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75화 (175/176)

외전_미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2)

방금 전만 해도 괴한의 침입에 두려워 몸을 떨던 ‘소년 국왕’은 금세 왕으로서의 품위를 되찾았다.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누가 보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어느새 제 코앞에 온 암살자를 마주하고서도 아이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스릉, 하며 검을 빼든 그 순간에도 아이는 침을 꿀꺽 삼켰을 뿐.

“오히려 암살자의 방문이 선물처럼 느껴질 정도이니, 팰러스 공의 시도는 대성공이라 할 법하군.”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농담을 하는 여유 아닌 여유 때문일까.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고픈 강렬한 욕망에 지고 말았다.

“폐하, 부디 저를, 반란자를···. 이 나라의 눈먼 자들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려 반가울 지경이야. 부디 나를 이 지독한 모멸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게.”

소녀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형의 순간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아닌, 긍지 높은 귀인다운 태도였다.

내 앞에 드러난 그 흰 목덜미에 일순 전율이 일었지만.

‘팰러스 님을 위해!’

나는 검을 들었다.

날선 검은 언제나처럼 망설임 없이 누군가의 목숨을 끝장냈으나···.

내 앞에 쓰러진 소녀의 모습을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나를 덮쳤고.

깨질 듯한 통증이 머릿속을 엄습했다.

“으윽.”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그곳을 벗어났다. 평소처럼 흔적과 증거를 지우는 것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그저 현장을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친애하는 리암 공,

그로부터 며칠 뒤, 소년 국왕이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내 머릿속을 가리던 어두운 구름, 시야를 어지럽히던 장막이 걷히고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네.

나는 드디어 벗어나게 된 걸세. ···무엇으로부터 벗어낫느냐고?

그대는 ‘이능’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

그래, 물론 모를 리 없겠지.

우리 곁에만 수많은 이능 신관이 존재하며, 신앙심의 증거이자 신의 기적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이능이니까.

그렇다면 이 또한 알고 있는가?

누군가의 정신을 붙잡아 제 뜻대로 휘두르는 능력 또한 ‘이능’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을.

소년 국왕, 아니 실은 소녀였던 해로드 왕가의 마지막 후계자가 세상을 떠난 직후, 나는 확신했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섬겼으며 내 목숨 이상으로 소중히 보좌했던 나의 주군, 팰러스 레핀은-

자신의 ‘이능’을 이용해 나의 이성을 옭아매고 판단력을 흐리게 했던 폭군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해,

나는 여태껏 그의 세뇌에 걸려 있었던 것일세!

——테오 2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객에게 목숨을 잃은 후, 귀족회는 팰러스가 다음 왕이 되는 데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우만, 그간 고생이 많았다. 네가 날 위해 해온 희생을 절대 잊지 않으마.”

왕위에 오른 직후 팰러스는 언젠가 나를 불러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그 말은 내게 진실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소년 국왕’을 내 손으로 죽인 이후로 그의 숨겨진 이능을 본격 조사하기 시작한 터였으니까.

“물질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 말고, 사람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이능도 존재합니까?”

개인적으로 알게 된 이능 신관을 통해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 판단에 확신을 가진 것까지는 좋았지만.

“우만, 요즘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이능자 신전에는 무슨 용건이지?”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하던가.

그러한 나의 행보를 수상하게 여기던 브렉은 나를 일일이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굴었고.

그 후 무언가 낌새를 차린 것인지 팰러스는 내게 유독 거리를 두었다.

의심을 받지 않으며 팰러스의 동태를 파악할 방법을 궁리하던 나는, 길드 ‘검은손’에 의뢰해 실력 있는 밀정을 고용했고.

밀정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정보를 물어다주었다.

그 과정은 차치하고 결과만 요약하자면.

-나의 주군 팰러스는 오프러스 공국의 꼭두각시이고.

-과거 내 부모가 살해 배후자로 지목되어 목숨을 잃은 ‘에르곤 왕자 암살 사건’의 진짜 배후가 공국의 수장 칼 오프러스 대공이었으며.

-나의 부모는 이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억울하게 처형당했을 뿐 아니라.

“···어릴 적 동생분이 사고로 돌아가신 것, 기억나십니까?”

무미건조한 밀정의 목소리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아까 언급한 것들이야 의도적인 기만이라 해도, 필리아 그 아이만큼은···.

“몇십 년 만의 홍수로 하천이 넘치고, 거기에 동생분이 빠져 돌아가신 걸로 알고 계시겠지만···.”

밀정은 내게 의사의 소견서로 보이는 것을 내밀었다.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부정했지만, 진실을 알고픈 충동을 이길 수 없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사인 : 교살’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의도적인 살인입니다, 우만 님. 그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흐르고 귓전에서 지잉- 하는 소음이 들리는 가운데, 밀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폐하의 측근 중 타릭이란 자가 있지 않습니까? 4대 원소를 다루는 이능을 지녔고···.”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을 예사로 알며, 그중에서도 어린 여자들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

밀정이 1주 만에 알아낸 사실을 내가 모를 리 없다.

타릭이라면, 그 빌어먹을 정신병자 놈이라면 얼마든···.

“···우만 님? 우만 님!”

놀란 밀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 사건의 참혹한 진상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팰러스에게 남아 있던 손톱만큼의 충심은 싸그리 재가 되어버렸다.

아니, 도리어 그를 향한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니.

‘결국은 내 부모와 여동생의 목숨 또한.’

왕위를 향한 팰러스의 야망에 불쏘시개로 쓰인 것이 아닌가.

그런 결론을 내리자 분노로 머리가 확 돌아버리는 기분이었다.

그 분노의 근원을 따지자면 이제는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여동생의 죽음보다도, 나를 ‘가신’으로조차 대우하지 않은 팰러스의 행태였으니.

‘도구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늘 결심해왔으나.’

그것은 주군과 가신 간의 상호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던가.

나를 일개 가신도 아닌, 그저 세뇌의 대상으로만 보는 그런 자가 주군 행세를 하며 기만해온 것으로도 모자라-

내 인생을 처음부터 조종하고 내 가족과 가문까지 송두리째 망가뜨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팰러스는 나의 주군도 친구도 그 무엇도 아닌, 내 인생의 파괴자라는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이성이 마비된 나는 그날 밤, 팰러스가 잠든 침실에 잠입했다.

발소리를 죽여 침대 곁으로 다가가자.

쌔액 쌔액.

팰러스는 고르게 숨을 내쉬며 천사처럼 잠들어 있었다.

단잠에 빠진 놈의 목에 그대로 칼을 내리꽂으려던 순간.

팰러스가 번뜩 눈을 떴다.

“···거기까지다.”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뒤로 물러섰다.

침대에서 일어난 팰러스가 날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째서, 어째서 다른 이도 아닌 우만 네가 나를···.”

도리어 배신감에 치를 떠는 놈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이 순간에마저도 나의 하나뿐인 주군은 연기를 하는 것인가.

“경비병!”

그가 신호를 보내자마자 경비병들이 안으로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팰러스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나는 곧바로 이능을 써 옆 방으로 달아났다.

“허억, 헉···.”

이능을 연달아 쓴 탓에 숨을 헐떡이며 도망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떻게 도망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팰러스가 보낸 경비대가 나를 끝까지 추적했고, 그들이 쏜 화살에 맞은 나는 개울가에 그대로 빠지고 말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의 손에 구출된 참이었다.

“정신이 드나요?”

나를 구해준 것은 여리여리해 보이는 체격의 두건을 쓴 청년.

나중에 알기로 반팰러스파의 선봉으로서 평민군을 이끄는 ‘포박의 사일롯’이라는 이능자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맨얼굴을 보고서 사일롯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너는···.”

“오랜만이네요, 우만 선배.”

한때 브렉의 전쟁 노예로 어여쁨을 받아 아카데미에까지 함께 다녔던 소녀, 롯.

그녀는 정확히 2학년이 되던 해에 브렉으로부터 달아나 행방이 묘연해진 터였다.

“사일롯이 너였다니.”

“···그런 선배야말로 폭군 팰러스의 시해미수범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롯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한때 팰러스의 오른팔이었던 우만이라는 것도, 팰러스를 죽이려다 실패해 달아났다는 것도.

그녀와 나는 ‘타도 팰러스’라는 생각지도 못한 공통의 목표를 향해 함께 활약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츰 가까워졌지만 사랑 놀음을 할 여유는 없었다. 매일이 전쟁과 생존의 연속이었고, 눈을 뜨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해야 했다.

그 사이 세상은 빠르게 변화했다.

제일 먼저 변한 것은 팰러스였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다! 누구 없느냐! 여기, 여기 우만이 내 목을 조르려···.’

나의 암살 시도 이후 경계심이 지나치게 높아진 나머지 가장 충실한 이들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작은 꼬투리를 잡아 가신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으며, 마땅한 구실을 찾기 어려울 때는 몰래 암살자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팰러스가 결국 제 동생마저 죽였다는군요.”

“세자르를?”

세자르 레핀.

제 형의 말이라면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충성을 바치는 의붓동생마저, 팰러스는 제 손으로 죽여버렸다는 소식이 궁 밖으로 퍼져나왔다.

이제 ‘피에 젖은 폭군’이라 불리는 왕의 광증은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검은손 길드에서 전해준 소식에 따르면, 해로드 왕가에 충성하던 귀족파들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해요.”

그 소식은 얼마 후 진실로 드러났다.

테오 2세가 내 손에 죽기 직전까지 충성을 바치던 페킹튼 가문을 비롯해 몇몇 무가들이 군사를 일으켰고.

그대로 왕성으로 직행해 폭군 팰러스의 목을 베었다.

이 부분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그자의 목숨을 거둔 것이 바로 그대 ‘폭군 처단자’, 리암 페킹튼 공이니까.

“팰러스가··· 죽었다고?”

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분노와 배신감이 향할 곳이 급작스레 사라졌기 때문일까. 한동안 허탈감에 사로잡혔지만.

“왜요, 본인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한 게 한이 되나요?”

롯이 했던 말을 나는 한동안 곰곰이 되씹었다.

덕분에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은 나는, 그녀에게 청혼했으며 롯은 내 청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팰러스 다음으로 ‘에드윈 레핀’이 왕위에 오르고, 그가 오프러스 공국과의 관계 개선 운운하며 로안 강 지대를 공국에 반환한 뒤.

공국에 포섭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허울뿐인 왕실이 몰락한 후 이 나라가 공국의 속국이 되기 전까지는.

“만일 우리가 그냥 평범한 남녀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내 물음에 롯은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남녀라도 이런 현실을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어.”

한동안 평범한 부부로 지냈던 우리는 ‘타도 오프러스’를 외치는 반란군 수장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

우리 반란군은 오프러스 공국군과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전사한 수많은 평민병들과 마찬가지로-

롯 또한 목숨을 잃었다.

···그녀와 함께한 지 불과 몇 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부터였네.

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없다면, 누군가는 진실을 기록이라도 해서 후대에 전해줘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

이 우만 드 빈터가 ‘어둠의 사관’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지.

‘하지만 롯은?’

공국의 입김이 닿지 않은 ‘진짜 역사’를 저술하는 거와는 별개로 나는 그녀를 되찾고 싶다는 지독한 열망에 시달렸다네.

그녀를 다시 보고픈 욕망이 너무도 큰 나머지,

시간을 되돌릴 방법마저 찾을 정도였으니.

그래. 물론 그대는 이쯤 되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 당시의 나 또한 내가 미쳐가는 중임을 모르지 알았네. 시간을 되돌리는 법 같은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갖은 수를 써가며 방법을 수소문했지.

하지만 이보게, 나부터가 ‘벽을 통과하는 자’가 아닌가.

나부터가 이 세상의 법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는데, 하물며 시간을 되돌리는 자가 없을 것은 또 무엇인가. 이능 신관이라는 자들 자체가 이 세상의 논리에 어긋나는 존재가 아니던가?

잡설이 길었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방법을 찾았네.

···그래, 그대가 지을 표정이 상상이 되는군. 리암 공 자네는 학생 시절부터 상당히 현실적이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정말일세.

나는 한때 수많은 이능자들을 거느렸으며, 본인 또한 기이한 이능을 사용한다는 신비한 자를 만나게 되었지.

혹시 몇십 년 전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추기경의 이름을 기억하나?

그래. 자네라면 알고 있겠지.

루치오 페카툼.

한때 불세출의 성직자라 불렸으며 수많은 이능 신관을 배출했으나, ‘금지된 약물’에 관한 추문에 휩싸여 소리 소문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

그가 바로 내게 ‘시간을 되돌리는 법’을 알려준 인물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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