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62화 (162/176)

대체 어떤 이능인데?

* * *

그랑은 살짝 긴장했을 뿐 평소와 달라 보이진 않았다.

소년의 시중을 맡은 하인 역시 딱히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아닌 듯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루치오의 이름을 듣고 기절한 건가.’

나는 집무실의 긴 소파에 뉘여놓은 그랑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큰 덩치 탓에 서 있을 때는 다 큰 사내 같지만, 기절해 눈을 감은 얼굴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롯.”

“네?”

롯은 그랑이 기절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달려온 터였다. 그랑의 이마를 닦아주던 그녀가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혹시 그랑이 어떤 연유로 이능자 육성 기관에 들어갔는지 얘기한 적 있어? 기관에 관련된 얘기라든가···.”

롯이 고개를 저었다.

“밀정 활동에 관련해서는 가끔 했지만, 이능자 육성 기관 얘기는 한 적이 없어요. 그랑은 그에 관련된 화제는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거든요.”

“흠.”

어쩌면 당연한 추측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랑에게 이능자 육성 기관의 경험은 그다지 즐겁지 않은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특히 루치오 전 추기경은···.

‘일종의 코치 같은 역할을 했던 건가.’

루치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얼굴이 시퍼래져서 기절한 그랑.

그 모습을 되새기는 순간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학습된 공포.”

“네?”

롯이 무슨 말이냐는 듯 날 쳐다보았지만 나는 대답 없이 생각에 잠겼다.

‘전에도 이런 걸 본 적 있잖아?’

하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체육계에선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선수들의 기록 향상을 명분으로 삼아서 폭력을 휘두르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코치들 말이다.

“롯, 네가 보기에···.”

그런 이들 앞에서 선수들, 특히 청소년 선수들은 천적을 마주한 가련한 초식 동물처럼 달달 떨게 마련.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듯, 인간은 자신을 줄곧 학대해온 사람 앞에서 쉽사리 전의를 상실하게 되니까.

“그랑이 루치오라는 자에게 학대를 당했던 것 같나?”

내게서 이미 모든 설명을 들었던 롯은 그 질문에 대답을 아꼈고.

잠시 후에야 주저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없을 법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게다가···.”

그녀가 안타까워하는 눈빛을 그랑에게 던졌다.

“보통의 왕국민들도 아니고, 저희 같은 이민족들은 어디서든 폭력에 가장 먼저 노출되기 마련이니까요.”

“···.”

그 말에 나는 롯 남매들의 과거를 떠올렸다.

바깥에서는 신사의 귀감이라 불리던 브렉이 채찍으로 남긴 상처를 애써 감추던 롯과.

허름하기 짝이 없는 창고에 짐승처럼 쇠사슬에 묶여 있던 3형제들의 모습이.

···그녀가 어째서 다른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랑을 회유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새삼 이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드립니다, 세자르 님.”

“응?”

롯은 여전히 내가 아닌, 그랑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세자르 님의 관대함이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그랑은 물론이고, 저와 제 오빠들 또한 그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 말에 잠시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지만.

나는 솔직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롯, 네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라뇨?”

“너희 남매를 들인 건 애초 그런 감상적인 감정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어디까지나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인재라는 이유로 영입한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했는데도 롯은 빙긋 웃었다.

“세자르 님이 칭찬을 몹시 어색해하신다는 건 잘 알겠네요.”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그렇게 대수롭잖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그랑이 몸을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우움···.”

“그랑, 괜찮아? 정신이 드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소년이 힘겹게 눈을 떴다.

내 얼굴을 보고 살짝 긴장하던 그랑은 롯을 보더니 안심한 듯 어깨의 힘을 풀었다.

“롯 누나···.”

“세자르 님이 네가 기절했다고 하셔서.”

그랑은 롯이 건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롯이 소년과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주치의가 들어와 그랑의 상태를 살폈다.

“일시적으로 기절한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주치의는 그 후로도 설명을 길게 늘어놓았는데. 그 말을 내가 해석하기로 그랑의 기절은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 같았다.

역시 루치오 추기경의 얘기를 꺼냈기 때문일까.

“그랑, 무슨 얘기를 하다가 기절했는지 기억나니?”

주치의가 나가고 나서 롯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그랑은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었다.

“루치오 전 추기경. 세자르 님은 그자에 관한 정보를 찾고 계셔. 만일 네가 뭔가를 알고 있다면···.”

롯은 소년의 두 눈을 따스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세자르 님께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랑은 입을 꾹 다문 채 망설였지만.

잠시 후 결심이 선 듯한 눈빛으로 말문을 열었다.

“얘기할게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롯 누나, 에스닐 귀족들이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던 날 기억나시죠?”

그 말에 롯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날은 그랑뿐 아니라 모든 카디움 부족이 노예로 전락한 날이었으니까.

그랑은 담담한 목소리로 제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날, 나는 운 좋게 잡히지 않고 도망쳤어요. 인적이 드문 숲을 지나 국경으로 향했는데···.”

오프러스 공국과의 국경에서 경비병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으며.

처음에는 처형당할 뻔했지만, 그가 카디움 족 출신이며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알게 된 병사들이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고.

“처음에는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 그저 기쁘기만 했어요. 하지만···.”

그랑이 옮겨간 곳은 다 허물어져가는 어느 신전 건물.

과거 알레스 교단이 쓰다가 버렸다는 이 폐신전에서는 그랑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수십 명이 지내고 있었다.

절반은 거리의 아이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랑처럼 전쟁 노예, 탈주 노예이거나 멸문지화를 당한 가문의 최후 생존자라고 했다.

“일명 ‘교관’이라고 불리는 어른들이 의식주를 제공하는 한편 우리를 훈련시켰고, 이 교관들의 책임자가 바로 ‘루치오’ 님이었어요.”

아이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교관들과 달리.

루치오는 겉보기엔 온화하기 그지없는 노신사라고 했다.

“우리처럼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아이들에게도 경칭을 써가며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그래서 날 비롯해 아이들 대부분은 루치오 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모든 속내를 털어놓았는데···.”

기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은 루치오가 준 시럽을 매일 먹게 되었다.

“시럽이라고?”

무언가 가닥이 와 닿는 느낌에 미간을 좁히며 묻자, 그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한 냄새가 좀 나긴 했지만, 설탕을 잔뜩 넣어 다디단 시럽이었죠. 아시다시피 우리 같은 애들은 그런 걸 먹을 기회가 없다보니 루치오 님이 주신 시럽에 환장했어요.”

문제는 시럽을 일주일째 매일 같이 먹은 뒤에 나타났다.

“아이들은 갑작스레 구토와 설사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며칠 뒤 그중 절반이 죽어버렸다는 거다.

“···!”

나와 롯은 경악의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탓인지 안색이 창백해진 그랑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살아남은 아이들은?”

“절반은 미쳐버렸어요. 매일 같이 광증을 호소했죠. ···나머지 절반인 열 명 가량만이 살아남았는데.”

내 질문에 대답하던 그랑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중 저를 비롯한 네 명에게서 이능이 발현됐어요.”

“···그게 무슨.”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은···.”

롯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지만.

루치오 전 추기경이 ‘이능자를 만드는 약물’을 개발해왔다는 것을 아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흐느끼듯 말하던 그랑은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루치오 님의 손에 모두 죽었고요.”

“···.”

소년은 힘겨워 보였지만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이능을 발현하긴 했지만 선천적 이능자들에 비해선 그 힘이 미약하기 그지없는 탓에, 아이들은 루치오가 만든 시럽을 매일 대량으로 먹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이능이 훨씬 강해졌죠.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폭으로 성장한 축에 속했고요.”

다만 먹고 나면 한동안 배앓이를 하기 일쑤였고, 일부 아이들은 중간에 견디지 못하고 기관에서 사라지기도 했단다.

“사라져?”

“···교관들 말로는 기관을 나갔다고 했는데.”

그랑은 그렇게 말했지만, 저 자신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가는 모습을 본 적 있나?”

역시나.

그랑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루치오가 만들었다는 ‘이능자의 약물’은 인체에 해로운 성분으로 구성된 게 아니었을까.

특히 어린아이 몸으로는 견디기 힘든 약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여기 있는 그랑은···.

‘웬만한 성인보다 덩치가 좋으니 버틸 수 있었던 거고.’

나는 이제 새파랗게 질린 그랑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랑, 힘들면 그만해도 좋아.”

이쯤에서 얘기를 멈추게 해야겠단 생각에 그랑의 어깨를 짚으며 소년을 제지했지만.

“아뇨, 괜찮아요. 기왕 말문이 터진 거···.”

그랑은 그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죽어간 아이들을 위해서, 아니 저를 위해서라도··· 다 털어놓고 싶어요.”

나는 소년의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 보다가.

“그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세자르와 롯.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두 사람 앞에서 지난 과거를 고백하기 시작한 지 어느새 30분째.

공포와 폭력, 훈련을 빙자한 학대로 얼룩진 비인간적인 나날들을 모조리 털어놓고 나자.

“후우···.”

안도인지 회한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탓인지 다 얘기하고 나니 온몸이 진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제 옷에서 나는 기분 나쁜 쉰내를 그랑이 뒤늦게 의식한 순간.

세자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랑.”

“···.”

그랑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주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뭐라고 하려나.’

왜 이런 중요한 정보를 진작 털어놓지 않았다고 질책하려나?

혹시라도 아직 공국과 무언가 연락을 주고받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라도 받는다면···.

괜한 걸 털어놓은 건 아닐까. 그랑은 긴장되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침내 세자르의 입에서 다음 말이 흘러나왔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그랑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놀람을 눈치챘는지 어땠는지, 세자르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누구에게도 하기 힘든 얘기였을 텐데, 내가 억지로 털어놓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고 말이야.”

“···.”

보면 볼수록.

이 사람은 여느 귀족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언젠가 카렌이 했던 말이 소년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임무에는 세자르가 자원한다니까?’

공을 세울 수 있는 임무는 가신들에게 주고, 제일 위험한 임무는 주군인 자신이 자처한다니.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세상에 어디 그런 주군이 있나 싶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그녀가 했던 말이 납득되었다.

그랑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도 한 번쯤은 털어놓고 싶었어요.”

그 말에 세자르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더 궁금한 건 없으시고요?”

잠시 고민하던 검은 머리 청년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렇지. 혹시 루치오 놈이 지금쯤 어디에 숨어 있을지 짐작이 가나?”

세자르는 루치오의 수배령이 떨어진 지 오래이지만, 단서는커녕 목격담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루치오 님은 숨을 필요가 없을 텐데요.”

“···숨을 필요가 없다니?”

“루치오 님이 이능자인 건 알고 계시죠? 그분의 이능이란 정신계 능력의 일종인데···.”

머리를 긁적이며 그랑이 늘어놓은 설명에, 세자르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루치오가··· 세뇌 능력자라고?”

팰러스와 마찬가지로, 아니 어떻게 보면 팰러스보다 훨씬 강력할지 모른다.

그 생각에 세자르가 퍼뜩 긴장한 순간.

그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분의 능력은 단순한 세뇌가 아니예요.”

“그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바싹 말라오는 존재.

‘루치오’의 기억을 되새기며 소년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기억 조작’에 가깝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