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3화
4. 소문난 즙쟁이(1)
1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난 뒤 좋은 점은 새로운 능력과 기회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난날들이 전부 헛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심지어 실수하고 후회했던 일들도 의미를 지녔다.
실수하며 보낸 인생이 무의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생보다는 더 큰 가치가 있는 듯하다.
이틀 후면 개업식 겸 가오픈을 하기로 결정한 상태.
가오픈 다음 날 정식으로 오픈이었는데, 큰 고민이 2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사.
현재 내 거주지는 관악구 신림동이었고, 건강원은 광진구 자양동.
차로 이동해도 약 40분이 걸렸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내 입장에서는 1시간이 소요됐다.
왕복 2시간.
마냥 멀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그 시간도 나쁘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사업에 쏟는다면 더 좋은 게 당연했다. 하다못해 쉬면서 재충전을 해도 낫겠지.
오가면서 드는 교통비도 은근히 돈이 나간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엄청 안락한 공간인 것도 아니고, 월세도 꼬박꼬박 나간다. 여기에 각종 공과금까지 합하면 월 50만 원은 그냥 깨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신림동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일단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분간은 가게에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벽 뒤로 마련된 방은 지내기에 충분한 넓이였다. 화장실도 안에 있었고.
새로 공사를 해서 지어서인지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좋은 느낌마저 들었다. 평수가 작으니 짐을 좀 줄이긴 해야 됐지만, 어차피 다 낡은 것들이기도 하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집주인과 통화, 원만한 합의, 다음 주에 곧바로 방 빼기.
갑작스레 이사가 결정됐다. 문제는 내 거주지였다. 가게는 주거지용이 아니라 전입신고가 불가능했으니까.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정득이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정득아, 나랑 같이 살래?”
―갑자기 뭔 헛소리야.
“정득아, 나랑 같이 살자.”
―끊는다.
미친놈이 진짜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 헛소리하면 차단한다.
“야, 야, 나 너네 집 주소로 전입 신고해도 될까?”
―뭐?
나는 현재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진짜로 같이 살자는 건 아니고, 가게는 거주용이 아니라서 전입 신고가 안 되거든. 그래서 너희 집 주소로 전입 신고만 좀 하면 안 될까 해서. 안 되면 말고. 그냥 물어보는 거야.”
만약 오정득이 거절한다면 고모나 작은아빠의 주소지에 전입신고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너무도 쿨하게 대답을 내놨다.
―뭐, 나는 상관은 없는데, 가게에서 살려고?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아야 되지 않겠어? 환경이 중요해.
“잠깐 임시로 여기서 지내려고. 적어도 전세 구할 때까지만. 일단 지금 사는 곳이랑 여기랑 너무 머니까.”
―그래, 그럼. 편한 대로 해.
“고맙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나는 녀석의 고객이기도 하니까. 별의별 서비스를 다 받는 고객.
고민 하나가 해결됐다.
하지만 더 큰 고민이 남아 있었다.
거래처.
이제 곧 오픈을 준비해야 되는데 아직까지 재료 거래할 곳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참 대책도 없지. 아직도 멀었다. 게으름을 떤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계속 다른 것들을 준비하느라 바빴으니까. 하지만 일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할머니가 건강원을 운영하면서 거래하던 곳들이 있을 텐데, 도통 연락처를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옛날 장부를 발견해서 거래처들 전화번호를 뒤졌다.
장부에서 건진 전화번호는 총 29개.
문제는 달랑 이름만 쓰여 있어서 거래처인지, 손님인지 뭔지 분간이 안 됐다.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보는 수밖에.
―번호 바뀌었습니다.
―여보세요? 뭐? 어디? 아, 건강원! 뭐? 바뀌었다고? 나중에 즙 내리러 함 들를게!
―잘못 거셨어요.
―네? 누구요? 아닙니다아.
―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대부분 바뀐 번호였거나 오래전에 주문했던 고객들의 연락처였다.
그러다 유일하게 거래처인 곳과 연결이 됐다. 적지 않은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운 건강원! 지옥자 할머니!
“네, 맞습니다. 제가 손자거든요.”
―아아아, 그때 상주! 내가 알지.
“아, 장례식에 오셨었군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좋은 데 가셨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셨대?
“다름이 아니라, 제가 그 자리 그대로 건강원을 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저도 재료 거래를 좀 하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됐습니다.”
약간의 아쉬움과 미안함이 섞여 있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아, 저희가 더 안 하기로 했어요.
“네?”
―얼마 전에 폐업을 했어요. 저도 이제 나이가 너무 들어서 좀 쉬어야겠더라고요.
“아, 그러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실례는요, 고생하세요.
“아, 네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는 순간 다른 과채류 도매점에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는 애매했다. 괜히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휴대폰으로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일단 움직이자.”
2
나름대로 열심히 검색도 하고 발품을 팔아봤다.
당연히 유통과정이 줄어들수록 마진은 높아진다. 하지만 그런 거래처를 만든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저렴한 값에 구매하는 방법은 경매였다. 하지만 경매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경매사를 고용하고, 따로 배송을 받는 등의 일도 상당히 번거로웠다.
특히 나처럼 소량 구매의 경우 중간 유통을 하나 끼워서 구입하는 게 오히려 저렴할 수도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저렴한 구입법이 또 있긴 했는데, 농장과 직접 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쉽게 알아볼 수도 없었고, 도매가로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량 이상을 주기적으로 구입해야 됐다.
나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 데다가 추출기도 3대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매출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공급량을 결정하여 거래를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는 유통과정이 한두 개 늘어나 비용이 조금 더 발생하더라도 수량 조율이 쉬운 업체를 알아보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그러한 업체를 알아보기 위해 선택한 곳은 바로 옆에 있는 시장이었다.
시장 내에 위치한 점포들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는 청과물 업체가 몇 군데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곳부터 들렀다.
내가 서성대는 게 보이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혈압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로 높은지는 알 수 없었다.
보이는 사람마다 이마에 가지고 있는 질환이나 신체 안 좋은 곳을 적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얼굴만 보면 대충 견적이 나오니까.
“뭐 드릴까?”
“아, 네. 뭐…….”
나는 과일들을 눈으로 훑다가 다시 여자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도매도 하세요?”
“예?”
“여기 나가면 건강원 있던 거 아세요?”
“대충 알 거는 같은데, 거긴 왜요?”
위치는 가까웠지만 딱히 왕래는 없었던 듯했다.
“제가 거기에 건강즙 전문점으로 장사를 하게 됐거든요.”
“아, 네에. 근데요?”
“여기서 도매도 하시나 해서요.”
“그런 거 안 해요.”
“아, 네. 실례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쌀쌀한 반응에 고개를 꾸벅이고는 몸을 돌렸다. 과일 조금이라도 사면서 물어볼 걸 그랬나 싶었지만, 금세 생각이 바뀌었다. 도매 문의도 구매 의사를 밝힌 거였으니까.
걸음을 옮겨 다음 청과물 가게에 들렀다.
“어서 오세요.”
70대 정도 됐을 것 같은 할머니가 나를 맞이했다. 연세에 비해 굉장히 건강한 듯했다. 안 좋은 곳이라고 보이는 건 무릎 정도였는데, 노년의 나이면 관절이 멀쩡하기가 더 힘든 법이니까.
“안녕하세요.”
“필요하신 거 가지고 오시면 돼요.”
“저,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뭐요?”
“혹시 여기 채소랑 과일들은 어디서 가져오시는 거예요?”
“우리 거 다 깨끗한 거예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농약도 거의 안 써요. 몇 개 벌레 잘 생기는 거만 어쩔 수 없이 쓰는 거지.”
할머니는 내가 의심한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내저으며 물어보지도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놨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아니요. 그런 거 때문이 아니고요. 제가 저쪽 시장 입구 쪽에 있는 건강원을 하게 됐거든요?”
“거기 새로 지은 곳? 원래 할머니가 하던 데인데, 총각이 산 거예요?”
“저희 할머니셨어요.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제가 새로 하게 됐거든요.”
“아아, 그랬구나아. 아무튼, 그런데 왜요?”
“제가 채소랑 과일을 좀 많이 살 생각인데요, 혹시 도매로도 하시나 해서요.”
“난 그런 거 잘 모르는데. 그냥 여기 정해진 가격으로 파는 것밖에 몰라. 잠시만요. 우리 아들이랑 얘기해봐야 돼.”
할머니가 곧바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전화를 걸었다.
“응, 기철아. 여기 무슨 건강원 총각이 와서 도매를 물어보네? 응, 응. 어여 좀 와봐. 그래애.”
전화를 끊은 할머니는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요오.”
“예, 예.”
그렇게 나는 어색하게 서서 괜히 이리저리 살피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거 좋아요. 다 엄청 싱싱하고. 아까 말한 것도 거짓말 아니에요. 농약 치는 것도 거의 없고.”
“네, 그럼요. 믿어요.”
그렇게 서 있는데, 새까만 피부에 모자를 쓴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이분?”
그는 나를 살짝 쳐다보고는 목소리를 냈다. 할머니가 그렇다고 하자 남자는 곧장 나와 눈을 마주쳤다.
“도매를 알아보신다고요?”
“네, 네.”
“얼마나 사시게요?”
“아, 제가 저쪽 시장 입구에 건강즙 전문점을 할 예정이거든요. 한 번에 엄청난 대량을 사기도 힘들고, 뭐를 주기적으로 얼마씩 사겠다고 약속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꾸준하게 거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서로 조건이 맞아야 되겠지만요.”
남자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다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이기철입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곧바로 손을 맞잡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반갑습니다. 강건희입니다.”
“잘 찾아오셨네. 듣고 오셨나?”
“아니요, 일단 와서 여쭤봤습니다.”
“그래요? 저희 물건들은 전부 직접 재배한 거예요.”
“직접이요?”
“정확히는 저희 작은아버지 농장에서 가져오는 거죠. 저희 가게 말고도 몇 군데 납품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직영점인 여기가 제일 깨끗하고 싱싱하겠죠? 값도 좀 더 싸고요.”
확실히 이미 소매가가 아닌 도매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싸고, 전부 상태도 좋아 보였다.
이기철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 특별히 원하시는 게 있어요?”
“제철에 맞는 것들로 할 생각입니다.”
“다 즙으로 파시는 거죠?”
“그렇죠.”
“언제부터 필요하신데요?”
“모레부터요.”
“그래요?”
이기철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씩 웃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들여오는 물건들 보시고 정하시죠. 왜냐면 어차피 즙으로 내실 거니까 생긴 건 상관없잖아요? 못생겨도 맛이랑 성분은 똑같으니까.”
“아, 그렇죠, 그렇죠. 주스용 과일들,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럼 제가 좀 상태별로 분류되는 것들을 가져올게요. 그리고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격도 상태에 따라 다르니까요.”
“그럼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예, 사장님 명함 하나 주십시오.”
“제가 아직 명함은 없어서요.”
“그럼 적어주세요.”
그렇게 연락처를 적어주고 이기철의 명함을 건네받은 뒤 몸을 돌렸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 듯했다.
판매되고 있는 것들로 봤을 때 물건의 질은 걱정되지 않았다.
만약 단가가 너무 안 맞는다면, 그때는 다른 거래처를 찾아야 되겠지만.
정 급하면 일단 마진율이 확 떨어지더라도 일단 소매로 물건을 구입해서 장사를 할 수 있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재미있었다.
하나하나 과정을 밟아가는 게 힘들지만 즐거웠다.
온전히 내 것인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게 이렇게나 짜릿할 줄이야.
이런 맛에 다들 사업을 하는 거겠지.
3
물건을 받기 전에는 가게에서 할 일이 없었기에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기철에게 문자메시지 하나가 왔다.
[물건 아침 6시쯤 들어옵니다. 6시 30분쯤 들르세요.]
현재 집에서 여기까지 아침 일찍 오려면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마땅한 이불 한 장 없지만 오늘은 가게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약간의 공복감에 뭐라도 시켜 먹을까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옆이 시장이었다. 널린 게 음식점들인데 가서 먹으면 되지.
그렇게 가게를 나서려는데 노인 여섯 명이 몰려오고 있었다.
선두로 오는 할아버지는 낯이 익었다.
며칠 전에 내가 급체한 걸 치료해준 할아버지였다.
“아, 진짜 기가 막힌다니까!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듯 목소리를 높이다가 나를 보고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