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32화
8. 사장님 (3)
남자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화색을 띠었다.
“안녕하세요. 휴가 중에 실례합니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사장님이 계신 거 같아서 노크를 해봤는데, 역시 계셨네요.”
“예,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저희가 아이튜버거든요.”
아이튜브. 세계 최대의 동영상 플랫폼. 모를 수가 없다.
얼마 전에 5살짜리 아이가 컵라면을 먹는 10분도 안 되는 동영상 수익이 3억에 이른다고 난리가 났었으니까. 임직원 1,700명 이상의 지상파 방송사의 광고매출과 비슷할 정도라고 하니 파급력이 대단하다.
나 역시 한창 회사를 다닐 때 아이튜브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생각에서 그치긴 했지만.
아마 요즘 사람들 중 대부분 한 번쯤은 생각해봄직한 분야였다. 자유롭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니까.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여자가 곧바로 치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는 아이튜버 가예림이라고 합니다. 방송 너무 잘 봤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가예림이 팔꿈치로 남자를 쿡 찔렀다. 그러자 남자도 곧장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김성환이라고 합니다.”
나는 곤란함을 드러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왜 찾아오셨는지는 알 것 같은데, 현재 영업을 안 하고 있어서요.”
가예림은 눈을 한껏 크게 뜨며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저희가 100만 아이튜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작지 않거든요. 보세요. 여기 제 남자친구 아이튜브 구독자가 7만, 제 아이튜브는 9만이에요. 그리고 현재 같이 운영하고 있는 커플 아이튜브도 17만이 넘어가고 있고요.”
그녀는 휴대폰으로 미리 켜둔 아이튜브 채널들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촬영 허가해주시면 영상을 쪼개서 3개로 만들어서 각 채널에 하나씩 올릴 예정이거든요. 그럼 총 33만 구독자들에게 홍보가 되는 거죠.”
기적의 수학법인가. 17만 구독자인 커플 채널이 메인이면, 개인 채널의 구독자는 대부분 중복될 게 분명했다. 그냥 다 더한다고 사람 수가 되는 게 아닌데.
그래도 17만이면 적은 구독자 수는 아니었다.
‘보통 이런 촬영 협조를 하려면 전화를 하는 게 먼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해 보니 영업용 번호를 자동응답으로 넘겨놓았던 게 떠올랐다.
더 이상의 홍보가 필요할까 싶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는 시청률 10% 이상의 프로그램이었고, 덕분에 내 능력 이상의 홍보효과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사람이 몰리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20대 초중반 커플이 운영하는 아이튜브의 구독자 연령층을 생각한다면 홍보효과는 떨어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건강에는 미성년자나 청년층보다는 중장년층의 관심이 깊은 법이니까.
나는 다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색해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라, 눈치껏 알아들으라는 의도된 어색함이었다.
“이렇게 찾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말이 휴가기간이지 일을 하는 중이라서요. 그리고 홍보가 급한 상황도 아니거든요. 무엇보다 이렇게 당일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바로 촬영을 진행하는 건 조금…….”
그렇게 말하는 중에 김성환이 손에 든 카메라가 작동 중인 게 보였다. 아마도 가게 밖에서부터 카메라는 켜져 있었던 듯했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여름휴가 중이라는데도 굳이 찾아와서 카메라를 돌렸다는 건 찾아와서 헛걸음을 했다는 것도 넣으려던 거겠지. 아마 휴가기간이 지나고 다시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촬영 협조를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는 거겠지. 요즘 같이 경기가 어려울 때 홍보를 마다할 사람들도 거의 없을 테고.
만약 내가 끝까지 거절했더라도 이곳에 찾아왔었다는 영상은 써먹을 사람들로 보였다.
그나저나 나하고 얘기를 시작했으면 카메라를 켰다고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촬영하고 계신 건가요?”
내가 묻자 김성환이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아, 이거요? 제대로 촬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까 오는 길에 일상 찍듯이 계속 켜고 있었거든요.”
곱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해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잘라내려는 찰나에 김성환이 말을 끊었다.
“영상을 3개 뽑는다고는 하지만 막상 촬영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즙 만드시는 거 촬영하면서 저희가 맛도 보고 그에 대한 리뷰랑 건강상담 받는 걸로 해볼까 하거든요. 사장님 인터뷰도 하나 하고요. 그럼 딱 3개 잘 나올 거 같은데. 어떠세요? 오케이?”
내가 헛웃음을 치려는데 김성환이 다시 말했다.
“사장님 입장에서 손해 보실 건 하나도 없잖아요. 홍보도 되시고. 가시죠. 오케이?”
두 번의 오케이에 미간을 팍 찡그릴뻔했지만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노케이.”
“예?”
김성환이 당황하는 찰나, 내가 씩 웃어 보였다. 그러자 김성환과 가예리 둘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사장님 센스가 장난 아니시네! 오케이, 노케이. 하하하하!”
“아, 진짜 너무 재밌으시다! 그럼 촬영 허락하시는 건가요?”
나는 코로 길게 숨을 내쉰 뒤에 대답했다.
“예, 하시죠. 몇 가지 조정은 좀 필요하겠지만.”
가예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조정이요?”
“네, 할 거면 확실히 해야죠.”
이것 또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성환의 경우 건강상담도 필요한 상태였는데, 이 사실을 가예림도 알아야 했다.
7
주방에 카메라를 고정해뒀다. 나름대로 본격적인 아이튜버들이라 그런지 카메라도 2대를 더 가져와 설치해뒀다. 개인별로 소형 마이크도 하나씩 달았다.
중간중간 김성환이나 가예림이 직접 털뭉치 같은 게 붙은 마이크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기도 했다.
추가로 내 휴대폰도 거치대에 세워둔 채 촬영 상태로 뒀다. 내가 아이튜브를 하기 위해 영상을 찍는 것은 아니었다.
방어수단이었다. 지난번에 무고로 신고를 당한 뒤로 이런 부분에 대해 더 경각심을 가지게 됐다. CCTV가 있긴 하지만 소리는 녹음이 되지 않으니까. 조만간 소형 녹음기도 따로 장만할 계획이었다.
“어우…… 사장님, 너무 힘들어요.”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서 포도알들을 분리하던 가예림이 징징거렸다.
나는 피식 사과손질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쉽지 않죠?”
“평소에 이걸 혼자 다 하시는 거예요?”
“그럼요. 그래서 여름휴가를 낸 겁니다. 방송이 나간 뒤로 손님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주셔서 전부 품절이 됐거든요. 즙을 한 번 내릴 때 기계가 돌아가는 것만 8시간입니다. 제가 과채류 손질하는 시간은 빼고요. 그러니 시간이 많이 부족하죠.”
“저도 지금 해보니까 알겠어요. 그냥 씻어서 기계에 넣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기계가 돌아갈 때도 수시로 살펴봐야 돼요. 예나 지금이나 다 정성인 건 똑같습니다.”
가예림은 포도알 분리를 멈추며 물었다.
“더 빠르게는 안 되나요?”
“가능하긴 하죠. 하지만 그러면 맛도 떨어지고, 온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영양분도 파괴됩니다. 고객님들께서 맛도 맛이지만, 건강을 위해 구입하는 제품들이니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여름휴가마저 반납하고 일을 하는 모습이 담기는 건 긍정적으로 비칠 게 분명했다. 정직하게 일하며 고객들을 1순위로 생각한다는 거니까.
아이튜브 촬영에 협조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김성환이 살짝 눈치를 주자 가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장갑을 벗고는 카메라를 건네받았다.
“사장님, 저는 어떤 걸 해볼까요?”
김성환이 물었다.
이들에게 진심으로 도울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그저 하는 척만 하면서 분량을 뽑을 생각이 전부인 게 뻔히 보였다.
“그럼 설거지 좀 도와주시겠어요?”
과채류 손질이야 요령이 필요하지만, 설거지는 누구든 할 수 있는 거니까.
5분쯤 지났을까.
김성환은 설거지를 하면서 힘든 기색을 보였다.
워낙 큰 커다란 용기들을 뜨거운 물로 벅벅 문지르며 씻으니 금세 몸이 더워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5분 만에 지칠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김성환은 처음에 집은 대야 하나를 아직까지도 붙들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하는 시늉만 하고 있었으니 힘들 이유가 없었다. 엄살도 심하고 아마도 그런 캐릭터겠지. 아마 재미를 위해서 오버를 하는 걸 테고.
“아이고악!”
김성환이 비명을 질렀다.
떨그렁!
그가 세제물이 잔뜩 들어 있는 대야를 엎었다. 아니, 집어던진 것에 가까웠다. 당연히 대야는 왕창 찌그러져 있었다.
촤아아아아아악……!
온 주방에 금세 세제물이 퍼졌다. 배수가 잘 돼 있긴 하지만 세제물이라 따로 청소를 한 번 싹 해야 됐다. 기본적으로 바닥 전체를 적시면서 일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안 다쳤어? 괜찮아?”
가예림의 물음에 김성환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어, 어. 괜찮아.”
그러고는 나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어떡하죠?”
당연히 화를 낼 수는 없기에 그저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설거지도 제가 다시 해야겠네요. 이 대야는 너무 찌그러져서 못 쓰게 됐지만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익숙지 않을 일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 일단 바닥부터 좀 치우죠.”
김성환과 가예림은 잠시 물러나서 내가 일하는 장면만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바닥에 물을 뿌린 뒤, 스퀴즈 밀대로 물을 배수로에 싹 몰아넣었다. 그 다음 마른 걸레가 달린 밀대로 물기를 제거했다.
“어차피 계속 물이 도는 곳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나요?”
김성환의 물음에 나는 밀대를 구석에 세워두며 대답했다.
“그래도 항상 청결을 유지해야 되니까요. 계속 습기가 돌게 놔두면 안 되죠. 그리고 곧 기계가 들어올 거라서요.”
“기계요?”
그때 가게 문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왔나보네요.”
나는 곧바로 장갑과 앞치마를 벗으며 가게 밖으로 나섰다.
박종만이 도착해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문을 열며 묻자 박종만은 함박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잘 지냈죠. 방송 잘 봤습니다.”
“아, 보셨습니까.”
“당연히 봤죠. 역시 카메라가 실물은 못 담아내더라고요.”
“하하하하! 말씀도 참.”
박종만은 내 뒤쪽에 있는 김성환과 가예림을 보고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지금도 촬영 중인 거예요?”
“네, 네. 이번엔 아이튜브입니다.”
나는 지금 상황을 간략히 설명한 뒤 물었다.
“촬영 괜찮으시죠?”
“그럼요, 당연하죠. 사장님 진짜 대박 나시겠네. 아니, 이미 나신 거 아닌가? 기계도 큰 놈으로 새로 주문하시고. 흐흐흐.”
“대박은요.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대박 나셔야죠. 사장님이 잘 돼야 저도 잘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박종만과 함께 곧바로 새 기계를 들였다. 잠시 카운터를 들어내야 될 정도로 덩치가 큰 기계였다. 기존의 기계보다 2배 용량인 60리터짜리였다. 그것도 2대. 게다가 포장기도 1대 더 들였다.
박종만은 지난번처럼 기계 세척 및 살균을 손수 도왔다.
이 과정 또한 촬영됐고, 영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촬영 시작 전에 김성환과 가예림에게 확답을 받아둔 부분이었다. 혹시 모르니 간단한 동의서도 작성해둔 상태였다.
철저한 위생을 강조하면서 좋은 기계를 들였다는 내용이니 가게 이미지에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내 가게보다도 박종만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담아내는 장면이었다. 사업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8
기계 설치를 전부 마친 뒤였다.
“그래요? 젊은 친구들이 대단하네.”
박종만은 물을 한 잔 마시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예림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아이튜브 자주 보거든. 일할 때 라디오처럼 켜놓으면 괜찮더라고. 거기도 다 내가 구독이랑 좋아요 그리고 알람 설정까지 눌러줄게요.”
박종만의 말에 가예림은 더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아아. 사장님 짱!”
“하하하하!”
박종만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장님, 그러 저는 이만 가볼게요.”
“네, 고생 많으셨어요. 매번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이고, 고생은요. 그리고 제가 감사하죠.”
그렇게 박종만이 가게를 나서려는데, 가예림이 다급히 말했다.
“사장님, 사장님. 홍보, 홍보하고 가세요.”
그녀가 카메라를 박종만에게로 향했다.
“아, 그래도 되나?”
“네! 홍보할 시간 10초 드릴게요!”
“10초? 아, 너무 짧은데.”
“시간 지나가고 있어요! 빨리!”
“아, 어…… 저희 JM테크는 건강한 즙을 내리기 위한 기계를 전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연락 많이 연락주세요! 파이팅! 아즈아!”
가게 안에 한바탕 웃음이 퍼졌다.
“그럼 진짜 가보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세요.”
“예, 들어가세요.”
내가 문 밖까지 배웅을 했고, 박종만이 트럭을 몰고 떠났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언젠가 따로 술이라도 한잔해야지.
가게로 다시 들어오자마자 김성환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사장님, 저희 이제 직접 만들어본 즙 좀 먹어볼 수 있을까요? 오케이?”
또 오케이. 캐시백 받고 싶어서 저러나.
“예, 그러시죠.”
나는 냉장고에 따로 병에 보관했던 즙을 꺼냈다. 그리고 유리컵에 얼음까지 담아서 내놓았다.
가예림은 카메라를 고정해둔 뒤 그 앞에서 사과즙을 마셨다. 그리고 눈을 한껏 크게 뜨고는 리액션을 했다.
“와아아아아아……! 너어어어어어무 맛있어요! 눈이 번적 떠져요! 먹자마자 피부 좋아지는 거 같아.”
그녀는 카메라 렌즈에 얼굴을 막 들이대며 눈을 뒤집어까며 오버액션을 했다.
왜 부끄러움은 보는 사람의 몫인지.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촬영도 내 요구대로, 계획대로 잘 이뤄졌고. 내 휴대폰과 CCTV에도 모든 장면들이 담긴데다가 동의서까지 작성하여 보험도 확실히 들어놔서 걱정이 없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찾아와서 촬영을 요구하는 것부터 시작해 일에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일을 늘려서 조금 짜증도 났는데.
“사장님, 저 한 잔 더 주실 수 있어요?”
가예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번에도 사과즙으로 드려요? 아니면 다른 것들도 있어요. 주스도 있고.”
그때 김성환이 씩 웃으며 물었다.
“사장님, 저는 팩에 든 걸로 주시겠어요?”
“팩에 든 거요? 지금 막 포장된 거는 다 너무 미지근할 텐데. 시원한 걸로 드시지 왜…….”
“저는 그 본연의 맛? 그런 걸 느끼고 싶어서요. 시청자 분들은 다 팩에 든 걸로 구입하시잖아요.”
“팩에 든 것도 차갑게 해서 먹기도 하고, 컵에 따라서 먹기도 해요. 똑같아요.”
“그래도 그 팩 딱, 쫙 찢어가지고, 쭉 빨아먹는 그 맛이 있잖아요.”
나는 헛웃음을 치며 사과즙 팩을 하나 빼들었다.
“그래요, 그럼. 여기요.”
“아, 저는 포도즙으로 주시겠어요? 두 팩이요.”
“그래요.”
조금 황당했지만 군말 없이 포도즙 두 팩을 내밀었다. 사실 김성환이 보유하고 있는 질환을 생각했을 때, 내 컵을 쓰는 게 찝찝하기도 했고.
김성환은 이빨로 두 팩의 모서리를 한 번에 찢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포도즙이 살짝 흘렀다.
“오, 오오오오오……!”
김성환은 놀랐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가예림이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다 흘리잖아 멍청아.”
“오케이, 오케이. 괜찮아. 할 수 있어. 감당할 수 있어.”
“감당하긴 뭘 감당해. 그거 한 번에 다 마시려고?”
“남자면 두 팩 정도씩은 먹어줘야지.”
“그럼 한 팩씩 먹어.”
“에이, 적어, 적어. 모자라. 한 번에 쭉 짜줘야 돼. 짜요짜요, 오케이?”
김성환은 그대로 포도즙 두 팩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물을 먹는 닭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포도즙 두 팩을 있는 힘껏 쥐어짰다.
“푸확!”
김성환은 포도즙을 뿜어내며 입 주변과 옷에 다 질질 흘렸다. 당연히 가게 이곳저곳에도 튀었고, 나에게도 튀었다. 카메라에도 조금 튀었는데, 가예림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몸을 뒤로 쭉 빼고 있었다.
의도된 연출이 분명했다. 대야를 엎었을 때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었다. 차라리 이런 연출을 할 거라고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재미를 위한 거니까 이해했을 텐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사장님 괜찮으세요? 오케이?”
김성환은 포도즙을 뚝뚝 흘리며 물었다.
부끄러운 과거를 회상하게 됐다. 옛날 같았으면 김성환이 흘리고 있는 포도즙이 팩에서 나온 게 아니었겠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코랑 입에서 더 새빨갛고 따뜻한 포도즙을 뿜게 해주고 싶었지만, 얼굴로는 웃고 있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인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도 빅엿을 준비해뒀으니까.
정확히는 김성환이 처음부터 커다란 엿을 단 채로 온 거지만.
9
카메라와 휴대폰 등을 고정해두고 나는 김성환과 가예림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오오오오, 안녕하세요오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김성환과 가예림은 휴대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실시간 스트리밍을 진행 중이었다.
이것도 사전에 얘기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건강상담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시청자들에게 조작 없이 보여주고 싶다나? 카메라로 촬영한 것으로 따로 편집해서 영상도 깔끔하게 올릴 거라고. 이번에도 역시나 마지막 질문은 김성환의 ‘오케이?’ 였다.
내게 선택권은 있었다. 그리고 흔쾌히 응했다.
아직은 건강상담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실시간 시청자수가 2천 명이 넘어가는 중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에 나온 건강원 사장님에게 직접 건강상담을 받는다는 내용이 어그로가 제법 끌린 듯했다. 방송이 나간 지 얼마 안 된 탓이겠지.
“사장님, 이제 시작하셔도 될 것 같아요.”
가예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구부터 할까요? 저부터?”
김성환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죠. 바로 시작할까요?”
“네, 네! 오케이! 바로 가주세요!”
“……평소에 어디 크게 불편하신 곳 있으세요?”
“아뇨, 딱히 크게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어요.”
“그래요?”
“네, 혹시 안 좋은 곳이 있는지 사장님께서 봐주시겠어요?”
나는 김성환의 입술과 그 주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입술은 언제부터 그랬어요?”
“아, 이거 입술 터진 거요? 종종 그래요. 피곤하면 그러더라고요.”
“그래요? 언제 처음 그랬어요?”
“처음이요? 글쎄요?”
가예림이 대신 대답을 내놨다.
“지난달에 같이 여행 다녀왔는데, 그때부터 피곤하면 그러더라고요. 술 많이 마셔도 그러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그전에는 안 그랬고요?”
“네, 저희가 만난 지 이제 1년 좀 넘었는데, 그전에는 그런 적 없어요.”
김성환은 조금 겁이 난 듯 나를 보며 물었다.
“뭔데요? 뭐 안 좋은 건가요? 딱히 다른 이상은 없고, 조금 이러다가 잠 잘 자고 그러면 없어지던데.”
“이거 말씀드리기가 조금…….”
가예림이 말했다.
“뭔데요? 말씀해주세요. 지금 2천, 이제 2천5백 분이 넘게 보고 계세요.”
나는 자연스럽게 휴대폰 화면을 슬쩍 봤다. 채팅창에는 이미 정답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김성환과 눈을 마주치며 나지막이 말했다.
“헤르페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