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복수
* * *
‘당신이 그자의 목숨을 직접 끝장내게 해주지.’
세자르가 한 번 더 약조해주고 떠난 뒤.
리아나는 제 나름의 준비에 나섰다.
다름 아닌 칼 오프러스 대공을 효과적이면서도 확실하게, 그러면서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니.
그 첫 걸음을 내딛고자 그녀는 주치의를 불렀다.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습니다. 통증이 아직 남아 있긴 할 테지만, 최소한 감염으로 번질 우려는 덜었으니 한시름 놓은···.”
40대 중후반에 이른 주치의 파울은 언제나처럼 성실했다.
환자가 궁금해할 만한 것은 빠짐없이 설명해주었으며 세심하고도 꼼꼼한 손길로 환부를 치료해주었다.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안경 쓴 얼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의료인의 귀감이었지만.
그런 완벽한 사내에게도 남에게 말 못 할 욕망 하나쯤은 있다는 것을, 리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파울.”
“···.”
리아나가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어부르자, 주치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의 이름이 파울이었지, 아마?”
“아, 네 맞습니다 마님···.”
“내가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주치의를 보니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릴 것 같다.
“플루아틱스라는 약을 알고 있나?”
“···그 약을 어떻게.”
“좀 구해다줬으면 하는데. 한 달 치 정도 말이야.”
잠시 말이 없던 주치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님, 그 약은 처방이 매우 까다로운 의약품입니다. 금지된 약까지는 아니지만, 잘못 쓸 경우 강력한 부작용에 시달리게 되시고요. 지금 마님의 신체 상태로는-”
“파울.”
그녀는 가느다란 손을 뻗어 파울의 팔을 붙잡았다.
주치의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리아나는 놔주지 않았다.
‘그래도 손만큼은 아직도 아름답군.’
그런 하잘것없는 생각을 하며 손에 한층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주치의의 팔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파들거리며 떨렸다.
“구해주게. 그대가 나를 조금이라도 ‘마님’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
“아니, 그도 어렵다면 옛 정을 생각해서 구해달라는 건 어떤가?”
옛 정이라는 단어에 주치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비록 이자와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지만.’
이 공작가의 진짜 마님이었던 시절.
리아나는 주치의가 자신을 늘 흠모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흠모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욕망이란 건, 사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주치의는 이를 갈며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의 팔 위로 시뻘건 손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설마 내가 그대의 약점을 잡아 폭로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나 보지?”
“···.”
파울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받았다.
“플루아틱스는 어디에 쓰실 겁니까?”
“이유까지 얘기해야 하나? 왜, 마음에 안 들면 거부하기라도 하려고?”
주치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상태로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틀 후에 가져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후우···.”
리아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가 끝까지 거부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순순히 들어주어서 다행이었다.
‘이자가 아니면 별달리 구할 만한 방도가 없으니까.’
플루아틱스.
소량으로 쓰면 안정제에 불과한 약이지만, 다량으로 쓰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부작용을 낳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감각을 시작으로.
복용량이 늘어남에 따라 환청과 망상을 겪으며.
실제처럼 생생한 환각 속에서 같은 경험을 무한히 반복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보통은 사교계의 난잡한 파티에서 많이 쓰이는 약이지.’
절정의 쾌락을 몇 번이나 느끼게 해주는 약으로 유명세를 탄 덕분에, 방탕한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가 좋다고 들었다.
잘못 쓰면 평생 반불구로 살게 될 위험이 있는데도 대중 없이 쓴다고 말이다.
허나 리아나는 이 약을 좀 다른 용도로 쓸 작정이었다.
완전하고도 효과적인 복수.
절대로 끝나지 않는, 영원히 되풀이되는 복수를 계획하는 중이었으니까.
* * *
나는 의식을 잃은 대공을 둘러업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어둑한 통로를 지나 마침내 바깥으로 나가자, 나를 기다리는 가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자르 님!”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도련님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고.”
[앙옹 부앙!]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온 내 모습에 앨빈은 몹시 안심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내가 바닥에 툭 내려놓은 이의 얼굴을 본 발닉의 눈이 커졌다.
“혹시 칼 오프러스 대공입니까?”
“정답이야.”
발닉은 대공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
옆구리 쪽에 피가 번진 것을 보더니 옷자락을 벌려 상처를 확인한다.
“···도련님이 응급 처치도 하셨군요?”
해놨지, 언젠가 보상으로 받았던 응급 처치용 손수건으로.
미리 가져오긴 했지만, 정말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폐위되긴 했어도 오프러스의 귀족이니 함부로 할 수는-”
“함부로 할 거야.”
“···네?”
놀라는 앨빈과 발닉을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사벨 대공에게 모든 허가를 받아놨다는 거, 벌써 잊어버렸어?”
다만.
대공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
검에 찔려 급사하는 게 아니라,
남들에게 준 만큼의 고통을 받으며 구구절절하게 죽어나가야 한다는 소리다.
“농농아, 부탁해도 될까?”
[앙!]
시원스럽게 대답한 농농이가 기절한 대공을 데리고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공작저로 순간이동한 것이었다.
‘우만이 알아서 잘해주겠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우만에게 이미 지시를 마친 터였다.
농농이가 대공을 데리고 순간이동해서 돌아오면 주치의를 시켜 놈의 목숨만 붙여놓은 채 지하감옥에 가둬놓으라고.
그다음은 내가 돌아온 뒤에 알아서 하겠다고 말이다.
“우리도 얼른 돌아가자.”
나와 발닉, 앨빈 또한 출발했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덕분인지 다음 날 해가 뜨기 직전, 공작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고.
“세자르 도련님, 어서 오시지요!”
문지기의 환영을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둘이 처소로 돌아간 사이, 나는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창살 안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공이 누워 있었고.
그런 그를 옥 밖에서 감시 중인 우만의 모습이 보였다.
“안 자고 뭐해.”
내 목소리에 뒤돌아본 우만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세자르 공께서 주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중인데, 뭐 불만 있어?”
“지나침은 모자람만도 못하다는 말 모르나 보지?”
그 말에 우만은 입가를 비틀며 미소 지었다.
“숨은 멀쩡히 잘 붙어 있으니 걱정 마. 주치의 선생이 상처도 대강 꿰매놨고 말이야.”
“잘했네.”
“근데 왜 굳이 살려놓으라고 한 거야? 오프러스 공국과의 관계 때문에?”
우만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거래를 마무리해야지.”
내 말의 속뜻을 알아들은 우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가끔 보면 넌 사람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거야말로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는데.”
“리아나 부인을 불러오지.”
···눈치 빠르기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5분쯤 지났을까.
우만은 아직 몸이 성치 않은 리아나 부인을 부축한 채 돌아왔다.
“그럼 난 이만 먼저 가보마.”
우만이 자리를 뜬 뒤.
창살 안의 대공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리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이든 상관없지만, 너무 흉측한 고문 같은 건 하지 마.”
“···.”
“오프러스 공국에 시신을 반환해야 하니, 이쪽도 체면은 차려야 하잖아?”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에 리아나는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게 된 것이 기쁘기도, 씁쓸하기도 한 듯한 미소였다.
“하, 나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법은 비단 고문뿐이 아니야.”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대공을 바라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저자가 어렸던 내게 직접 알려준 방법이기도 하지.”
언뜻 돌아본 리아나의 옆얼굴은 알 수 없는 양가적 감정으로 요동치는 중이었다.
비통함, 일그러진 애증, 음습한 증오, 해묵은 복수심···.
나는 그 이상 알고 싶지 않아 그 길로 지하감옥을 나섰다.
* * *
누군가가 두개골 안으로 손을 넣어 뇌를 붙잡는 듯한 느낌에-
“헉!”
대공은 비명을 지르며 의식을 되찾았다.
잘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려 주변 광경을 파악했다.
화르륵, 화르륵.
벽에 걸린 횃불에서 불꽃 튀기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한쪽 벽에 세워진 창살들이 보인다.
‘레핀 공작저의 지하 감옥인가.’
그는 손을 들어 옆구리의 상처 부위를 더듬었다. 검에 찔린 탓에 통증은 여전했지만, 의사가 응급 처치를 해놓은 것이 느껴졌다.
‘하, 무르기는.’
딱 봐도 뻔하다.
이사벨이 목숨만은 살려서 보내달라고 애원한 것이겠지.
그 멍청한 계집의 우유부단함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대공은 그에 마음 깊이 안심하며 후일을 도모하기로 마음먹었다.
‘목숨만 붙어서 공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래, 그러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번 일을 가지고 저를 향한 동정심을 자극하여 세간의 여론을 뒤집을 수도···.
“대공 각하, 그간 격조하셨는지요?”
그 순간.
옆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그의 사고가 멈췄다.
천천히 옆을 돌아본 순간, 흉측한 이목구비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
“뭘 그리 놀라십니까, 각하.”
순간적으로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내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설마 누군지 몰라 보시는 건 아니겠지요? 물론 제 얼굴이 좀 상하기는 했습니다만···.”
사내를 유혹하는 듯한 저 달콤한 목소리.
자신이 그토록 찾아서 제거하려 했던 ‘리아나’가 아닌가.
“리아나.”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그토록 아름답던 얼굴은 눈코입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으나.
잔뜩 흘러내린 눈꺼풀 너머에서 빛나는 눈동자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이냐.”
간신히 위엄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그의 심장은 천천히 불안감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 대체 왜 여기에 리아나가···.
“어쩜 그렇게 말을 섭섭하게 하십니까.”
그녀가 간드러지게 웃자 이목구비가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제가 세자르 레핀의 양어머니라는 것을 잊어버리셨을 리는 없고.”
세자르 레핀과 그녀가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인가?
아니, 애초에 그 둘은 적이 아니었나?
대공의 머릿속이 온갖 추측으로 바쁘게 돌아가는데.
“비록 각하께 저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제게 각하는 여전히···.”
다음 순간.
리아나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아주 중요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잊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꿀꺽.
대공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곧 다가올 불길한 미래의 예감에 심장이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어렸던 내게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임무를 시켰던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나를 강제로 취해 아이를 갖게 한 뒤, 임신한 나를 레핀 공작에게 보낸 것이 누구였지?”
“···리아나, 잠시만.”
“그리고 결국, 팰러스를···.”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리아나가 절규하기 시작했다.
“나의 소중한 팰러스, 네 핏줄이기도 한 팰러스에게!”
그녀의 두 손이 대공의 목을 움켜쥐었다.
대공이 커억, 신음했지만 리아나는 놔주지 않았다.
“제 손으로 독을 먹인 짐승이, 아니 짐승만도 못한 것이 바로 네놈이 아니더냐!”
손에 들어간 힘이 도리어 한층 강해졌다.
대공은 정신이 아득해져가는 와중에도 지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리아나 모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던 어린 소녀를 발견한 이후, 자신이 지금껏 그녀를 이용해온 방식들이.
온갖 음모와 흉계, 살인 모의로 얼룩진 그녀의 역사가.
“하지만.”
그 말과 함께 리아나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대공은 컥컥거리며 모자란 숨을 한번에 들이마셨다.
눈앞이 노래지고 입에서 침이 절로 흐르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쉽게 죽어줘서는 안 되지.”
그 한 문장에 대공의 머리칼이 쭈뼛 섰다.
아군이 되면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도구인 그녀가,
적이 되면 얼마나 공포스럽고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가 새삼 실감났으니까.
“제, 제발, 리아나···.”
리아나가 또다시 예의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칼 오프러스는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이 된 기분이었다.