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70화 (170/176)

성하 협박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 * *

루치오가 남긴 흔적들을 모두 정리한 뒤, 나는 마지막 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출발한 터였다.

다름 아닌 교황 직할령 알레스빌을 향해서.

‘교황 성하는 잘 지내고 계시려나.’

완벽한 성자처럼 생긴 외모와는 달리 속알맹이는 세속화의 끝판왕인 제수알도 3세. 그 능구렁이 같은 자가 나와 또다시 대면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들판 한가운데에서 신나게 말을 달리는데.

“네가 지시한 일은 잘 처리했다, 세자르.”

우만의 보고에 옆을 돌아보았다.

내가 그에게 지시한 일이란 ‘환각의 이능자’ 소년에 관련된 것.

‘환각을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

언젠가 그랑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어왔다. 환각은 아주 강력하게 세뇌에 걸려든 나머지, 루치오를 자발적으로 따랐던 몇 안 되는 아이라며.

‘물론 원칙을 따지자면 녀석을 처형하는 게 맞겠지만···.’

그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루치오 아래서 이것저것 나쁜 짓을 하긴 했어도, ‘환각’이 어쩌다 그런 지경이 되었는지 아는 만큼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다 계획이 있다, 그랑.’

내 말에 그랑은 희망을 품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환각’에 대한 내 계획이란 다름 아닌···.

“네가 준 그 ‘망각의 약’이라는 거, 무서울 정도로 잘 듣는 것 같더군. 루치오를 기억하냐니까 그게 뭐냐며 황당해하는 거 있지?”

얼마 전 도전과제가 대거 달성되며 보상으로 나온 ‘망각의 약’이란 게 있었다.

『‘망각의 약’(가격 : ????, 소모성 아이템)

- 설명 : 특정 키워드에 관련된 기억을 모두 지워주는 신비의 물약.

- 비고 : 물약을 먹고 나면 3시간 동안 잠들고, 깨어난 후에는 기억이 사라진다. 천연 재료로 만들어 부작용이 거의 없다.』

그 설명을 미루어보아 ‘환각’에게 쓰면 딱 좋을 아이템이었으니까.

나는 ‘루치오 페카툼’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해놓은 물약을 우만에게 넘긴 터였고, 우만은 그것을 아이에게 먹였다.

“그래? 부작용이나 그런 건 없었고?”

“전혀. 혹시나 해서 주치의에게 살펴보라고 했는데 컨디션이 아주 좋다고 하던데. 그리고···.”

우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깃들었다.

“네 말대로 그 ‘환각의 이능자’에게 ‘랑세’란 이름을 주었다. 의미를 알려주니 꽤 마음에 들어하더군.”

랑세.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 단어.

나는 소년이 루치오에 대한 기억을 싸그리 잊은 기념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길 바랐다.

“그렇담 다행이고.”

한편.

앞서 도전과제가 대거 달성되었다고 했는데,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루치오 전 추기경의 파문에 얽힌 비밀을 파헤쳤나요?

-라페스 자작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쳤나요?

-남은 이능자들의 행방을 알아냈나요?

-교단의 비리를 온 천하에 까발렸나요?

-교황을 성공적으로 협박했나요?

이 다섯 가지 중 위에서부터 세 가지가 달성이 되며 저 ‘망각의 약’이 보상으로 나온 건데.

문제는 달성이 된 후에 새로운 과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해볼까.’

들판에서 말을 달리며 또다시 도전과제 창을 불러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목록에 있는 것은 ‘교단의 비리’와 ‘교황 협박’에 관련된 과제 두 개뿐.

과제 목록이 갱신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여기에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남은 할 일이 단 두 개뿐이고, 그마저도 곧 마무리가 되겠군.’

나는 어쩐지 복잡해진 심경으로 말을 더 빨리 몰았다.

* * *

바로 그 시각, 스완 성.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 부부를 본다는 생각에 피터 3세는 며칠 먼저 도착했을 뿐더러.

성의 시종들만이 아니라 손수 데려온 인력까지 탈탈 털어가며 스완 성을 치장시키고, 먼 길을 올 아들 내외를 위한 화려한 정찬을 준비시켰다.

‘우리 사랑하는 레온!’

‘아바마마!’

간만의 부자 상봉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그간 많이 컸구나! 벌써 이 아비의 허리춤을 넘어서고 말이야!’

‘히히, 저 요즘 채소도 잘 먹어요. 테스가 그러는데, 채소 먹으면 키가 쭉쭉 큰대요!’

‘어이구, 우리 강아지. 어쩜 이렇게 기특한 소리만 할까!’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서 오가는 것치고는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있는 대화를, 테레사는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다.

식사 내내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벼운 신변 잡기적 이야기가 오갔고.

이동하느라 지친 레온이 쉬겠다며 먼저 물러난 직후, 테레사가 피터 3세를 붙잡았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커글랜드 국왕은 그녀의 눈빛만 보고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테레사가 말하려는 것이 아주 민감한 사안이라는 사실을.

[좋소.]

흔쾌히 청을 승낙한 피터 3세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역관을 대동할까 물었지만, 테레사는 유창한 커글랜드어로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정무를 보는 그 바쁜 와중에 언제 커글랜드어까지 배운 걸까.’

아무리 봐도 참 자식 결혼을 잘 시킨 것 같다.

어쨌거나.

커글랜드 국왕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운을 뗐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라니 무엇을 말하는 거요?]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나 싶어 이쪽은 긴장되건만.

막상 먼저 제안해온 테레사는 찻물을 음미하듯 들이켜는 여유를 보였다.

[홍차가 참 향긋하네요. 역시 커글랜드의 차는 세계 일품이라는 말이 맞나 봅니다.]

그럴수록 피터 3세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웬일로 레온을 데리고 스완 성으로 온다 길래 몹시 기뻐했는데, 사실은 이쪽이 진짜 용건이었던 건가.

그때, 테레사가 훅 치고 들어왔다.

[최근에 ‘루치오 페카툼’이라는 자의 사건이 화제가 되었는데,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피터 3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교황청에서 공식 파문 당한 몇 안 되는 추기경이자, 그대의 가신 중 하나였던 라페스 자작을 살해한 이능자라고 들었소.]

[잘 알고 계시군요.]

[그런데 그에 관해 무슨 할 얘기라도···.]

테레사는 홍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켠 후 고개를 들었다.

피터 3세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눈동자는 교활하고도 야심차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이야기는, 폐하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꿀꺽.

피터 3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이어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빠짐없이 경청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러니까··· 세자르 공이 교황 성하를 독대하러 갔다, 이 말이오?]

세자르 레핀이 교황청 직할령을 향해 떠나기 이전.

테레사는 이 젊은 궁내장관과 긴밀하게 논의하며 만반의 준비를 다한 터였다.

루치오의 자료를 넘기라는 교황청의 요구를 듣지 못한 척 무시한 것은 물론이고.

일부 민감한 자료들은 일부러 학계에, 그것도 급진적 성향의 학자들에게 넘어가도록 손을 썼다.

그 결과.

‘이백년 전의 마녀 사냥, 교단이 의도한 참극?’

‘교황청은 어째서 역사를 지우려 했나’

‘마법이 사라지고 생겨난 이능··· 그 정체는 과연?’

안 그래도 한창 끓어오르던 학계의 여론은 이번의 자료 유출을 기점으로 물이 넘치기에 이르렀고.

이는 에스닐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한 마디로 교황청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어찌나 몸이 달아올랐는지, 교황 제수알도 3세가 -그다지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을 직감했을 터인데도- 에스닐 왕실과 긴급 회담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즉 이번은 에스닐에서 알현 요청을 한 게 아니라 교황이 에스닐에 SOS 신호를 보낸 것.

그런 만큼···.

[아마 며칠 후면 결과가 나올 겁니다. 세자르 공이 여태껏 해온 일들로 미루어보아, 이번 회담에서도 상당히 많은 걸 얻어내겠지요.]

테레사의 말을 피터 3세는 금방 납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세자르 레핀 공 아닌가.

제 아무리 성직자판에서 정치질을 잘하기로 소문난 제수알도 3세라 해도 그 청년 앞에선 속수무책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헌데 이런 기밀 사항을 타국의 왕에게 가감없이 공개하는 저의는 무엇이오?]

이 순간만큼은 ‘이뻐 죽겠는 며느리’가 아니라 타국 지도자를 대하는 중인 피터 3세를 향해.

테레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스닐과 함께 대륙의 두 마리 맹수라 불리는 커글랜드와 손을 잡기 위해서이지요.]

그녀는 준비해온 책 한 권을 피터 3세의 눈앞에 꺼내 보였다.

[여지껏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온 교단의 권위에 대항하고,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건···.]

오래된 가죽 장정의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본 피터 3세의 눈이 커졌다.

[이능이 마법이라니, 이게 무슨···.]

[폐하.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기밀 사항입니다.]

테레사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피터 3세가 입을 꾹 다물었다.

* * *

테레사의 말대로, 교황청은 이번 루치오 사건과 관련하여 에스닐에 특별 회담을 요청했으나.

설마 ‘그자’가 특사로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세자르 레핀만큼 특사에 잘 어울리는 인물은 없었겠지만···.

“잠깐만, 또 자네인가?”

그저 개인적인 바람에 가까웠다.

제수알도 3세는 내심 알레스신에게 ‘제발 그 청년만큼은 아니게 해주십시오’라고 꾸준히 기도해온 터였으니까.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세자르는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또 자네라니, 무슨 말씀을 그리 섭하게 하십니까?”

저 편한 말투는 또 무엇인가.

알레스신의 대리자나 다름없는 그를 무슨 시골 촌부 대하듯 하는 태도에 교황은 벌써부터 부아가 치밀었다.

“하, 물론 그대가 특사로 오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아니지, 오히려 우리가 구면인 이상 더 얘기가 빠르겠군.”

역대 교황 가운데서도 ‘실용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제수알도 3세는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더더욱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세자르 공,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바라는 바입니다.”

뭐든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세자르가 여전히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루치오 페카툼이 보유했던 금서들과 그가 직접 작성한 기록들 전부를 우리 교황청에 조속히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바요.”

“그건 전에도 하셨던 얘기 아닙니까? 그리고 저희 에스닐이 이미 거절한 걸로 알고 있는데.”

능청스러운 대꾸에 분통이 터졌지만, 제수알도 3세는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그렇소, 다른 사람도 아닌 에스닐의 여왕 테레사 1세가 직접 거절 의사를 전했지. ···하지만 한 나라의 왕 또한 결국은 우리 교단의 신도 중 하나.”

제수알도 3세는 근엄하고도 진지한 눈빛으로 상대를 마주 보았다.

“끝까지 요구에 불응한다면, 교황청 또한 그대의 주군을 더는 관대하게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오.”

“어라, 지금 성하께서 저희 여왕 폐하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라는 적나라한 단어에 교황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혀, 협박이라니 무슨 말을-”

“와, 세상에. 알레스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성하께서···.”

세자르는 제수알도 3세의 목소리와 몸짓을 고대로 모사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주군을 더는 관대하게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오!’ 같은 말씀을 직접 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지 뭡니까.”

그러며 가벼운 농담이었다는 듯 허허 웃는 세자르.

그 반반한 낯짝을 보니 제수알도 3세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뒷목을 잡는다는 표현이 진짜로구먼.’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속을 애써 추스리는데.

‘에스닐의 최연소 궁내장관’은 금세 낯을 싹 바꾸며 말을 이었다.

“지금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착각이라니?”

“성하께서 협박해보신 경험이 많지 않으셔서 모르시나 본데.”

세자르 레핀이 교황을 향해 비스듬한 시선을 보냈다.

···교황 입장에서는 몹시 고깝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자고로 협박이라 함은 상대의 약점을 쥔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하. 밑도 끝도 없이 위협만 한다고 상대방이 주눅이 드는 게 아니다, 이 말이지요.”

“그게 무슨-”

“보시지요.”

세자르는 담담한 태도로 두툼한 인쇄물 더미를 교황에게 넘겼다.

교황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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