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90화
21. 인연 (1)
1
승승장구(乘勝長驅).
나와 가까우면서도 참으로 멀던 사자성어였다.
어릴 적에 쌈박질이나 하던 시절에는 언제나 승승장구였다.
엘리트 체육 코스를 밟는 수준이 아니고서야 애들끼리 싸움이 거기서 거기.
더군다나 나는 아무하고나 싸우고 다니지도 않았다.
보통은 껄렁거리는 녀석들과 맞붙었고, 그런 녀석들은 무엇 하나에 몰두하여 열심히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성인이 돼서는 제법 번듯해진 녀석들도 있겠다마는, 당시 내가 상대하던 녀석들은 그랬다.
그러니 언제나 승승장구였다.
건방진 녀석들의 코에서 포도즙을 쫙쫙 짜주기를 수십 차례, 어느새 내게 시비를 거는 녀석은 없어져 있었다.
가난이란 게 지독하게도 싫지만, 학교라는 곳에 묶여 있으니 그걸 뼈저리게 느끼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돈을 뺏고 다닌다거나, 힘이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도덕적 우월감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싸움질 좀 잘한다고 은근히 어깨가 솟아 있었다.
그때는 아닌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분명히 그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이 내 인생 최대의 황금기라 착각할 정도였다.
내가 가난의 서러움을 제대로 느낀 것은 아버지의 투병이 시작되면서였다.
가난이라는 칼바람은 세차게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나이를 먹을수록 돈의 소중함과 돈의 무서움을 알게 됐다.
당시 돈이 있다고 아버지가 산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더 해볼 수는 있었겠지.
적어도 좀 더 편히 모실 수는 있었을 테지.
성인이 되고 나서 사회에 발을 내디뎠다는 느낌은 없었다.
사회에 던져진 것도 아니었다.
사회라는 괴물이 나를 집어삼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별한 기술도 없고 가난하기만 했던 나는 약체 중의 약체였다.
승승장구라는 말은 신기루와 같았다.
그래도 열심히 해보겠다고 들어간 중소기업은 좆소기업이었다.
차라리 일찍이 막노동이라도 꾸준히 하면서 기술 하나라도 익혔으면 몸은 고되더라도 돈은 좀 만졌을 텐데.
내가 다니던 좆소기업보다는 나을 게 분명했다.
비루했던 나의 인생은 한 방에 역전됐다.
실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가족이라는 인연.
너무나 밝아 눈부신 인연이었다.
이후로는 줄곧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다.
행복 건강점 1, 2호점과 카페 웰웰 그리고 온라인 건강 주스 브랜드 웰니스까지.
미라클 헬스케어.
이 회사의 대표가 나라는 게 지금 이 순간에도 놀랍다.
정말 기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붙일 것이 없다.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가족들과 거래처와 동업자, 직원들 그리고 건강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 등 수많은 인연들이 엮이고 엮인 결과였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차를 몰고 가다보니 어느새 행복 건강즙 2호점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이곳에 올 때면 숙모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JM테크 대표 박종만.
행복 건강즙 1호점을 시작할 때부터 맺어진 인연이다.
고마운 사람이다.
행복 건강즙 2호점은 모난 곳 하나 없는 바퀴처럼 잘 굴러가고 있었다. 직원들은 서로에게 맞춰 만들어진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렸다.
나도 수시로 와서 들여다보고, 조언을 건네긴 했지만 1등 공신은 숙모였다. 더 이상 숙모가 아닌데도 내게는 영원할 숙모였다.
묘한 인연이었다.
숙모는 지시를 하는 자리였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먼저 움직여서 일했다. 그 덕분인지 직원들도 더 열심히 하는 듯했다.
“쉬엄쉬엄해요.”
내가 말하자 숙모는 웃어 보였다.
“사람들 다 저렇게 일하는데 내가 어떻게 쉬어. 너도 사장일 때 항상 같이 일했잖아.”
“그래도요. 숙모가 가능하면 직원들을 잘 관리하라고 사람도 넉넉하게 뽑은 건데 일하시느라 그게 안 되면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절대 무리는 안 하니까. 그리고 요즘 성과제를 도입하니까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좀 다르더라고.”
“성과제요?”
“이제 몇 달 되면서 전체적으로 주문량도 차이가 큰 폭으로는 안 나잖아. 즙 주문 들어오는 거랑 주스 주문 들어오는 거랑 한 달 평균치를 내봤지. 그래서…….”
숙모는 주위 눈치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평균치보다 조금 많은 양을 하루 목표로 삼고, 그거 끝내면 퇴근으로 하고 있거든.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이제 막 조정을 해보느라고 정신이 없었거든. 한약 달이는 날은 또 안 되고.”
“숙모한테 믿고 맡긴 거니까요. 그래서 결과는 어때요?”
“빠른 날은 40분 정도, 느린 날은 평소랑 비슷하고, 일반적으로 2, 30분 일찍 끝나더라고. 아주 가끔은 시간을 오버할 때도 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정도면 괜찮네요. 사실 매일 그렇게 일찍 퇴근하면 곤란하지만…… 한약 달이는 날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평소보다 늦어지는 날도 있다고 하니까.”
“응, 오히려 전체적인 분위기는 더 좋아진 거 같아. 다들 좀 으쌰으쌰하는 느낌이야.”
“그런데 평소보다 늦어지는 날에 대해 직원들 말은 안 나와요?”
“그래봤자 최대 10분이고, 그런 날은 뒷정리 빼주고 빨리 보내거든.”
“뒷정리는요?”
“그건 내가 하지.”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그러다 쓰러져요. 결국 숙모가 무리한다는 소리네.”
“아니야, 직원들도 그럴 때면 같이 좀 도와주기도 하고 그래.”
시간 외 근무에 대한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직원들이 일찍 퇴근하는 날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그전에 숙모는 좋은 지점장으로서 직원들고 잘 지내고 있었고.
“아무튼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쉴 때는 좀 쉬시고요.”
“적당히 하고 있어. 여기서 내가 제일 편해. 그래서 조금 불편하지만.”
“왜 불편해요?”
“아무래도 내가 관리자 입장이잖아. 그래서 나랑 같이 붙어서 일하면 직원들 입장에서 더 신경 쓰이는 게 있나봐. 뭐, 잘 지내는 사람은 잘 지내지만. 그래서 저절로 일이 좀 적더라고.”
나는 숙모를 유심히 쳐다봤다.
건강 상태는 좋았다. 굳이 따질 부분이 있다면 수면 시간 정도였다.
“요즘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주무세요?”
“나? 글쎄? 한 6, 7시간?”
“하루에 7시간 이상은 꼭 주무세요. 가능하면 8시간 가까이.”
“애들도 챙기고 그러려면 그렇게는 안 돼.”
“어떻게든 수면시간 7시간 이상 꼭 채우세요. 그러셔야 돼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내가 말하자 숙모는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할게.”
“약속한 겁니다?”
“알았어.”
“그나저나 이 대표님하고는 어때요?”
“어? 그게…….”
숙모가 말끝을 흐렸고, 나는 조금 놀라며 물었다.
“왜요? 잘 안 됐어요?”
“아니, 아직 잘 연락하면서 지내. 가끔 식사나 커피도 마시고.”
“놀랬잖아요.”
“그냥…… 조금 부끄러워서.”
정말 부끄러운지 숙모는 금세 볼을 붉혔다.
나는 하하 웃었다.
“아무튼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좋아 보여요. 다행이에요.”
“나 네 덕분이지 뭐. 네 작은아빠는 별말 없지?”
“그럼요.”
“같이 뭐 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구체적으로 하나씩 잡아나가는 중이에요.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래. 이제 애들 양육비 안 보내도 이쪽 생활비 넉넉하니까 속 끓지 말라고 해.”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숙모가 아차 싶었는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민망함으로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맞다, 내가 실수했네.”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아무튼 네 작은아빠가 엄청 성실하긴 하잖아. 뭐 하나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고. 내 인생의 파트너로서는 서로 안 맞았지만, 네 사업 파트너로서는 최고일 거야.”
“저도 그렇게 돼야죠.”
나는 슬슬 나갈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아, 숙모.”
“응?”
“성과제로 조기 퇴근하는 거 좋기는 한데요, 다음부터는 꼭 뭐 하시기 전에 저한테 한 번 언질만 주세요. 숙모께 맡긴 거지만, 그래도 같이 상의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알았어, 미안.”
“아니에요, 전혀 미안하실 거 없어요. 그냥 같이 더 좋은 방향을 모색하자는 것뿐이에요.”
“알았어, 고마워.”
“제가 감사하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벌써 가려고? 하긴, 바쁘겠다.”
“요 앞에 박 사장님 잠깐 뵙고 가려고요.”
“그래, 그래. 지금 공장에 있을 거야.”
박종만도 수시로 행복 건강즙 2호점에 들러 기계 점검을 해줘서인지 숙모랑도 많이 친해진 듯했다.
나는 숙모를 비롯해 행복 건강즙 2호점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JM테크를 향했다.
2
“잘 지내셨어요?”
내가 인사를 건네자 박종만이 고개를 돌리고는 씩 웃어 보였다.
“아이고오, 대표님 오셨구나.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는데.”
그가 바로 장갑을 벗으려고 했다.
“하시던 거 마저 하세요. 저 때문에 흐름 깨지면 안 되죠.”
“아, 그래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거 조이고 확인만 하면 끝이거든요.”
“예, 그럼요.”
예전의 박종만이었다면 내가 아무리 권해도 장갑을 벗어던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많이 편해졌는지 양해를 구할 줄 안다. 나 역시 그렇고.
그와 친구 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거래처라고 할 수도 없다.
기계 점검을 마친 박종만과 함께 작고 낡은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워낙 지저분해서.”
박종만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에요, 깔끔한데요 뭐. 안락하고 좋네요.”
“뭐 좀 드시겠어요?”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럼 커피?”
“네, 좋아요.”
우리는 마주앉아 커피를 한 잔씩 홀짝거렸다. 그리고 내가 미리 준비해온 쿠키 세트는 따로 선물하고, 커피와 곁들일 걸로 몇 개를 일회용 접시에 담았다.
박종만은 쿠키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묘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그러다 쿠키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꽤 맛있네요.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이렇게 단맛이 적은 쿠키는 처음 먹어보는 것 같습니다.”
“그쵸? 그게 밀가루도 안 들어가고, 설탕도 안 들어간 겁니다.”
“그래요? 그래도 제법 쿠키의 구색을 갖췄는데요? 직접 만드신 거예요?”
“아니요, 그건 따로 납품을 받고 있어요. 뭐…… 개인이 소량으로 만드는 걸 받는 거라 제대로 된 사업이라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요. 그래도 카페에서 그럭저럭 팔리네요.”
“이거 제대로 벌려 봐요.”
나는 쿠키를 가리켰다.
“이 쿠키요?”
“네, 나 쿠키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건 잘 들어가는데요?”
박종만은 그 말을 증명하듯 손바닥에 꽉 차는 쿠키를 벌써 2개째 집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 애기들도 먹기 좋은 건강 간식으로, 좀 작은 버전도 같이 만들면 좋을 거 같네요. 큰 건 큰 거대로 좋지만. 뭐, 맛은 똑같고 크기만 조절하는 건 쉽지 않나?”
“그렇죠. 진짜 이게 사업성이 있어 보이나요?”
“제가 볼 때는 그런데.”
민희재와 이 부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를 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현재 암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관리가 필요한 그녀였기에 무리해서는 안 됐다.
“그나저나 제가 들른다고 했을 때 안 그래도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죠.”
박종만의 낯빛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그의 건강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겉보기처럼 건강 그 자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박종만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젊어지고 싶습니다.”
“예?”
“동안…… 아니, 제 나이로라도 보이고 싶습니다. 어떻게 방법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