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6화
4. 소문난 즙쟁이(4)
“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여자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토마토랑 자두랑 포도랑 100포씩 주세요.”
“아…… 지금은 자두만 구매 가능하세요.”
“왜요?”
“오늘은 가오픈이라서 아직 준비가 다 안 돼서요.”
“조금 전에 세 가지 있다고 하신 거 아니에요?”
나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 그게 시음은 가능하신데 판매가 안 돼요.”
“왜 판매가 안 돼요?”
“이게 저희가 판매를 할 때 즙이 팩에 들어 있잖아요? 팩 뒷면에 영양성분이 인쇄돼서 나가는데, 토마토랑 포도 성분 검사는 내일 도착하거든요.”
가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과채류 몇 가지는 기본 품질의 과일들로 즙을 내서 영양성분분석 의뢰를 미리 해둔 상태였다. 비용이 2배 이상 들더라도 14대 영양성분이 나오는 옵션을 택했다.
분석 기간에만 최소 5일에서 주말이나 공휴일이 끼면 10일까지도 걸리는 데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즙 한 종류당 부가가치세 제외하고 60만 원가량 들었으니까.
“영양성분 안 찍혀 있어도 괜찮아요. 그냥 파세요.”
여자의 말에 나는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증이 안 된 걸 팔면 불법이라서요. 괜찮으시면 자두만 챙겨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래요? 아이, 참. 우리 아저씨가 꼭 다 사오라고 했는데.”
“내일 오시면 구입 가능하십니다.”
“알겠어요. 내일 몇 시에 여세요?”
“영업은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인데요, 미리 전화주시면 그전이나 후에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여자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자두팩 100포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는데, 박종만이 이미 자두즙을 포장기로 옮긴 상태였다. 예쁘게 팩으로 나온 자두즙이 대야에 쌓여갔다.
“아니, 사장님께서 왜 일을 하세요.”
내가 말하자 박종만은 씩 웃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또 할 줄 아는 거 가만히 못 보고 있거든요. 손님 오셨는데 최대한 안 기다리셔야지, 계속 세워둘 수는 없는 거잖아요.”
“매번 신세만 지는 거 같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신세는요, 짜장면이랑 탕수육 얻어먹은 값은 해야죠.”
“그때도 제가 감사해서…… 아니, 애초에 짜장이랑 탕수육으로 무슨…….”
“진짜 고마우시면, 이거나 빨리 외우세요.”
박종만이 벽에 붙어 있는 코팅된 종이를 가리켰다. 내가 기계 작동법을 하나하나 다 적어서 붙여둔 것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아직도 헷갈릴 때가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붙여뒀다.
“다 외우기는 했는데, 실수할까 봐…….”
나는 종이박스에 팩을 하나하나 세면서 담고 있었다.
“아무튼 글씨는 기가 막히셔. 명필이시네 진짜. 처음에는 무슨 인쇄한 줄 알았어요.”
박종만은 낄낄 웃으며 종이박스 하나를 조립하여 자두즙을 담기 시작했다.
“제가 할게요. 그냥 놔두세요.”
내가 말을 하자마자 카운터 밖의 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멀었어요오오?”
“금방 됩니다아! 담기만 하면 돼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힘 있게 대답을 하고는 손을 조금 더 빨리했다.
박종만은 그것 보라면서 밖을 가리키고는 낄낄 웃었다.
그렇게 자두즙 두 박스의 손잡이를 잡고 밖으로 나갔다.
“여기 나왔습니다. 차갑게 드셔야 더 맛있어요. 보관도 더 오래 할 수 있고요.”
“네, 얼마예요?”
“5만9천 원입니다. 50포에 3만 원이고, 100포 사시면 천원 빼 드려요.”
“가격 괜찮네요.”
여자는 만족스러운 듯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카드를 건네받고는 씩 웃어 보였다.
“5만9천 원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가게 열고 첫 손님이십니다.”
“아, 잠시만요.”
“네?”
“카드 다시 주세요.”
카드를 돌려받은 여자는 현금 5만9천 원을 딱 맞춰서 내밀었다.
“개시하시는데 현금으로 해야죠.”
“아, 하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돈을 받아 챙기고는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섰는데, 박종만은 이미 자두즙의 포장을 전부 마치고 50개씩 박스에 담는 중이었다.
“아이, 가만히 놔두시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토마토즙과 포도즙을 한 팩씩 챙겨서 나갔다. 그리고 여자에게 내밀었다.
“이거 포도즙이랑 토마토즙이에요. 드셔보시고 괜찮으시면 꼭 또 찾아주세요.”
“어머어, 이런 거 안 주셔도 사러 올 건데. 감사히 잘 먹을게요. 근데 영양성분 어쩌고 하시면서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이건 판매가 아니라 선물로 드리는 거잖아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저희 시어머니가 여기서 꼭 즙 사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시어머니께서요?”
여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시어머니가 여기 사장님한테 진료를 받았는데, 몸 상태가 너무 좋아졌다고, 거기서 하는 즙은 무조건 사와야 된다고 우리 아저씨한테 뭐라 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사러 온 거죠, 뭐.”
“아아, 그러셨구나.”
“뭐…… 원래 의학 쪽 공부하시고 그런 거예요?”
“아니요오, 그냥 남들보다 민간요법 같은 걸 조금 더 아는 정도입니다.”
“그래요? 저는 다른 거보다 이거, 즙을 어떻게 먹어야 좋아요? 반은 어머니 드릴 거고, 반은 저희 먹으려고 사는 거거든요. 특히 제가 요즘 다이어트 시작해서.”
나는 자두즙 박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이어트하시면 후식이나 야식으로 드시는 건 피해 주세요.”
“그래요? 100% 과일즙 아니에요? 그리고 칼로리 낮던데.”
“그렇죠. 하지만 다이어트를 가장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야식은 피하는 게 좋겠죠? 그리고 과당이라는 게 있고, 즙이나 주스로 마시면 혈당이 좀 빠르게 오릅니다. 그러니 아침에 혈당이 떨어졌을 때, 그때 먹는 게 제일 좋아요. 아니면 식간이나요.”
“그렇구나아.”
“요거트에 드셔도 좋고, 탄산수에 타서 드셔도 괜찮을 거예요. 팩 뒤쪽이나 박스에 영양성분표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칼로리가 워낙 낮아서 식후에 드셔도 크게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최선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진짜 아시는 게 많으시네. 호호호호.”
내가 손을 뻗어 가게 전체를 보란 듯이 말했다.
“여기 사장인데 당연히 잘 알아야죠.”
“자두가 다이어트랑 피부에 좋다고 하던데, 또 어디에 좋죠?”
“영양성분표 보시면 아시겠지만 비타민C도 많고, 비타민E가 노화방지에도 도움을 줍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항산화 성분들이 있고요. 식이섬유도 풍부한 데다가 항암 효과, 뇌 건강에도 도움을 줘요. 제철 자두로 내린 즙이라 맛도 좋으실 겁니다.”
“먹어보고 괜찮으면 또 사러 올게요. 많이 파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여자가 나가고 난 뒤에야 의문이 들었다.
즙 100포씩 세 종류면 6박스인데 어떻게 들고 가려고 했지? 아마 수레라도 가져온 거겠지.
그나저나 나한테 처방을 받은 할머니면 누구를 말하는 거지? 물어볼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기계 소리가 계속 작게 울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몸을 돌렸다. 박종만이 내가 할 일들을 다 해치우고 있었다.
“아이고, 사장님. 그냥 놔두시라니까.”
“그냥 보이길래요. 딱히 한 것도 없어요. 그냥 기계가 알아서 다 하는데요 뭐. 제가 판 기계잖습니까? 잘 돌아가나 확인한 거죠.”
“아이, 참…… 점심식사라도 하실래요? 제가 사겠습니다.”
“다음에요. 가봐야 됩니다.”
“에이, 어차피 가셔도 식사는 하셔야 되잖아요.”
“아니에요, 다음으로 하죠. 진짜 가봐야 돼서요.”
나는 미안한 마음에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박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세 종류의 즙을 한 상자에 가득 채워 넣었다.
“이거 가져가세요.”
내가 즙을 내밀자 박종만은 양손을 내저었다.
“어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가져가세요. 이래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습니다.”
“에헤이이, 가져가세요. 진짜 깨끗하게 했어요. 맛도 괜찮더라고요.”
“이것 참…….”
박종만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박스를 받아들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감사는요, 제가 감사하죠. 저거 나무도 열심히 키울게요.”
“쟤가 키우기도 쉽대요. 그럼 다시 한번 개업 축하드리고요, 조만간 또 들르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주시고요.”
“네, 그럴게요. 들어가세요.”
그렇게 박종만이 나갔고, 혼자 남았다.
아직 가오픈인데 바로 즙이 판매된 게 좋았다. 아마 내일도 찾아와서 구입할 가능성도 높았고.
노인들을 진단하고 처방한 게 헛된 노동력 낭비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즙을 사러 오지도 않았겠지.
그 시작은 냉면집에서 급체한 박춘기 할아버지를 치료한 덕분이었다.
이제 시작이었는데, 이 일이 너무 좋았다.
지갑도 두둑해지고 마음도 따뜻하고 푹신하며 부드러운 데다가 달달한 무언가로 가득 차는 듯했다.
8
오늘까지는 판매가 가능한 즙이 자두뿐인 상태.
포도즙과 토마토즙은 따로 대형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뒀다. 내일 성분분석표를 받으며 인증이 되면 그때부터 포장지에 인쇄를 하면서 담아낼 예정이었다.
대충 오늘 해야 될 일은 마친 상태였다.
총 60k㎏의 과일을 샀는데, 새벽부터 해서인지 생각보다 일을 빨리 마칠 수 있었다. 어차피 기계가 추출하고 포장을 하기에 가장 힘든 과정은 손질과 세척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기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강 사장님!
사장이라는 소리가 참 듣기 좋다. 비록 직원 하나 없이 나 혼자 일하는 작은 가게이지만, 사장이라는 말이 좋다. 아마 당분간은 이 호칭이 질릴 일은 없을 듯하다.
“안녕하세요, 저 다른 게 아니라 주문 좀 넣으려고요.”
―벌써요? 가져간 거 다 파셨어요?
“아니요, 미리 좀 내려놓으려고 그러죠. 그리고 다른 것들도 같이 주문하려고요.”
나는 차갑게 식힌 자두즙을 꺼내 컵에 따랐다.
―네, 말씀하세요.
“토마토, 블루베리, 포도, 자두 각 20㎏씩 그리고 복분자 10㎏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양파도 20㎏이요.”
―양파는 50㎏ 하세요.
“예?”
―지금 양파 엄청 쌉니다. 품질도 좋고요. 쌀 때 가져가시는 것도 괜찮죠.
“그럼 100㎏ 주세요.”
―예?
이기철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웃었다.
―하하, 화끈하시네. 알겠습니다. 근데 100㎏ 하셔도 얼마 안 됩니다. 작년 반값도 안 돼요.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그냥 지나치게 대풍년에 소비는 적어서 그런 건데. 더 필요하신 건 없고요?
“더 필요한 게…….”
무심코 컵에 따라둔 자두즙을 한 모금 마셨다.
“어우 셔.”
―예?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만요.”
분명히 맛을 봤었다. 하지만 갈증에 벌컥벌컥 들이켰을 때랑 지금처럼 맛을 음미할 때랑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냥 먹으면 달달한 자두가 추출기로 즙을 내리니 시기만 했다. 저온으로 추출하는 것이기에 영양분은 지켜내지만, 맛까지 지키지는 못하는 듯하다.
아무리 건강식품이어도 가능하면 맛이 좋아야 자주 많이 먹게 된다. 신맛을 즐긴다면 나쁘지 않지만, 달달한 맛이 있으면 더 좋을 듯했다.
즙에 꿀을 넣어서 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머릿속에 자연스레 방법이 떠올랐다. 이 역시 할아버지에게 전수받은 능력 덕분이었다.
“사장님, 지금 사과 있습니까?”
―아, 그럼요. 제철은 아니어도 요즘은 사계절 내내 나옵니다.
“가격은요?”
―조금 신 놈은 10㎏에 만원도 가능합니다. 당도 높은 부사 원하시면 3만 원 주셔야 합니다.
3배나 차이가 났다.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달달한 사과였다. 당장 마진부터 계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사람들이 몰려야 됐다.
“달달한 걸로 25㎏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자두는 15㎏ 더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20㎏은 사과즙을 내릴 것이었다. 그리고 5㎏는 자두 15㎏와 섞어서 즙을 내릴 예정이었다. 맛과 향도 괜찮고 영양성분도 나쁠 게 없었다.
단점이라면 단순히 세척뿐만 아니라, 쪼개고 씨를 제거해야 하는 등 손이 많이 가는 편이었다.
그래도 하면 제품 하나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너무 시기만 한 즙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양은 챙기면서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었고.
생각보다 할 일이 많고 바빴다. 하지만 조금도 귀찮거나 성가시지 않았다.
잘 포장되어 진열된 자두즙 상자와 냉장고에서 포장되길 기다리는 포도즙과 토마토즙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9
잠시 가게 문을 잠그고 쪽지를 써 붙여놓았다. 옛날에는 어디서 글씨 쓸 일이 있으면 창피했는데, 이제는 기회만 되면 글씨를 써서 내보이고 싶다.
점심시간이었다. 간단하게 분식을 샀는데, 이기철의 가게에 들러 과일도 몇 가지 샀다. 마트에서는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도 구입했다.
정식 오픈인 내일은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주변 사람들은 가능하면 오늘 가게에 들르라고 했다.
오늘 오후 중에 고모와 작은아빠가 가게에 들를 예정이었다. 대단한 건 아니어도 뭐라도 내놓아야 될 것 같아서 굳이 나갔다 온 것이었다.
그렇게 곧장 가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한 할아버지가 가게 유리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코가 문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님이라는 생각에 걸음을 서둘렀다. 내가 가까워지자 발걸음 소리 때문인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가게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며칠 전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할아버지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더 이상 할아버지의 손에는 지팡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