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60화 (160/176)

근데 누구?

리아나는 미리 따라둔 물 한 잔을 그의 입가에 들이댔다.

“마셔.”

“···.”

대공은 떨리는 가슴으로 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리아나는 내가 직접 가르친 만큼, 나만큼이나 독물학에 정통하다.’

이 잔에 든 것이 그저 물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을···. 그렇게 의심하던 찰나, 리아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가 들었는지 의심하는 건가?”

“···.”

“좋아, 네 손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지.”

그녀가 준비해온 가죽 파우치를 펼쳐 보였다. 언뜻 보기에 이발사들이 들고 다니는 가죽 가방과 비슷했지만.

칼 오프러스 대공은 파우치에 빼곡 꽂힌 것들이 고문 도구임을 알아보았다.

“···그건.”

리아나가 그중 하나를 꺼내 대공의 뺨에 들이댔다.

금속 날붙이의 차가운 감촉에 대공은 몸을 꿈틀거렸지만, 단단히 포박된 몸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약으로 숨이 끊어질 것인지, 고문당하다 고통 속에 죽을 건지. 직접 선택하시지요, 대공 각하.”

그 말이 진심임을 확신한 대공은 얼른 잔 속의 물을 들이켰다.

고문당하며 죽을 생각은 없기도 하거니와, 나름 믿는 구석도 있었다.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있는 몸 아닌가.’

독물학을 이십여 년간 공부해오며 제 몸에 직접 투입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공은 몸이 버텨주길 바라는 한편, 기회를 틈 타 저 고문도구 중 하나를 손에 넣을 궁리를 했다.

‘밧줄만 풀 수 있다면···.’

꿀꺽꿀꺽 소리까지 내가며 다 마시자, 리아나는 텅 빈 잔을 확인한 뒤 거두어들였다.

대공은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회유하기 위한 말을 꺼냈다.

“그대와 나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었던 듯한데-”

“대화는 이제 됐고.”

그녀가 가져온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성인 여성의 팔 길이 정도 되는 단검이었다. 검집에 화려한 장식이 된 것이 무척 고급스러웠다.

“이거 기억나나?”

“···.”

“언젠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돌아왔을 때 당신이 내게 준 선물이야. ···그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고작 이런 것에 기뻐했었지.”

리아나가 씁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대공은 단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녀가 조금만 더 다가온다면 어떻게든 검을 빼앗을 수 있을지 모른다. 검만 있다면 이 밧줄 따위 풀어내고···.

대공의 두뇌가 빠르게 움직이며 계획을 도출해냈지만.

그것을 실현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잘 가.”

그 한마디와 함께 검집에서 뽑혀나온 단검은-

푹!

그대로 대공의 왼쪽 가슴을 찌르고 들어갔으니까.

“···크억!”

금속이 살과 장기를 찢고 들어가는 끔찍한 감각에도 리아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검신을 끝까지 밀어넣었다.

부지불식간에 심장을 관통당한 대공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 크르륵···.”

리아나는 검자루를 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대공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신음이 완전히 끊겼다.

경악과 공포에 물든 두 눈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지고 난 후.

그녀가 가슴에 꽂힌 검을 도로 빼내자 왈칵 하고 선혈이 흘러나왔다.

‘내게 있어서야 한순간의 죽음이지만.’

대공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의 낯빛이 노래진 것을 보아, 플루오틱스가 제 효과를 발휘했음이 분명하니까.

리아나에게 이 약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애초 칼 오프러스 대공이었다.

‘리아나, 너라면 가장 증오하는 상대에게 어떻게 복수하겠느냐?’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자신이 아는 온갖 고문법을 털어놓자,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하수들이나 하는 것이지. 상대에게 복수를 하다가 자신을 더욱 망가뜨리는 방법이다.’

‘그럼 각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플루오틱스라는 약을 알고 있느냐?’

‘안정제의 일종 아닌가요? 과다 복용하면 환각이나 환청이 보인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대공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들려주었다.

약을 복용한 이를 그 즉시 죽이면, 그 장본인에게는 임종 시의 고통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듯 느껴진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래 봤자 상대는 한순간에 죽을 뿐인데···.’

‘시간이란 개념은 상대적이지. 죽인 자의 입장에선 한순간이지만, 죽임당한 자에게선 한없이 늘어난 듯 느껴지는 거다.’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을 꿰뚫는 감각.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나면 비수가 또다시 제 가슴을 뚫고 들어온다.

그러한 죽음의 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으냐, 리아나?’

리아나는 의자에 묶인 채 완전히 숨이 끊어진 대공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래서 알게 해주었다.”

그가 빼앗은 목숨들만큼, 그가 흘리게 해온 피눈물만큼.

저자 또한 부디 절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기를.

‘드디어.’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을 이루었는데도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인지를 넘어선 곳에서 벌어지는 고통이자 죽음이었고, 그녀의 복수는 찰나에 불과했으니.

그저 해야 할 일을 마무리했다는 것만이 다행일 뿐.

“이제 마지막 임무를 마쳤으니···.”

그래도 홀가분한 기분으로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는 대공의 피가 여전히 묻어 있는 단검을 들어올려 제 목에 가져갔다.

* * *

리아나가 지하 감옥으로 내려간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발닉에게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 확인해보라고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앨빈은 어쩐지 불안한 기색이었다.

“세자르 님, 그 여자와 대공을 이렇게 오랫동안 단둘이 놔둬도 괜찮을까요? 혹시나 저희가 모르는 이능을 써서 둘이서 빠져나온다든가···.”

아무래도 앨빈은 리아나나 대공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악마나 대마법사 따위로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으니 걱정 마, 앨빈. 그보다는 시체를 치울 준비나 해야 할 것 같은데.”

“시, 시체요? 설마···.”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구의 시체를 말이지.

씁쓸한 기분으로 생각하는데, 발닉이 돌아왔다.

“도, 도련님! 대공이···!”

리아나 부인의 칼에 대공이 죽었다는 얘기에 앨빈이 경악했다.

“그뿐 아니라 리아나 부인도···.”

발닉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숨을 몰아쉬며 말을 쏟아냈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앨빈의 낯이 차츰 창백해졌다.

“그러니까··· 리아나 부인이 자결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몹시 씁쓸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군.”

발닉과 앨빈이 시신을 정리하고자 지하 감옥으로 내려간 사이, 나는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내 입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충격적인 소식에도, 공작은 생각외로 놀라지 않았다.

“그렇군. 알겠다.”

“···.”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옆으로 돌아서서 창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색소가 옅어져 거의 흰색에 가까운 희푸른 눈동자에 창 밖 풍경이 반사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주름진 옆얼굴을 한참 지켜보다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니, 무엇이?”

기이한 우연과 필연이 겹쳐져 만들어진 악연.

그 지긋지긋한 연결고리가 끊어져 나갔으니 홀가분해지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공작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그녀와 보낸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기라도 하듯 빠르게 깜박이는 눈꺼풀 너머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나는 다시 한 번 묻고 말았다.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

로건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감았다 뜬 눈꺼풀 아래로 회한에 가득 찬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만··· 네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괜찮다.”

한순간의 회한은 이내 그의 입가에 드리운 주름진 미소에 밀려서 사라졌다.

“무엇보다 내겐 네가 있지 않느냐, 세자르. 네가 보여준 무한한 가능성과 영광, 그게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니.”

로건은 천천히 걸어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공작이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더불어 ‘명예 원수’라는 직함도 받아보고, 인생 말년에 이리 큰 공도 세웠으니 더 바랄 것이 없지 않겠느냐?”

“···아버지.”

그 이상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데, 공작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리아나의 시신은 팰러스의 옆에 묻어주거라. 네게는 그저 증오스럽기만 할 계모일 터이니 그런 부탁을 하는 것도 미안하다만···.”

“아닙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공작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 * *

일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대공의 시신을 오프러스 공국으로 돌려보낸 지 얼마 후, 옆나라에서는 칼 오프러스 전 대공이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이사벨 대공은 밀정을 통해 ‘친애하는 세자르 공’에게 서신을 보냈다.

간만의 편지인만큼 사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제일 중요한 용건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깨끗이 손질하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 딴에는 어떤 고문을 당한 시체가 오더라도 감내할 작정이었던 듯했다.

한편.

리아나의 장례식 또한 가문 구성원과 식솔들만이 참가한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사교계 인사들은 그녀가 먼 곳으로 요양을 갔던 차,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허허, 괜찮대도.”

[옹, 앙옹··· 부앙···.]

리아나를 떠나보낸 후, 한동안 기운이 없던 공작은 최근 새로운 낙을 찾았는데.

“허허, 녀석.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커가는구나. 어쩜 이렇게 똘똘할까.”

[앙, 바앙!]

다름 아닌 농농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공작은 무릎에 농농이를 올려놓고 손주 바보 할아버지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

“저, 아버지. 걔가 인간이 아닌 건 알고 계시죠?”

“아무렴 내가 모르겠느냐. 하지만···.”

공작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농농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간이든 노움족이든 아이는 다 귀엽기 마련이지.”

그를 ‘철혈공’으로만 알았던 이들이 들으면 기함할 법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자르.”

그때, 공작이 예상치 못한 잽을 훅 날렸다.

“손주는 언제 보게 해줄 거냐?”

“···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나는 진땀을 훔치며 대꾸했다.

“순서가 좀 바뀐 것 아닙니까? 손주 운운하기 이전에 일단은···.”

“아, 마음에 드는 참한 아가씨가 있다, 이거냐?”

“아버지.”

역정을 내며 그를 부르자 공작이 허허 웃으며 받아쳤다.

“하긴, 나도 이것저것 얘기를 듣긴 했다만. 보아하니 이미 마음에 둔 이가 있다지?”

저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은 무엇일까.

···마음의 시름을 달래주려고 농농이를 투입한 것이 이러한 결과로 돌아올 줄이야.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재빨리 공작의 방을 도망치듯 뛰쳐나왔고.

내 뒷모습을 바라보던 농농이가 까륵거리며 웃는 것이 들려왔다.

* * *

그렇게 민감한 주제를 잘 피해나갔다고 생각했건만.

다음 날 집무실에 찾아온 발닉은 대뜸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도련님?”

“뭘?”

“최근 공작저 식솔들 사이에서 도련님의 정혼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맞추는 게 유행이랍니다.”

“···.”

“자기들끼리 돈도 걸고 아주 난리가 났더군요.”

발닉을 좀 더 캐낸 끝에 나는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을 찾아냈다.

범인은 다름 아닌 농농이였으니.

“크크크, 농농이가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고 돌아다닌 줄 아십니까? 또 앨빈 경은 그 옆에서 농농이 말을 기막히게 옮기는데, 아주 음유시인 뺨 칠 정도로-”

“그만.”

거기에 공범은 앨빈이다, 이거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순간,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앨빈이 나타났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나는 굳은 얼굴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앨빈, 마침 잘 왔다.”

“어, 세자르 님, 대체 왜 그런 무서운 얼굴로···.”

그때, 앨빈이 주섬주섬 들고 온 서류가 눈에 띄었다.

“일단 보고부터 먼저 해봐.”

“아, 네. 그··· 2백 년 전 마녀 사냥에 관해 조사해보라고 하셨잖아요? 알레스 정교단을 도와 마녀 사냥에 누구보다도 앞장선 것이···.”

보고가 시원찮으면 대차게 까려고 했건만.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다름 아닌 이 에스닐의 국왕, 파이슨 2세였다고 합니다.”

앨빈이 알아온 것은 뜻밖의 정보였을 뿐 아니라.

[도전과제 ‘감춰진 역사’ 달성! - ‘만들어진 역사’의 진실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보상으로 ···을 수령했습니다.]

대공의 죽음 이후 새로이 생겨난 도전과제가 달성된 것을 보니,

내 앞을 가로막은 수수께끼의 핵심을 짚은 것이 분명했으니까.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앨빈.”

앨빈은 미소 지으며 말하려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근데 세자르 님 정혼자가 누구-”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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