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72화 (172/176)

에필로그(1)

겉옷을 챙겨입은 뒤 정신없이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어? 도, 도련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마굿간지기를 내버려둔 채, 나는 말 한 필을 끌고 저택을 나섰다.

말 달리는 속도를 높이는 가운데 머릿속에 의문이 생겨났다.

‘어째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을까.’

확신이 부족해서? 아니다. 확신이라면 차고 넘칠 만큼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향한 감정과는 별개로 갈등하고 망설이는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아마도 그 망설임의 근원을 찾자면···.

‘언젠가 나는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이 이상 선을 넘어서는 안 돼, 라는 자제심이 늘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에 내 감정을 인정하지도, 나를 향하는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했던 것.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이상하기만 하다.

‘내가 돌아가다니, 대체 어디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과거의 나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걸까.

어쨌거나.

그간의 망설임은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먼 옛날의 얘기처럼 느껴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 기점이란 아마도 ‘행복의 묘약’을 먹은 순간인 듯하다.

지금의 나는 내 안의 감정을 진솔하게 털어놓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터였다.

* * *

검은손 길드 본부는 언제나처럼 각양각색의 길드원으로 가득했다.

꽃과 신문을 파는 거리의 아이들부터 전문 용병, 암살자에 이르기까지.

겉모습만 보아선 같은 장소에 함께 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이들이 내 곁을 수없이 지나쳤다.

“길드장 님을 뵈러 왔는데.”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나 귀족이오, 를 외치는 차림의 나 또한 이질적인 존재이긴 했으나.

귀족이 이곳을 들락거리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닌지 길드원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큼은 두건 아래 가려진 내 얼굴을 알아보고 덜덜 떨었다.

“세, 세자르 공께서 어찌 이곳에 직접···.”

언젠가 한 번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카렌의 부관이라는 자였다.

“돌로레스 경을 만나러 왔는데. 사전 약속은 잡지 않았지만, 세자르 레핀이 왔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다.”

이곳에서 그녀는 ‘렌 돌로레스’로 통하는 만큼, 일부러 존칭을 썼다.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지금 바로 안내할 테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부관을 따라 복도를 몇 번씩 돌아 들어갔다. 겉보기에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던 건물은 숨겨진 통로와 눈에 띄지 않는 가벽 따위로 가득했고.

“여기입니다.”

마침내 제일 안쪽에 자리한 ‘렌 돌로레스’의 집무실에 부관은 나를 데려다놓고 물러났다.

“돌로레스 경.”

부관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창가에 붙어 서 있던 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아래서 밝게 반짝이는 붉은 머리, 새하얗고 정갈한 얼굴이 꼭 도자기처럼 빛나는 미형의 소유자.

“세자르? 여긴 갑자기 무슨 일이야?”

길드장 모드로 남장을 한 카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뭔가 급한 임무가 생긴 거야? 북부 국경지대의 부족들과 충돌이 잦아졌다던데 혹시 그쪽-”

“아니, 그건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교황청 쪽?”

내가 교황과 쇼부를 보기 전, 여론을 움직이는 데 크게 일조한 게 바로 카렌의 검은손 길드였으니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카렌도 둔감하기는 나 이상인걸.’

그녀가 온갖 국내외 현안들을 읊는 것을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쪽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는-”

“카렌.”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한동안 임무는 없을 거야. 오늘은 그보다 너랑 얘기를 좀 하고 싶어서.”

임무가 없다는 말에 카렌이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기? 무슨 얘기?”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음.

나만큼이나 눈치가 없는 카렌의 반응에 말 끝을 흐리다가.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해버렸다.

“미래를 논하기 위해서랄까.”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카렌은 ‘대체 뭘 어쩌자고?’라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 *

널찍하고 화려한 고급 마차의 안.

카렌은 마주 앉은 세자르를 흘긋거렸다.

아무 기약도, 언질도 없이 갑자기 길드로 쳐들어오는 건 세자르답지 않은 방식이었다.

그래서 무언가 시급한 임무가 생겼나 싶어 잔뜩 긴장했던 그녀였지만.

‘미래를 논하자더니,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세자르는 막상 명확한 용건도, 별다른 이유도 없어 보였다.

여기에 타고 왔던 말은 길드에 그냥 놔둔 채, 마차를 대절해서 가자고 했다.

‘마차? 대체 왜?’

본인 말을 놔두고 왜 굳이 마차를 타는 거냐, 라는 질문에 그는 말을 흐렸다.

‘그게···.’

말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세자르라니.

참 그답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카렌은 짐짓 그의 의견을 따랐다.

세자르를 따라 휘황찬란한 고급 마차를 타고 도심을 나섰고, 마차는 어느새 교외에 들어섰다.

카렌은 이유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창 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에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간만에 나오니 좋긴 하네.’

하긴 요즘 그녀 자신도 휴식이 필요한 시기이긴 했으니.

다그닥 다그닥, 덜컹덜컹.

기분 좋은 속도로 달리던 마차가 어느 호수 앞에서 멈춰 섰다.

“내리시지요.”

마부의 말에 그녀는 세자르와 호숫가에 내렸다.

탁 트인 시야에 유리처럼 맑은 수면이 들어왔다.

“풍경이 근사하네.”

세자르는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그렇게 말했지만, 카렌은 외려 긴장한 터였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길드나 자신의 집무실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건가.

레핀 가문, 아니면 왕궁에 무언가 심각한 사건이라도 생긴 걸까.

그렇게 걱정하는 한편, 얼마 전 그랑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요즘 세자르 님이 좀 이상하세요.’

‘이상하다니, 뭐가?’

‘뭐 이제는 그럴 만한 사건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세자르 님을 뵈었을 때 이렇게 여쭤봤거든요.’

검은손 길드에 들어와 밀정 일을 배우며 카렌과 친근해진 덕분일까.

이제 소년은 거리낌 없이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세자르 님, 제 능력을 써먹을 만한 일이 있음 써먹어주세요 했더니···.’

소년은 세자르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러면 말이야. 왕궁에서 날 부를 때 그랑 네가 한 번 가서 대타 좀 뛰어줄 수 있나? 한 서너 시간 정도만 말이지, 라고 하시는 거 있죠.’

‘···진짜?’

그랑더러 왕궁에서 본인 행세를 하라니.

세자르가 그간 많이 지치긴 했나 보다, 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터였다.

하지만 자신을 굳이 데리고 이 호숫가로 나와 허허롭게 산책이나 하는 걸 보면.

‘지쳐도 보통 지친 게 아닌가 보네.’

카렌은 그런 결론을 내리고는 세자르에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를 곁에서 보좌하며 ‘세자르 레핀’의 모든 일을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굴러가게 하는 일도 보람찬 일이지만.

주군이 휴식을 원한다면 그 또한 함께하는 것이 가신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걸.’

세자르가 던진 실없는 농담에 카렌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카렌, 이쪽으로 와봐.”

세자르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호수 근처로 이끌었다.

아주 잠시간의 접촉이었지만.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곳에 꽤 오랫동안 온기가 남은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네.’

심장이 기분 좋게 고동치는 가운데, 카렌은 이렇게 단둘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여기 마음에 들어?”

“···응, 아주.”

그녀 자신이 대답한 말대로, 아주 마음에 들었으니까.

두 사람은 그렇게 호숫가를 한참 거닐었다.

그간 함께 해낸 일들에 관해 실없는 이야기를 나눈 뒤, 배가 고파질 즈음 마차를 타고 도심의 유명 식당에 들렀다.

“···덕분에 요즘은 길드 일에도 좀 여유가 생긴 참이야. 신입들도 생각 외로 빠릿빠릿하고···.”

식사를 마치고 나와 세자르에게 길드 얘기를 길게 늘어놓을 때에도 그녀는 오늘의 경로가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라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터였다.

두 사람이 공작저로 돌아와 세자르의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유명 화가가 그린 듯한 3단 병풍이 집무실 한쪽 벽에 세워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데, 세자르의 수집품인가?’

그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으며 카렌이 고개를 돌린 순간.

“카렌.”

세자르가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보석 상자를 꺼내어 내밀었다.

“응? 이건 뭐야?”

카렌이 물었지만 세자르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의미심장한 표정에 그녀는 퍼뜩 긴장했다.

‘혹시 이게 오늘의 본론인 건가. 이 안에 뭔가 중요한 단서가 들었다든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을 하며 카렌은 상자를 천천히 열어보았다.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순도가 높아 보이는 보석인걸.’

함부로 손을 대지 않은 채, 감정사 같은 눈빛으로 목걸이의 요모조모를 뜯어보어보며 카렌이 말했다.

“이건 뭐야, 마도구? 아니면 보석 감정이 필요한 물건-”

“카렌 네게 주고 싶은 거야.”

“···?”

그녀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선 세자르가 머쓱해하며 말을 이었다.

“내 할머니께서 쓰셨던 물건이라더군. ···오늘 아침, 아버지께 말씀드려 받아온 거야.”

카렌은 이 대화의 맥락을 여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세자르는 어째서 이 물건을 레핀 공작에게 받아왔으며, 레핀 가문의 귀부인이 썼던 목걸이를 왜 자신에게 주려는 것인가.

‘서, 설마.’

아니, 그럴 리 없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설마 이건 혹시···?’라는 가능성을 그녀는 억지로 지워냈다.

자신은 그의 가신일 뿐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세간에서는 그와 자신을 혼약을 맺은 사이로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눈가림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애초 나라 최고의 공작 가문 적장자와 암흑세계 길드장의 조합이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

그럼에도 카렌은 이렇게 묻고 말았다.

“이걸 왜, 나한테···.”

그녀의 떨리는 눈빛을 본 세자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제대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카렌.”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녀의 두 손을 감싸쥔다.

“지금까지 내 약혼녀 행세 하느라 고생했어. 그러니 이젠···.”

카렌은 숨도 쉬지 못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짜 약혼녀가 되어주지 않을래?”

“···.”

잠시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으나, 카렌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꾸했다.

“···바보.”

세자르가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둘의 대화가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려던 순간.

“엣취!”

병풍 뒤에서 난데없이 재채기 소리가 튀어나왔고.

두 사람이 그쪽을 돌아본 순간.

“자, 잠깐 밀지 좀 마!”

“어이쿠!”

“앗···.”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병풍이 쓰러지더니, 그 뒤에 한데 뒤엉켜 넘어진 가신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그게 말이죠···”라며 어떻게든 변명하려는 앨빈.

허허 헛기침만 하는 발닉.

얼굴이 시뻘개진 채 눈을 못 드는 디터.

거기에···.

[아뿌부부!]

통통한 팔을 휘저으며 두 눈을 반짝이는 농농이까지.

당황한 가신 일동을 대표하듯, 농농이는 맨 앞으로 나서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앙, 아옹, 아부 부앙···.]

“···농농 님이 두 분의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하십니다.”

···어째 제대로 된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게 농농이뿐인지.

카렌은 어이없어하다가 풋 웃음을 터뜨렸고.

세자르도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희들 방금 로맨틱코미디 클리셰의 한 장면 같았던 거 알지?”

“···로맨틱코미디요?”

“클리셰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렇잖게 핀잔을 줬던 세자르는 디터와 발닉의 대꾸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 그러게. 내가 왜 이런 말을 알고 있지?”

평소 빈틈없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주군의 일면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우만과 롯, 3형제와 리암이 들어와 뒤늦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바바는 수정구를 들고 와 씨익 웃어 보였다.

“이 바바, 기쁜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두 분의 길일을 점쳐드리겠다며 바바가 앉은 자리에서 점판을 깔자.

당사자 두 명은 민망해했고 나머지 가신들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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