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02화
23. 확장 (2)
부정적인 의견을 냈던 여자 의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눈알을 굴리지 않아도 보인다. 흰자로 보고 있다. 시야에 분명하게 들어온다.
기세를 몰아 더 밀어붙였다.
“그리고 주스 찌꺼기, 불용성 식이섬유는 흡착력이 높아 영양소까지 몸 밖으로 배출하기 때문에 소화 흡수를 방해한다는 연구 결과 또한 있습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착즙주스와 건더기가 있는 주스를 마시는 목적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진행자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착즙 주스를 마실 때는 영양소 흡수에 무게를 두고 식이섬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식이섬유 섭취를 위해서라면 건더기를 통째로 갈아내는 주스를 마시면 됩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식사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섭취가 가능하고요.”
진행자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많은 분들이 착즙주스를 드시고 계시는데요, 이를 식사대용으로 드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에 한 남자 의사가 목소리를 냈다.
“착즙주스에는 각종 비타민이나 미네랄, 항산화 성분이 많습니다. 반면에 필수지방산, 단백질, 식이섬유 같은 영양소는 없습니다. 그러니 식사대용으로는 부적합합니다. 또한 채소만 즙을 내서 먹는 경우에 과다 섭취를 하면 오히려 독소로 작용하는 성분에 대한 위험도도 있습니다.”
진행자가 다음을 기대하며 운을 떼는 순간, 나는 우선 동의했다.
“저도 모든 식사를 대체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당연하지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필수지방산,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등 우리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영양소들이 필요하니까요.”
반박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식사대용이라 하는 것은, 아침에 시간이 없을 때 혹은 저녁에 다이어트 등을 위해 한 끼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잖습니까? 그 정도는 식사대용으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대로 필수지방산이나 단백질을 함께 곁들인다면 더 좋을 테고요. 다만, 개개인의 건강상태나 상황에 따라 적절한 재료들을 사용한 주스를 마셔야 할 것입니다.”
진행자가 입을 열려는 찰나, 내가 손을 살짝 들며 말했다.
“아, 한 가지 잊었네요. 끝으로 과다 섭취로 인한 독소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뭐든지 과유불급입니다. 당연히 과다 섭취를 하면 좋지 않죠. 당연한 얘기입니다.”
나의 말에 진행자는 다른 의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지금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오갔다.
언젠가부터 진행자는 착즙주스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의견이 나올 때마다 그 다음에는 자동으로 나를 바라봤다.
수차례 그러기를 반복했다. 조금은 공격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문제가 될 내용도 없었고, 착즙주스가 완벽한 건 아니지만 분명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또한 착즙주스와 재료를 갈아서 만드는 주스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도 충분히 전달했다.
여러 모로 내 목적을 제대로 달성했고 성공적이었다.
조금 걱정했던 부분은 PD가 저격에 가까운 진행으로 시작했던지라 중간에 태클이 들어오지는 않을까 했었다. 다행히 건강주스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저 건강 프로그램이더라도 최대한 시청률이 나오고 화제 혹은 논란이 되길 바랐던 것 같았다.
“그럼 우리가 건강주스를 마실 때 유의해야 될 것들은 뭐가 있을까요?”
진행자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우선 이러한 주스들은 유통기한이 상당히 짧습니다. 그래서 보관에 유의하셔야 하는데요. 요즘은 온라인으로 냉동된 제품을 주문해서도 많이들 드십니다. 이때 꼭 드시기 전날 냉장 보관으로 해동해서 드시는 걸 추천합니다. 실온에서 해동할 경우 맛도 떨어지고, 영양소 파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의사들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까 선생님들께서도 강조하신 부분인데, 자신의 몸에 알맞은 주스를 드시는 게 중요합니다. 가령 예를 들면 위가 안 좋으신 분들은 산성이 강한 과일을 재료로 하는 건 피하시는 게 좋겠죠. 신장이 안 좋으시다면 칼륨이 많이 들어간 과일은 피하는 게 좋을 것이고요. 자신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가급적이면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진행자는 적당한 리액션을 하고는 전체적인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녹화의 끝이 다가왔다.
5
돌아가려는데 한 여자 의사가 내게로 다가왔다.
박소영.
피부, 다이어트 클리닉을 운영한다고 했었나.
딱 봐도 부유함이 흐르는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그걸 증명하듯 얼굴에는 광이 났다.
“저기요, 강 대표님.”
“네?”
“사전에 협의도 없이 그런 식으로 받아치시면 어떡해요.”
“아까 착즙주스 얘기한 거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네. 그렇게 하실 거면 사전에 협의를 하셨어야죠. 오늘 보니까 대본 싹 다 무시하시고 하실 말씀 다 하시던데.”
작가가 해야 할 말을 전부 써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은 있었다.
“PD님도 작가님도 다 아무 말씀 없으셨잖아요. 그럼 괜찮은 거 아닌가요?”
“그래도 그런 식은 아니죠. 서로 잃는 거 없이 깔끔하게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깔끔이요? 선생님께서는 저한테 양해를 구하셨나요?”
“네?”
“오늘 주제가 착즙주스였죠? 제가 착즙주스를 주력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스 판매하고 있는 건 전부 알고 계셨을 텐데요? 그런데도 굉장히 공격적으로 착즙주스가 먹으면 안 되는 식품처럼 말씀하셨죠. 그에 대해 사전에 양해를 구하셨냐고요.”
박소영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 번 더 쏘아붙였다.
“면전에서 제 밥그릇을 걷어차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습니까? 선생님들한테는 매주 출연하는 방송에서 다루는 주제, 수많은 식품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게 전부고 삶입니다.”
“아니, 무슨 주스가 삶까지―”
“주스 팔아서 먹고살잖습니까. 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아래로 있는 수십 명의 직원들의 생계 전부가 달린 문제입니다. 본인이 팩트라고 생각하시는 부분을 주장하는 거? 좋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저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하실 말씀이 있으셨다면 아까 녹화 중에 주제에 대해서 또 다른 반박을 하셨어야죠. 이런 식으로 와서 따지는 건 아닙니다.”
“하…… 아무리 그래도…….”
박소영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반박은 불가능한 듯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몸을 홱 돌렸다.
해야 할 말을 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가능하면 적은 하나라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다.
특히나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며 살고 싶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상대방이 아무 이유도 없이(혹은 정당하지 않게) 나를 안 좋게 생각한다면, 안 좋게 생각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줘야 한다.
6
이틀 뒤.
방송이 나가려면 3주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모든 브랜드들의 매출이 상승하고 있었다.
정효원의 완치 덕분이었다.
그녀는 종종 문자를 보내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저 세계여행 가요.]
[세계여행이요?]
[네. 1년에서 1년 반 정도 보고 있어요. 지금 제 체력으로 세계 구석구석 전부를 돌기에는 조금 부족한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한 번만 여행을 할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부모님께서 너무 위험한 국가는 못 가게 하셔서 반쪽짜리 세계여행이 될 거 같아요.]
[큰 결심을 하셨네요.]
걱정되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이미 결정을 했다고 하는데 부정적인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 하시고 싶은 말씀 많으시죠? 아니실 수도 있지만, 대표님이라면 그러실 것 같아서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많이 걸으면서 운동도 될 거고, 식사는 더 잘 할 거니까요. 6개월마다 하는 정밀검사도 외국에서 진행할 계획이에요. 상황에 따라 잠시 한국에 들어올 수도 있고요.]
정효원 집안의 재력이라면 그 정도 비용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안 그래도 신경 쓰였는데, 잘 생각하셨네요. 부디 앞으로는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그럴 거고요.]
[전부 대표님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감사는요, 제가 감사하죠.]
[또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외국 나가면 꼭 엽서 한 번 보낼게요. 사실 좀 해보고 싶었던 거라.]
나도 모르게 실제로 웃었다.
[그래요, 기대할게요.]
기분 좋은 문자였다.
내가 치료에 도움을 준 사람이 건강을 되찾고 새로운 삶으로 발을 내디디는 걸 경험하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의료 계통 종사자들이 숭고한 목표를 가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기분을 느껴본 사람들은 많을 거라 생각한다.
꼭 큰 병이 아니더라도, 아파서 죽상이던 사람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면 거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모든 게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근래 들어서 어디에선가 연락이 오면 대개 반가운 것이었다.
발신자는 김현자였다.
왠지 모르게 아랫배에 싸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7
조수석에 앉아 양손 깍지를 끼고 이마에 대고 있는 노우민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녀석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했다.
김현자가 갑작스런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탓이었다.
괜찮을 거란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암 말기인 사람이 갑작스레 응급실에 실려간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갑자기 악화가 돼서 오늘 당장 세상을 떠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는 말을 아낀 채 운전에만 집중했다.
병원에 도착.
김현자는 여전히 응급실에 있다. 그녀는 링거를 꽂은 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얼굴 전체가 아래로 축 늘어진 듯 힘들어 보였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이필순 할머니가 우리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나와 노우민은 걸음을 서둘러 다가섰다.
“앉아 계세요.”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이필순 할머니는 양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하이고… 선상님, 어쩌면 좋대유…… 이게 무슨 일이래유…… 멀쩡하던 아가 갑자기 배 잡고 데굴데굴 구르는디…….”
나는 말없이 이필순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느새 김현자는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어디가 아픈지는 보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장 경련이었다. 몸의 기능이 떨어진 탓에 발생한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당연히 와야죠.”
그때 이필순 할머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연락드렸어.”
“대표님한테 왜 연락을 해.”
김현자가 핀잔을 줬고,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제가 마침 우민이랑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아무튼…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일단 좀 쉬세요. 안정이 우선이니까.”
“네, 죄송해요.”
김현자는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는지 곧바로 눈을 감았다.
“저는 잠깐 간호사한테 좀 물어보고 올게요.”
노우민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걸음을 뗐다.
김현자가 침대에 눕지도 못한 채 앉아서 링거를 맞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거겠지.
나도 씁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김현자의 얼굴을 집중해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