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64화 (164/176)

할 땐 한다니까

* * *

“루치오 전 추기경이··· 라페스 자작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테레사의 일목요연한 정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왕궁으로 달려와 최근에 알아낸 사실을 정리해서 보고한 터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복잡해질 수 있는 문제, 예컨대 교단이 마녀 사냥을 실시한 목적이라든가, 루치오가 실은 마법사 가문의 후계자라든가 하는 얘기는 쏙 빼놓고 말이다.

“네. 그자가 기억 조작 이능자인 만큼 라페스 자작을 살해하고 자작 행세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며···.”

심각해진 여왕의 얼굴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렇게 가로챈 자작의 재산을 이용해 에스닐과 공국에 복수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복수?”

“그자에겐 아직 십여 명의 이능자가 있거든요.”

그랑의 말에 따르면, 암살이나 각종 음모에 적합한 정신 계열 이능자가 대부분이라고.

“특히 폐하의 목숨을 대놓고 노린다면 대비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쪽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전, 우리가 먼저 잡아야 합니다.”

그자가 오프러스의 영토에 있다면 문제가 까다로워지겠지만.

다행히도 라페스 자작저에 틀어박힌 데다 살인 혐의 가능성까지 있는 상황이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듯한 테레사가 날 똑바로 보았다.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라페스 자작저에 들어가게 해줄 공식적인 구실을 만들어달라, 이거로군?”

그 말에 나는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정확합니다, 폐하.”

“하지만 만약 그대가 추측한 대로 라페스 자작이 이미 죽었고 그 시체까지 처리했다면, 루치오를 죽였다가 엄하게 라페스 자작의 살인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나 역시 그 부분을 우려 안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적절히 대비해놓았지.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라페스 자작의 시신을 확보해놨으니까요.”

“어떻게?”

“제 밀정이 상당히 수완이 훌륭하거든요.”

카렌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이렇게 말했으니.

‘원래 뒤가 구린 사건이 있으면 뭐든 물증부터 확보하는 게 우선이잖아?’

확보한 자작의 시신은 머리가 반쯤 뭉개져 있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다행히 몸은 멀쩡하다고 했다.

자작의 자녀든 애인이든 간에, 그의 신체 어딘가에 가까운 이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분명 있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니 안심하시지요, 폐하.”

“아주 훌륭해. 가끔 보면 그대는 참 탐이 나는 인재를 많이 데리고 있단 말이야.”

“제가 인복이 좀 있는 편이죠.”

“어때, 그 밀정 나한테 소개해줄 생각은 없나?”

이미 만나보신 적 있는데요, 라고는 할 수 없어 그저 웃기만 했다.

테레사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라페스 자작가의 문을 열게 할 만한 구실이라. ···짐이 직접 쓴 왕명서 정도면 충분하려나?”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국왕의 친필이 담긴 왕명서를 들고 간다면 그 어떤 귀족이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완벽합니다, 폐하.”

테레사는 피식 웃더니 서류더미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침 딱 좋은 구실이 있네. 지난 번 그대와 레핀 공작이 승리로 이끈 전투 때 말이야.”

여왕은 내 바로 앞에 서류를 펼쳐 보였다. 지난번 전투 당시 기꺼이 사재를 털어 바친 귀족들의 명단이었다.

“라페스 자작은 꽤 통이 컸거든. 나라를 생각하는 자작의 마음에 짐 또한 보답해야 하지 않겠나?”

그녀가 짓는 능구렁이 같은 미소에 나 또한 비슷한 미소로 화답했다.

* * *

여왕의 왕명서를 받자마자 나는 곧바로 자작가로 출발했다.

인원을 최소한으로 한정한 덕에, 말 몇 필과 마차 두 대로 구성된 무리는 그날 안에 라페스 자작저에 도착했다.

“세, 세자르 레핀 공이 어찌 여기까지 행차를···.”

처음에는 경계하는 반응이었으나, 내 이름을 대자마자 성문은 곧바로 열렸다.

경비병의 전갈을 받고 버선발로 뛰쳐나온 집사장은 내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눈치였다.

“어찌 여기까지라니, 몇 년 전 학생 때 자작저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나는 일부러 친근하게 굴며 옆에 선 우만을 가리켜 보였다.

“나는 기억 안 날지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우만 경은 기억하지 않나?”

“아, 그러믄요. 우만 님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자작저에서 꽤 오래 머물며 그 딸의 공부를 봐줬던 우만. 그가 집사장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자작저 내부를 둘러보았다.

‘예전과 큰 차이는 없는 듯하군.’

웅장하진 않지만 애정을 가지고 가꾼 덕에 아담한 매력이 있는 저택을, 야트막한 성곽이 둘러싸고 있다.

자연물이라고는 저 앞쪽에 있는 작은 연못이 전부.

‘그 문제의 변사체를 연못에 던져 처리하려고 했다던가.’

카렌의 수하들이 그날 밤 바로 연못에서 꺼내어 방부 처리를 한 덕에, 사체의 부패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쯤은 전문 부검의의 손에 들어가 있을 터이고···.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라페스 자작을 자칭하는 루치오 놈의 면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

우만과 안부 대화를 마친 집사장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헌데 세자르 공, 정말로 죄송하지만··· 지금은 자작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방문객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이 근방에 묵을 만한 곳을 소개해드릴 터이니-”

“그대의 충심은 이해하지만, 나는 폐하의 왕명서를 가지고 왔다네.”

“와, 왕명서요?”

눈이 휘둥그레진 집사장에게 나는 미소 지어 보였다.

“그래. 지난번 오프러스 동맹전에서 자작님이 왕실에 큰 도움을 주시지 않았던가. 그 노고를 치하하는 왕명서이니, 한시라도 빨리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네.”

“그, 그런 사항이라면···.”

라페스 자작은 본디 평민 출신으로 신분 상승의 욕구가 상당한 인물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집사장은 잠시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자작님을 뵙고 상황을 말씀드리지요.”

“고맙네.”

라페스 자작저의 입성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 * *

집사장이 세자르 일행을 들인 것은 ‘왕명서’의 거부할 수 없는 권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충심이 더 앞섰기 때문이다.

‘국왕 폐하께서 자작님을 직접 치하하시다니!’

그것도 일개 전령도 아닌, 무려 세자르 레핀 공을 보내서 말이다.

그러니 집사장은 아무리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도 이 소식을 들으면 자작이 뛸 듯이 기뻐하리라 확신했지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자, 자작님.”

“내 명령이 명령 같지 않나? 응?”

평소 호인으로 소문난 사람답게 사용인들에게도 여간해서는 호통을 치는 법이 없는 라페스 자작.

그러나 최근 한 달 사이 급격히 나빠진 건강 탓일까.

자작은 아예 딴 사람이 된 듯 괴팍하게 굴었다.

“물론 들이지 말라고 하시긴 했으나, 왕명서를 들고 온 분을 어찌 돌려보내겠습니까.”

“···허어.”

집사장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자작은 침대 휘장 뒤편에서 말을 아꼈다.

남에게 옮길 수 있는 병에 걸린 탓에 두문불출하는 중인 자작의 얼굴을, 집사장조차 본 적이 없었다.

“세자르 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작님을 뵙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중인데··· 어찌할까요?”

집사장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자작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내 딸을 데려오거라.”

“달리아 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작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성마르고도 날카로웠다.

“하지만 지난번만 해도 달리아 님께 옮길 수도 있다며 데려오지 말라고-”

“내 말에 토를 다는 건가 지금?”

“아니, 아닙니다.”

얼른 고개를 젓던 집사장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작님의 목소리가 저렇게 쉬고 갈라졌던가.’

병환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발음이나 억양도 묘하게 이질적이다.

‘아무리 아프기로서니 평소의 말버릇마저 달라질 수 있나?’

그러한 의문이 든 순간, 무언가 구름 같이 뿌연 것이 그의 머릿속에 엄습했고.

‘어쩐지 어지럽구나.’

그러한 감각과 함께 집사장의 이성이 혼미해졌다.

방금 전만 해도 논리적으로 돌아가던 사고는 금세 흐트러졌고.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날카로운 의심은 연기처럼 공기 중에 흩어졌다.

여전히 멍해 있는 집사장에게 다시금 명령이 떨어졌다.

“내 딸을 데려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자작님.”

지시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움직이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라페스 자작’은 흐뭇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 * *

배정받은 방에 사용인들이 우리 짐을 풀어놓는 가운데, 우리는 귀빈 전용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나는 함께 앉은 가신들을 돌아보았다.

‘라페스 자작과 친분이 있는 우만과 리암은 당연히 데려왔고.’

그 외에도 발닉, 앨빈, 그랑, 롯을 데려왔다.

일행의 구성이 독특해서인지 자작가 사용인들이 이쪽을 흘긋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 바로 옆에 앉은 리암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세자르, 이런 거 진짜 오랜만인 거 알아?”

“이런 거라니?”

리암은 뭔가 불만이 있는 듯 입가를 씰룩이며 말을 받았다.

“너 그동안 다른 가신들만 데리고 다닌 거 알고 있냐?”

“내가?”

“그래.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다만···.”

그런 말은 충분히 자주 해온 것 같은데.

그렇게 대꾸했다간 삐질 것이 분명해 나는 잠자코 리암의 말을 들어주었다.

“내가 이능이 없긴 하지만, 널 호위해줄 검술 실력 정도는 있거든.”

누가 누굴 호위해줘? 라고 묻고 싶었으나 이 역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주군이 되어도 인간 관계란 쉽지 않구나, 를 몸소 느끼며 나는 리암을 달래보았다.

“리암. 너는 더 중요한 일을 맡고 있으니 다른 임무를 안 맡기는 것 알고 있지?”

“내가 그런 얘기 들으면 옳다구나 납득할 줄 알아?”

이미 얼굴은 반쯤 넘어온 표정이긴 했지만.

“오늘 네가 여기서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게 뭔데?”

간만의 임무라 그런지 아주 의욕적인 태도를 보이는 리암.

나는 응접실 안쪽 문을 열고 나오는 누군가를 가리켜 보였다.

화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꽤 귀여운 인상의 여인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가운데, 나는 리암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라페스 자작의 딸, 달리아야. 자작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이고, 어디까지나 참고로 말하자면 아직 정혼자는 없는 상태지.”

“어, 그, 그런 얘기를 왜 갑자기···.”

“오늘 네 임무가 바로 이거야.”

“···?”

“달리아 양의 관심을 네게로 분산시키는 것. 그래야 내가 라페스 자작, 아니 루치오 놈과 마음 편히 끝장을 볼 수 있을 거 아냐.”

“어, 근데, 음···.”

리암이 당황하며 말을 못 잇는 사이.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온 달리아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뵈어요, 세자르 님. 아니다, 이제는 세자르 공이라고 해야겠네요?”

그녀가 내민 손을 가볍게 맞잡아 악수하며 미소 지어 보였다.

“뭘 그런 말씀을, 편하게 불러주시죠 달리아 양. 그새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어머, 무슨 말씀을.”

예의 상의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웃는 달리아에게 나는 자연스럽게 일행을 소개했다.

“이쪽은 내 가신들입니다. 우만 경은 잘 아실 테고, 여기는 리암 페킹튼 경. ···페킹튼 가문의 차남으로 최근 혁혁한 공을 세웠죠.”

“반가워요, 리암 경.”

“어, 으, 그···. 반갑···.”

갑자기 고장난 로봇처럼 삐그덕거리는 리암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후에도 달리아가 몇 번 더 말을 걸었지만, 리암이 어버버거리는 탓에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달리아 양, 워낙 간만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식솔들 중 새로운 얼굴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자작가에 며칠 머문 것 가지고 사용인들의 얼굴을 기억할 리 없다.

어디까지나 떠보려고 던진 말에 달리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가 한 달 전에 싹 갈아치우셨어요. 집사장과 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새로운 사용인들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원래 아버지가 그런 분이 아닌데. 좀 답답한 구석이 있으시긴 해도, 정이 많고 사용인들을 잘 챙기셨거든요. 최근에 편찮으시더니 성격이 날카로워지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두문불출 중이시라 들었습니다.”

자작의 딸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옮는 병이라며 집사장을 통해 모든 지시를 내리고 계세요. 유명한 의원을 불러오겠다고 해도 고집불통이시고··· 제 얼굴도 한 달째 안 보려 하시네요.”

한 달째 친딸의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 하며, 사용인을 모조리 갈아치운 것이 딱 그 시기라니.

모든 것이 빠짐없이 맞아떨어진다.

확신을 가진 나는 고개를 들어 달리아와 두 눈을 맞추었다.

“달리아 양.”

“네?”

“혹시나 아버지께서 갑자기 보자고 부르시면 절대, 절대 보러 가시면 안 됩니다.”

달리아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오른 순간.

“그게 무슨···.”

집사장이 응접실에 들어왔다.

“저, 달리아 아가씨.”

“무슨 일이야?”

“자작님께서 급히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

달리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역시 놀란 기색의 리암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리암에게 눈짓해 보였다.

‘어떻게든 좀 해봐!’

리암은 우리가 여기 왜 온 건지 알고 있다.

지금 방 안에 틀어박힌 라페스 자작이, 진짜 자작이 아니라 놈 행세를 하는 루치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어, 그게···.”

“아가씨. 자작님이 지금 바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완강한 집사장의 태도에 달리아가 무심코 일어난 순간.

앉아 있던 리암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머.”

“아, 죄송합니다.”

곧바로 손을 놓은 리암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말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달리아 양께 정원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달리아는 붉어진 얼굴로 리암을 멍하니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리암 이 자식, 할 땐 하는 놈이었네.

그녀를 데리고 나가며 리암이 뒤돌아본 순간, 나는 엄지를 치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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