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2)
* * *
그로부터 10년 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카렌과 결혼식을 치렀고, 여전히 에스닐의 역대 최연소 궁내장관으로서 왕궁 일에 충실히 임했다.
테레사 여왕은 열여덟 살이 되어 섭정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제법 근사한 미남으로 장성한 레온 공과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전례 없이 훌륭한 통치를 이어온 덕에 온 백성에게 열렬히 사랑받으며 ‘영광의 여왕 테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오랫동안 사소한 충돌로 골머리를 앓던 커글랜드와의 국경 분쟁은 순조롭게 풀린 결혼 동맹으로 깨끗하게 해결되었고.
동부의 오프러스 공국을 지배하는 이사벨 대공과는 긴장감 있는 우정을 맺으며 순조로운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교단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었는데.
마녀 사냥의 과오를 사죄한 교황청은 그간 불만을 지녔던 이들의 가차없는 공격에 노출된 터였다.
‘그래서 말인데 세자르 공, 짐은 교황청에 원조의 손길을 내밀 셈이야.’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것을 그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에게 보여줘야지, 안 그런가?’
덕분에 교황청은 무사히 위기를 넘겼고, 그 대가로 에스닐은 교단의 제재 없이 이능자들을 등용 가능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온 대륙에 숨어 지내던 이능자들, 아니 마법사들이 모여든 덕에 이 나라는 자연스레 부국강병의 길을 걷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폐하께서 널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겠다 하시는 거지.”
여전히 나의 최측근이자 정식 부관으로 있는 우만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은인은 뭘.”
“게다가 이제는 무려 ‘재상 각하’가 되어 에스닐의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될 거 아냐?”
우만의 말대로였다.
오늘은 내가 ‘재상’으로 정식 임명받는 날이니까.
그간은 최연소 궁내장관이라는 직함 아래 숨은 2인자 역할을 맡아왔다면, 이제는 공식 2인자가 되는 셈이다.
“띄워줘도 아무것도 안 나오니 적당히 해라.”
그렇게 대꾸하자 여태 말없이 있던 발닉이 입을 열었다.
“띄워드려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게 어디 하루이틀 일입니까, 도련님. 저희는 이미 익숙하니 그냥 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발닉의 대꾸에 우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외국의 분쟁지역에서 의뢰를 해결하다가 내 서임식에 맞춰 급히 왔다는 발닉은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너무 무리해서 온 것 아냐?”
“이 발닉의 사전에 무리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발닉이 대답하고 난 뒤, 옆에 앉아 있던 나답, 나훔, 나만 3형제도 차례로 말했다.
“단장님 말씀대로입니다!”
“저희 <검은 날개단>에게 불가능한 의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검은 날개단>은 세자르 님께 평생 충성할 것이니···.”
아, 뜨거워.
나는 언제나처럼 열정적이고 충성스러운 3형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발닉과 3형제도 잘 나가는 중이지.’
십 년 전.
내가 루치오 사건을 해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닉은 오랫동안 고민해온 것을 털어놓았다.
‘도련님, 정말로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발닉의 요는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모은 재산을 가지고 자기만의 용병단을 꾸려보고 싶다고.
‘도련님께 평생의 충성을 맹세해놓고 이런 말씀 드리는 게 가당치 않다는 걸 압니다만-’
‘용병단을 만들면 충성하지 않을 생각이야?’
‘네? 아니 그게···.’
‘해봐라, 발닉.’
나는 오히려 그의 계획에 적극 찬성이었다.
사실 발닉이 내 아래서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출신의 한계도 있거니와 검술 실력만으로 따지면 비교할 수 없는 인재들이 상당수였으니.
‘하지만 베테랑 용병의 경험이 있는 건 발닉 자네뿐이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약속해라, 발닉.’
‘뭐든 말씀하시지요.’
‘용병단을 만드는 것뿐이 아니라 네 용병단을 대륙 최고로 키우겠다고.’
‘···.’
‘그리고 발닉 네가 이끄는 그 용병단은, 내게 평생토록 충성하겠다고 말이야.’
그날, 발닉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충성을 맹세했으며.
나는 자유기사 신분으로 활약하고 싶다던 나답, 나훔, 나만 3형제를 그의 용병단에 편입시켰다.
그때의 다짐이 계기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닉이 만든 용병단 <검은 날개>는 창단을 기점으로 파죽지세로 성장해 어느덧 에스닐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대형 용병단이 되었으며.
그 일원인 3형제와 디터는 용맹한 무장으로 이름을 날리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세자르 레핀과 우리 가문을 무대 뒤편에서 보조하는 병력이기도 하지.’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 다들 보기 좋아.”
그 말에 발닉이 고개를 조아리려던 순간, 알현실 문이 벌컥 열렸다.
리암과 달리아 부부였다.
“세자르!”
“세자르 공, 축하드려요.”
“이거, 사교계에서 소문 난 잉꼬 부부가 오셨군요.”
발닉이 너스레를 떨자 리암과 달리아 부부가 얼굴을 붉혔다. 결혼 십 년 차에도 여전히 신혼 같은 모습이 보기 좋다.
‘따지고 보면 계기는 그때인가.’
루치오 사건에서 안면을 튼 두 사람은 이후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
서너 번 보고 난 후에 리암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했고.
레핀 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 정식 서임을 받은 후 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보니 왜 내가 감개무량한지 모르겠어.”
“내가 늘 고마워하는 것 알지?”
리암이 씩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치는데, 우만이 한 마디 거들었다.
“이 정도면 세자르 너 중매에 꽤 소질이 있는 것 아냐? 따지고 보면 여왕 폐하의 결혼도 네 덕분인데.”
그러네.
무려 국혼을 성사시킨 중매쟁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우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중매에 소질이 있다니 이쪽도 좀 도와줘야겠는데.
“그러고 보니 롯이랑은 요즘 어때?”
롯 얘기가 나오자 우만은 눈에 띄게 우물쭈물거렸다.
“롯이랑 어떻다니 뭐가.”
롯은 우만과 함께 나의 최측근으로 일하고 있다. 우만이 주로 왕궁 정무를 보조해준다면 롯은 나의 호위를 담당했는데.
‘언제부턴가 이 둘 사이의 기류가 묘하다 이거지.’
리암은 어색해하는 우만을 보며 놀리듯 말했다.
“둔감한 것도 정도가 있어, 우만.”
“···리암 너한테 둔감하다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데.”
“마차는 한 번 놓치면 또 오지 않는 법이지, 잘 생각해보라는 얘기야.”
그때,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응접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세자르 님! 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큰 키에 떡 벌어진 체구를 자랑하는 건장한 청년.
그랑은 소년 시절에 비해 꽤 근사한 모습으로 자라난 터였다.
“그랑, 바쁠 텐데 뭘 왔어.”
“이 뜻 깊은 날에 오지 않으면 언제 오겠어요.”
그랑이 내 옆에 자연스럽게 앉자 우만이 그쪽을 보며 한마디했다.
“그랑, 또 한 건 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랑이야 이제 완성형 인재이지.”
길드 ‘검은손’에 들어가 정식 밀정이 된 그랑. 그는 본인의 마법을 십분 활용해 온갖 고급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내왔다.
우만과 나의 칭찬에 그랑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
“뭘요. 다 카렌 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죠.”
그랑의 성장에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다름 아닌 카렌의 가르침이었는데.
카렌은 정식으로 ‘귀부인’이 된 후에도 길드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 적성에 맞는 걸 하는 게 최선이야.’
‘카렌 네 적성?’
‘난 너의 가장 우수한 정보원이 될 수는 있어도, 사교계를 휘어잡는 안주인은 아무래도 못 될 것 같거든.’
‘그런 거 될 필요 없으니 너 하고 싶은 거 해.’
덕분에 카렌 돌로레스, 아니 ‘카렌 레핀 부인’은 사교계에 영 관심이 없다는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필참해야 하는 곳에는 얼굴을 비치며 최소한의 역할은 하는 그녀였다.
“본인한테 얘기해주면 더 좋아할 거야, 그랑.”
그렇게 대답해주는 순간, 이번엔 바바가 머리의 땀을 닦아내며 응접실에 들어섰다.
“제가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오늘, 주인께서 재상직에 오르실 거라고!”
“···그놈의 주인이라는 호칭도 이젠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흐흐, 뭐 그런 사소한 것 갖고 그러십니까.”
바바는 십 년 전과 달리 온몸에서 부티가 흘렀다.
여전히 나와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점술가 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곳의 조합장이 되었고.
이후 뛰어난 사업 수완을 이용해 지금은 저잣거리에서 제일 잘나가는 상인이 되었다.
“공작 각하도 여전하시군요.”
어느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발닉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아버지 로건 공은 최근 새로운 취미에 재미를 붙이셨는데.
다름 아닌 손주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섰다.
나와 카렌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에게 둘러싸인 공작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과거 철혈의 공작이라 불렸던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그야말로 손주 바보 할아버지의 전형이었다.
‘세자르, 요즘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 같구나.’
며칠 전 아버지는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이 없다며.
그 말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는 언제일까.
‘역시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했던 열네 살 때이려나.’
한때 수도에서 가장 비천한 사생아로 불렸던 내가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 에스닐의 2인자로 우뚝 서게 해준 ‘시스템’을 손에 넣었을 때.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스무 살까지가 내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이자 승승장구했던 시기였다.
아무것도 없던 빙의자 ‘김현우’의 두 손에 내 가족, 내 일, 내 나라 등 소중한 것이 속속들이 생겨났고.
‘김현우’가 ‘세자르 레핀’으로 완전히 거듭나고 난 후에야 시스템은 내게서 사라졌다.
···그 덕분에 내 삶은 좀 더 평범해진 동시에 좀 더 행복해진 터.
최근 들어 새삼 느끼지만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은 생각 외로 그리 쉽지 않다.
‘평온해 보이는 오리가 물 밑에서 필사적으로 발길질하듯.’
치열하게 노력하고 분투해야지만 그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음을 이제야 깨달은 참이었으니.
아버지가 손주들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풍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요 앞 복도가 시끌시끌해졌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세자르 님?”
문이 열리며 나타난 것은 앨빈과 디터였다.
“주군, 재상이 되시는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세자르 님, 저도 축하드려요.”
내가 카렌과 결혼한 직후, 디터와 앨빈, 농농이는 대륙의 미지를 탐험한다며 공작저를 떠났다.
나머지 가신들이 내 눈이 닿는 곳에서 승승장구하는 사이, 이 세 사람은 간간이 내게 편지를 보내 연락을 취했다.
그 셋이 마지막 탐험을 떠났던 것이 오년 전.
“요즘 디터 소문이 자주 들리던데?”
내 말에 디터는 쑥스러워했지만, 옆에 있는 앨빈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그 날고 긴다는 <검은 날개> 용병단원들 가운데서도 ‘괴력 기사’로 이름을 날리는 중이니까요.”
“앨빈 경도 학자 길드에서 유명하시면서···.”
디터의 말도 사실이었다.
앨빈은 그간 탐험하며 쓴 기록들을 출판해 유명 저자의 반열에 올랐을 뿐 아니라 학자 길드에서 대활약을 펼치고 있다.
둘이 서로의 자랑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이 자리에 없는 한 명이 떠올랐다.
‘···농농이는 어떻게 지내려나.’
농농이만큼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소식을 듣지 못한 터였으니.
십여 년 전 이곳을 떠날 때 내게 작별을 고하던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가끔 떠오르곤 한다.
그때,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세자르, 나야.”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카렌의 목소리.
문이 열리며 아름답게 치장한 카렌과 롯이 들어왔다.
“어, 오빠들이 와 있었네. ···세자르 님, 축하드려요.”
“고마워, 롯.”
롯의 등장에 우만이 움찔하는 것을 나는 애써 모른척했고.
카렌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축하해, 세자르. 그리고 특별한 선물이 있는데.”
“선물?”
의아해하며 되묻자 그녀가 제 뒤에 서 있던 누군가를 앞으로 내세웠다.
보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 처진 눈매의 동그란 눈. 여전히 토실토실해 보이는 팔다리.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여운 어린이였다.
“빛처럼 빠른 자, 아이다페올트 왕자님이 몸소 행차하셨지.”
“···!”
나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농농아.”
[빠!]
농농이가 내게 달려와 껴안겼다. 나는 한참 후에야 아이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옹, 아옹앙, 아부···.]
“다들 오랜만이고 반갑다네.”
그간 노움어를 익힌 덕에 얼추 의미를 파악해 가신들에게 전해주었다.
내 품에서 풀려난 농농이에게 디터와 앨빈 또한 달려왔다.
“농농아!”
“농농 님···.”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그 둘의 반응에 농농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부부, 바뿌, 아그그그···.]
“노움족은 누구나 웃으며 재회한대. 그러니 울지 마라, 디터, 앨빈.”
내가 미소 지으며 저의 말을 옮기자, 농농이가 그에 화답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륵!]
농농이가 간만에 능력을 쓰자 우리의 머리 위에서 펑! 하고 금화가 떨어져내렸다.
오랜만에 맞는 금화 비가 꽤 기분 좋았다.
응접실에 앉은 가신들 일동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