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76화 (완결) (176/176)

외전_미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3)

———— 말로만 듣던 루치오 페카툼은 생각보다 훨씬 안쓰러운 꼴을 하고 있었다.

용병 출신으로 풍채가 좋은 성직자로 유명했던 그는 도망자 생활이 오래된 탓인지 뼛가죽만 남은 몸을 자랑했으며.

“걱정마십시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웬만한 건 다 알 수 있으니.”

···칼 오프러스 대공에게 눈이 뽑히는 고문을 당해 장님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의 텅 빈 안구를 보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요?”

루치오는 자신의 지난날을 간략하게 늘어놓았다.

금지된 실험을 하다 교황청에서 파문당한 후 우연한 계기로 칼 오프러스 대공에게 중용되었고.

그에게 충성을 바쳐가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중요한 순간, 대공에게 토사구팽당했다는 것이다.

“대공은 이제 더 빼먹을 것이 없는 나와, 교황청 사이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지요.”

교황청은 공국이 교단에 충성하다는 증거를 보이라며 ‘파문당한 추기경’의 신병을 요구했고.

대공은 지난날의 정이라며 루치오를 교황청에 보내는 대신···.

“저의 두 눈알만 뽑아서 보냈지 뭡니까.”

“···.”

“그분도 참 악취미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루치오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결국 전 그분에게 한 번 쓰고 버리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우만 경,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다지.”

루치오는 무대 전면에서 활약하지 않은 만큼 그 악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나는 그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테면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모아다가 끔찍한 생체 실험을 했다던가.’

지식과 연구의 열정을 채우고자 사람의 목숨을 해치기도 서슴지 않았던 자다.

그런 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으나···.

‘적의 적은 나의 우군이란 말이 있듯.’

그때의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이능자 육성이라고? ···교단이 아니라 일개 개인이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오?”

내 물음에 루치오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거. 더 중요한 사실부터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더 중요한 사실이라니?”

“어찌 보면 그거야말로 오늘의 용건이기도 하겠군요.”

진정으로 충격적인 폭로가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저 루치오 페카툼은 멸문당한 마법사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들어본 적은 있는 이야기였다.

이백 년 전에 시행된 마녀 사냥, 그때 죽어나간 수많은 마법사들, 역사 속에서 지워진 비극···.

‘그러나 어디까지나 흥미 본위의 야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설마 정말이었단 말인가.

루치오의 증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뿐이 아닙니다. 교단에서 신의 기적이라 주장하는 ‘이능’은 기실 ‘마법’에 다른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지요.”

“···!”

극심한 고통의 흔적인지 머리가 벌써 새하얗게 새어버린 루치오.

그는 ‘이능이 마법임을 폭로하고’ ‘마녀 사냥의 역사를 널리 알리며’ ‘마법사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이 제 목적이라면, 우만 경의 목적은 에스닐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겠지요.”

아니. 더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롯이 죽어야 할 이유를 없애는 것에 가깝겠지만.

루치오는 오늘 점심 메뉴를 이야기하듯 여상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되돌리는 주술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

자신이 ‘마법사’ 가문의 마지막 후예라 주장하는 그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또한 존재하며.

이는 혹독한 대가가 뒤따르는 금지된 흑마법이라고 덧붙였으나.

“주술을 시행한 술사, 그리고 주술의 ‘대가’를 지불하는 계약자는 ‘되돌아간 시간대’에 직접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과거의 자신이 또다시 같은 과오를 반복하는 결말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해가 되었다.

이미 벌어진 일들을 알지 못하는 ‘과거의 나’라면, 당연한 듯 팰러스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쳐가며 충성할 테니까.

그렇게 역사의 비극은 또다시 반복될 터이고 말이다.

“그렇담 어떻게 해야하지?”

루치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아주 오래전 사장된 주술 중 ‘용사 소환’이라는 것이 있지요.”

고대 전설에 ‘용사’라는 존재가 있었다 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해 사악한 위정자와 맞서 싸우고, 멸망 직전의 세계를 구원하는 자.

“나는 이 두 가지 주술을 복합하여 시전할 생각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당신과 나, 두 사람의 목숨이 필요한데··· 그 정도 각오는 되었겠지요?”

흑마법은 누군가의 목숨을 대가로 요구했으나.

롯이 떠난 후 삶의 의미가 사라진 내게 생명이란 값싼 대가나 다름없었다.

“물론이오.”

그렇게 우리는 금기된 주술에 손을 대는 데 합의했다.

———— 리암 공, 여기까지 읽고 있는 것 맞나?

그래. 자네가 내 편지를 아직 던져버리지 않은 게 맞다면 분명 ‘이능이 마법이라니, 그리고 뭐, 시간을 되돌려? 이 친구가 드디어 맛이 단단히 갔구만!’ 따위의 말을 하고 있겠지.

아마 루치오가 등장한 시점부터 자네 표정이 꽤 볼 만해졌다는 데 내 깃펜을 걸겠네.

하지만 맹세하건대 여기 적힌 모든 내용은 사실이네.

루치오는 내 눈앞에서 마법 의식을 행했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수많은 평행세계와 소통하게 해주는 통로인’ 마도서 앞에 제물을 바치고 뭐라 뭐라 주문을 외우더군.

이쯤 되면 자네가 ‘혹시 그 미치광이한테 사기당한 게 아닌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만큼은 아니라네.

왜냐면 그는 평행세계와의 통로를 여는 데 성공했고.

나는 그 용사와 대화를 주고받기에 이르렀거든!

———— 루치오가 주술을 행한 후, 우리는 은신처를 공유해가며 함께 움직였다.

‘마도서는 평행세계와 소통하는 통로입니다.’

‘여기에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적으면 그에 응답해주는 평행세계의 누군가를 용사로 소환할 수 있는데.’

‘그를 지금 이 시점이 아닌, 시간을 되돌린 과거 시점으로 소환하는 복합적인 주술식이 되는 셈이지요.’

그가 주술을 걸어놓은 마도서에 나는 첫 문장을 적었다.

『테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팰러스 레핀은, 정통의 핏줄, 타고난 총명함과 발군의 검술 실력, 좌중을 압도하는 매력을 갖춘 완벽한 청년이었다···.』

깃펜에 잉크를 묻혀 글자를 적으면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흡사 종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지난 일들을 묵묵히 적어나갔다.

누군가 이 부조리하고 끔찍한 참상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기다리며.

그러한 시간이 몇 달이 지나갔을까.

“아직도 반응이 없습니까?”

루치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도서 옆에는 촉이 다 닳아버린 깃펜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반응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이따끔 평행세계의 것으로 보이는 반응이 종이 위에 나타나고는 했으나.

-아 이런 싸패 주인공 이제는 지겹다 지겨워

-개씹노잼이네 이런 건 누렁이도 줘도 안 먹음

-작가님은 상하차하세요 저는 하차합니다

-이런 핵고구마를 묵묵히 처먹는 내가 바로 참된 누렁이

“누렁이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처음 듣는 말이군요.”

누렁이는 무엇이며 싸패는 무엇인가.

상하차와 하차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각운을 살린 언어 유희일까.

그 세계에서 쓰이는 표현들인지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이들이 용사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후로도 한동안 포기하지 않았다.

팰러스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적고, 왕위를 얻기 위한 온갖 음모와 계략을 낱낱이 밝히며.

그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적어내려갔으나···.

“···이제 그 시점인가.”

팰러스가 의붓동생 세자르를 제 손으로 죽인 시점.

밀정을 통해 전해들은 세자르의 죽음을 내 손으로 생생히 묘사하고 나자, 어쩐지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형을 향한 맹목적 믿음으로 빛나던 세자르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더는, 더는 못 쓰겠군.”

바퀴가 망가진 전차처럼 역사가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점부터가 아닐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백지 위에 글자들이 잔뜩 생겨났다.

-안녕하세요, —-님. 저는 ‘이면세계의 역사’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이자 당신의 지지자입니다. 오늘 글을 보고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장문의 글에서는 조롱이나 비아냥거림이 아닌,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믿어지지 않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펜을 들어 응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독자님. 진심 어린 의견 감사합니다. 저도 사실 고민이···.

우리는 마도서 위에서 필담을 이어나갔다.

평행세계의 독자는 생각지도 못한 의견을 잔뜩 내놓았다.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주인공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는 거죠. 상태창은 어떠세요?

-상태창···은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게 중요해요.

-그렇군요.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 나와야···.

그의 의견은 구구절절 옳았고 명확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바꾸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바꿔야 할지···.

-저 같은 독자처럼, 앞일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역사 속에 들어가면 어떨까요?

그가 마지막으로 내놓은 의견에 눈이 번뜩 커졌다.

-독자님이 우리 세계에 오시겠다고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이 사람이야말로 그토록 찾아헤매던 적임자가 아닌가.

그날 저녁.

나는 은신처로 돌아온 루치오에게 ‘용사’의 적임자를 찾았다고 말했다.

“남은 술식을 완성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몸에 그의 영혼을 깃들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루치오의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세자르.”

평생에 걸쳐 ‘가문의 수치’라 불렸던 레핀 가문의 사생아, 팰러스의 단 하나뿐인 의붓동생 세자르.

남들은 다 그를 우둔하고 어리석다고만 생각했으나.

“세자르 이상으로 의지가 강한 이를 본 적 없으니까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정신.

마르고 빈약한 체구를 커버할 만큼의 뛰어난 신체 능력과 운동 신경.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것이 바로 세자르 레핀이니까.

“무엇보다 그는 왕위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인물입니다.”

레핀 공작의 눈에 들어 적자로 인정받기만 한다면, 팰러스의 다음 순위가 될 계승권자가 된다.

판을 흔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터.

‘거기에 용사의 의지가 깃들어진다면.’

이 에스닐의 역사를 충분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좋습니다.”

내가 내린 결론에 루치오 또한 동의했다.

“술식의 목표가 달성되는 즉시, 이 주술은 우리 둘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동시에 ‘세자르’의 영혼과 ‘용사’의 영혼을 하나로 만들어줄 겁니다.”

그렇게 용사는, 우리 세계에 소환되었다.

———— 리암 공, 자네라면 분명 이렇게 묻겠지.

‘아니, 흑마술의 대가가 목숨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자네가 살아서 이 편지를 쓴단 말인가?’

그러한 지적은 합당하니, 나를 과대망상증 환자로 여기는 것은 조금 미뤄두고 일단 내 설명을 들어보게.

술식은 완성되었지만, 흑마법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좀 더 후일이라네.

마법의 계약자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해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인 셈이지.

여기서 나의 목표란 에스닐의 역사를 바꾸고 롯을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열네 살적 세자르의 몸에 빙의한 용사에게 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네.

그에게 닥쳐올 위기를 사전에 예고해주었고.

때로는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귀뜸해주기도 했으며.

마도서의 힘을 빌려 온갖 귀한 마도구를 보내는 등 그의 수호천사를 자처했지.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용사 자신의 의지였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이 과실을 맺은 듯하네.

어쨌거나.

리암 공, 이번 생에 그대를 알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웠네.

내가 평생에 걸쳐 집필한 <이면세계의 역사서>의 진본을 검은손 길드를 통해 보낼 테니, 향후 처분은 그대의 손에 맡기겠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꼭 작별 인사처럼 들린다면 그것이 맞네.

나는 내 목표를 이루었고.

이제 주술의 술식이 나의 목숨을 거둬갈 것이니.

——리암 공에게, 존경을 담아.

그렇게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한 순간.

얄팍한 벽 너머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 주변을 포위하라! ‘어둠의 사관’이 이 안에 있다!”

어쩜 이렇게 시기적절할까.

우만은 편지를 접어 전서구의 다리에 묶고는 창문을 열었다.

“저기다! 저기 우만 드 빈터가···.”

푸드득.

열린 창문 사이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저 아래서 병사들이 뒤늦게 화살을 쏘아댔지만, 비둘기는 어느새 파란 하늘의 일부가 된 뒤였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우만은 책상 위에 펼쳐진 마도서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 위에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드디어.

시간의 수레바퀴가 본래대로 되돌아갔다.』

우만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이 저에게서 떠나가는 감각이 찾아왔고.

‘드디어···.’

두 눈을 감자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평화롭고도 고요한 죽음이 찾아왔다.

그렇게 의자에 앉은 채 우만이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쾅!

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나타났다.

“어둠의 사관을 체포해라!”

십여 명의 병사가 우만을 둘러쌌다.

잠시 긴장 상태의 대치가 이어지는가 했으나.

“우만 드 빈터, 널 체포한다!”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인 그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옆에 있던 병사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가 그를 흔들어보았고.

“흐억!”

우만의 몸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은 것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주, 죽었는데요···.”

“자결했나 보군.”

생포했으면 좋았을 터이지만, 아쉬워해봤자 소용없는 일.

우두머리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놈이 남긴 흔적이라면 뭐 하나 빼놓지 마라! 손수 쓴 서류는 전부 다 압수해!”

그때.

병사 하나가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발견했다.

“여기 뭐라고 적혀 있는데.”

그 문장을 읽으려던 순간.

···책 주변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

그를 비롯해 주변 병사들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떠올랐을 때.

일렁이던 빛이 점차 커져 그들의 몸을 감쌌고.

파아아-!

이질적인 충격음과 함께 빛이 터져 나갔으며!

병사들도, 책상 주변에 잔뜩 펼쳐져 있던 종이더미도, 그들을 둘러싼 허름한 은신처도-

그 모든 것이 먼지처럼 스러져갔다.

* * *

누군가 몸을 흔드는 감각에 우만은 두 눈을 떴다.

“일어나, 우만.”

열린 눈꺼풀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검은 머리에 단정한 생김새가 눈에 띄는 청년.

“···세자르.”

우만은 잠 기운을 몰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책을 보다가 책상 앞에서 잠들다니, 도무지 자신답지 않은 일이다.

제 앞에 펼쳐진 낯선 책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아주 긴 꿈을 꾼 기분이야. 그것도 아주 이상한···.”

“웬일로 꿈도 꾸나 봐?”

세자르의 말에 우만이 혀를 찼다.

“뭐, 난 꿈도 안 꿀 것 같나?”

“응. 꿈이 다 뭐야 찌르면 피도 안 나올 것 같은데.”

“···하.”

청년의 너스레에 우만은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방금 꾼 기나긴 꿈의 잔상들이 여전히 머릿속을 부유하는 가운데, 어느 문장 하나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도구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늘 결심했으니···.’

그 때문일까.

우만은 충동적으로 세자르에게 묻고 말았다.

“세자르. 네게 나는 그래도 꽤 쓸 만한 도구이지, 안 그래?”

세자르의 눈이 순간 커졌지만.

청년은 이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도구는 무슨. 잔소리꾼도 이런 잔소리꾼이 없는데.”

“···농담하지 말고.”

“너야말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세자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구니 뭐니, 그렇게 자기비하적인 말 한 마디만 더 해봐.”

“그럼 뭐, 때리기라도 하게?”

“그럼. ···내가 아니라 롯한테 맞을 줄 알아.”

“롯?”

우만의 눈이 커지자 세자르가 즐거워하며 말을 받았다.

“지금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니.”

“롯이 왜···.”

잘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롯’의 이름을 들으니 어쩐지 아주 오랜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물씬 피어올랐다.

꿈을 꾸기 전 그녀를 향해 느꼈던 설익은 두근거림과는 다른 감정이.

“롯이 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제발 눈치 좀.”

세자르가 하, 한숨을 내쉬더니 우만의 어깨를 툭 쳤다.

“넌 다른 데는 날카로우면서 이런 데는 눈치가 더럽게 없냐.”

지금 내가 저 세자르에게 눈치 없다는 소리가 들은 건가 싶기는 했지만.

우만은 ‘롯도 어쩌다 이런 놈이랑 엮여서’라며 툴툴거리는 세자르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우만이 문을 열고 나서자, 그의 등 뒤로 세자르가 외쳤다.

“롯 보면 오늘 진짜 근사하다고 칭찬하는 거 잊지 말고!”

“시끄러.”

우만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걸어내려가는 제 발소리가 귓전에 유쾌하게 울렸다.

저 아래서 롯이 기다란 머리칼을 휘날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만 선배.”

우만은 홀린 듯 그녀 앞에 가 섰다. 심장이 기대감으로 쿵쿵거렸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전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롯을 보자, 칭찬해주는 걸 잊지 말라던 세자르의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평생 해본 적 없는 말이 우만의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아름답···네.”

“네?”

롯이 놀란 듯 되물었지만, 우만은 못 들은 척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벌써 저만치 멀어진 가운데, 롯은 살풋 웃으며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늘의 이 만남이야말로,

아주 오래된 기다림이 드디어 실현된 순간이라는 사실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