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고 왔는데?
* * *
집사장이 나를 찾은 것은 조찬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세자르 공, 세자르 공. 자작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그것 참 다행이로군.
집사장이 설득에 성공한 건지, 루치오 놈이 마음을 바꿔먹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집사장의 안내를 받아 자작의 침실에 들어섰다.
“세자르 공, 앉으시지요.”
집사장이 나를 침실 가운데에 자리한 탁자로 안내하고 차를 따를 때까지도, 루치오 놈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침대 휘장 뒤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로만 놈의 인기척을 파악할 뿐.
그래서 집사장이 나가자마자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루치오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으로 멈춰 있었지만.
“이거, 간만에 찾아온 귀한 손님을 두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그렇게 말하며 휘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저자가 루치오···.’
루치오 페카툼.
한때 유명한 검객이자 용병으로 승승장구했으며, 밑바닥에서 출발해 추기경의 자리까지 오른 비범한 인물.
전설이나 다를 바 없는 화려한 소문에 비한다면, 루치오의 외모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5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과거에 검을 잘 쓰는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이답게 나이에 비해 건장한 체구를 자랑했다.
인생 초년에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까맣게 탄 얼굴은 추기경이라기보단 농부의 그것에 가까워 보였다.
인상만 보면 이 이상 온화해 보일 수 없었으나···.
‘그 속내는 칼 오프러스 대공 이상으로 교활무도한 자다, 이 말이지.’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어린애들을 데려다가 실험체로 삼은 잔악무도한 인물이 아닌가.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일부러 놀란 척을 했지만 루치오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그러한 예상대로, 그의 전신에서 이제는 꽤 익숙한 강렬한 힘이 흘러나왔고.
‘이능’이 내게 닿기 직전, 메시지가 떴다.
[‘무효화의 목걸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2단계 스킬 ‘기억 조작’이 무효화됩니다.]
그랑이 말했던 대로였다.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이능에 걸려들었다면 나는 저자를 꼼짝없이 ‘라페스 자작’으로 인식했겠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연기를 해줘야 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며 일부러 걸려든 척을 해봤다.
애꿎은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입을 벌린 채 멍을 때리자, 루치오 놈이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이능에 걸려든 모습을 가장한 채로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근데 그쪽은 라페스 자작이 아니라···.”
나는 자연스럽게 안쪽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미리 준비해둔 권총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온 대륙에 수배령이 내려진 범죄자, 루치오 페카툼이 아니시던가?”
그것을 꺼냄과 동시에 철컥, 하고 장전하여 그대로 놈의 얼굴을 겨눴다.
루치오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새된 신음을 흘렸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나는 실실 웃으며 자못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비록 명중률은 높지 않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못 맞추는 게 바보일 테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살해한 라페스 자작의 시신은 이미 내 수하가 회수해놨다. 증거를 인멸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언제까지 발뺌할 생각일지는 모르겠는데, 연극은 끝났어. 아, 좀 더 근본적인 설명이 필요한가 보지?”
금속 총구가 좀 더 가까워지자 루치오가 몸을 흠칫 떨었다.
놈의 코앞에 총구를 들이댄 채 나는 핵심을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네놈의 이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야, ‘기억 조작의 이능자’ 씨.”
루치오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능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생각 못 해본 눈치였다.
“설마, 이능자 육성 기관을 운영해온 주제에 ‘무력화 이능’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루치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 말로만 듣던 무력화 이능자라니··· 과연, 그래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뭐라 뭐라 중얼거린다.
그간 에스닐이 오프러스 공국의 음모를 막아낼 수 있었던 연유를 이제야 짐작한 모양이다.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던 루치오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애송이.”
“애송이란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나 보지?”
“···이 자작가는 이미 내 부하들의 손아귀에 있어. 네가 데려온 가신들 몇 명 가지고선 손 쓸 수 없을 거다.”
“흠, 그래?”
제 앞에 겨눠진 총구 앞에서도 루치오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과연 교황청을 제 뜻대로 흔들고 한 나라의 군주를 좌지우지하던 계략가답다,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은 아주 좋은데 말이야.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지 않을까?”
내 조롱 섞인 말에도 루치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부하들은 나만큼이나 강력한 이능을 지닌 자들. 너야말로 좋은 말로 할 때 그 권총을 내려놓는 편이 나을 거다.”
그 말과 함께 슬쩍 옆을 돌아보던 루치오가 날카롭게 외쳤다.
“방해꾼! 지금이다! 저자의 무력화 이능을 제지해!”
타인의 이능을 방해하는 자.
놈은 내 ‘무력화 이능’을 ‘방해’하여 수포로 돌리고.
“그리고 증폭! 나를 보좌하도록!”
내게 다시 한 번 ‘기억 조작 이능’을 걸 속셈이었다.
···그런 순간적인 판단력과 순발력, 거침없는 실행력은 다 좋은데 말이지.
“루치오, 네놈의 계획은 이미 실패했다.”
“뭐?”
그 원인을 따지자면 일단 첫 번째.
내가 지닌 ‘무력화의 힘’은 엄밀히 말하면 이능이 아니라 마도구의 효력인 만큼 ‘방해의 이능’으로 억제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두 번째는···.
“이 녀석들을 찾나 보지?”
나와 루치오가 마주 앉은 탁자 옆으로 청년 하나가 벽을 뚫고 나타났다.
“흐익!”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등장에 비명을 지를 뻔한 것도 잠시,
루치오는 청년의 손에 들린 두 아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 살 언저리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는데, 우만이 카렌의 마비침으로 기절시킨 모양이었다.
“방해꾼, 증폭, 너희가 어째서···.”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어때야 할지, 이 안쪽 통로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길래 그냥 데리고 들어왔지.”
“잘했어, 우만.”
내가 씩 웃으며 치하하자, 루치오가 못 믿겠다는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저자가 네··· 가신이라고?”
“설마 이능자를 부하로 둔 게 당신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루치오는 잠시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이내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저자가 잡은 두 명은 새 발의 피에 불과-”
“총 여섯 명, 맞나?”
그 말에 루치오가 입을 다물었다.
“하인들 틈바구니에 용케 섞여들게 했던데, 그래 봤자 소용없어. 지금쯤 다 기절해 있을 테니까.”
“너희가, 너희가 무슨 수로!”
나는 놈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쌍둥이 이능자를 기억하나?”
“···!”
루치오의 얼굴에서 핏기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 *
세자르와 우만이 루치오를 상대하던 바로 그 시각.
롯과 발닉은 사용인들이 입을 법한 옷차림을 한 채 자작가 하인들 사이에 섞여든 상태였다. 그랑이 지목했던 ‘이능자’들의 동태를 그 둘이 멀찍이서 살펴보는 가운데.
사용인 숙소에 갑작스레 나타난 누군가의 모습에 하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나 좀 보지 않겠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인자한 중년의 남성.
다름 아닌 ‘루치오 페카툼’의 모습에 그의 부하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루치오의 존재를 모르는 사용인들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루치오의 부하들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잠자코 그를 따라 나섰고, 나머지 하인들은 황당하다는 듯 입만 벌렸다.
···루치오의 부하들 뒤에 롯과 발닉이 따라붙었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인적이 드문 뒷마당으로 나온 후에야 부하 중 하나가 억누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치오 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에 직접 얼굴을 드러내시다니···.”
“환각.”
“네.”
“너는 언제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였지.”
“···루치오 님?”
“그리고 제일···.”
루치오 페카툼, 아니 루치오의 얼굴을 한 그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눈치가 빠르기도 하고 말이야.”
“너, 너는 설마-!”
‘환각의 이능자’가 미처 다음 말을 내뱉기도 전, 그랑의 손이 움직였다.
“끄윽···.”
마비침에 당한 ‘환각’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어···?”
“루치오 님이 어째서···.”
그랑의 눈짓으로 롯과 발닉이 나머지 부하 중 한 명을 더 기절시킨 직후.
이제는 확실히 이상한 낌새를 챈 루치오의 부하들, 아니 아이들이 그랑을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얘들아.”
···천천히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그랑의 모습에, 아이들 사이에서 새된 경악의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동안 힘들었지?”
그랑이 눈시울을 붉히며 한 말에, 나머지 아이들이 소리 죽여 울음을 터뜨렸다.
* * *
“자, 다 됐다.”
우만이 가져온 밧줄로 루치오의 포박을 마쳤다. 루치오는 등 뒤에서 두 손이 단단히 묶인 채였다.
“난 이만 나가보지. 복도에서 대기할 테니 필요하면 불러.”
나와 루치오 사이에 할 얘기가 많다는 걸 아는 우만이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루치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세자르 공, 지금 당신은 아주 잘못하는 걸세. 평민 졸부 출신 자작의 목숨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가 내 손 안에 있다고.”
“어디 계속 해보시지.”
“하, 나와 칼 오프러스 대공이 조력 관계였다는 것도 알고 있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루치오가 말을 이었다.
“그, 그것도 그렇지만··· 제수알도 3세! 교황 성하가 비록 20년 전에 친히 나를 파문시키긴 하셨지만, 그분은 얼마 전만 해도 나와 연락을 주고받으셨다. 어째서라고 생각하나?”
“나야 모르지.”
루치오는 그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교황청의 기밀이 내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아, ‘이능자를 만드는 물약’ 말인가? ···근데 그거야.”
나는 루치오에게 한 발 다가갔다.
놀란 나머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놈을 노려보았다.
“네가 만든 거잖아, 이 썩을 놈아.”
“···!”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루치오는, 마침내 한 풀 꺾인 기세로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온 거냐?”
“네놈이 페카툼 가문의 최후 생존자인 것. 그리고 그 페카툼은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진 ‘마법사’ 가문이라는 것.”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두 눈을 껌벅이는 루치오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교황청에서 신의 기적이라 꾸준히 주장해온 ‘이능’이란 곧, ‘마법’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는 것 정도가 되려나? ···그러니까 이젠 네 입으로 자백할 차례다, 루치오.”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는 놈을 보며 쐐기를 박았다.
“네놈의 대답 여하에 따라 내 앞으로의 행보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중년의 사내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고.
루치오 페카툼.
마법사 가문 최후 생존자의 고백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