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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63화 (163/176)

돈을 쉽게 얻는 법

* * *

색색의 구슬이 잔뜩 달린 터번과 정신 사나운 무늬의 튜닉과 망토.

화려한 차림의 바바가 흰 종이를 앞에 두고 연신 진땀만 흘렸다.

“···이것 참.”

내 눈치를 흘긋 보던 바바는 다시 한 번 이능을 써보았지만, 흰 종이는 새카맣게 물들 뿐이었다.

“영 보이지가 않네요.”

이마의 땀을 훔쳐내는 바바를 보며 나 또한 입을 열었다.

“막혀 있다, 그건가?”

“네, 전에 건국기념제 때 기억 나십니까? 그때랑 똑같습니다. 구름이 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로써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사벨 대공의 손에서 살아나거나 아직 잡히지 않은 이능자들이 십여 명쯤 되는데.

그중 루치오가 데리고 있는 누군가가 바바의 예지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

‘나머지 애들 중에는 위협적인 능력자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랑의 말에 따르면.

바람이나 불을 다루거나 괴력을 발휘하는 등 물리적 피해를 주는 능력자들은 대부분 전투에 참가했을 거란다.

‘이 중 생존자는 테레사 여왕의 손에 넘어간 상태이고.’

우리 에스닐과 공국에서 각각 확보 중인, 혹은 이미 사망한 이능자들의 명단을 보여주자.

그랑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사망’으로 표시된 이름들을 볼 때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생존’으로 표시된 이름들 앞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소년은 딱 잘라 말했다.

‘제가 보기에 루치오 님이 데리고 있는 애들 중 제일 위협적인 건 딱 두 명이에요.’

그중 하나가 다른 이능자의 능력을 방해하는 ‘방해의 이능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이능자의 능력을 증폭해주는 ‘조력의 이능자’라는 것이다.

조력의 이능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랑은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 루치오 님은 본인의 능력을 한 번에 한 명한테밖에 못 쓰거든요. 근데 조력 이능자의 도움을 받으면, 한 번에 서너 명에게도 기억 조작 능력을 쓸 수 있어요.’

루치오 놈처럼 이능자를 잔뜩 데리고 있는 경우에는 아주 쓸모가 많은 능력이란 의미.

어쨌거나 지금 문제는 이 루치오 놈의 행방을 어떻게 알아내느냐인데.

내 얼굴을 흘긋거리던 바바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 세자르 님. 지난번처럼 질문을 살짝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일리가 있는 얘기네.”

“지금은 ‘루치오 전 추기경이 어디에 있는가?’가 질문이었잖습니까. 근데 이걸 조금 모호하게 바꿔본다면···.”

나는 새카맣게 얼룩진 종이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어떤 질문을 던져야 그물을 피해가면서도 루치오가 있는 곳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머리를 굴려서 내놓은 질문에, 바바는 멍한 얼굴을 했다.

“예? 정말 그 질문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이잖아. 해봐.”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뭐···.”

투덜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는 성격답게, 바바는 그대로 이능을 재실행해보았고.

이윽고 씩 웃으며 내게 무언가가 적힌 종이를 건네 보였다.

“성공이네요.”

“훌륭해.”

바바를 내보낸 뒤, 그가 건넨 종이를 다시 한 번 살펴보려는데.

“도련님. 전서구로 이런 게 왔는데요···.”

제이콥이 들어와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두고 나갔다.

그것은 카렌이 보낸 서신이었는데,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세자르, 네가 지난번에 준 페카툼 가문의 족보 있잖아.

도전과제의 보상으로 받은 것으로, 이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페카툼’ 가문의 족보.

그 맨 끄트머리에 적힌 ‘루치오 페카툼’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네가 추측한 게 맞아. 루치오 전 추기경은 이 페카툼 가문의 최후 생존자가 분명해.

빈민가 출신으로 무려 추기경 자리에 오른 불세출의 인물.

그의 정체는 페카툼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라는 것, 그리고···.

-이백 년 전 교단에서 마녀 사냥을 벌였잖아. 그때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파이슨 2세의 손에 절멸당한 마법사 가문이···.

바로 이 페카툼 가문이다, 이 말이다.

“역시나.”

나는 그녀가 쓴 서신을 한참이나 들여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며 이 새로운 정보들을 조합했고, 단순하고도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

“이능 신관은 마법사이고, 이능은 마법이란 거잖아.”

<왕도의 대가> 속 세계로 들어온 이후.

나는 줄곧 의문을 느껴왔다.

마법은 전설이나 설화, 역사서에나 등장하지 지금은 사라진 힘이라고 했으나.

내가 지닌 무효화의 목걸이도 그렇고.

현재도 ‘마도구’의 일종이 귀족들 사이에 고가로 거래된다는 것은, 마법의 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아닐까?

또 한편으로, 신의 가호를 받아 생긴다는 이능은 어째서 -롯과 3형제처럼- 알레스 신을 믿지 않는 소위 이교도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일까.

이전의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에서 알게 되었듯, 어째서 교단은 이 ‘이능’을 자신들 손아귀에서 통제하려 하는 것인지 늘 궁금했는데.

‘그 의문이 이제야 해소되는 기분이군.’

이백 년 전만 해도 ‘전문가’로서 인정받으며 저희들 나름의 학문을 발전시키던 마법사들.

그들의 존재는 ‘마녀 사냥’ 이후로 역사 속에서 통째로 지워졌을 뿐 아니라, 마법에 관련된 자료들 역시 완전히 말소되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마녀 사냥’의 진짜 목적.

교단은 마법사에 ‘이능 신관’, 마법에 ‘신성’이라는 거짓 이름을 붙여가며 이 규격 외의 힘을 독점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아까 바바가 건넨 종이를 다시 꺼내보았다.

‘예? 정말 그 질문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바바가 난색을 표했던 질문은 이거였다.

-루치오 전 추기경이 가장 최근에 만난 재력가는 누구인가?

그 질문으로 이능을 행한 종이 위에는 단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라페스 자작]

···이 이름을 보는 것도 오랜만인걸.

라페스 자작이라면 리아나 부인이 돈줄로 삼았던 호구가 아닌가.

“루치오가 라페스 자작을 찾아갈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나는 루치오와 라페스 자작의 상관 관계를 한참 고민한 끝에 나름의 해답을 찾았고.

카렌에게 보낼 답장을 쓴 뒤 제이콥을 불렀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것 좀 전서구로 보내줘.”

겉장에 적힌 ‘카렌 돌로레스’의 이름을 본 제이콥이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연애 편지도 전서구로 보낼 정도로 뜨거운 사이이신-”

“연애 편지 아니거든?”

제이콥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의도는 ‘흐뭇한 미소’이지만- 살벌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니겠지요.”

“그리고 가는 길에 앨빈도 불러주고.”

편지를 들고 나가려던 제이콥이 뒤를 돌아보더니 날 보며 덧붙여 말했다.

“참고로 전 카렌 아가씨께 걸었습니다, 도련님.”

“···제이콥.”

“이만 나가보지요, 허허.”

이 정도면 내 할 일은 다했다.

나는 그 두 사람이 방문하길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 * *

카렌과 앨빈에게 본격적인 조사 요청을 한 지 일주일 뒤.

조용하던 집무실에 쾅! 하고 문 소리가 울렸다.

“세자르 님! 말씀하신 게 맞았습니다!”

깜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니 앨빈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앨빈은 내 앞으로 걸어와 낡은 가죽 장정의 책 한 권을 내려놓았다.

“이것 좀 보시지요.”

표지에는 <이능은 마법이다>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거야말로 내가 며칠 전에 내린 결론이 아닌가.

“사실 세자르 님 말씀을 들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요전에 알게 된 학자들에게 자료 공유를 요청했거든요. 그랬더니 이런 걸 보내주지 뭡니까.”

이미 몇 십 년 전에 금서로 지정된, 지금은 단 두 부만이 존재하는 책이라고 한다.

“근거 없는 낭설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보내온 학자들 주장으로는 이 책 저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했답니다.”

“···그래?”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금서로 지정되었다곤 해도, 이런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예 사라졌다는 건···.

‘그 존재를 지워버리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이니까.’

여기서 그 누군가란, 다름아닌 교황청일 터이고 말이다.

“일전에 세자르 님이 얘기하셨을 때,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신성 모독이라고 해서 죄송해요···.”

“미안하긴. 그런 반응이야 당연한 거지.”

앨빈이 가져온 책을 가볍게 훑어본 나는, 내가 얼마 전에 내린 결론이 틀리지 않음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내게서 루치오의 정체를 들은 바 있는 앨빈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역시 루치오 전 추기경의 목적은 복수일까요?”

“그렇겠지 아마?”

마녀 사냥을 벌인 교단, 그리고 자신의 가문을 절멸시킨 에스닐을 향한 복수 말이다.

“그자의 이능이 기억 조작이라고 했잖아.”

앨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았다.

“빈민가 출신이라도, 그 정도 능력이라면 신분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겠죠. ···그렇게 추기경이 된 뒤에는 교황을 비롯해 다른 추기경들을 제 뜻대로 움직였을 테고요.”

그렇다.

루치오는 실제로 ‘이능자를 만드는 약물’(사실은 ‘마나를 일깨우는 약물’)을 개발해 자신만의 마법사 군대를 키우려고 했으니까!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가 어떤 연유로 파문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교황청에서 쫓겨난 후에도 루치오는 칼 오프러스 대공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며 본격적인 마법사 육성에 나선 한편.

칼 오프러스 대공의 손을 빌려 에스닐의 왕실 구성원들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나라 전체가 흔들렸으니 복수는 절반쯤 성공한 셈이지만···.’

결국 그의 복수는 ‘세자르 레핀’의 등장으로 실패해버렸다.

균형추를 잃고 흔들리던 에스닐은 평형을 되찾았고, 테레사 여왕의 치세 아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인 나날이 이어지고 있으니.

“루치오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자가 또 언제고 암살을 계획할지 모르지.”

나는 앨빈의 굳은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그자를 붙잡아 끝을 내야 해.”

“하지만 어떻게요?”

공국뿐 아니라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수배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루치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바바의 이능으로도 어렵다고 하셨잖습니까, 질문이 막혔다고. ”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지.”

나는 바바가 이능을 행한 종이를 앨빈에게 보여주었다.

그 위에 적힌 ‘라페스 자작’이라는 단어를 뚫어져라 보던 앨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무슨 질문을 던지셨길래···.”

“루치오가 가장 최근에 만난 재력가가 누구인가.”

“···.”

앨빈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리고 그때.

집무실 문이 또 한 번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번엔 또 누구야, 라고 생각하며 그쪽을 돌아보자.

“세자르! 네 말이 맞았어!”

카렌이 날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맞다니, 어떻게?”

“라페스 자작.”

그 이름에 앨빈의 눈이 커졌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작이 어땠는데?”

“네가 자작이 멀쩡히 살아 있는지 알아봐달라며.”

“그랬지.”

그 말에 앨빈이 기겁하며 물었다.

“서, 설마··· 라페스 자작이 살해당했다는 건가요?”

“그게 말이지, 좀 이상해.”

카렌은 일주일 전, 자작가 근처에 밀정을 심어뒀다고 했다.

“라페스 자작이 활동한다는 얘기는 꾸준히 들려오는데, 저택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질 않는다지 뭐야? 두문불출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었다나.”

한 달이라면 루치오가 대공성에서 도망친 시점과 얼추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어제 저녁, 자작저 근처에서 변사체 하나가 발견되었어.”

“변사체?”

“아주 이상하게도, 이 사건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무마되었지. ···사건의 은폐를 지시한 사람이 바로 라페스 자작이야.”

카렌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뭔가 촉이 오지 않아?”

-루치오 님은 숨을 필요가 없어요.

-그분의 능력은 ‘기억 조작’이거든요.

나는 그랑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촉이 오다니, 뭐가요?”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앨빈을 돌아보았다.

“앨빈, 지금 루치오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뭘까?”

“음, 안전한 은신처?”

“그거야 당연하지만. 루치오가 교단과 에스닐에 복수하길 꿈꾼다면 또 뭐가 필요할까?”

복수의 실현.

그게 루치오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라면.

앨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돈이··· 필요하겠죠?”

“그렇겠지?”

남은 이능자를 먹여살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본격적인 복수에 나서려면 병력과 그걸 뒷받침해줄 자금이 필요하다.

수배자가 된 마당에 칼 오프러스 대공처럼 영향력 있는 권력자를 찾아가기란 글렀고, 이제 남은 방법은···.

“엄청난 재력으로 용병과 암살자를 고용하는 거지.”

앨빈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재력을 간단히 얻을 방법은···.”

비록 본인의 대에 들어 돈을 꽤 날렸다고는 하나, 라페스 자작은 여전히 이 대륙에서 제일가는 거부가 아닌가.

‘대륙 제일의 대부호 라페스 자작’

‘기억 조작 능력’

‘자작가 근처에서 발견된 변사체, 그리고 그 사건을 황급히 묻어버린 라페스 자작’

나와 카렌, 앨빈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앨빈은 이제야 깨달은 듯, 헉 하고 신음했다.

“···돈이 있는 누군가를 살해하고, 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겠네요!”

바로, 라페스 자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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