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56화
15. 누구나 과거는 있다 (3)
나와 양미희는 자연스레 여자 한의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대기실에는 없던 사람이었다. 촬영이 시작될 때쯤 딱 맞춰 등장해 자리했던 그녀는 ‘우리는 몸신이다’에 처음 출연을 할 때부터 화제가 됐다.
미담 한의원. 강남에 위치한 본점 외의 지점들만 전국에 총 29개. 그중 송파지점의 원장인 나도혜. 미담 한의원의 본점 원장인 나현수의 딸이기도 하다.
빼어난 미모에 젊은 한의원 원장이라는 점 때문에 크게 이목을 끌었다. 어떤 분야든 실력 이전에 외모 혹은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튀면 더 관심을 받는 세상이니까.
그렇다고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한의학 업계에 혁신을 일으킨 여자였다.
현대의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최신기기 도입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의학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으로도 유명했으니까.
실제로 나도혜가 방송 출연을 한 이후로 전국의 한의원 이용자들 중에서 젊은 층의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고.
재작년 세계 머슬매니아 스포츠 모델 분야 챔피언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 때문에 더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도 검색어에 오른 나도혜의 사진 몇 장 정도는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체지방과 수분을 쫙 뺀 상태에 태닝도 하고 근육이 도드라져 보이게 컬러크림도 바르고 있어서 다소 날카로운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피부도 하얗고 ‘차분하다’ ‘단아하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절대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느낌은 조금도 받을 수 없었다. 대회 사진도 적당히 균형미 있는 근육질이었지, 덩치가 큰 느낌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단 한마디의 인사였는데, 지금까지 나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살면서 내가 말을 섞은 적이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좋은 의미로는 기품이 있었지만, 나쁜 의미로는 인간미가 없었다.
연예인들과 얘기를 할 때도 이런 느낌은 받지 않았는데.
고작 겉모습과 말 한마디로 이 정도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나도혜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내가 대단한 건지.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양미희는 갑자기 라미네이트로 다진 완벽한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어, 안녕하세요. 저희 뵌 적 있었죠?”
“네, 지난 달 19일 촬영 때 봤었죠.”
“그러니까요.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말씀 감사합니다. 미희 씨도 여전하시네요.”
“네에…….”
자신이 의도했던 대화의 방향이 아니었는지 양미희는 서서히 얼굴에서 미소를 거뒀다. 나도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두 분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의례적인 말을 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비즈니스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비즈니스요?”
“네.”
나도혜는 재킷 주머니에서 카드지갑을 빼들었다. 이런 여자가 핸드백도 없이 돌아다닐 것 같지는 않았고, 미리 챙겨둔 것 같았다.
그녀는 카드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연락 한 번 주세요. 지금은 바쁘신 것 같으니.”
“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나도혜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입가에도 그만큼이나 옅은 미소를 묻혔다. 그리고 양미희에게도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또 기회 닿으면 봬요.”
“네에.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나도혜는 바로 자리를 떴다.
나는 명함을 힐끗 보고는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지갑에 챙겼다. 그러다 양미희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에 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사라져 있었다. 나도혜라는 조용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여자들 사이에서만 생기는 일종의 힘겨루기 같은 느낌이었다. 착각이 아니리라. 과거에 아르바이트 하나만 해도 여자들의 파벌 싸움은 많이 봤으니까.
거기서 남자들도 여러 갈래로 찢어지곤 했다. 한쪽에 붙는 놈, 고루고루 잘 지내다가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는 놈, 이리저리 휘둘리다 이도저도 아니게 돼서 붕 뜨는 놈, 애초에 어울리지 못하는 놈 등등.
당시 내 눈에 승리자로 보였던 건 잘생긴 외모로 가만히 있어도 다들 친해지고 싶어 하던 놈뿐이었다.
나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지 않고 버티는 새우 같은 존재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어느 한쪽에 속하지도 않고, 특별히 적도 만들지 않아서 그럭저럭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잘 안다. 방금도 전부는 아니지만,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여자들만의 기싸움.
시작은 양미희가 했다.
이미 함께 방송에 출연한 적도 있었고, 나도혜 정도의 인지도라면 모르기가 어려웠다. 특히나 트랜드에 민감한 타입인 양미희라면 더욱.
그런데 굳이 ‘뵌 적 있었죠’라며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굴었다. 나도혜가 많은 걸 드러내지도 않았고,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양미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여자는 아닌 걸로 보였다.
나도혜는 정면으로 부딪쳐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다.
확실히 양미희는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의 텐션을 살펴볼 수 없었다.
“아무튼…… 반가웠습니다.”
딱히 할 말도 없어 적당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다음에 커피나 한 잔 해요.”
의외의 발언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네?”
“커피 안 드세요?”
“아뇨, 먹죠.”
“오늘은 제가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되는데, 다음에 커피 한 잔 해요.”
“네, 뭐……. 그래요.”
“반응이 뭐 그래요? 싫어요?”
“아뇨, 아뇨, 그냥 너무 의외라서.”
양미희가 피식 웃었다.
“의외일 건 뭐 있어요. 그냥 커피 한 잔인데.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니에요? 커피 한 잔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마요.”
짓궂은 말에 헛웃음만 쳤다.
양미희의 의도는 알기 어려웠다. 처음에 접근을 해온 걸 보면 ‘혹시’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나도혜가 가고 나서 갑자기 더 적극적이니 ‘홧김에 이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도혜가 내게 명함을 건넨 것을 보고 비즈니스를 다르게 해석해서는 일단 자신의 손으로 집어 보겠다는 것 같기도 했고.
그 중간에 끼어 있는 나 자신이 제일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고, 기분은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니, 좋았으니까.
동성애자도 아니고 무성애자도 아니며 임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찌됐든 매력적인 이성의 접근은 즐거운 일이었다.
스스로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남자’라는 것을 오랜만에 느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데이트가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하네.
5
다음 날, 가게에서 마지막 건강상담을 마친 다음이었다.
여전히 상담실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앉아 있었다.
오정득이었다.
“구라 치지 마.”
녀석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
“진짜라니까? 내가 왜 이런 걸로 구라를 치냐?”
“그러니까, 그 필라테스 강사가 너한테 커피 먹자고 했고, 그 머슬매니아 출신 한의사가 명함을 줬다고?”
“그 한의사야 비즈니스 때문에 연락하라고 했던 거고.”
“무슨 비즈니스? 연락해봤어?”
“나도 모르지. 아직 안 해봤어.”
“빨리 해봐.”
“이따 저녁쯤 해보려고.”
“세상 불공평하네.”
오정득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한테는 컵라면 하나 먹자는 여자도 없는데.”
“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뭐라는 거야?”
“야, 이씨, 컵라면 먹자는 여자가 어디 있냐? 여자랑 컵라면 먹을 일이 모텔에서밖에 더 있냐?”
“모텔에서는 컵라면 먹어? 왜?”
“진짜 몰라서 묻냐?”
“알면 묻겠냐?”
“모텔 가면 컵라면 있는 데가 많아. 그냥 제공하는 거니까 간식으로 먹는 경우 많지. 없으면 다음 날 오전쯤 부스럭대며 일어나서 짜장이나 볶음밥 시켜놓고 꼼지락대다 먹는 거고.”
오정득은 ‘오’ 소리를 내듯 입 모양을 한 채 얘기를 듣다가 갑자기 인상을 팍 구겼다.
“너 이 새끼, 진짜 먹고살기 힘들었던 거 맞냐?”
“갑자기 뭐가 또?”
“할 거 다하고 다니고, 만날 거 다 만나고 다녔네. 에이, 정조관념도 없고.”
“정조는 미친……. 그리고 이것도 다 10년도 더 전에 얘기들이다. 그때는 어리니까, 여자친구들도 그냥 나 돈 없는 거 이해해주고, 자기들이 좀 내주고 그랬지.”
“이 새끼 이거, 김치남이었네 완전.”
“뭔 김치남이야, 미친놈아. 돈 없어서 웬만하면 돈 안 쓰는 데이트하려고 하고, 자취방 가서 설거지랑 청소도 해주고 내가 얼마나 착했는데.”
“아무튼…… 고생만 한 것 같더니, 할 건 다하고 다녔어.”
“더 빡세게 살아야 할 타이밍에 정신 제대로 못 차렸으니 그 고생들을 했지. 운도 안 따라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노력도 부족했어.”
오정득은 얘기를 듣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 갑자기 분위기 개싸해지네.”
“회계사란 놈이 입은 걸어가지고.”
“내가 무슨 성직자냐? 회계사지. 회계사는 욕도 못하냐?”
녀석은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 건강상담할 때 불면증 있는 여자 있으면 나한테 소개시켜줘. 내가 바로 치료해줄 수 있으니까.”
“뭐?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어떻게 하는데?”
“여자들이 나랑 연락하면 불면증 싹 낫더라. 뭐하냐고 물어보면 다 잔대. 아니면 자고 있는 것처럼 굴더라. 그런데 부작용이 있어.”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뭔데?”
“다들 몽유병이 생기더라고. 분명히 잔다고 했는데, SNS는 계속 업데이트 돼.”
“하하하하! 미치인.”
“야, 얘기 나와서 말인데, 그 필라테스 강사 아웃스타나 들어가 봐.”
어젯밤에 아웃스타그램 아이디를 만들었다. 아직 게시물은 하나도 올리지 않았지만.
바로 휴대폰을 꺼내 아웃스타그램 앱을 실행했다.
“뭐 아무것도 없냐.”
오정득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제 가입했어.”
“빨리 뭐 좀 올려.”
“그럴 거야.”
“그, 양미희 거나 빨리 들어가 봐.”
“어.”
양미희의 아웃스타그램은 자신의 사진들로 가득했다. 특히 탱크탑이나 레깅스 차림으로 몸매를 과시하는 사진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직업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예쁘긴 예쁘네.”
“그러냐?”
오정득은 아예 내 휴대폰을 가로채서 양미희의 아웃스타그램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엄청 예쁜 거지. 너랑 찍은 사진도 올렸네.”
“응, 어제 바로 올렸더라.”
“잘 나왔네. 은근히 어울리네? 열받네?”
“시끄러워.”
“왜 댓글도 안 남겼냐?”
“그냥 뭐라고 남기기가 괜히 좀 그래서.”
“좋아요 정도는 눌러야지.”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오정득이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고,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야, 나도혜도 아웃스타그램 있지 않을까?”
“아마 있겠지.”
“들어가 보자.”
“뭘 또 들어가.”
그렇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똑똑똑똑.
다급함이 느껴지는 빠른 노크 소리였다.
“들어오세요.”
내가 목소리를 내자마자 문이 열렸다.
강인나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오빠! 오빠! 빨리 이리 와봐!”
“왜? 뭔데 그래?”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인나는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가리켰다.
인터넷 창이 떠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20위권 안에 ‘미라클 헬스 케어’ ‘행복 건강원’ ‘강건희’ 등의 검색어들이 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