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묘약
교황의 눈이 인쇄물 위 활자들에 붙잡혔다.
하나 같이 알레스 정교단을 비판 혹은 비난하는 도발적인 문구들.
그중에서도 ‘이능은 신의 기적이 아닌, 마법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핵심은 그쪽이 아니었다.
“이건···.”
교황의 주름진 손이 바르르 떨리며 오래된 서신 앞에 멈춰 섰다.
“증거는 이것 외에도 많지만, 지금 보시는 그건 루치오가 성하께 보냈던 편지입니다. 설마 못 알아보겠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친애하는 성하께’로 시작되어 페이지를 빼곡 채운 글자들에서 교황은 눈을 떼지 못했다.
세자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듣자 하니 루치오가 금지된 약물로 인체 실험을 하고, 실험에서 이능을 개화한 자들을 ‘이능 신관’ 부서로 돌리는 것이 모두 성하의 승인 아래서 이루어졌다던데요.”
“아, 아닐세! 나는 그저 허가해줬을 뿐 인체 실험 같은 게 이뤄지는 줄은-”
“나는 몰랐던 일이니, 루치오를 파문시키면 사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셨나 보군요?”
비아냥거림이 분명한 말에도 교황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성하, 이능 신관의 수를 대거 늘릴 방법이 있습니다.’
그 자세한 과정을 몰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음에도 그 불안감을 억누르며 루치오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과실만 탐하려 했던 것도 사실.
교황이 수치심에 사로잡힌 가운데 청년의 매서운 질타가 이어졌다.
“언제까지 진실을 호도하고, 산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교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래도 이백 년간 이어져온 일이네. ···내 대에서 그 모든 것을 수포로 돌릴 수는-”
“자그마치 이백 년에 걸쳐 완성된 날조의 역사다, 이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뭐가 됐든 간에 정당화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는 듯한 세자르의 매서운 눈빛에 교황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지금은 이백 년 전과 다르지 않습니까.”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암흑시대’라 불린 이백 년 전만 해도, 백성은 말 그대로 무지몽매한 존재였다.
엄격히 통제되는 정보와 지식이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덕분에, 피지배 계층은 ‘무지’로 인한 두려움을 쉽사리 광기와 분노의 형태로 표출하고는 했고.
그것이 교황청의 교활한 정치적 공작과 맞아 떨어진 사건이 바로 ‘마녀 사냥’이었던 것.
“지금의 민중은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학계에서 혁명에 가까운 발견들이 이어지고 있고, 자연 현상을 경원시하는 대신 그 가운데서 규칙과 논리를 찾아내는 중이죠.”
스스로를 ‘과학자’라 칭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고, 신앙과 종교의 적폐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장도 서슴지 않게 튀어나오고 있다.
“아무리 억압한다 해도 그 시기를 조금 늦출 뿐, 흐르는 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다 스러진, 실체 없는 권위를 붙들고 계실 작정입니까?”
다 스러져 가는, 실체 없는 권위.
황금기와 비교해 위세가 줄어든 교황청의 현실을 꼬집는 말에 제수알도 3세가 주먹을 꽉 쥐었으나.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어째서 이런 지경까지 오고 말았나.’
진실이 자아낼 혼란도 혼란이지만, 그로 인해 교단의 권력이 얼마나 약화될지.
또 교황청의 권위가 얼마나 실추될 것인지.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것들이 두렵다고 지금 상황을 외면하고 단순히 도망친다면, 상황이 악화될 뿐이겠지.’
제수알도 3세는 지금 자신이 기로에 서 있다고 느꼈다.
비록 자신이 이전의 교황들만큼이나 온갖 사사로운 욕망을 채워온 ‘세속적인 종교 지도자’이라는 것은 잘 알았으나.
역사적 선택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모든 것을 나 몰라라 하고 동굴 속에 틀어박힐 만큼 못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제가 성하께 드릴 수 있는 얘기는 이것뿐입니다.”
늙은 종교인의 마음이 양 극단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때, 세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스스로 본인 대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결단력 있는 교황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지.”
“···.”
“아니면 끝까지 왜곡되고 날조된 역사를 고집하다가 추한 결말을 맞이하는 역대 최악의 지도자가 될 것인지.”
역대 최악의 지도자라니!
저런 말을 들어도 싼 상황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청년은 표현이 늘 지나치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교황에게, 세자르는 쐐기를 박았다.
“···선택은 성하의 몫입니다.”
교황은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않았고.
세자르는 침묵이 깨지길 기다리는 대신 곧장 문가로 걸어갔다.
알현실을 나오기 직전, 잠시 뒤돌아보며 덧붙였다.
“이런 기회를 드린 것에, 언젠가 성하는 제게 감사하시게 될 겁니다.”
“···.”
교황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세자르는 곧바로 몸을 돌려 나왔다.
비록 명확한 대답은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이 생겼으니까.
* * *
내가 제수알도 3세를 만나 담판을 지은 지 시간이 꽤 흘렀다.
교황청은 한동안 가타부타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추기경 회의는 물론이고, 여기저기 의견을 규합하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몇 주간 침묵을 지킨 후, 여론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을 때에야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보면 주군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가.”
디터는 존경심으로 부담스럽게 빛나는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켰다.
“신의 대리자라고 불리는 교황 성하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담판을 지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시다니···.”
교황이란 자를 두 번이나 협박한 게 놀랍다 이건가.
잠시 대꾸할 말을 찾는데, 발닉이 나 대신 말을 받았다.
“우리 도련님은 여느 필부와 다르지, 디터. 아무리 높은 분 앞에서라도 절대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으시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 던전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요.”
“그래, 우리 둘은 악마의 소행이라며 겁먹어 벌벌 떨 때도 도련님은 의젓하시지 않았나. 그땐 열네 살에 불과했는데도 말이지.”
음, 칭찬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면전에서 듣기엔 좀 낯부끄럽다.
“적당히 하자, 적당히.”
그러자.
저 두 사람의 촌극 같은 대화를 흐뭇한 얼굴로 경청하던 앨빈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만 보면 세자르 님이야말로 칭찬받는 데 익숙지 않으시다니까요.”
“···내가 언제.”
“다른 건 몰라도 교황청이 ‘마녀 사냥’이 끔찍한 살육의 역사였음을 인정하게 한 건 어디까지나 세자르 님의 공이잖아요.”
앨빈의 말대로 교황청은 바로 어제, 공식 성명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마녀 사냥’은 적법한 종교 재판이 아닌, 광기가 빚어낸 끔찍한 살육의 역사였음을 천명하며.
-당시 부당하게 심판당했던 마법사들의 지위를 복권시키고, 역사 속에서 사라진 ‘마법’의 존재를 인정한다.
-종교 개혁의 요구를 내부에서부터 진실성 있게 받아들이겠다.
물론 비판할 만한 점이 아예 없진 않았다. 이능이 사실은 마법이라든가, 루치오가 행한 끔찍한 실험의 전모는 세간에 공개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교황청의 태도를 떠올려본다면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했다.
“어쨌거나 인정할 건 인정하셔야죠, 도련님. 그래야지 제가 어디 가서 마음껏 자랑하고 다닐 것 아닙니까.”
발닉이 내게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껄껄 웃었다.
그 말에 대답 대신 그저 피식 웃자, 가신들은 저희들끼리 죽이 맞아 신나게 떠들었다.
‘뭐, 발닉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겠지만.’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런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내가 꽤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도전과제 목록 때문이지.’
앞서 말한 교황청의 성명문이 발표된 직후.
남아 있던 과제 두 개가 모두 달성되었다.
[도전과제 ‘진실 폭로자’ 달성! - 교단의 비리를 온 천하에 까발렸습니다.]
[도전과제 ‘교황 전담 협박범’ 달성! - 교황을 성공적으로 협박했습니다.]
[달성도가 ‘최상’을 기록해 보상이 상향 조정됩니다.]
[보상으로···]
거기까지는 뭐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까지도 새로운 과제가 생기지 않았다. 아니, 도전과제는커녕···.
‘상태창.’
나는 시험 삼아 상태창을 불러내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상태창이 안 된다면 가신들의 호감도 목록은 어떠려나.
아직도 저희들끼리 대화하느라 여념이 없는 가신들을 곁눈질하며 호감도 창을 불러내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것으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그간 나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저 밑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르는 데 치트키 역할을 해줬던 시스템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
어차피 이제는 딱히 필요하지 않으니 아쉽지도 않았지만.
‘많은 생각이 들긴 하네.’
마지막 도전과제가 교황을 협박해 ‘마녀 사냥’의 진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수행한 결과, 마법의 존재가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시스템의 창안자는, 내가 에스닐을 비롯한 대륙의 역사를 바꾸고, 무엇보다 마법에 얽힌 진실을 이끌어내길 바랐던 게 아닐까.'
내가 ‘세자르 레핀’이 된 것도 결국은 이 같은 목적을 위해서이고 말이지.
누군가의 의지를 대신 실현해준다는 게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많은 걸 바꿔왔다는 가신들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며.
“결과적으로 모두에게도 이롭고 내게도 이로운 일이 되었으니 상관없으려나.”
“네?”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도련님도 참 싱거우시긴, 이라고 대꾸한 발닉은 다시 앨빈과 디터와의 대화로 돌아갔다.
나는 품에 넣어두었던 작은 약병을 꺼내 보았다.
최후의 도전과제 두 개가 달성되며 받은 보상으로, 이런 메시지가 떴었다.
[보상 ‘행복의 묘약’을 수령했습니다.]
행복의 묘약이라니 대체 뭘까.
정체를 알고 싶어도 전처럼 소지품 정보를 불러낼 수도 없고.
저 ‘보상 수령’을 마지막으로 더는 메시지도 뜨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몹시 수상하긴 하지만.’
결국 이 먼 길을 돌아와 얻은 보상이 아닌가.
시스템이 내게 해로운 것을 안배해줄 리 없다는, 이제는 확고한 믿음 덕분일까.
나는 망설임 없이 약병을 열고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그때 도련님이 그 거대한 동굴을 앞에 두고 말씀하시기를···.”
세 사람이 아직도 내 무용담을 주제로 신나게 떠드는 가운데.
달콤한 물약이 혀를 타고 목 안으로 넘어갔다.
‘···.’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자 즐겁기 그지없는 발닉과 앨빈, 디터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이곳.’
레핀 가문의 적자들만 쓸 수 있는 집무실.
과거의 내게는 절대 허용되지 않았던 공간이다.
이곳을 숱하게 사용하면서도 가끔 느껴지던 그 ‘낯선 감각’이-
아예 사라져버렸다.
‘이게 묘약의 효과일까.’
김현우에서 세자르 레핀이 된 후.
한동안 나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빙의한 지 몇 년 후에도 잊을 법하면 한 번씩 내 머릿속을 강타했는데.
‘지금은 그게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아니, 더 나아가 그런 걸 애초 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머릿속이 뿌얘지는 기분이기도 한데···.
구름을 탄 듯 두 다리가 둥둥 뜨는 감각 속에서 입을 열었다.
“그거 기억나, 디터?”
“네?”
“내가 어렸을 때 이 집무실에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했었잖아.”
“···.”
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 시절 아버지가 쓰셨다는 떡갈나무 책상, 그 뒤편 벽에 걸려 있는 검과 방패 장식.
그것들을 천천히 손으로 쓸며 집무실 안을 걸어다녔다.
이 방에 오랜만에 들어와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나를 가신들이 황당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그런 것 보면 참 인생이란 게 알 수 없는 법이야. 평생 들어올 일 없다고 생각한 이곳이 어엿한 내 전용 공간이 되었으니.”
잠시 긴장하던 세 사람이 그 말에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결국은 다 도련님 손으로 해내신 것 아닙니까. 그때 몇 살이었더라, 열네 살 때 어느 날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처럼 확 달라지셨죠.”
“무용담의 시작이었군요.”
발닉의 말을 앨빈이 받은 순간,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예? 아니 그 아카데미 편입하시기 직전에 말입니다. 갑자기 성격이 변하셔서 다들 신기해했었잖습니까.”
발닉의 설명에 디터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내가 그랬다고?”
“아니, 그···.”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러려니 하고 수긍했다.
‘내게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어도 남들 눈엔 달라 보일 수도 있겠지.’
왜,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하루 하루 확 달라지지 않는가.
나 또한 그런 과정을 겪어 성격이 많이 변한 것뿐.
지금도 이 안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어린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세자르 레핀’이 들어 있다는 걸 저 세 사람은 잊어버렸겠지.
그리고 이제는···.
“나가봐야겠다.”
“네? 이렇게 갑자기요?”
당황하는 세 사람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걸 잊고 있었어.”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