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21화
5. 처음 같지 않은 사장(4)
학창시절 공부와 그리 친하지 않았다.
식품 가공 기능사가 엄청난 학력이나 자격을 요하는 시험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국가기술 자격증.
켈달법, 멜링 시험, 닌히드린 시험, 밀론 시험, TBA 값 시험, 염산, 황산, 질산, 붕산, 에테르, 포름알데히드, 알데히드, 지방산, 글리코겐, 수중유적형의 유화 식품, 아밀라아제, 리파아제, 프로테아제, 펙티나아제, 나이아신, 엽산, 티아민, 리보플라빈 등등.
눈에 익지 않은 단어들이었다. 몇 개를 제외하면 처음 보는 게 대부분인 듯했다.
그런데도 문제를 푸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아도 문제를 읽다 보면 뭐가 뭔지 알 수 있었고, 정답에 이르렀다.
순식간에 몇 페이지나 문제들을 싹 풀었고, 답을 맞춰보았다.
역시나 모두 정답.
헛웃음을 치며 몇 페이지를 더 풀었다.
결과는 같았다.
모두 정답이었다.
“대박…….”
할아버지는 저승에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한 듯하다.
전수받은 능력을 꽁으로 먹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가르침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전수받은 능력 외에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끝을 봐야지.
일 자체에 즐거움이 있으니 욕심도 더 커졌다.
예전에는 이따금씩 허황된 망상이나 하다가 현실에 지친 나를 술과 인스턴트식품으로 달래고 잠들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자기 전까지도 일에 대한 생각을 하며 열정을 불태운다.
과거의 생활이 점점 잊히고, 새로운 삶에 익숙해져 간다.
9
―응, 되지. 다 비용처리 가능해.
수화기너머로 오정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잘됐네.”
―괜찮은 생각 같다. 확실히 신뢰도 더 갈 거 같고.
“그치?”
―근데 한 번에 다 할 수 있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식품 가공 기능사의 필기시험을 접수한 상태였다.
안 봐도 뻔한 결과였다. 2차로 실기도 있었는데 우유 품질 검사, 사과젤리 제조, 연제품(어묵) 제조까지 총 세 가지 과정이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만 살짝 돌려봐도 껌이었다. 내게는 시험 같지도 않은 시험이었다.
애초에 실기 응시자의 합격률은 95%라서 필기만 통과하면 대부분 통과하는 거지만.
오정득이 걱정하는 건 내가 여러 가지 자격증에 도전하는 점이었다.
고졸에 다른 자격증도 없고, 특별한 실무 경력도 없는 내가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은 한정돼 있었다.
사업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로 골라보니 식품 가공 기능사, 식생활교육지도사, 식생활개선지도사, 약초차 힐리스트, 약용식물관리사, 발효효소 관리사까지 총 6개였다.
“할 수 있으니까 하지.”
―그래? 목소리 들어보니 진짜 자신 있나 본데? 그래도 8, 9월에만 여섯 개는 좀 심한 거 아니야? 민간자격증은 그렇다 쳐도 지금 검색해 보니까 나름 국가기술 자격증에 국제자격증들도 있는데.
“그래도 해야지.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솔직히 자격증들을 보유하나 하지 않으나 내가 가진 능력은 똑같거든? 이거 공부한다고 뭐 더 새롭게 많이 알게 되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사람들한테 어필하려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표현하려면 자격증만큼 확실한 게 없잖냐.”
―하긴, 그건 그렇다. 나도 회계사 딱지 없으면 누가 일 맡기겠냐.
“아무튼 고맙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당연히 고객님한테 이 정도 설명은 해드려야지.
나는 낄낄 웃었다.
“끊는다.”
―응, 수고.
자격증 6개를 갖춘 내가 판매하는 건강즙과 주스는 꽤나 신뢰가 갈 테지. 운전면허증밖에 없던 내가 나름대로 자격증 부자가 되기까지 2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9
슬러시도 곧 판매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내가 보유한 슬러시 기계는 두 가지 맛을 돌릴 수 있었는데, 당연히 사과와 포도를 택했다. 즙으로 냈을 때 첨가물 없이 가장 단맛을 내는 것들이었으니까.
슬러시용 사과즙과 포도즙은 기존에 판매하는 것보다는 농도가 낮았다. 마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일즈 포인트가 달랐다.
슬러시는 건강을 위해 먹는 게 아니다. 일단 시원하고 맛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고농축 즙은 맛만 따지면 사람에 따라 다소 부담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슬러시용 즙은 비율을 낮춰 순하고 달달한 맛을 냈다. 덕분에 마진율도 조금 높아지긴 했고.
가게 앞에 설치된 나무 데크 바닥 위에 자그마한 수납 겸용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슬러시 기계를 설치했다.
쨍쨍한 햇빛이 내 얼굴과 기계에 곧바로 떨어졌다. 이 더운 날씨에 나도 계속 나와 있는 게 불가능하고, 슬러시도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기계가 고장이나 안 나면 다행이지.
또 돈이 깨질 일이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휴대폰을 빼 들었다.
약 10분 뒤, 인테리어 업자가 와서 실실 웃었다.
“거봐요, 그때 설치하시라니까.”
“그러게요. 그때는 쓸 일이 없을 줄 알았죠.”
“저는 밖에 데크까지 깔았는데 왜 어닝을 안 치시나 했죠.”
간판 밑에 어두운 녹색 어닝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것도 오늘 바로.
전동으로 달면 훨씬 편리하지만, 단가가 너무 올라갔다.
운동 겸 핸들 꽂고 좀 돌리면 되지 뭐.
“다 됐습니다.”
설치를 마친 인테리어 업자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무슨 문제 있으시면 연락해 주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는데 이거라도.”
나는 포도즙을 한 팩 내밀었다.
인테리어 업자는 팩을 이빨로 찢은 뒤 단번에 쭉 빨아 먹고는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거 죽이네요. 조만간 사러 올게요.”
“예, 들어가세요.”
진작 설치할 걸 그랬다. 입구 쪽이 더 안락해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늘이 생기고, 비도 막아주니 얼마나 좋은가. 수십만 원이 들긴 했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듯했다.
이제 슬러시도 팔기만 하면 됐다.
이것 또한 도전이었다. 장사가 안되면 어닝 설치비, 슬러시 기계, 슬러시용 즙을 개발하기 위해 든 시간과 돈까지.
이번에도 역시나 특유의 떨림과 긴장감이 날 찾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컸다.
이 묘한 감각에 천천히 중독되는 듯하다.
무엇이든 간에 도전을 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런 맛이다.
10
슬러시 판매 개시한 지 3일째.
띵도옹.
벨소리가 울렸다.
“네에에에에.”
주방에 있던 나는 곧바로 목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섰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자아이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쥔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였는데, 혼자서 건강원을 찾아온 모양새가 어떻게 생각하면 웃겼다.
“어떤 걸로 줄까아?”
“작은 걸로 주세요.”
“무슨 마앗?”
“사과 맛이요.”
“1,000원이에요.”
아이가 내민 1,000원을 받은 뒤 곧바로 컵에 사과 맛 슬러시를 받았다. 그리고 빨대를 꽂아주면 끝이었다.
“감사합니다아.”
아이가 활짝 웃으며 자라다 만 앞니를 드러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방긋 웃었다.
“또 오렴.”
아이는 곧장 빨대를 입에 물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슬러시는 현재 200㎖ 작은 컵이 1,000원 그리고 300㎖ 큰 컵이 1,500원이었다. 사과 맛과 포도 맛 가격은 동일했다. 마진율은 포도 맛이 높았지만.
처음에는 가게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늘에서 버텼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타산이 맞지 않았다.
슬러시 하나 팔자고 계속 가게 앞에 나와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너무 더워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으니 보기에 영 좋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위생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정도.
게다가 가게 일이라는 게 과일 손질, 즙 내리기, 설거지, 상품 정리 등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계속 나와서 슬러시만 팔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을 열어놓을까 고민도 했는데, 그래서는 나와 있는 거랑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불러야 되면 부담도 됐을 거고.
그러다 떠올린 게 바로 벨이었다. 내가 카운터 부근에 있으면 오는 손님을 보고 나가서 맞이할 수 있었지만, 주방에 있거나 다른 일을 할 때는 불가능했다.
[슬러시를 드시고 싶으신 분은 여기를 눌러주세요!]
형광색지를 활용해서 최대한 발랄하게 썼다. 보통 슬러시를 먹자고 오는 손님들의 절대다수는 어린 학생들이니까.
좋은 선택이었다. 손님들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첫날에는 가격만 적어놓고 슬러시를 팔았는데, 매출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순수하게 슬러시만 팔아서 33,500원. 이틀째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오후 3시가 안 됐는데도, 평일인데도 5만 원을 넘어선 상태였다.
역시나 홍보가 중요하다.
자그마한 칠판 형태의 입간판을 세워 놨다.
[無설탕 슬러시! 그 어떤 첨가물도 들어가지 않은 100% 과즙 건강 슬러시입니다!]
어린아이와 함께 가는 어른들을 노리고 쓴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이들에게도 상당한 어필이 됐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다이어트를 하는 세상인지라 저런 게 먹혔다.
시작할 때 예상했던 루트도 몇 번 이뤄졌다. 슬러시를 먹겠다고 온 아이 덕분에 그 엄마가 즙을 한 박스 구입했다.
슬러시 장사는 확실히 여러 면에서 매출 증대에 효과가 있었다.
“좋구나아, 좋으아아으아아아.”
나만의 리듬으로 흥얼거리며 물건을 정리하는데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머리는 희끗희끗 물들었고, 코는 벌에 쏘인 듯 커다란 통통한 중년 남자가 가게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내가 곧바로 몸을 틀고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중년 남자는 가만히 서서 고개만 이리저리 움직여 가게 내부를 살폈다.
건강원이라는 곳 특성상 조금 낯설 수도 있기에 나는 곧바로 설명에 들어갔다.
“저희 가게는 현재 여러 가지 과채류 즙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첨가물 없이 100% 해당―”
중년 남자가 내 말허리를 잘랐다.
“물건을 사러 온 것은 아니고요.”
“아, 그러십니까.”
누군가에게 얘기를 전해 듣고 몸이 안 좋은 곳을 봐달라고 온 사람인 듯했다. 확실히 중년 남자는 관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혈관이 안 좋은 편이었고, 살도 빼야 됐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오셨죠?”
내가 묻자 중년 남자가 눈썹을 한 번 들썩였다.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예? 무슨 협회요?”
“건강원 협회입니다.”
건강원에도 협회가 있나? 금시초문이었다. 하긴, 무엇이든 관련 단체나 협회가 있게 마련이지.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건강원 협회요?”
“예, 그렇습니다. 여기…….”
중년 남자가 내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서울 건강원 협회 동부지부장 정성기]
나는 명함을 힐끗 보고는 정성기와 눈을 마주쳤다.
“아, 네…… 저는 건강원 협회가 있는지도 몰랐네요.”
정성기가 껄껄 웃었다.
“그러실 수도 있죠. 이제 알아가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