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선택은 후회를 부른다
부웅! 슝!
루치오의 검은 단순하고도 실용적이었다.
허례허식 따위는 조금도 없는, 오로지 생존을 위한 검술.
벽에 걸어둔 것이지만 꾸준히 관리했는지 날카로워 보이는 검날이 내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지만.
“느려.”
그 검을 여유롭게 쳐낸 뒤 루치오의 허점을 수차례 노렸다.
일부러 간을 보듯 천천히 파고들었지만, 오랜만에 검을 잡은 탓인지 루치오는 벌써부터 힘겨워 보였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막는 거냐!”
“질문치곤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않나?”
약 올리듯 찌른 검을 놈은 혼신의 힘을 다해 쳐냈다.
“어째서 정당한 복수를 방해하는 것이냐!”
외침과 함께 검이 붕- 하며 내 눈앞을 갈랐다.
무의식적으로 물러선 덕에 피할 수 있었지만.
‘살기가 느껴지는 검.’
방금 전과는 다르다.
나는 자세를 고쳐 루치오를 진지하게 상대하기 시작했다.
“네가 아무리 서자라 해도 반쪽은 공작가의 핏줄이 아닌가! 너희 같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과거 용병 시절의 검 솜씨를 되찾기라도 하듯, 루치오의 검이 좀 더 빠르고 매서워졌다.
챙! 챙캉!
두 개의 검이 세차게 부딪쳤다.
온 힘을 실은 일격에 손목이 얼얼할 정도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버러지 같은 자들의 마음을 네가 어찌 알겠나!”
울분에 찬 루치오가 사력을 다해 덤벼들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죽음을 각오한 맹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제아무리 이름을 날리는 검객이자 용병이었다 한들, 이미 몇 십 년 전의 영광일 뿐.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따라오긴 무리였다.
“어째서 널 방해하느냐 물었나? ···답은 간단하다.”
내 옆구리를 노리는 검을 가볍게 받아낸 뒤.
“네 심정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고, 같잖은 신세 한탄에 관심도 없어. 그저···.”
나는 전력으로 부딪치는 대신 그의 검을 부드럽게 미끄러뜨리며 되받아쳐냈다.
···이 기술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군.
“네가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리포스트 쉬르 르 페르, 즉 검신을 이용한 반격기로 그 힘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자.
“큭!”
손목 위로 전해지는 충격에 루치오가 고통의 신음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균형이 흔들리는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 * *
루치오는 제 앞을 막아선 청년의 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 방어해도, 언제든 좁디좁은 틈을 찾아내 그 사이로 공격해 들어왔다.
‘치열한 건 나 혼자뿐인가.’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청년을 감탄하듯 바라보았다.
저 혼자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타기라도 하듯, 세자르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방금 전은 분명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었거늘.
“네가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청년은 무미건조하게 대꾸하며 그것을 가볍게 받아쳐냈다.
투캉!
우아하고도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으나 그 위력은 상당했다.
“크윽.”
손목이 찌르르 울리는 바람에 루치오는 하마타면 검을 놓칠 뻔했다.
흔들리는 균형을 간신히 붙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상대는 이미 다음 번 공격에 나선 터였다.
황급히 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찰나 같은 1초가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아, 안 돼···.”
순식간에 생겨버린 무방비한 공간으로 세자르의 검이 불쑥 난입했고.
그대로 루치오의 왼쪽 가슴을 향해 들어왔다!
마지막 순간 몸을 비튼 덕에 가까스로 심장은 비껴나갔지만.
“커억···.”
이미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건지기 어려운, 치명상이었다.
제 입에서 튀어나온 밭은 신음이 루치오의 귀에는 남의 비명처럼 낯설게 들렸다.
무릎이 풀려 바닥에 무너져내리는 그의 몸 위로 세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치오, 너는 너무 위험하다. 법의 심판을 받게 한답시고 널 데려갔다간 나와 내 주군, 가신들의 목숨을 또다시 위협하겠지.”
“크, 쿨럭···.”
“끝없는 혼란을 만들어낼 자의 싹을 미리 잘라내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나?”
루치오는 의식이 흐릿해지는 가운데서도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를 보고도 무표정한 청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자 또한 나와 비슷한 부류이로군.’
목숨을 빼앗는 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해진 인간.
어쩌면 자신이야말로 괴물이나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는 것을, 루치오는 생사의 문턱에서 깨닫는 중이었다.
“그, 그래 봤자··· 너 또한 나와 다르지, 컥, 않다···.”
어차피 죽을 목숨.
그는 할 말은 전부 다 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너도 교황청의 개가 아닌가··· 나를 제거해서 증거를 인멸할-”
“그럴 생각은 없는데?”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청년의 말에 루치오의 눈이 뒤늦게 커졌다.
“그 비밀 던전의 위치가 어디지?”
“···.”
“네 부친이 알려주셨다는 던전 말이다. 너희 가문에서 전승되었다는 마도서는 어디에 뒀지?”
“어째서···.”
“그 외에도 증거가 될 만한 게 있으면 다 털어놓도록. 가급적 서면 형태가 좋아.”
루치오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위협이 될 만한 증거를 사전에 없애버리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그러한 의혹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세자르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말하지만 증거를 인멸할 생각은 없어. 오히려 폭로하려는 쪽에 가깝지.”
“그게 무슨···.”
“루치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
루치오는 제 생명이 천천히 꺼져가는 가운데서도 세자르의 말에 집중했다.
세자르 레핀.
레핀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보기 드문 공을 세워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는 저 청년은,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물론 내가 총대를 메고 앞장 설 생각은 없어. 다만.”
···다름 아닌, ‘진실’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것 말이다.
“민감한 비밀이 담긴 자료가 있다면, 그걸 온 천하에 까발려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지.”
세자르를 바라보는 루치오의 눈빛이 천천히 바뀌어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의문을 느끼고 있다. 학계에서는, 특히 과학자들은 이능이 신이 내려준 기적이 아니라 유전 능력에 불과하다고 보며. 일부는 이백 년 전 마녀 사냥으로 역사에서 지워진 ‘마법’이 이능의 정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하지.”
“···!”
“세상은 바뀔 거다, 루치오.”
튀어나올 듯 커진 루치오의 눈을 보며 세자르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대가 그토록 증오하던 교단은 결국 독점적 권한을 내려놓게 될 것이고, 수많은 비판과 비난에 맞서야만 할 테지. 영원한 젊음이란 존재하지 않듯, 불멸의 절대 권력 또한 존재할 수 없으니까.”
루치오는 그 말에 대꾸하려다 피를 토하고 말았다.
제 입에서 흘러나온 선혈, 그리고 가슴께를 뜨겁게 적시는 피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제야···.”
죽음을 눈앞에 둔 그 순간.
수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매 순간마다 정당화, 혹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잘못된 선택을 하고.
남의 목숨을 취하고 자신보다 더한 약자들의 머리를 밟고 올라가는 데 아무 거리낌도 없던 자신의 모습을.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 수많은 기로에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힘들더라도, 멀리 돌아가더라도 최소한의 긍지를 지켜냈다면···.
“나 역시 안타깝군, 루치오.”
저도 모르게 후회의 한숨을 토해낸 순간, 세자르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복수와 진실을 위해 싸워왔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넌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비겁자에 불과하다.”
“아···.”
“네 목표가 치졸한 신분 상승 따위가 아니라 마법의 존재를 알리는 거였다면···.”
여태껏 무감정하던 청년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내 손에 네 피를 묻히는 일은 없었을 테니. ···아무리 익숙해진다 해도, 이런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그 순간.
루치오는 결단을 내렸다.
“내 아비가 알려준 던전의 위치는···.”
모든 극비 서류의 존재를 알리고 그 위치를 상세히 짚어주고 나서야.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 사내는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 * *
마비 침을 맞고 기절해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우움···.”
그것은 우만의 손에 붙들렸던 두 아이, ‘증폭’과 ‘방해꾼’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한 군데도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외려 그간 부족했던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듯 머릿속이 개운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묶여 있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다.
“여긴 어디지.”
“라페스 자작저인 건 분명한데···.”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하인 숙소 따위가 아니었다.
깔끔하고도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자리한 것을 보니 귀빈에게 내어주는 손님방 같았다.
그렇게 생각 외의 풍경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다들 몸은 괜찮아?”
아이들은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는 쌍둥이 이능자!”
대공의 명령을 받아 홀몸으로 암살 임무에 나선 쌍둥이 이능자.
덩치는 웬만한 성인도 저리 가라할 정도이지만, 실제 나이는 열두 살에 불과한 데다 마음도 약하고 눈물도 많았던 소년을 아이들은 잊지 않은 터였다.
“증폭, 방해꾼. 너희도 괜찮니?”
“쌍둥이 오빠···.”
그랑과 제일 가깝게 지냈던 ‘방해꾼’이 제일 먼저 달려들었다.
열 살짜리 소녀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덩치 큰 소년의 품에 안겼고.
“살아 있었잖아, 형.”
‘증폭’ 또한 훌쩍거리며 걸어와 그랑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랑은 어색해하면서도 두 아이를 토닥여주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은 되지 않지만, 이 눈물 겨운 상봉에 나머지 아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가운데.
그랑의 덩치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이능자 아이들 사이에서 놀람의 신음이 터져나왔다.
“당신은···.”
새카만 검은 머리에 푸른 눈, 섬세한 형태의 이목구비.
저 얼굴을 잊을 리 없다.
칼 오프러스 대공의 지시 아래, 루치오 님이 몇 번이나 초상화로 보여주셨던 증오스러운 적의 얼굴이 아니던가.
“세자르 레핀!”
그 이름을 외친 것은 제일 늦게 깨어난 소년, ‘환각’이었다.
이능자 아이들 가운데서도 나이가 가장 많아 대장 노릇을 했던 소년은 그랑을 분노에 가득 차 노려보았다.
“쌍둥이 이능자, 네가 우릴 배신했구나.”
그 이글거리는 눈빛 앞에서도 그랑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네가 우릴 팔아넘겼잖아! 저 혐오스러운 적의 노예가 되어서 말이야!”
“노예 따위가 아니야, ‘환각’.”
그랑은 달달 떨어대는 ‘증폭’과 ‘방해꾼’을 꼭 붙들어주었다.
“나는 세자르 님의 정식 가신으로 인정받았어.”
웅성웅성.
아이들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이능명으로 불리던 과거와는 달리 ‘그랑’이라는 이름을 직접 하사받았-”
“그래 봤자 네가 배신자라는 건 변하지 않아!”
‘환각’은 씩씩거리며 그랑의 말을 잘랐다. 동의를 구하듯 다른 이능자 아이들을 돌아보았지만.
“‘기만’, ‘광기’, 너희도 말해봐! ‘쌍둥이’가 우릴 배신했다고 다같이 비난했던 건 기억나지 않나 보지?”
이름이 불린 아이들은 고개를 수그리며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환각’은 여론을 움직이길 포기하고 다시 그랑에게 초점을 맞췄다.
“넌 루치오 님을, 우리 모두를 배신했다. 그리고 우리 정보를 팔아넘긴 대가로 저 빌어먹을 놈의 가신이 되었겠지, 안 그래?”
그랑은 고개를 저었지만 ‘환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주인은 루치오 님뿐이야. 네가 그분의 뜻을 어긴 이상, 네게 남은 결말은 죽음 외에는-”
“우리에게 주인 같은 건 없어, ‘환각’.”
“···뭐?”
그때.
세자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꼬맹이들, 긴장 풀어라. 너희의 주인을 자처했던 루치오 페카툼은···.”
생각 외로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이들이 안심하며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죽고 없으니까.”
“···!”
‘환각’의 눈이 커졌다. 소년은 충격을 받은 듯 부들부들 몸을 떨었지만.
나머지 아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다들 놀라서 경악의 신음을 뱉었지만, 충격 받은 것은 한순간뿐. 곧이어 안도의 감정이 그들의 얼굴을 지배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어쩔 줄 몰라하는 ‘환각’을 향해 그랑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환각’?”
“···.”
“루치오는 주인을 ‘자처’했을 뿐, 우리에게 애초 주인 같은 건 없었어. ···의미도, 명분도 없는 충성을 고집하다가 애꿎은 목숨을 버리겠나, 아니면···.”
소년은 전보다 훨씬 맑은 눈동자로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나와 같이 에스닐로 가지 않겠어?”
아이들의 마음이 세차게 흔들린 그 순간.
···‘환각’이 불시에 이능을 사용했다.
“어디 네 마음대로 될 줄 알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환각의 미로 속에 가둬놓기 위해!
그러나.
소년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이능이 순식간에 사그라든 것을 깨달았다.
“어이, 꼬마. 발악은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옆을 돌아보니 문제의 ‘세자르 레핀’이 자신을 향해 어깨를 으쓱한다.
“대, 대체 어떻게!”
“너는 좀 더 잘 필요가 있겠다.”
“그게 무슨, 크윽.”
그대로 날아온 마비침에 ‘환각’은 또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입을 벌린 아이들을 향해 그랑이 얼른 말했다.
“자, 어떻게 할래?”
아이들 중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밝아진 얼굴로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