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10화
3. 예비 사장(2)
딱히 계약서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내가 슬며시 시선을 옮기자 오정득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녀석이 부동산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런 쪽으로 나보다 훨씬 밝았기에 의지가 됐다.
할머니가 같은 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건강원을 했으니 크게 살펴볼 것도 없었다. 계약서 내용도 명의와 금액이 바뀌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했고.
나는 첫 번째 공란을 채워가기 시작했는데, 정석용이 입을 열었다.
“와따메, 글씨 겁나게 잘 쓰네!”
“예? 무슨 말씀…… 엇!”
그야말로 명필이었다. 한석봉 부럽지 않은 필체였다.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공란 몇 개를 더 빠르게 채워나갔다. 마치 컴퓨터로 프린트를 한 듯 완벽했다.
“와…… 너 글씨 이렇게 잘 썼었나?”
오정득도 믿기 힘든 듯이 쳐다봤다.
제일 믿기 힘든 건 나였다.
나는 원래 지독한 악필이었다. 가끔은 내가 써놓고도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너무 신기해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모든 공란을 채우고 서명을 마쳤다. 마치 나만의 폰트로 찍어낸 듯 깔끔하고 완벽한 글씨였다.
“와…… 자네 이걸로 돈 벌어도 되겠어.”
정석용은 눈을 부릅뜬 채 따봉을 세 번이나 날렸다.
오정득도 혀를 내둘렀다.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네가 글씨 제일 잘 쓴다. 따로 뭐 연습이라도 한 거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기다리던 인테리어 업자도 다가와 글씨만 슬쩍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간판은 사장님 글씨로 직접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요? 크게 쓰시는 것도 되면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냥 글씨 좀 잘 쓰는 거로 뭘…….”
입꼬리가 자꾸만 실룩실룩 올라갔다. 이상하게 기분이 째졌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칭찬이란 걸 언제 마지막으로 받아봤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회사에 다니면서 뭐 빠지게 일해도 사람들은 전부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수고했어’ ‘수고 많았어’ 같은 의례적인 말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지 않았나.
내가 갑자기 이렇게 글씨를 잘 쓸 수 있을 이유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기적 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기에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점심에도 하는 중이었다.
“자, 이제 그럼 인테리어 얘기 좀 해볼까요?”
인테리어 업자는 몸이 근질거린다는 듯이 양손을 비비적거리며 씩 웃었다.
임대차 계약을 마쳤으니 인테리어 차례였다. 여기서의 조율이 중요했다. 내가 인테리어를 새로 하지 않아도 원래 정석용이 내부공사를 할 예정이었다.
즉, 그걸 제외하고 추가되는 비용만 내가 부담을 하도록 합의가 필요했다.
“일단 그 얘기부터 해야죠. 기계를 몇 대 들인다고 하셨죠?”
인테리어 업자가 물었다.
“총 여섯 대 들어올 겁니다. 크기는 생각보다 별로 안 커서 이쪽 벽에 쭉 세우면 될 거 같거든요?”
내가 말을 하자마자 인테리어 업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견적 나오네요.”
그는 벽 쪽으로 손을 이리저리 뻗어가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이쪽을 쭉 빼면 되겠네요. 간단해요. 원래도 이쪽으로는 빠지는 게 있고.”
“아, 그렇습니까? 나중에 기계가 늘어날 수도 있고, 다른 것들도 써야 되는데 그것도 감안해 주시는 거죠?”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당연히 저전력 제품들은 멀티탭 활용하시고요. 그리고 저기 안쪽에 따로 공간 내는 곳 있죠? 그쪽으로도 많이 뺄 거라서 불편할 일은 없으실 거예요. 만약에라도 추가 배선작업이 필요하다고 해도 비교적 간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아, 그리고 배선 작업만큼 중요한 게 더 있는데요.”
“예, 말씀하세요.”
“같은 업종이라 눈에 딱 보이실 텐데요, 수도랑 배수가 중요하거든요. 특히 기계들 자리 쪽으로는 바닥도 타일로 해야 될 거 같고요.”
어제 JM 테크 대표인 박종만과 만나서 이야기를 한 게 많은 도움이 됐다. 겉핥기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가 핵심을 탁탁 짚어줘서 훨씬 수월했다.
인테리어 업자는 이해했다는 듯이 살펴보다가 말했다.
“네네, 그 부분은 이따가 같이 자재만 고르시면 되겠네요. 아니, 다른 부분들이 사실 대부분 그래요. 기본적으로 틀이 잡혀 있어서 이쪽으로는 건드릴 게 많이 없네요. 오히려 저기 안쪽으로 할 일이 많지.”
그는 안쪽에 새로 트는 공간을 가리켰다.
나는 가게의 구조를 완전히 바꿀 생각이었다. 많이 바뀔 예정이긴 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틀은 옛날 그대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할머니도 이곳에서 수십 년 장사를 하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치를 한 거였다. 역시 경험치는 무시할 수 없다.
사실 내가 정말 원하는 구조는 손님을 받는 공간과 주방 공간이 분리된 거였는데, 협소한 이곳에서는 불가능했다. 언젠가 그런 가게를 얻을 날도 오겠지.
“그리고 또 뭐 말씀하실 거 있나요?”
“아, 네. 이쪽 벽만 색을 다르게 하고 싶습니다. 투톤으로요. 그리고 여기는 이렇게…….”
나름대로 머릿속에 있던 것들을 전부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정석용은 딱히 반대하거나 하지 않았다. 원래 건강원이었으니 그럴 일도 없었고.
“마지막으로요.”
나는 검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에어컨이요. 어디에 설치하고 배관을 어디로 빼는 게 나을까요? 아무래도 벽걸이로 하지 싶은데.”
그러자 정석용이 출입구에서 먼 쪽을 가리켰다.
“이쪽에 달아야 돼.”
그는 안쪽에 새롭게 만드는 공간을 가리켰다.
“여기가 방이 될 거란 말이야. 창문도 틀 거고. 가벽이니까 여기 뚫어서 창문으로 배관 빼면 돼.”
내가 조금 당황하며 물었다.
“공간을 튼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지. 창고처럼 돼 있던 걸 같이 쓰는 거니까.”
“근데 방이요? 방금 가벽을 세우신다고…….”
“그래, 문도 달고. 작게 화장실도 설치할 거야. 씻을 수도 있게.”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바삐 머리를 굴렸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것 트이는 공간에 카운터를 두고 옆으로 선반을 세워 상품을 진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석용의 의견도 나쁘지 않았다. 총 3.5평 정도 되는 공간이었는데, 쉴 공간이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이쪽의 공사비는 정석용이 전부 내는 거였고.
“왜? 싫은가?”
정석용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 다른 구조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자네도 여기서 좀 쉬고 그러면 좋잖아. 그리고 종일 가게 있다 보면 식사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안에서 하는 게 낫지.”
“네, 네.”
인테리어 업자가 책자들을 꺼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 그럼 자재들을 골라볼까요?”
“아, 그전에 이야기를 좀 다시 해야겠습니다.”
“예?”
“저는 안쪽 공간이 방이 될 줄은 몰랐거든요. 이렇게 되면 구조를 싹 다 바꿔야 해서요.”
“예에?”
새로 떠올린 구조를 포함하여 또 한참 얘기를 하고 나서야 전체적인 견적 이야기를 거의 마칠 수 있었다.
결국 할머니가 운영했던 건강원과는 꽤 다른 모양새로 변했다. 나름대로 손님을 받는 곳과 공간도 분리하게 됐다.
스스로의 아이디어에 제법 만족했다. 오정득도 그게 더 나은 것 같다며 힘을 실어줬고.
13.5평에 총 견적 1,850만 원.
이제 여기서 내가 얼마를 내느냐가 중요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원래 정 사장님이 생각하시던 공사비용이 얼마인가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부분이 더해지면서 추가로 발생하는 공사비는 얼마죠? 정확히 계산 좀 해주시겠습니까?”
정석용은 조금 당황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인테리어 업자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다 이내 대답을 하며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네. 바로 계산해드리겠습니다.”
그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동안 내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원래 제가 안 들어와도 내부공사는 하시는 거였잖아요? 그에 대한 부분이야 보증금 500만 원 올리고, 월세도 5만 원 더 드리는 거로 계산이 되는 거고요. 맞죠?”
정석용은 조금 버퍼링이 걸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맞지.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은 공사비를 아낄 요량이 있었던 걸로 보였다. 내가 원천봉쇄를 해버렸지만.
그래도 임대인인데 조금이라도 껄끄러워서 좋을 건 없었다. 나는 인테리어 업자가 하나하나 계산을 하는 동안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잘 지키고 계세요?”
정석용은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허허 웃었다.
“어어, 아주 좋더라고. 술 한 방울 안 먹는데 잠도 아주 푹 잔다니까?”
“그전에 술을 드시고 주무시는 건 잠이 잘 들기만 한 거지, 잘 주무신 건 아닐 거예요. 오히려 숙면에는 방해가 됐을 겁니다.”
“그런가 봐. 하하하. 이번에는 뭐 또 바꿔야 되는 거 없나?”
“지금은 그때 말씀드린 것들을 계속 지켜서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뒤에 한 번 들르세요. 그때 또 봐 드릴게요.”
“그래, 그래.”
계산을 마친 인테리어 업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여기 사장님이 뭘 좀 잘 보시나 봐요?”
그러자 정석용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 장난 아니지. 완전 도사야, 도사.”
인테리어 업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점을 보시는 거예요?”
“아니요, 아니요. 그냥 어디 안 좋으신 곳 있으면, 거기에 좋은 음식 좀 알려드리고 그런 거예요. 민간요법 같은 거.”
“아, 그래요?”
그는 조금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혹시 정력에 좋은 거 추천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요즘 바다장어라도 열심히 먹고는 있는데.”
나는 인테리어 업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당장 보이는 거에서는 크게 건강에 이상이 있지 않았다. 조금 관리가 필요한 부분으로는 눈과 위 그리고 혈액순환.
“그보다는 일단 당근을 좀 드셔야 할 것 같아요.”
“당근이요?”
“예. 당근이 눈에도 좋고, 위 건강 개선에도 도움을 주고, 혈액순환에도 도움을 줍니다. 항암 효과도 있는 데다가 건강에도 도움을 주고요. 볶아서 드시는데, 들기름이 좋습니다. 단, 들기름이 잘 타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볶으시다가 중불 정도에서 들기름을 부어 조금 더 볶은 뒤 드세요. 그게 좋습니다.”
“그냥 소주 마시면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안 됩니까?”
“당근은 볶아서 드시는 게 훨씬 좋습니다. 비타민 A가 지용성 비타민인데, 기름과 결합해야 체내로 흡수됩니다. 그리고 들기름에는 오메가3가 풍부하니 또 필수지방산을 섭취하실 수 있어서 좋고요. 오메가3 효능도 다양한데, 특히 심혈관에 좋습니다. 혈액순환이 좋아지면? 아래로도 피가 잘 돌겠죠?”
인테리어 업자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다 목소리를 냈다.
“이야아, 알겠습니다! 완전 척척박사시네! 척! 척! 박! 사! 이야아!”
오정득도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는 눈치였다. 정석용은 마치 자기가 처방이라도 한 듯 뻐기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부담해야 될 비용은 어떻게 되죠?”
“아, 일단 새롭게 추가되는 비용만 따지면 678만 원 정도 나오거든요? 그런데 사실 이게 좀 애매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바닥 같은 경우 정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거보다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자재들이 훨씬 비싸요. 시공비가 더 들어가는 부분들도 있고요. 차액만 딱 떼기도 애매한 게 인건비는 원래 들어가는 건데, 그 차이만 넣기도 그렇고…….”
나는 정석용을 힐끗 본 뒤 인테리어 업자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는 만큼 너무 인간미 없게 하나하나 자르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정석용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휴, 내가 공짜로 진료를 보는데 여기 공사비는 좀 더 내야지. 게다가 내 건물인데, 내가 책임을 져야 되지 않겠나?”
그도 마음을 더 바꿨는지 아까보다 훨씬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결국 내가 부담하기로 한 비용은 총 800만 원이었는데, 대신 에어컨을 더 좋은 걸 달고 안쪽의 방 벽지와 바닥도 전부 바꾸는 등 세부적인 걸 전부 내 마음대로 했다.
결국 나중에 내가 추가로 들일 비용을 더 내는 셈이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인테리어 업자가 말했다.
“사장님, 간판 고르셔야죠.”
“아…….”
내가 살짝 놀라는 순간, 오정득이 크게 탄식을 내뱉었다. 녀석이 계속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먼저 가도 됐는데, 내가 호구처럼 당하지는 않을지 계속 자리를 지킨 듯했다.
간판은 또 종류가 뭐 이렇게 많고, 가격대도 다양한지.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드는 데다가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걸로 110만 원에 맞췄다.
모든 계약을 마치고 난 뒤에는 악수로 마무리를 했다.
뭔가 대단히 커다란 숙제를 끝낸 기분인 것 같았다.
이제야 시작지점에 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4
“지루했지? 미안하다.”
내가 멋쩍게 웃자 오정득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가 기다린 건데 뭐. 아무튼 이제 금방 시작이네. 정말 축하한다.”
“축하는 잘 되고 나서 축하해야지.”
“너 그렇게 사업 시작하는 거 보니까 나도 회사 그만두고 사무실 차리고 싶네.”
“그것도 괜찮지 않아?”
오정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 잘 모르겠어. 이제야 아래 후배들도 좀 생기고 나아졌는데, 나가면 손해는 아닌지, 지금 회사에 있으면 안정적으로 연봉 들어오는데 사무실 내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녀석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다시 말했다.
“아마 조금은 더 다닐 거야. 나중에는 모르지만. 아무튼 좋다. 사업자 등록 같은 절차들은 맡겨둬. 금방 싹 처리해 줄게.”
그러고는 필요한 자료들 사본을 훑어보고는 싹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뭐야? 가려고?”
내가 묻자 오정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커피 다 마셨잖아.”
“내가 밥이라도 살게. 오늘 계속 옆에서 고생했는데. 너 바쁜데 붙잡아놓고 미안해서 어떻게 그냥 보내냐.”
“다음에 사. 네 거랑 일이나 얼른 끝내게. 그리고 너도 아직 해야 될 절차들 남았잖아. 보건증도 떼야 하고.”
“아, 맞다. 그랬지.”
오정득은 삐까번쩍한 손목시계를 슥 보고는 말했다.
“아직 다섯 시도 안 됐네. 바로 보건소 가서 해. 그거 나오는데 며칠 걸려.”
“알았어.”
“연락하자.”
“그래, 고생 좀 해줘.”
“고생은 무슨. 밥이나 맛있는 거 사라.”
“돈도 낼 거야.”
“그 돈도 밥값에 보태. 비싼 거 먹을라니까.”
그렇게 카페를 빠져나갔다.
손가방을 든 오정득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봤다. 친구지만 여러 가지로 본받을 점이 많은 녀석이다. 고마운 놈. 이 빚은 꼭 갚을게.
5
보건증을 발급받기 위해 보건소에 들렀다. X레이를 찍은 뒤에는 병리검사실이라는 곳으로 가야 했다. 피 검사라도 하나 했는데,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면봉을 항문에 넣었다 빼야 했다.
이런 씨…….
장티푸스와 전염성 피부질환을 정확히 검사하기 위해서란다.
왠지 모르게 찝찝한 검사를 마치고 보건소를 나왔다.
삼복더위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곧 오후 6시인데도 더위는 물러갈 줄 몰랐다.
“냉면이나 한 그릇 때릴까…….”
박봉에 시달리며 살 때는 먹는 것에 돈을 쓰는 게 참 아까웠다. 매번 무언가 먹고 싶다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주머니에 돈 좀 생겼다고 바로 눈이 돌아간다.
아끼자. 지금은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지.
필요에 의해 쓰는 것은, 받은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할 때는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그 누구보다 엄격해지고자 했다.
그래도 뭘 먹기는 먹어야 되는데.
스스로를 진단했다. 무언가 먹어야 하는 음식은 없는지 떠올렸다. 어디에 뭐가 좋은지는 분명히 알았지만, 딱히 치료해야 될 부분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을 가졌다.
배도 고프고 탄수화물을 원하며 더위를 타고 있으니 냉면이 처방으로 나오면 좋을 텐데.
“미친…….”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틀어 냉면집으로 향했다. 궁상도 적당히 떨어야지. 이거 한 그릇 먹는다고 어디 큰일 나나? 무슨 코스 요리를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냉면 한 그릇인데.
이 정도는 나한테 주는 약소한 선물이었다. 이거 먹고 더 힘내서 일하자.
“여기 물냉면 곱빼기로 주세요.”
바로 주문을 하고 살짝 추울 정도로 느껴지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뜨끈한 육수를 먹는데, 옆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자꾸 가슴을 두드렸다.
“어이구, 어구구…….”
그 모습을 본 나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급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