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지워버려야 할 기록
* * *
세자르와 그랑, 우만이 한창 루치오 일행과 대치하고 있을 무렵.
오전에 달리아 양과 정원 산책을 무사히 마친 리암은 그녀에게 함께 외출할 것을 제안했다.
‘외, 외출이요?’
갑작스러운 말에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는 것을 보니 단순한 외출로 생각하지 않는 듯
했으나.
리암은 오해하도록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면 어차피 금방 풀릴 터였으니까.
“이, 이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진 달리아의 얼굴 앞에서 리암은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시신이라고요?”
여기까지 데리고 오며 많은 고민을 했다.
아무리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필수 절차라고는 하지만, 이 나이대의 아가씨에게 아버지의 시체를 직접 보여주는 게 맞는 걸까 싶어서.
“···그게.”
그런 착잡한 마음에 리암이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는데, 여태껏 물러서 있던 카렌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카렌 돌로레스라고 합니다, 달리아 양.”
“카렌 양···.”
눈물로 글썽글썽해진 눈을 마주 보며 카렌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몇 년 전, 부친께서 초대해주신 적이 있었는데. 제 얼굴이 기억나진 않으시지요?”
자연스럽게 소개를 마친 카렌은 달리아를 잠시 자리에 앉히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세자르가 어째서 이곳에 들렀는지.
파문당한 추기경 루치오가 어떤 이인지.
그가 어떤 수를 써서 자작가 안으로 들어왔고, 라페스 자작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런!”
자초지종을 들은 달리아의 낯빛이 또다시 하얗게 질렸지만.
카렌은 차가워진 그녀의 손을 꼭 붙들며 기운을 북돋아줬다.
“달리아 양, 냉정을 유지하셔야 해요.”
카렌의 말이 힘이 되었는지 달리아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 양이 날카로운 눈으로 확인해주셔야 루치오 페카툼의 범죄를 입증할 수 있어요.”
“···해볼게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리암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달리아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까보다 훨씬 진정된 눈빛이었다.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목숨을 해쳤다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라페스 자작의 시신이 자리한 안치실로 향했다.
오밀조밀하고 귀여운 얼굴에서 평소 같지 않은 기백이 느껴졌다.
“반드시 진상을 확인해봐야죠.”
카렌과 함께 안치실로 들어가는 달리아의 뒷모습을, 리암은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잠시 후, 새된 비명과 함께 구토하는 소리가 났다.
“우욱···.”
리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의 죽음만으로도 충격적인데, 하물며 신원을 속이려고 머리를 훼손한 시신을 마주하는 상황이니.
‘그래도 그 외의 사지는 멀쩡해서 다행이야. 이 정도만 되어도 확인은 가능하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카렌이 얼마나 놀랍던지.
리암은 달리아가 충격으로 기절하면 어쩌나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으니.
“···아버지가 맞아요.”
곧바로 안치실 문이 열리며 달리아가 굳은 얼굴로 걸어나왔다.
비록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안색에 온몸이 후들거렸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확실한가요?”
카렌의 물음에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어머니의 이니셜이 새겨진 결혼반지예요.”
달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는 최고의 아버지였던 자작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이 반지는 너희 엄마와 결혼한 후로 단 한 번도 빼지 않은 물건이란다.’
손가락을 자르지 않는 이상 뺄 수 없다고 농담처럼 말했던 그 반지.
그것이 시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분명 끼워져 있었다.
“그러니 그 시신은··· 내 아버지, 콘다 라페스의 것이 맞아요.”
달리아는 끝끝내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채 신원 확인을 마쳤고.
‘달리아 라페스 양.’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에도, 그녀가 보여준 강인한 모습은 한동안 리암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 *
라페스 자작 사건, 아니 루치오 페카툼 사건이 마무리된 지 약 일주일이 흘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대륙 최고의 대부호가 소리 소문 없이 살해당한 사건이니만큼 민감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겠지만.
‘세자르 공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 흉악한 계획의 다음 희생자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리암과 카렌이 일처리를 잘한 것인지, 달리아 양이 적극 나서서 목소리를 낸 덕분에 큰 잡음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자작을 살해하여 그 행세를 하려 했던 루치오 페카툼의 계획은 나라 안팎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미 내 손에 죽기는 했지만) 루치오는 공공연한 범죄자로서 사후에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가 데리고 다닌 어린 이능자들의 처분 또한 관심거리였는데.
‘제발, 세자르 님. 그 아이들에게 선처를 베풀어주세요.’
그랑이 나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빌었을 뿐 아니라, 사실 그러지 않았어도 내 선에서 최대한 노력해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이 중 세 아이를 그대의 수하로 보내달라?”
테레사 여왕의 말에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요청한 인물은 ‘증폭’과 ‘방해꾼’, 그리고 ‘환각’.
‘증폭’과 ‘방해꾼’은 그랑과 가장 친한 아이들이기도 할 뿐더러, 여러 이능자를 거느리고 있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전력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환각’은···.
“그거야 문제없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드려는 순간, 테레사가 시원하게 승낙의 말을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무슨,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쪽은 이쪽인데.”
테레사는 연신 싱글벙글하며 진척된 상황을 알려주었다.
앞서 붙잡혔던 이능자들이 어떤 식으로 관리가 되고 있고, 자신들의 이능을 어떻게 적재적소에 쓰고 있는지.
“애들이 상당히 협조적이던데. 보아하니 대공 아래에 있을 때는 끔찍한 일을 많이 겪은 모양이야.”
여왕은 지나가듯 대수롭잖은 어투로 말했지만 목소리 너머에서 미세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녀 역시 얼마 전만 해도 어린 아이였던 만큼 이능자 아이들이 겪은 것이 남일 같지 않았겠지.
“라페스 자작 살인사건은 에스닐 국경 안에서 일어난 일인만큼 적법한 절차를 통해 구형이 선고되었지만···.”
여왕의 말이 이어졌다.
“루치오 전 추기경이 남긴 증언이나 회고록, 서류 등은 국내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야. 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그렇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교황청에 공식 파문을 당한 전 추기경이자 수많은 암살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국제적 범죄자, 루치오 페카툼.
그자의 목숨은 비록 내 두 손으로 직접 끊었지만, 그자가 뿌려둔 씨앗은 대륙 여기저기에 널리 퍼져 있었다.
테레사는 한층 성숙해진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세자르 공, 그대 의견은 어떻지?”
의견이 어떻냐.
단순하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한 질문이었다.
“교황청과 맞설 것이냐, 아니면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없던 일로 할 것이냐. ···그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테레사가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은···.”
* * *
“어우, 어깨가 다 쑤시네요.”
앨빈이 본인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오늘은 그럴 만도 한 것이 새벽부터 시작해 꽤 많은 시간을 꼬박 노동에 바쳤기 때문이다.
“요즘 수련이 너무 부족했던 건 아니고?”
“그다지 그런 건···.”
“디터 말로는 앨빈 네가 훈련에 참석 안 한 지 꽤 됐다고 하던데.”
지나가듯 던진 말에 앨빈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할아버지를 닮아 타고난 검술 센스를 자랑하지만, 본인의 성향이 워낙 학자 타입이다 보니 점점 더 그쪽과 멀어지는 듯하다.
“뭐, 상관없어. 훌륭한 기사는 많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내게는 앨빈이 학자로서 활약해주는 편이 낫다.
“···그래도 체력 단련은 꾸준히 하겠습니다.”
그러든가, 그렇게만 대답하고는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대리석 열주가 인상적인 고대풍 신전. 이 거대한 건축물 안에는 온갖 기밀 서류가 가득했다.
‘이곳이 바로 루치오 놈이 얘기했던 고대 던전.’
본래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으나.
루치오가 알려준 주문을 외우자 땅이 쩍 갈라지며 그 안에서 신전이 솟아났다.
‘으아악!’
‘귀신, 아니 악마의 소행이다!’
‘사람 살려!’
빠른 작업을 위해 데려온 인부들은 이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자빠졌지만.
이미 또 다른 고대 던전을 경험한 적 있는 나나 앨빈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지금은 정리 작업이 얼추 마무리된 시점.
“헌데 세자르 님, 요즘 기분은 괜찮으세요?”
옆을 돌아보자 앨빈은 무언가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괜찮다니 뭐가?”
“아니 그게···.”
나는 그의 속내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괜찮아.”
“정말로···.”
“정말이라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자, 그제야 앨빈은 안심이라는 듯 따라 웃는다.
아마도 예전에 내가 브렉 헬리오스를 죽이고 나서 침울해했던 것을 떠올렸던 듯하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더라.’
나의 첫 번째 숙적이었던 브렉 헬리오스.
결국 필연적인 결말이었음에도, 내 손으로 직접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그 감각이 참을 수 없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그때의 내가 여전히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닌 ‘김현우’였다면.
이곳에서 수많은 일을 겪으며 언젠가부터 사람의 죽음은 일상 속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쟁을 몸소 경험하고 난 후에는 진정으로 ‘레핀 가문의 세자르’가 되었음을 실감했으니까.
“그러니 정말로 괜찮다, 앨빈.”
내 말에 앨빈은 대답 대신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눈앞에 쌓인 연구서들로 향했다.
“근데 루치오 전 추기경이 천재이긴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앨빈과 내가 던전 안팎을 수없이 오가며 특별히 골라낸 것들로, 루치오 페카툼이 직접 저술한 연구서였다.
여태껏 읽은 마도서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마법 이론을 정리한 것은 물론이요, ‘이능자를 만드는 약물’을 비롯해 엄청난 효능을 지닌 약물들의 조합식까지 적어놓았다.
“대단한 동시에 단단히 미친 놈이었지.”
“그건 그렇죠.”
헌데 그 대부분이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합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린 양의 생피로 만든 무언가라든가, 산 사람의 피부를 뜯어내어 만든 무언가라든가.
고대 주술사들이 저주를 걸 때에나 썼을 법한 사악한 수법으로 가득해, 읽기만 해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그냥 연구만 한 게 아니라 그걸 실행에 옮겨서 어린애들에게 직접 먹인 인간이야.”
“···그랑은 아직도 가끔 악몽을 꾸는 것 같더라고요.”
덩치 큰 어린애를 떠올린 앨빈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고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여기 담긴 술식이 제 아무리 혁신적이고 놀라운 것이라 해도···.
“이런 것들은 절대로 후대에 남겨져서는 안 돼.”
“···어?”
“깨끗이, 재도 남지 않을 정도로 불태워버려야지.”
“네?”
앨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 어떤 희생자를 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앨빈은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저걸로도 부족한가 보지?”
“네?”
나는 피식 웃으며 다른 쪽에 쌓인 한 더미의 서책을 가리켜 보였다. 내가 고용한 인부들이 던전 안으로 들어가 꺼낸 것들이다.
여태껏 나와 같이 다니느라 미처 저 책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던 앨빈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와, 저게 바로···.”
“그래. 페카툼 가문의 비기는 비록 아니지만, 당시의 마법사들이 써낸 마법 관련 서적이지.”
본격적인 학술서가 아니다 보니 마도서라고 부르기엔 뭣하지만.
마법의 기본적인 원리조차 사장된 지금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거다.
“그럼 두 말 하지 않고.”
나는 가져온 기름등에 붙을 붙여 루치오의 연구 자료에 던졌다.
화르륵.
얇고 바스락거리는 종이더미에 금세 불이 붙었고.
“···묘한 기분이네요.”
날름거리는 불꽃이 일생 일대의 기록들을 집어삼켰다.
타닥 타닥 불티 튀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점차 커지며 회색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고, 바스락거리는 잿가루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어딘가 고요하고도 적적한 광경이 마치 루치오의 손에 희생당했을 어린 아이들을 추모하는 듯 보였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드네, 라며 고개를 돌리는데.
“아, 그런데···.”
앨빈이 조심스레 물었다.
“교황청과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 자료들을 내놓으라고 교황청에서 압력을 행사하는 것 같은데···.”
귀하디 귀하신 교황 성하까지 몸소 나서서 에스닐 왕실에 압박을 가하는 중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테레사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한 번 더 협박해야지.”
그리고 테레사는 그 말에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었더랬다.
‘역시 나의 충신, 세자르 공다운 해결책이야! 정말로 믿음직하군.’
그녀와는 여러모로 죽이 잘 맞는다니까.
그거야 그렇고.
“잠깐만, 또 자네인가?”
어쩌다 보니 교황의 전담 협박범이 되어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