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74화 (174/176)

외전_미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1)

가짜 역사가.

거짓과 비방, 날조의 전문가.

온갖 박해와 억압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역사서를 집필하는 이를 가리키는 별명은 수없이 많았으나.

우만 드 빈터를 백성들은 ‘어둠의 사관’이라고 불렀다.

“거, 이번에 또 어둠의 사관이 한 건 했다지?”

“왕실을 정면으로 조롱하는데 얼마나 통쾌하던지!”

우만의 은신처 주변에서는 매일 같이 불법 인쇄물이 나돌았다.

그가 작성한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선전물을, 조력자들은 열심히 나라 안팎으로 실어날랐다.

십 년 전만 해도 에스닐 왕국은 대륙의 최강국 중 하나로 꼽혔지만, 이제는 오프러스 공국의 속국 신세가 되어버린 터.

공국의 과도한 요구에 등골이 휘기 일보 직전인 에스닐 백성들에게 ‘어둠의 사관’이 펴내는 인쇄물은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못하는 말을 해주니 시원하기야 하지만, 혹시나 잡히기라도 하면···.”

“예끼 이 사람아, 어디 그분이 쉽게 잡힐 분인가? 그리고 그럴 거면 진작에 잡혔겠지.”

어둠의 사관, 우만 드 빈터는 신출귀몰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왕국의 병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이닥쳐 그를 잡으려 했지만 번번이 허사였으며.

우만이 제 눈앞에서 벽을 통과해서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각, ‘어둠의 사관’은 대체 어디 있을까.

우만 드 빈터는 힘겹게 구한 새로운 은신처에서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끼릭끼릭.

끝이 무뎌져 잘 써지지 않는 깃펜이 정제되지 않은 문장을 휘갈길 때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에스닐 왕실이 보낸 군대뿐 아니라 칼 오프러스 대공의 암살자들이 코앞까지 쫓아온 상황.

이 은신처도 몇 시간 후면 발각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깃펜을 쥔 손을 부지런히 놀렸지만, 글씨를 쓰는 속도는 한계가 있었다.

우만은 제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손이 야속하기만 했다.

‘반드시 이 편지만은 완성해야 한다.’

누군가는 모든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혹독하고도 끔찍한 진실을 후대에 전해주기 가장 알맞은 인물은···.

‘참으로 우습게도, 과거의 적이 이제는 가장 믿을 만한 우군이라니.’

리암 페킹튼.

우만이 목숨을 걸고 쓰는 편지는, ‘친애하는 리암 페킹튼 공에게’로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리암 페킹튼 공에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이 편지는 내가 살아서 남기는 마지막 글이 될 것임을 맹세하네.

만일 이 편지 이후로 그대가 내 이름으로 된 또 다른 글을 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닐세.

단순히 내 이름을 사칭한 편지이거나, 설령 내 손으로 썼다 해도 나의 자유의지와는 하등 상관없는 글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며 편지를 시작하자면-

일단은 이 부분부터 확실히 해야겠지.

한때 ‘미치광이 왕’ 팰러스의 오른팔이었으며 그를 왕좌에 올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나, 우만 드 빈터가 어째서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는지.

‘폭군 처단자’ 혹은 ‘백성의 구원자’로 불리는 그대가 무척이나 궁금해할 것이리라 믿네.

지금부터 내 지난 날의 진실을 모두 털어놓겠네.

그대에게 쓴 편지라기보다는 과거를 솔직하게 회고하는 기록으로 봐주면 좋겠네.

나의 복합적이고도 뒤틀린 이 충심을, 그 충성의 끝에서 느낀 배신감을-

왕립 아카데미에서 수학할 시절, 팰러스를 향해 찬탄 어린 눈빛을 보내던 소년이었던 그대라면 십분 이해해주리라 믿으며.

——나의 주군 팰러스 레핀이 본격적으로 에스닐 사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해,

매년 국내의 유수 가문 구성원들을 초대하여 열리는 왕궁 연회 자리에서였다.

그 누구보다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 세련된 매너와 예법, 머리부터 발 끝까지 흐르는 기품까지.

팰러스 레핀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연회에 참석한 모두가 말로만 듣던 미청년의 실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레핀 가문의 적장자, 신 팰러스 레핀. 온 백성의 어머니이신 모후 전하께 신하의 예를 갖추옵니다.”

···그것은 남편을 잃기에는 너무 젊은 모후 안느도 마찬가지였다.

‘온 백성의 어머니’를 향한 것이라기엔 너무도 유혹적이고 도발적인 팰러스의 눈빛에, 안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물도 드물게 있긴 했지만 말이다.

“글쎄, 내가 보기에 그대는 누군가의 가신이 되기보다는 주군이 되는 편을 선호하는 편일 것 같은데.”

그것은 안느의 오라비인 션 노바스의 뼈 있는 농담이었다.

젊은 노바스 공작은 왕위 계승 순위 3위인 팰러스 레핀이 아카데미 재학 시절부터 야금야금 제 영향력을 넓혀나가는 것을 늘 경계했던 터였다.

“공작 각하,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 보잘것없는 자의 능력은 의심하실 수 있겠지만, 부디 저의 순수한 충심만큼은 의심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도발적인 언사 앞에서도 팰러스는 그린 듯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때 오간 한두 마디의 대화로 결심을 굳혔다.

‘션 노바스’는 애초 자신에게 넘어올 확률이 적은 인물인 만큼 사전에 깔끔하게 제거하며.

더불어 모후 안느의 마음을 더더욱 완벽하게 사로잡기로 말이다.

“전하, 사냥터에 함께해도 괜찮겠습니까?”

“제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이라 해도 전하의 미모 앞에선 빛을 잃기 마련이지요.”

“제게는 오로지 전하뿐입니다···.”

단순한 군신 관계를 넘어 구혼자 흉내를 내던 팰러스는 결국 모후 안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고.

“션 노바스 공작이 왕실을 상대로 모반을 계획했다!”

“어린 조카를 제거하고 왕좌에 오르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젊은 노바스 공작을 영구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안느 모후의 유일무이한 ‘내 사람’이 된 팰러스는, 슬슬 소년 왕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폐하께서 요 근래 환각을 보신다던데···.”

“악몽에 시달리시는 것은 물론이고, 헛소리를 하며 몽중에 복도를 배회하신다 합니다.”

“허어, 이 나라의 미래가 어찌 될런지···.”

처음만 해도 또래에 비해 병약할 뿐, 명석한 두뇌를 지닌 것으로 유명했던 소년 국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온갖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소년’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었다.

자연히 귀족들의 관심은 그다음 왕위계승권자인 팰러스에게 쏠렸으며, 소년 왕을 지지하던 소수의 충신들조차도 고뇌에 빠졌다.

이 모두 사실과는 관계가 먼, 팰러스 세력이 날조한 소문이 일궈낸 효과였으며.

···나 또한 이 같은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여기에 유일하게 문제 제기를 한 것은 팰러스의 동생, 세자르뿐이었다.

“하지만 형님, 폐하는 애초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누군가가 진실을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팰러스는 무슨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냐며 이렇게 대꾸했다.

“왕이 정말로 미쳤는지는 중요치 않다. 남들이 그를 미쳤다고 여기면 그는 광인이 되는 것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불안했던 것일까.

팰러스는 소년 국왕을 진정 ‘광인’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에 나섰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시종 외에는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했으며.

사회적 관계를 완전히 차단한 채 기본적인 의식주만 보장해줬다.

···왕궁의 유일한 권력자인 모후 안느가 그의 권속이나 다름없이 굴었으므로, 이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년 왕은 그 모든 것을 꿋꿋이 버텨냈다.

“아직도 덜 미쳤단 말이냐?”

왕이 아직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보고에 심기가 상한 팰러스는 괴상한 주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떻겠나?”

소년 왕이 기거하는 침실 주변에 악사들을 불러모아 24시간 내내 악기를 연주시키는 것.

그 괴이하고도 치밀한 고문은 결국 소년의 정신을 완전히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날, 팰러스는 나를 불러 은밀한 주문을 했다.

“우만. 네가 이제껏 날 위해 보여온 충성에 방점을 찍을 기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팰러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지독히 아름다운 동시에 소름끼쳤다.

“소년을 제거하거라.”

“···.”

‘소년’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했다.

여태껏 팰러스를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이번만큼은 나 또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을 하거라, 우만. 그럼 우리의 계획이 완성될 것이니.”

팰러스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보려니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자신이 섬기는 왕을 죽이라는 명령을 아무렇잖게 내리는 주군이라.’

국왕시해죄는 본인의 목숨만으로는 씻어낼 수 없는, 멸문지화로 이어지는 중죄다.

내가 아무리 평생을 그의 그림자로 살아왔다고는 하나···.

‘과연 이러한 주군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이유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서 구름 같은 것이 연기처럼 피어올랐고.

내 안에서 피어오르던 불만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어느새 나는 또 그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에 굴복한 채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팰러스 님.”

“너라면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 우만. 네 역할만 잘 해낸다면 넌 나를···.”

팰러스의 손이 내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교활한 미소가 걸린 입술이 보였다.

“곧 ‘폐하’라 부르게 될 것이다.”

——다음 날 밤.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벽을 통과하는 이능’을 이용해 국왕의 침실에 잠입했다.

“꺄악!”

어두운 벽 그림자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인영에 놀라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그 비명이 생각보다 새된 것에 나는 도리어 놀라버렸다.

“대, 대체 어떻게···.”

그 목소리의 주인공, 테오 2세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맹세컨대 내가 소년 국왕을 직접 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깨닫고 말았다.

···국왕의 정체는 소년이 아니라 소녀라는 것을.

‘맙소사.’

비록 짧은 머리와 통 넓은 의복 따위로 애써 감추기는 했지만.

이제 곧 사춘기에 접어드는 여자아이 특유의 부드러운 얼굴선, 장밋빛 뺨은 감춰지지 않았다.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는 꽃봉오리같은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통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째서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것일까.’

평소 국왕을 알현해온 신하만 해도 수십 명이 아니던가. 먼 발치에서나마 회의에 참석하던 귀족들은 또 어떻고.

그들 모두가 눈이 삔 바보라는 말인가?

특히나 모후이신 안느 전하의 태도는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젠가 세자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우만 선배? 아무리 형님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는 해도···.’

‘이상하다니, 뭐가?’

‘내게 팰러스 형님이 계시듯, 테오 폐하께는 안느 전하가 계신 거잖아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세자르, 바보 같을 정도로 멍청한 세자르.

‘에스닐 사교계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내’라는 멸칭 앞에서도 그는 꿋꿋했다.

제 하나뿐인 형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다며.

그런 세자르가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아무리 사랑에 빠졌다고는 해도, 애인을 위해 자기 자식을 궁지로 몰아넣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요.’

물론 그때의 나는 세자르의 말에 코웃음을 쳤었다.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성을 잃은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이야.’

그것이 설령 제 자식을 사지를 몰아넣는 일이 되더라도.

···비록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와 돌이켜보니 더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왕가의 명맥을 잇기 위해 성별마저 감추고 소년 행세를 하는 어린 딸.

사방이 정적투성이인, 매일 같이 목숨을 위협받는 딸을 고작 ‘애인’ 때문에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그때.

“···나를 죽이러 온 것인가.”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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