호순과 인사를 나눈 뒤, 우리를 소개했다.
“사장님, 여기 말씀드렸던 대표님들입니다.”
왠지 모르게 그 상황이 좋았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대표라고 소개하는 것이 뿌듯했다.
아마 이런 순간들은 평생 좋겠지.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추운데 안으로 드시지요.”
권호순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내부도 상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역시나 먼지 한 톨 발견하기 힘들 것처럼 깔끔했다.
우리는 먼저 테이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강건희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권호순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 다음은 작은아빠가 권호순과 인사를 나눴고.
“음식 경력이 오래되셨다고 해서 좀 더 연세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젊으시네요.”
내가 말하자 권호순이 헤실헤실 웃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계속 여기서 일했거든요. 학생 때도 자주 일을 도왔고요. 잠깐 사찰 음식을 배우러 절에 들어간 기간 빼면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사찰 음식이라.
여기서 뭔가 확 느낌이 왔다.
권호순도 맛있으면서도 건강한 음식을 추구하리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