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의 티타임
“어, 아, 아가씨?”
집사장은 당황한 기색으로 그쪽을 돌아보았으나 두 사람은 이미 사라진 후.
“상황이 그렇게 되었으니, 자작님께는 적당히 둘러대주게나. 알겠지?”
한동안 멍하니 있던 집사장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아, 네!” 하고 대답했다.
저것도 혹시 정신계 이능의 영향일까.
그런 생각에 슬쩍 미끼를 던져보았다.
“근데 집사장, 최근에 두통이 계속되거나 무기력하고 몸이 영 찌뿌둥하지 않나?”
그 말에 집사장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제대로 짚었나 보다.
“뭔가를 잊어버린 듯 머릿속이 개운치 못하고 말이야.”
“어, 어찌 아셨습니까?”
“전에 나의 부친 또한 그대와 비슷한 증상에 시달리셨거든.”
“아하···.”
나는 집사장에게 그런 증상에 효과가 있다는 약초 이름 몇 개를 알려주는 한편,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에 빠졌다.
‘그랑의 말로는 저게 딱 정신계 이능의 부작용이라고 했지.’
특히 반복적으로 기억 조작 이능에 노출되면 저런 증세가 나타난다고.
이 이상 확실할 수는 없다. 그런 결론을 내리는 순간, 집사장이 감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자르 공이 사려 깊으시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이 보잘 것 없는 노구에게까지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다니.”
“음···.”
“정말로, 정말로 영광입니다 세자르 공.”
집사장은 두 눈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며, 이 미담을 반드시 널리 퍼뜨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비쳤다.
“영광은 무슨. 그보다는 자작님을 꼭 개인적으로 뵙고 싶네만. 학생 때 내가 자작님께 신세를 지기도 했으니 말이네.”
그 말에 집사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일부러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게다가 나의 새어머니 리아나 부인이 한때 자작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시지 않았던가. ···어머니께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나셨다는 얘기를 혹시 전해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아, 리아나 부인께서···.”
“자작님께 전해드릴 유품이 있네. 그걸 위해서라도 꼭 뵙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나?”
자작이 한때 정신 못 차리고 열중했던 애인, 리아나 부인의 얘기가 나오자 집사장의 태도가 달라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고민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세자르 공, 자작님은 남에게 옮길 수도 있는 병에 걸리신 터라···.”
“걱정 말게나. 나는 어릴 때 근방에 돌았던 유행병에 걸렸다가 회복된 터라 면역도 있을 뿐더러.”
옆에 있는 우만을 가리켜 보였다.
“이 우만은 의학에도 박식하니 만일의 경우 날 진료해줄 수 있네.”
개소리도 자신 있게 말하면 믿음을 주는 법.
그것이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집사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보지요.”
“고맙네.”
이로써 집사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
그를 비롯한 자작가 사용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물러난 뒤, 나는 남은 가신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각자 맡은 일을 할 시간이다.”
발닉과 그랑, 롯.
세 사람은 이곳에 오기 전, 미리 받은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제각기 흩어졌고.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내가 쓰는 손님용 방에 다시 모였다.
“이것 보시지요. 대충 그린 거긴 하지만, 알아보시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발닉이 내놓은 것은 종이에 엉성하게 그린 저택 구조도였다.
자작가 안에 돌아다니던 생쥐에 빙의하여 조사했는데, 집사장의 뒤를 쫓아 라페스 자작이 머무는 방 외에도 온갖 곳을 돌아다니고 왔단다.
“그리 크지 않아서인지 시간이 얼마 안 걸렸습니다. 구조도 상당히 단순한 편인데···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그가 그림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라페스 자작의 침실’이라고 적힌 부분이었다.
“이 옆에 자작의 개인실이 있는데, 침실과 개인실 사이에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있더군요.”
이번에는 그랑과 롯이 나섰다.
“루치오가 데리고 도망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능자들 말인데요···.”
“그랑의 말로는 하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 같답니다.”
그랑은 미리 뽑아둔 어느 하인의 머리카락 한 올을 이용해 자작가 하인으로 변신했으며.
그 상태로 롯을 안내해주는 척하며 이능자가 누구인지 알려줬다고 했다.
“총 여섯 명이에요. 걔들의 이능은···.”
그랑은 하인들 틈에 있는 이능자 여섯 명의 특징을 하나하나 알려주었고, 이렇게 덧붙였다.
“방해의 이능자와 증폭의 이능자는 아무래도 루치오 님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아요. 하인들 사이에 안 보이더라고요.”
그렇다면.
나는 발닉이 그려놓은 저택 구조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작의 개인실과 침실 사이에 비밀 통로가 있다고 했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누군가를 이동시키기에 좋은 구조가 아닌가.
문제의 두 이능자가 거기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준비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
창 밖으로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집사장이 내일 오전 중에 자작과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며 말을 마무리헀다.
“오늘은 푹 쉬며 여독을 풀자고. 내일 할 일이 많을 테니 말이야.”
내일은 결전의 날이 될 테니.
* * *
집사장의 보고에 ‘라페스 자작’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던졌다.
챙그랑!
발치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찻잔을 집사장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본 순간.
자작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달리아는? 달리아는 왜 안 데려왔느냐!”
“아, 그것이···.”
집사장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세자르 공이 데려온 인원 중 페킹튼 백작가의 차남이 있었는데.
“그분이 아무래도 우리 달리아 아가씨께 관심이 있으신 듯하여···.”
“뭐? 관심이라고?”
“네, 주인어른. 달리아 아가씨가 최근 사교계 행사에도 나가지 못해 많이 울적해 하셨는데···.”
리암 페킹튼이라면 성실하고도 능력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청년이 아닌가.
반면 달리아 아가씨는 대륙 제일 가는 대부호의 고명딸이지만, 워낙 한미하고 교양 없는 가문 출신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마땅한 혼처가 없었던 것이 사실.
걸음마를 할 때부터 아가씨를 보필했던 집사장은 그녀가 좋은 남편감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던 터였다.
“허, 보자 보자하니 별것들이 다 들러붙어서···.”
“네?”
집사장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깜짝 놀랐지만. 자작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만 나가라. 더는 듣기도 싫으니.”
네, 라고 무심코 나가려는 순간.
집사장은 또다시 저 쇳소리 섞인 목소리에 이질감을 느꼈다.
‘아무리 들어도 자작님 목소리 같지가 않은데.’
아무리 성미가 날카로워지셨어도 그렇지, 자작님이 찻잔을 내던지시다니.
게다가 달리아 님의 마땅한 혼처를 찾지 못해 늘 전전긍긍해하시지 않았던가?
‘헌데 어째서 리암 경 같은 훌륭한 남편감을 두고 그런 반응을···.’
집사장의 생각이 거기에 이른 순간.
또다시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고.
“나가라니까.”
위압감이 느껴지는 힘 있는 목소리에, 집사장은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갔다.
문이 쾅 닫혔다.
‘라페스 자작’, 아니 루치오 페카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신음했다.
‘머리가···.’
요즘 들어 이능을 지나치게 쓴 탓일까.
한 번 능력을 사용하고 나면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는데, 개인실로 이어지는 안쪽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아이들이 나타났다.
“루치오 님, 괜찮으세요?”
상냥하게 물으며 루치오에게 다가오는 어린 여자아이와.
“제가 증폭의 힘을 쓸 때까지 기다리시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아이.
열 살 언저리로 보이는 아이들은 깡마른 것이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왔나?”
루치오의 성마른 목소리에 두 아이는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그, 그냥 복도만 걸어다녔어요.”
“침대 아래에 계속 있기 너무 힘들어서···.”
루치오는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두 아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했지.’
만사형통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한 달 전, 숲속에서 다 죽어가던 그와 아이들을 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라페스 자작이었다.
‘이런, 아이들까지 데리고 힘드셨겠습니다.’
사냥하러 야영을 나왔다가 루치오 일행을 마주친 자작은 식량과 물을 아낌없이 내주었고, 덕분에 루치오들은 아사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요 앞에 제 영지가 있는데, 거기서 지내지 않으시겠습니까?’
루치오는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요 앞에 있다는 영지가 바로 ‘라페스’ 가문의 영지이고.
이 멍청할 정도로 순진해빠진 호인은 다름 아닌 대륙 최고의 부호 ‘라페스 자작’ 본인이라는 것을!
‘괜찮으시다면 며칠 묵어가시면서···.’
그 순간.
아주 사악하면서도 훌륭한 아이디어가 루치오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저는 사실···.’
루치오는 자신과 아이들이 어느 가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노예이며, 무자비한 주인에게서 벗어나고자 도주 중이라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저런, 그런 끔찍한 일이!’
워낙 청산유수였던 탓에 자작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고.
루치오 일행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남들 눈에 띄면 안 되니···.’
달이 유난히 어두웠던 그날 밤.
자작은 약속한 대로 남 몰래 성문을 열어 루치오 일행을 안으로 들여주었다.
···자작에게 비극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회상에서 깨어난 루치오가 여자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해꾼.”
“···네, 넷!”
“세자르 레핀의 동태는 살폈나?”
“그것이···.”
아이들에게서 세자르 일행의 자초지종을 들은 루치오는 확신했다.
···세자르가 이곳에 온 것은 단순히 왕명서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뭔가 의심스러운 낌새를 챈 모양인데.’
세자르 레핀은 촉이 좋기로 유명한 사내가 아닌가.
애초 그자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칼 오프러스 대공이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지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더는 피할 수 없겠군.”
그 말에 아이들이 번뜩 고개를 든 순간, 루치오가 위협하듯 물었다.
“증폭, 방해꾼. ···너희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다, 그렇지?”
“그, 그럼요.”
“네, 물론이에요.”
아이들은 영혼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치오가 손을 뻗어오자 두 아이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래, 너희만큼 충실한 종도 없다는 걸 내 모르지 않지.”
그가 손을 거두어들이자 아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치오는 피할 수 없다면 직접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세자르를 위한 티타임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 *
다음 날 오전, 아침 식사를 마쳤을 무렵.
“주인어른, 세자르 공을 모셔왔습니다.”
충실한 집사장이 그의 명을 온전히 이행했다는 생각에 루치오는 기분 좋게 대꾸했다.
“들어오게.”
집사장이 청년을 대동하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저자가 말로만 듣던 세자르 레핀!’
제 집에 온 듯 여유로운 태도로 탁자 앞에 앉은 미청년을, 루치오는 침대 휘장 너머로만 지켜보았다.
집사장은 두 사람 몫의 차를 따라놓은 뒤 나가서 문을 닫았다.
“라페스 자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자르는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대뜸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휘장 뒤에서 나와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루치오는 다시금 확신했다.
···세자르가 뭔가 낌새를 채고 이곳에 온 것이 분명하다는.
‘하지만 그래 봤자다.’
세자르 단 한 명뿐이라면.
기억 조작 이능을 이용해 자신을 ‘라페스 자작’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루치오는 오히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거, 간만에 찾아온 귀한 손님을 두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가 휘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세자르 레핀의 눈이 놀란 듯 커졌지만.
그 순간 루치오는 ‘기억 조작의 이능’을 개방했다.
침대 아래에 숨은 ‘증폭의 이능자’가 그의 힘을 증대해준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힘이 청년을 덮쳤고.
‘그럼 그렇지.’
세자르의 눈빛이 일순 멍해지는 것을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여유롭게 탁자로 걸어가 그 맞은편에 앉자, 검은 머리의 미청년이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세자르 공, 이곳까진 무슨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듣기로는 폐하의 왕명서를 가져오셨다고 했는데.”
“네, 폐하께서 라페스 자작님이 일전에 왕실에 큰 도움을 주신 것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로 직접 작성하신 것이지요.”
또다시 만사형통이로구나.
세상 일이 참으로 쉽다고 느끼며 루치오는 대꾸했다.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그럼 어디 왕명서를···.”
“왕명서를 보여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겠군요.”
문득 그 목소리에서 느껴진 알 수 없는 예리함에 루치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세자르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지만, 인상이 묘하게 달라 보였다.
“그럴 수가 없다니, 어째서···.”
“폐하의 왕명서는 라페스 가문의 수장, 콘다 라페스 자작 앞으로 온 것입니다.”
저 싱글거리는 청년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억누른 순간.
“근데 그쪽은 라페스 자작이 아니라···.”
세자르가 품에서 뭔가를 꺼냄과 동시에 철컥, 하는 장전음이 울렸다.
“온 대륙에 수배령이 내려진 범죄자, 루치오 페카툼이 아니시던가?”
“···!”
제게 겨눠진 금속 총구 앞에서, 루치오는 등골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